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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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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9:11


 

아사코와 바쿠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스포일러 있음] 

오사카 사는 아사코 (카라타 에리카) 는 갑작스러운 폭죽과 함께 바쿠 (히가시데 마사히로) 를 만난다. 훤칠한 이 남자는 뜬금없이 다가와 키스를 하는데, 현실이면 쇠고랑 차야하지만 잘 생겼고 다정해서인지 아사코는 봐준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친구 하루요 (이토 사이리) 가 만류해도 직진하던 아사코의 연애는, 신발 사러 나간 바쿠가 사라지면서 갑작스럽게 끝이 난다. 2년 후 도쿄의 카페에서 일하던 아사코는 배달한 보온병을 회수하려고 맞은편에 있는 회사에 갔다가 직원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만난다. 그녀는 료헤이가 바쿠와 너무 닮아서 깜짝 놀라는데 이후로도 계속 마주칠 일이 생기자 묘한 불편함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료헤이는 아사코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고, 얄궃게도 또다른 사랑이 시작된다. 오랫동안 깨를 볶는 두 사람. 그런데 둘이 본격적으로 인생의 무덤을 파려고 할 때, 사라진 바쿠가 나타난다.




극장가에서 간만에 보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신작이다. 그가 한국에서 조금이나마 이름을 알린 작품은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동경국립예술대학원의 합작 프로젝트로 제작된 <심도>였다. 비록 한국 배우와 스탭을 투입시켜 만들었음에도 소리소문없이 묻혔지만... 덕분에 한국 극장가에 정식으로 재방문하는데 9년이 걸렸다. <아사코> 도 개봉시키기엔 애매했으리라고 본다. 칸느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이지만 영화제 측에서도 명확한 호불호가 갈린데다 무관이라서다. 수입사 입장에서는 선남남녀가 펼치는 젊은 감각의 로맨스물로 포장가능한 줄거리라고 판단했나보다. 그런 발상으로라도 갖고 온 게 가상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싸늘한 구석이 많다.

 

 

<아사코> 초반부에 사랑에 빠진 아사코와 바쿠가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해안가 도로를 지나며 자유로움을 느끼던 두 사람은 곧 자동차와 충돌하고 길바닥에 나뒹군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와중에도 좋다고 웃으며 서로 물고 빨기 바쁘다. 작품은 바이크와 충돌한 검은 차를 프레임 구석에 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보통 이런 경우는 바이크 탑승자들을 걱정하게 된다. 그런데 서로의 체액을 열정적으로 공유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커플을 보고 있으면 어째 차 탑승자를 걱정하게 된다. 아사코와 바쿠가 그 차에게 닥쳐온 재난이 아닌가 싶어서다. 묘하게 섬뜩한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새삼 모든 재난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작품은 바쿠도 아사코에게 그렇게 찾아왔음을 상기시킨다. 작품이 사랑이야기를 기본으로 했지만 동시에 재난의 후유증도 은유하고 있음을 미리 알리는 순간이다. 사랑을 키워가는 두 사람과는 별개로 라디오 등을 통해 3.11 대지진으로 대표되는 재난 관련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리고 어느새 아사코에게 바쿠는 그녀의 세계나 다름없어진다. 사랑을 하면 서로가 서로의 세계가 되는 법이지만 작품은 이 점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 덕분에 사랑과 재난이 동일선상에 놓인다. 바쿠가 아사코에게도 재난이 될 때, 그녀의 세상은 지진 겪듯 무너지고 강한 후유증이 남는다.



사랑이야기로만 머물렀어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개인적으로 <아사코>에 끌린 이유는 사랑 뒤에 음울하게 드리워진 재난의 공포스러움 때문이었다. 작품은 바이크 사고장면 후로 한동안 심드렁하게 보던 날 바로 각 잡게 만들었다.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연극을 관람하던 극장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장면이 그것이다. 작품을 관람한 곳은 조조상영으로 하루에 딱 한 번 상영해주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롯데시네마였다. 음향으로 승부하다시피 하는 짧은 시퀀스였지만, 짜증날 정도로 리얼한 연출이었다. 오래된 건물에다가 몇 년 전 포항지진 겪었던게 생각나 숨이 턱 막혀왔다. 후진 극장이었는데 스피커에서 일부 잡음까지 들렸던 점이 의외의 사실성까지 배가시켰다. (물론 이 점에 관해 롯데시네마 포항점에게 감사할 생각은 없다.) 이 순간부터 주인공인 아사코와 료헤이는 단순히 사랑을 나누는 커플 이상의 존재가 된다. 둘은 각각 지진이나 바쿠라는 재난을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유형이 된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료헤이가 자신을 경계하는 아사코를 안심시키며 마침내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이다. 작품은 여기서 특이한 편집을 보여준다. 료헤이가 고개 숙인 아사코의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갖다대자, 그녀를 바스트 샷으로 찍다가 바로 다음 프레임에서 클로즈 업 샷으로 넘어간다. 순간적으로 화면이 튀어 거칠고 부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일순간 작품에 확 몰입하게 되는 독특한 감흥을 준다. 마치 아사코의 결심처럼 보여서다.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료헤이를 보니, 바쿠와 얼굴만 같을 뿐 다른 자아를 가진 사람이 분명하다. 그녀는 이 순간 료헤이를 받아들이고 바쿠로 대표되는 재난의 기억을 잊어보겠다고 결심한 듯 하다. 물론 얼마 안 가 료헤이를 차 버리는 대참사로 끝나지만, 결심이 단발성은 아니었는지 지진을 계기로 둘은 다시 재회한다. 작품은 이 때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이 운명인지, 아사코가 료헤이를 만나러 찾아갔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생각해보면 후자이리라. 관계가 깨지기 전 두 사람은 연극 공연에 초대받았다. 그 중 먼저 이별얘기를 꺼냈고 공연 당일날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쪽은 아사코다. 그녀가 료헤이를 다시 찾으러 갔다는 쪽이 자연스럽다.


 

작품은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이별을 선언한 후 재회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재회 후 그녀의 행동들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바라보며 결심한 것처럼, 계속 혼자서 뭔가를 시도해 왔다는 인상을 준다. 못 견디겠다고 판단해서 료헤이를 멀리한 일도 그렇고, 연인으로서 재결합한 후에는 함께 (정확히는 그녀가 료헤이를 데리고) 3.11 대지진으로 피해입은 마을에 꾸준히 가서 재건활동을 돕는다. 그리고 '먹어서 응원하자' 식으로 그 곳 해산물을 받아다 먹는 짓을 한다. 작품은 그런 아사코가 행동으로 옮기는 추진력을 담아내는데 관심을 둔다. 가족을 비롯한 그녀의 평소 생활상 등을 전달하는데는 이상할 정도로 설명이 없다. 뭔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진 여자같달까. 결국 아사코는 3.11 대지진의 피해자는 아닐지, 가족들이 그 때 모두 죽어서 혼자 남은 여자가 아닐지 같은 생각에도 이르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품은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며 아사코라는 캐릭터를 만든 셈이다. 굳이 거기까지 들추지 않아도 그녀가 바쿠를 만나는 바람에 여러 의미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삶을 살고 있음이 보이니까. 아사코의 모든 행동은 트라우마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발버둥같다. 덕분에 그녀는 좀 뻔뻔해 보이기도 한다. 자기가 료헤이를 차 놓고 다시 만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경우의 수를 시도했는데 이전 대안이 더 낫다고 여겨서가 아닌가? 물론 벗어나려는 것과 돌아오는 것. 둘 다 굉장히 용기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사코는 그걸 다 한다. 물론 작품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굳이 옹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를 구하려는 그녀의 용기있는 시도를 화면에 담기는 하되,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진 않는다. 덕분에 아사코의 추진력을 보고 있으면 과연 제대로 방향을 잡고 시도 중인지, 아예 개인적인 시도에 실용적인 효과가 있는지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트라우마가 해결되기는 커녕 그녀의 현실 속 삶만 더 위태롭게 변해가서다.


 


료헤이에 대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상황을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이 태도는 정작 누군가와 속내를 나눠야 할 때는 쓸모가 없다. 료헤이는 아사코가 바쿠와 닮아서 자신과 함께 있기 시작했음을 진즉에 알았지만 이걸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녀가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마을에 지속적으로 데려갈 때도 군말 없이 운전해 간다. 거기서 음식을 받아올 때도 한 번쯤 찝찝하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티도 내지 않는다. 료헤이는 일방적으로 좋게좋게 이해하기만 할 뿐 의문을 갖고 본질에 접근하는 일을 피한다. 이는 아사코를 만족시킬지는 몰라도 작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둔감해지는 원인이 된다. 그녀와 함께 먹었던 아침식사가 카레인지 라따뚜이인지도 모르고, 스스로를 위해 뭐든지 시도하는 아사코가 통수 칠 것도 예상 못한다. 



둘 다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은 한다. 그러나 개인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방식은 모두 말미에는 무력해진다. 아사코는 먹으면서 응원하다 뇌가 피폭됐는지 바쿠가 돌아와서 유명 모델이 된 사실도 모르고 산다. 료헤이는 바쿠의 존재를 전부터 알았으면서도 별 일 있겠냐는 식으로 안일하게 군다. 바쿠와 얽히면서 두 사람의 태도는 스스로에게 재난으로 돌아온다. 바쿠가 아사코의 집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두번째로 만날 때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 아사코는 바쿠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끝내 그에게 잠식당한 듯 보인다. 료헤이는 바쿠가 세번째로 아사코를 찾아왔을 때, 면전에서 그녀가 함께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도 부들거리기만 한다. 




* 마지막 사진은 빅터 쇠스트롬 감독의 1928년작인 <바람>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릴리언 기쉬의 모습 



보다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나' 싶었던 부분은 이 다음이었다. 작품은 아사코가 마치 불가항력이라는 듯 바쿠와 함께 도망치게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료헤이에게로 되돌아가서 재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사코는 어째서 돌아왔을까. 그녀는 재난같은 트라우마에 종속되어 끌려다니느니 스스로 지배당해 취해버리기를 택한 것 같다. 재난에 익숙해지면 그것은 더이상 재난이 아니다. 아사코는 쓰나미를 몰고 왔던 3.11 대지진을 기억하려는 듯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바다를 보며 온 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이 때 창백한 얼굴로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짓는 카라타 에리카의 모습은 압도적이다. 그녀는 마치 빅터 쇠스트롬 감독의 1928년작인 <바람> 에서 온 몸으로 텍사스 서부 광야의 매서운 바람을 맞아내며 버티던 릴리언 기쉬를 연상케 한다. 두 여자는 바람을 맞으며 마침내 자기 운명을 결정짓는다. 물론 차이는 있다. 릴리언 기쉬는 바람이라는 재난을 맞이하다 이를 극복하고 더욱 강인한 자아를 갖춘다. 카라타 에리카가 연기한 아사코도 강해지긴 한다. 재난에 굴복하다 못해 스스로 재난 그 자체가 되는 방식으로. 료헤이 집 앞까지 쳐들어온 아사코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은 그녀를 찾아왔던 바쿠와 배치가 유사하다. 돌아온 아사코는 료헤이의 연인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바쿠나 다름없다.



아사코가 료헤이의 집에 들어온 후, 두 사람이 강물을 바라보며 이견이 발생하는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다. 료헤이의 집은 앞에 강이 흐른다. 말미에 이르러(서야) 료헤이는 집 앞에 있는 강을 보며 더럽다고 말한다. 반면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두 사람의 시선은 모두 불편하다. 아사코처럼 더러운 풍경을 보고 "그래도 아름답다" 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방법일까. 그녀는 일본인 특유의 사생관이 반영됐는지, 죽음을 향하는 더러움에다 아름다움을 논하며 웃음짓는 데카당트한 모습을 보인다. 죽음의 기운에 취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모든 불편한 기억들에게서 벗어나기로 한 모양새다. 그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재난을 극복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재난을 더 키우는 모양새가 될 뿐이다. 더러운 풍경을 보며 더럽다고 말하는 료헤이는 그나마 솔직한 편이지만 여기에 별 기대는 되지 않는다. 말만 앞설 뿐,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두 일본인은 그렇게 암울한 미래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아사코>는 후반으로 갈수록 불편해진다. 아사코나 료헤이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을 일본 관객들에게는 불편함의 정도가 훨씬 클 것이다. 작품은 두 사람이 재난같은 현실을 소화해 내려다, 되려 소화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점점 혼탁해지는 세계를 보며 아름답다고 웃거나, 더럽다고 말만 하는 채로 살아갈 것이다. 이를 문제로 여기지는 않는다. 아사코와 료헤이의 행동은 개인이 감내할 수 있는 어떤 한계다. 그래서 사회에 드리워진 암연을 개인적 지층에서 소화해 보라고 분위기를 만드는 현 일본, 좀 문제 있어 보이지 않냐고 묻는다.



작품은 가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인 <이 세상의 한 구석에>와 비슷해 보인다. 말하려는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외피를 지녔지만, 보는 동안 이상한 경직성과 불안함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여기에 의문을 갖게 만들면서 감상자가 내부로부터 각성할 수 있기를 유도한다. 이 방식은 다소 복잡하지만 현재 일본영화계에서 사회와 현실을 묘사하고 질문하기에는 가장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대놓고 문제를 거론하고 계몽하려는 화법을 취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아사코>는 21세기 일본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는 것. 하지만 애써 외면하려 하는 문제를 다룬다. 몰라서 이렇게 살고 있는게 아님을 알고 있다. 작품은 무작정 잘못됐다고 할 게 아니라 이 문제를 이렇게 소화해내는 게 괜찮은지, 앞으로도 괜찮을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이미 5년 넘게 사귀었고, 파탄났다가 또다시 함께 살아가게 될 아사코와 료헤이를 통해서 말이다. 정교한 과정을 거쳐 불편한 질문을 제시하는 <아사코>의 화법이다. 지진과 사랑 사이 뒤틀린 인물들로부터 파생된 작품의 질문에 '불쾌하지만 거 일리가 있다' 고 느낀다면 그 사회나 사람은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아사코와 료헤이처럼 되지는 않겠지.



p.s.


1) 리뷰의 부제는 피천득 시인이 1973년에 발표한 수필인 <인연> 속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피천득이 짝사랑한 여자와 세 번 만나고 이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여자 이름이 미우라 아사코다. 원래 문장은 이렇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2) 작품의 일본 개봉 제목은 <자나 깨나>, 해외 개봉 제목은 <아사코 1&2> 다. 작품을 생각해보면 <아사코> 뒤에 1&2를 붙이는 쪽이 더 어울리는데 한국 개봉 제목에는 빠져서 안타깝다. 



3) 후반에 돌아온 아사코가 료헤이를 쫓아가는 롱 샷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먹구름이 달리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걷히는 장면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마냥 대규모의 스탭들과 필름 촬영이라는 상황이 아니었을테니까 크게 돈 들 일도 없었을테고. 구름이 걷히기를 직접 기다렸다 찍었을 법도 한데.. 아니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장면 같아 보이기도 한다. 실제든 컴퓨터 그래픽으로 덧입힌 것이든, 영화가 자연의 변화를 표현하는 순간들은 언제봐도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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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03-30 17:51:51

불어 자막은 뭔가요? 순간 저런게 있었나 생각을....

WR
2019-03-30 17:58:43

온라인에 공개된 스틸 컷에 저 장면들이 없어 프랑스 개봉 예고편에서 캡쳐해 봤습니다.

1
2019-03-30 19:09:19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흥미로운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WR
2019-03-30 21:05:45

독특한 작품이었죠.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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