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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레토 (Лето)(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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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30:37

 

혹은, 나는 어쩌다 걱정을 그만두고
빅토르 최를 밀어주게 되었나

 

 

[스포일러 있음] 

지난주에 <레토>를 보러 갔다. 개봉했지만 당연히 포항에까지 개봉하진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했더라. 하루에 두 번 상영은 한 번으로 내려갔다가 얼마 안 있어 사라졌으니 구색맞추기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좀 놀랐다. 시간 맞춰 가서 보고 왔다. 극장은 더럽게 먼 곳에 있었다.



작품은 소련 시절 80년대 레닌그라드가 배경이다. 레닌그라드는 지리적으로 핀란드와 가까워서 암시장을 통하지 않고도 쉽게 '자본주의 록 음악' 앨범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산주의 사회지만 당시 합법적으로 록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레닌그라드 록 클럽' 도 있다. 밴드 주파크의 리더 마이크 나우멘코 (로만 빌릭) 는 그 곳 스타다. 그를 보려고 감시를 피해 무단침입을 시도하는 팬까지 있을 정도. 물론 공연 때는 KGB로 인해 하트가 그려진 플래카드는 커녕 아티스트와 팬 사이의 어떤 사소한 교감도 원천봉쇄된다.이 각박한 현실 속에 아내 나탈리아 (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를 대동해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 마이크 일행. 곧 자기들 노래를 들려주고자 찾아온 두 남자와 만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빅토르 (유태오) 다. 마이크는 빅토르의 재능에 관심을 갖고 그를 돕는다. 그리고 빅토르의 음악은 시간이 지나자 '뉴 웨이브 같다' 는 평을 듣게 된다.



작품 속 빅토르는 1990년에 요절한 러시아의 고려계 록 스타이자 '키노' 라는 이름의 밴드를 이끌었던 빅토르 최. 곡들이 당시 구 소련 시기 대중들에게 억압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인식되어 저항음악의 아이콘이 되어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빅토르 최는 90년대 중반에 잠시 알려진 정도다. 그의 앨범이 발매됐고, 정지영 감독이 신성우와 진희경을 배우로 캐스팅해서 전기물을 제작하려고 시도했다가 엎어진 바 있다. 러시아에서 마침내 <레토>가 만들어졌지만, 작품은 빅토르 최 전기물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그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정착시킨 키노 시절보다 '가린과 쌍곡선' 이름으로 활동하던 초기 시절을 주로 다룬다. 그리고 함께 등장하는 마이크 / 나탈리아 나우멘코 부부 역시 실존인물이라 엄밀히 말하면 3인 공동 주연이다. 마이크 역시 유명한 펑크 록 아티스트였으며 나탈리아 나우멘코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작품이라 당연히 관객들이 셋에 대해 알고 있다 싶었는지 친절한 인물설명도 없다. 러시아어로 '여름' 이란 의미를 지닌 제목답게, 구 소련을 살아가는 록 음악인들이 보여주는 풍경의 한 순간을 담고 있다. 그래서 <레토> 가 특별히 신선한 이야기를 지녔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구 소련 시절이 배경이지만 해당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체제배경을 자본주의로 바꿔놔도 무리없이 어울릴 수준이다. 멘티와 멘토같은 빅토르와 마이크, 나탈리아와의 삼각관계같은 이야기들은 흔하지 않나. 어느 사회건 청춘들은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아니면 록 음악을 연주하는 청춘들이 다 비슷하거나. 


* 손가락질 하는 양반이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연기지도 중이시다. *



물론 러시아 정부는 <레토>를 의미심장하게 봤다. 정부는 촬영장에 쳐들어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을 구속했다. 남은 촬영분량은 연출을 하고 있는 감독의 지인이 투입되어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공식적인 구속 이유는 공금 횡령. 하지만 감독의 전작인 <스튜던트>가 러시아 정교를 비판했고 차기작 소재가 성소수자 관련이라는 점들이 블라디미르 푸 짜르를 자극해 구속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신뢰를 얻고 있다고. 감독의 그런 패기를 생각하면 <레토>는 일면 소박해 보인다. 나름대로 공산주의 사회가 문화를 어떻게 자기 입맛대로 끼워 맞추는지를 보여주지만, 장 마틴 샤프 감독의 <데싸우 댄서스> 처럼 다룰 것이라 기대했다가 실망한 측면도 있었다. <레토>는 자본주의 록 음악을 어떤 로컬라이징 없이 툭하고 당시 소련 사회에 떨궈놨을 때, 어떤 충돌을 일으키며 무슨 효과를 일으킬지 더 관심을 둔다. 마이크와 빅토르 일행이 섹스 피스톨즈 노래를 흥얼거렸다는 이유로 '적국 놈들을 떠받든다' 외치는 한 열차 승객과 시비가 붙는 데서 작품이 지닌 뮤지컬적 특성이 드러난다. 아무 상관 없는 주변 사람들이 록 음악 가사를 소박하게 열창한다. 그리고 토킹 헤즈, 데이빗 보위, 이기 팝, T-REX의 음악들이 삽입되며 스크래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컬러풀한 낙서들이 흑백 촬영된 본편에 덧칠된다. 애니메이션이 프레임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프레임 브레이크 효과도 등장한다. 이런 연출들은 당시 소련사회에는 오직 흑과 백의 관념만이 있을 것 같지만 언제든 컬러풀한 욕망들이 암약해 있다 튀어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레토>는 디지털로 촬영됐다. 스크래치 애니메이션이라 썼지만 아날로그 필름에 스크래치를 낸 듯한 거친 효과가 아니라 가벼운 뮤직 비디오나 광고처럼 보인다. 의도 전달보다는 현실도피적인 감흥을 우선적으로 준다는 얘기다. 그래서 회의론자 (알렉산데르 쿠즈네초프) 란 존재가 등장해 모두 없었던 일이라며 소격효과를 준다. '없었던 일' 이라는 문장을 아예 컬러로 대놓고 부각하는 이 소격효과가 오히려 더 과감해 보인다. 회의론자는 모든 뮤지컬 장면들에서 등장하는데, 덕분에 어느 시점부터는 해당 장면들을 보면서 신나다기 보다는 헛웃음부터 나왔다. 소격효과를 넘어 '컬러' 라는 형식 자체를 유치하게 보이게끔 만들어서다. 작품은 뮤지컬 외에도 실험적 영상을 시도한 듯한 장면들도 있다. 다큐멘터리 <우드스탁: 3일간의 평화와 음악> 을 연상시키는 화면 분할을 한다. 중앙에는 마이크와 빅토르 일행이 한가롭게 음악을 모습들을 컬러로 찍은 화면을 보여주고 왼쪽은 사운드트랙으로 삽입된 곡들의 원 가사, 오른쪽은 그 가사가 소련어로 적혀지는 연출을 구사한다. (작품이 2.76:1 이라는 흔치 않은 화면비를 가진 이유는 이 장면 연출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이크가 소련사회에 공헌한 바를 생각해보게 된다. 소련어를 이데올로기의 틀에 가두지 않고 영어로 불리는 록 가사를 해석하는 데도 쓸 수 있음을 발견한 것들 말이다. 그가 음악으로 이뤄낸 소중한 결과였다. 하지만 마이크는 그 이상을 해내지 못한다. 그의 음악은 레닌그라드 록 클럽을 비롯한 한정되고 사적인 공간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품 속 컬러풀한 장면들은 활기차고 독특하며 잊을 수 없다고 평가받을 인상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마이크가 나름의 음악적 영역은 구축했을지언정, 아이러니하게도 더이상 파급력을 발휘하거나 나아가지는 못함을 증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마이크와 친구들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록 음악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고 자신들의 음악이 그 사회에 섞이는 데엔 한계가 있음을 안다. 그들은 알면서도 애써 그 음악적 방법론을 쫓아가려 한다. 마치 몽니 부리는 것 같다. 그 시절 레닌그라드에서는 컬러풀한 음악보다 검은색, 흰색, 회색의 세계로부터 발아한 음악이 필요했다. <레토>는 마침내 빅토르의 음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태까지의 이야기는 마이크의 음악이 어째서 더이상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 할 수 없는지를 이해시키는 고백에 가깝다.



질투하지 않았을까? 슬펐지만 좀 이상하기도 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처럼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쪽이 더 어울리고 현실적인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레토>도 나타샤와 빅토르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설정을 삽입하며 잠시 그렇게 진행될 것처럼 구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끝내 마이크가 빅토르의 음악을 더 유려하고 견고해질 수 있게 돕는 방향으로 큰 질투나 반목 없이 평화적인 이야기를 유지한다. 작품 끝에는 결국 빅토르 최가 있다. 작품은 그를 다룰 때는 당연히 이런 화법으로 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 점이 러시아 정부로 하여금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여기게 했나보다. 지금 시대에 빅토르 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마이크는 어째서 그렇게 빅토르에게 주목하고 그의 음악 완성이 완성될 수 있게 돕는지. 뭘 이 정고 가지고 그렇게 만든 사람까지 잡아넣나 싶었지만, 보고 나면 알게 된다. <레토>는 빅토르 최에 대한 이야기이자 정치사회적인 작품임을.



하지만 여전히 마이크 부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 인물들에 대해 모르고 관람해도, 결말에 이르면 <레토>는 보편적으로 공명할 수 있는 작품이 된다. 같은 음악 동지가 어느 순간 자신의 명성을 훌쩍 뛰어넘겠다는 가능성이 보일 때 과연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견제해서 싹을 자르려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이크는 오히려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빅토르를 무대에 세운 채 관객이 되어 그를 지켜본다. 마이크의 실력과 예술세계 또한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이 선택은 숭고하고 결말은 아련하다. 빅토르의 공연을 보러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 온 관중들은 마이크의 공연처럼 음악을 즐기지는 않지만, 나이 먹은 공산주의 검열관을 비롯해 각양각색 젊은이들 모두 조용히 앉아 가사를 음미하며 가수를 바라본다. 진정한 린민의 락이 시작되는 순간이지비. 정치물인 동시에 <레토>는 성공적인 음악물이다. 작품은 근래 개봉작 중 간결하지만 겁나게 아련한 출생과 사망년도 연출을 보여준다. 아련한 이유는 그들이 떠나갔다는 점이 안타깝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p.s.

 

 

1)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구속 후 가택 연금 됐다. 그래서 작년 칸느 영화제에서 공개될 당시 유태오 배우를 비롯한 출연 + 제작진들이 일제히 감독의 얼굴사진을 뱃지로 달고 이름을 팻말에 써서 레드 카펫 행사에 들고 갔다. 칸느에서 이렇게 구금당한 영화인들의 자유를 바란다는 식의 호소를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희생>을 유작으로 남겼을 때, 그의 아들에게 대리수상 시키려고 소련 당국과 협상하는 등 이쪽으로 짬밥 있는 영화제이긴 했으니. 2019년인데 감독은 연금해제 됐을까. 됐더라도 당분간 작품활동 금지 당하지는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2) IMDB에는 <레토>의 화면비가 2.39:1로 되어있다. 실제로 프레임 브레이크가 일어나긴 하지만 2.76:1로 된 블랙 바를 다 활용하진 않는다. 다 활용하지 않을거면 화면비를 2.55:1로 해도 괜찮았을텐데 어째서 2.76:1을 고수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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