[영게] [읽을거리] 리들리 스콧의 두번째 불운 [레전드,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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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08-05-13 18:23:24
[블레이드 러너, 1982]가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참패한 후 리들리 스콧 감독은 잠시 영화계를 떠나 애플 컴퓨터를 위한 상업광고를 하나 만듭니다. 당시는 '블레이드 러너'가 널리 재평가받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으로 스캇의 좌절감은 꽤 컸을 것입니다.
1980년대초 IBM 컴퓨터 제국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애플의 야심찬 CEO 스티브 잡스는 스콧에게 애플의 신제품인 '맥킨토시' PC를 홍보하기 위한 텔레비젼 광고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데 스캇은 이 제의를 수락하고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를 참고한 같은 제목의 광고를 만들어 냅니다.
이 60초짜리 광고는 1948년 1월, 전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슈퍼볼' 경기 중간에 전파를 탔고 완성도면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IBM을 소설 속의 독재자 '빅 브라더'와 일체화시킨 점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요.
아무튼 '1984'로 짭짤한 성과를 거둔 스캇 감독은 1985년 영화계로 컴백,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의 제작자로 유명한 아논 밀챈과 손잡고 [레전드]라는 제목의 판타지 영화를 연출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출신의 유태인 사업가인 밀챈은 그전까지 마틴 스콜세지의 [코미디의 왕, 1983]을 포함한 몇몇 작품들에 투자를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상태였기에 이 작품에 거는 기대는 컸습니다.
[리스키 비지니스, 1983]로 이름을 알리며 당시 떠오르던 젊은 스타였던 톰 크루즈를 주연으로 기용한 것도 이같은 기대를 반영한 결과입니다 (주인공 잭 역에는 조니 뎁, 짐 캐리, 로버트 다우니 쥬니어 등이 함께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여주인공에는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샛별 미아 사라가 캐스팅되었고 희극과 정극을 넘나들며 활약하던 팀 커리 (어둠의 제왕 역할)와 [양철북]의 오스카 역으로 유명한 데이빗 베넨트도 출연진에 이름을 올립니다.
3년만의 영화연출에 의욕을 보인 리들리 스캇 감독은 월트 디즈니의 고전 만화영화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판타지아], [밤비] 등을 보며 영화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었습니다. 스캇을 도와줄 스탭들도 화려했는데 특히 아카데미 작곡상의 관록을 가진 제리 골드스미스가 음악을, 특수 분장의 대가 롭 보틴 (역시 아카데미 수상자)이 고블린 및 캐릭터들의 분장을 담당한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편집에는 전작 [블레이드 러너]에서 호흡을 맞춘 테리 로울링스, 촬영감독인 알렉스 톰슨도 [엑스칼리버]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졸츠버그 (엔젤 하트의 원작자)가 쓴 영화의 각본은 판타지 영화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요소-캐릭터와 배경-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줄거리상의 참신함이나 신비로움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고전 동화의 전형적인 구성을 따랐습니다만 관객들의 흥미를 끌만한 볼거리들도 부족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리들리 스콧의 장기인 시각적 아름다움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각본이 안이했던 까닭입니다.
정작 촬영에 들어가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영화는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는데 예기치못한 화재로 사운드 스테이지 (영화촬영을 위한 방음시설이 된 건물)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분량은 세트를 새롭게 건설하여 촬영을 해야했으며 이 또한 완성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블레이드 러너]때와 마찬가지로 미국 관객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초기 시사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관객들의 불만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1) 영화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 2) 제리 골드스미스의 음악이 마음에 안든다였습니다. 이런 결과에 크게 당황한 유니버설 (미국측 배급사)과 스캇 감독은 120분에 달하는 초기 편집본을 89분으로 대폭 잘라내었고 골드스미스의 음악은 탄저린 드림 (독일 출신의 전자음악 밴드), 브라이언 페리, 존 앤더슨이 만든 곡으로 긴급히 교체하여 영화를 살려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 상영관에는 이같이 대폭 편집된 ㅤㅉㅏㄻ은 버전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에이리언, 1979]에서 일부 음악이 자신의 동의없이 스캇 감독에 의해 교체되는 아픔을 겪었던 작곡가 제리 골드스미스는 [레전드]에서는 아예 통째로 자신의 작업을 날려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두번 다시 공동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6년 4월 비수기에 개봉한 영화는 흥행/비평 양면에서 참패하며 리들리 스콧에게 또한번의 좌절을 안겼습니다 (전미 최종 흥행수입 1천 5백만 달러). 20세기폭스가 배급한 유럽에서는 미국판보다 조금 긴 94분 버전이 상영되었는데 영국 배급판에서는 제리 골드스미스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그대로 사용되었고 일부 음악 평론가들은 역설적으로 골드스미스의 음악을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진풍경이 벌어져 스콧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아카데미 분장상 후보에 오르고 촬영, 시각효과와 의상디자인 등 기술 분야는 인정을 받았지만 애초에 기대한 성과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레전드]는 스캇의 작품들에 비우호적인 평론가들에게는 '비쥬얼만 있고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강화시키는 사례로 자주 이용되었고 스캇 감독에게도 한동안 SF/ 판타지 쟝르의 작품을 피하고 드라마에 집중하는 계기가 됩니다.
세월이 흐르며 일부 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던 [레전드]도 재평가를 받게 됩니다. 2002년 유니버설은 초기 편집판에서 들어냈던 장면들을 다시 복구해 넣은 113분짜리 감독판 DVD를 출시합니다. 더욱 반가운 것은 미국 상영시 들을 수 없었던 제리 골드스미스의 음악을 재삽입하였다는 것입니다. 코드원 [레전드] UE는 감독판과 극장 상영판을 모두 수록하고 있을 뿐 더러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음성해설과 부가영상들이 포함되어있어 많은 팬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비록 [블레이드 러너]만큼의 관심이나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였고 완성도도 비교할 수 없지만 판타지 영화가 빛을 보지 못하던 80년대에 쟝르의 초석을 놓은 [레전드]의 공헌은 영화사적으로 재평가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Das Ende. 감사합니다.
* 본문에 사용된 캡쳐화면의 저작권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1980년대초 IBM 컴퓨터 제국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애플의 야심찬 CEO 스티브 잡스는 스콧에게 애플의 신제품인 '맥킨토시' PC를 홍보하기 위한 텔레비젼 광고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데 스캇은 이 제의를 수락하고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를 참고한 같은 제목의 광고를 만들어 냅니다.
이 60초짜리 광고는 1948년 1월, 전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슈퍼볼' 경기 중간에 전파를 탔고 완성도면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IBM을 소설 속의 독재자 '빅 브라더'와 일체화시킨 점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요.
아무튼 '1984'로 짭짤한 성과를 거둔 스캇 감독은 1985년 영화계로 컴백,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의 제작자로 유명한 아논 밀챈과 손잡고 [레전드]라는 제목의 판타지 영화를 연출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출신의 유태인 사업가인 밀챈은 그전까지 마틴 스콜세지의 [코미디의 왕, 1983]을 포함한 몇몇 작품들에 투자를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상태였기에 이 작품에 거는 기대는 컸습니다.
[리스키 비지니스, 1983]로 이름을 알리며 당시 떠오르던 젊은 스타였던 톰 크루즈를 주연으로 기용한 것도 이같은 기대를 반영한 결과입니다 (주인공 잭 역에는 조니 뎁, 짐 캐리, 로버트 다우니 쥬니어 등이 함께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여주인공에는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샛별 미아 사라가 캐스팅되었고 희극과 정극을 넘나들며 활약하던 팀 커리 (어둠의 제왕 역할)와 [양철북]의 오스카 역으로 유명한 데이빗 베넨트도 출연진에 이름을 올립니다.
3년만의 영화연출에 의욕을 보인 리들리 스캇 감독은 월트 디즈니의 고전 만화영화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판타지아], [밤비] 등을 보며 영화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었습니다. 스캇을 도와줄 스탭들도 화려했는데 특히 아카데미 작곡상의 관록을 가진 제리 골드스미스가 음악을, 특수 분장의 대가 롭 보틴 (역시 아카데미 수상자)이 고블린 및 캐릭터들의 분장을 담당한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편집에는 전작 [블레이드 러너]에서 호흡을 맞춘 테리 로울링스, 촬영감독인 알렉스 톰슨도 [엑스칼리버]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졸츠버그 (엔젤 하트의 원작자)가 쓴 영화의 각본은 판타지 영화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요소-캐릭터와 배경-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줄거리상의 참신함이나 신비로움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고전 동화의 전형적인 구성을 따랐습니다만 관객들의 흥미를 끌만한 볼거리들도 부족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리들리 스콧의 장기인 시각적 아름다움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각본이 안이했던 까닭입니다.
정작 촬영에 들어가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영화는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는데 예기치못한 화재로 사운드 스테이지 (영화촬영을 위한 방음시설이 된 건물)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분량은 세트를 새롭게 건설하여 촬영을 해야했으며 이 또한 완성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블레이드 러너]때와 마찬가지로 미국 관객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초기 시사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관객들의 불만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1) 영화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 2) 제리 골드스미스의 음악이 마음에 안든다였습니다. 이런 결과에 크게 당황한 유니버설 (미국측 배급사)과 스캇 감독은 120분에 달하는 초기 편집본을 89분으로 대폭 잘라내었고 골드스미스의 음악은 탄저린 드림 (독일 출신의 전자음악 밴드), 브라이언 페리, 존 앤더슨이 만든 곡으로 긴급히 교체하여 영화를 살려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 상영관에는 이같이 대폭 편집된 ㅤㅉㅏㄻ은 버전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에이리언, 1979]에서 일부 음악이 자신의 동의없이 스캇 감독에 의해 교체되는 아픔을 겪었던 작곡가 제리 골드스미스는 [레전드]에서는 아예 통째로 자신의 작업을 날려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두번 다시 공동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6년 4월 비수기에 개봉한 영화는 흥행/비평 양면에서 참패하며 리들리 스콧에게 또한번의 좌절을 안겼습니다 (전미 최종 흥행수입 1천 5백만 달러). 20세기폭스가 배급한 유럽에서는 미국판보다 조금 긴 94분 버전이 상영되었는데 영국 배급판에서는 제리 골드스미스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그대로 사용되었고 일부 음악 평론가들은 역설적으로 골드스미스의 음악을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진풍경이 벌어져 스콧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아카데미 분장상 후보에 오르고 촬영, 시각효과와 의상디자인 등 기술 분야는 인정을 받았지만 애초에 기대한 성과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레전드]는 스캇의 작품들에 비우호적인 평론가들에게는 '비쥬얼만 있고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강화시키는 사례로 자주 이용되었고 스캇 감독에게도 한동안 SF/ 판타지 쟝르의 작품을 피하고 드라마에 집중하는 계기가 됩니다.
세월이 흐르며 일부 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던 [레전드]도 재평가를 받게 됩니다. 2002년 유니버설은 초기 편집판에서 들어냈던 장면들을 다시 복구해 넣은 113분짜리 감독판 DVD를 출시합니다. 더욱 반가운 것은 미국 상영시 들을 수 없었던 제리 골드스미스의 음악을 재삽입하였다는 것입니다. 코드원 [레전드] UE는 감독판과 극장 상영판을 모두 수록하고 있을 뿐 더러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음성해설과 부가영상들이 포함되어있어 많은 팬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비록 [블레이드 러너]만큼의 관심이나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였고 완성도도 비교할 수 없지만 판타지 영화가 빛을 보지 못하던 80년대에 쟝르의 초석을 놓은 [레전드]의 공헌은 영화사적으로 재평가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Das Ende. 감사합니다.
* 본문에 사용된 캡쳐화면의 저작권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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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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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리플이네요.
전 이영화를 처음 봤을때 너무 재미있게 보았었습니다.
처음 판타지라는 장르를 접한게 아닌가 싶은데
마지막에 마왕의 등장에서 그 색감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DVD 생활하면서 찾아서 다시본 영화중에 하나가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