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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바이스 (Vice)(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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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8:32

 

공포의 보수



[실존인물 전기물이라 스포일러라고 해야하는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있습니다.]


<바이스>는 공화당 출신 정치인이자 실존인물인 딕 체니 (크리스찬 베일) 를 다룬 전기물이다. 똑 부러진 아내 린 (에이미 아담스) 을 만나 예일대에 재학했지만 망나니처럼 살던 남자. 그러다 젊은 정치인이 돼서 도널드 럼스펠드 (스티븐 카렐) 밑에 들어가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하원 의원, 국방장관 등 승승장구하던 그는 심장질환과 첫째 딸 메리 (앨리슨 필) 가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 하면서 공화당 정치인으로서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 때문에 건강과 딸을 외면할 바엔 평화롭게 은퇴하길 선택하여 가족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보낸다. 여기까지 다뤘다면 <바이스>는 미국판 <온달왕자와 평강공주> 공화당 버전 스타일로 그냥저냥 끝났을지 모른다. 은퇴해서 평화롭게 노후를 보내는 전개는 사실 작품이 지닌 바람이다. 왜 그런고 하니 도입부에서 2001년 9.11 테러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비상상황센터로 대피한 관료들 중 딕 체니가 특별 재량권을 주장하며 “위협으로 판단되는 항공기는 격추하라.” 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아들 부시 (샘 록웰)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내던 시절이다. 작품은 중반부에 갑자기 엔딩 크레딧을 한 번 등장시킨다. 딕 체니를 향한 외침이다. 그 때 은퇴했으면 내가 이런 거 안 만들었다고!

 


원래 <바이스>는 딕 체니라는 보수 공화당 정치인을 이 정도 수위까지 묘사할 계획은 없었다. 이는 연출을 맡은 아담 맥케이의 말이다. 감독은 <빅 쇼트>로 비평과 흥행 모두를 사로잡은 후 차기작에 투자하겠다는 헐리우드 영화사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 때 딕 체니 이야기를 했는데, 메이저 영화사들이 듣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감독에게 관심을 끊었다고 한다. 최종 구원자는 세계적인 갑부인 로렌스 조셉 엘리슨의 딸 메건 엘리슨이 운영하는 영화사인 안나푸르나 픽쳐스가 되었다. 일명 '사장될뻔한 영화들을 구원하는 영화사'. 돈으로 돌아가는 헐리우드에서 드물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아담 맥케이 감독은 투자에 어려움을 겪던 일과 더불어, 제작을 본격화하면서 인간 딕 체니를 탐구하던 중 <바이스>의 컨셉을 확정했다. 그가 현대 미국 정치사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녔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는 것이다. 최종 각본과 작품의 모양새는 초고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형태로 완성됐다.



아담 맥케이 감독은 <빅 쇼트>로 아카데미 영화제 각색상을 수상했을 당시, 소감으로 버니 샌더스를 에둘러 지지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바이스>가 딕 체니를 적나라하게 다룬 이유는 이 정치성향으로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여한 일들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최소화했던 체니였으니, 이를 드러내려는 연출방식도 될테고. 개인적으로도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일어났던 모든 정치문제의 원인은 대통령에게 있었겠거니 생각했다. 물론 아들 부시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이 작품은 격추명령을 내리는 도입부를 통해 정부는 대통령 한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구성원들이 이끌어 가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부통령의 영어식 표현인 vice president 의 줄임말이면서 악(惡) 을 뜻함을 인지시키는 중의적 측면에서 '바이스' 라는 제목은 적절하다. 악의 존재감은 여러 사람들에게 배분되어 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주변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고 대표자만 기억에 남는 법이다. 작품은 이를 막으려 한다. 조지 W. 부시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비난받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아들 부시가 그 정부에서 그나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고.) 도널드 럼즈펠드도 기억하게 하며 마지막으로 딕 체니. 가장 알려지지 않은 척 하는 그를 비추면서 '이 사람을 보라' 고 선언한다. 실제로 딕 체니는 많이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에 관해 많이 알려고 노력했다는 듯 도입부 자막에서 '존나 노력했다' 고 써 놓을 정도다.

 


<빅 쇼트>와 유사한 형식을 지닌 <바이스>지만, 전자는 다양한 사람과 집단이 얽힌 세계금융위기를 다뤘고 후자는 한 인물을 콕 찝어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비판정신이 두드러진다. 이 자가 저지른 만행들을 하나씩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큰 힘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를 알리려고 노력한다. 직설적 태도가 감정을 앞세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생각을 들게 할 수 있으므로 작품이 정치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비판적 반응도 나오게 한다. 그러나 호불호가 갈릴지라도 톤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이 부시 행정부도 아니고, 딕 체니가 대외적으로 정계 중심에서 벗어난지 10여년이 넘었다는 인식이 갖춰진 상태다. 베일에 가려진 척 하는 자의 악행을 드러내려는 자세로서 에둘러가는 풍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작품은 이런 직설을 영화적 재미로 삼으며 현란한 편집과 화려한 인포그래픽을 구사한다. 정치인 전기물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코미디적 용도로 기능하는데, 일면 연출자로서 아담 맥케이의 자아도취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내가 이만큼 조사했다거나 이만큼 안다 같은. 딕 체니가 아들 부시에게 대통령 선거 러닝메이트가 되어달라고 제안 받은 후, 아내 린과 함께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리차드 3세>를 패러디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사실 해당 장면에 한해 한글자막을 궁서체로 바꾼 자막제작자 / 수입사의 센스 덕분에 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정상과 오버의 경계선에서 비교적 줄타기를 잘 한다. 뮤지컬 장면들을 찍어뒀지만 최종 상영본에서 뺀 것처럼 그런 순간들을 더하거나 줄이는 감각을 상실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 크리스찬 베일은 이제 진심으로 건강 걱정이 될 정도고, 에이미 아담스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에 이어 또 한 번 남자를 뒤에서 조종하는 비선실세 같은 느낌을 준다. *



더불어 주조연 4인방의 대단한 연기력도 작품을 고발 리포트로만 보일 위험을 막아준다. 보통 영상적 형식이 정보전달을 위주로 강조되면 배우가 존재감을 잡아먹힐 위험이 있다. <바이스>에 출연한 배우들은 그 연출에서도 살아남는다. 인포그래픽이 등장인물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줄테니, 이들은 애써 코미디 연기를 할 필요 없이 진지하게 무게감을 잡을 수 있다. 덕분에 실제 인물들에 빙의된 듯한 수준의 열연을 선보이며 입체적인 드라마를 구축한다. 그런 점에서 위에다 언급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는 발언에는 비판으로만 한정짓지 않는 복합적 의미가 담겨 있음을 말하고 싶다. <바이스>는 체니를 향해 날을 세우면서도 어떤 측면에서는 그에게 매혹될만한 점도 있음을 고백한다. 초반에 린이 똑똑하고 능력이 있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 진출에 제한 받고 있음을 가슴절절하게 말할 때, 이를 본 체니가 각성하고 정계입문에 성공하는 장면은 솔직히 좀 폼 난다. 그 외에도 여러 장면이 있다. 럼스펠드와 일하면서 처음으로 자기 사무실을 얻은 체니가 전화로 린과 딸들에게 찬사를 듣는 장면, 망나니 장인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며 다시는 접근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장면, 부시의 러닝 메이트 제안을 승낙하는 조건으로 공화당 성향임에도 레즈비언인 딸을 위해 동성애 반대 연설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 등.

 


비록 비판적 자세로 해당 인물을 보고 있지만, 작품은 사실에 기반한 위 장면들을 다룰 때, 전기물로서 지닐 수 있는 고유한 드라마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욕 먹어야 마땅하지만 그냥 정치계의 실세가 된 게 아니고 나름 매력발산을 해 왔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아내의 말에 그녀를 만족시키는 남자가 되고, 공화당에 있으면서도 동성애 혐오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을 비롯해 누군가를 만족시키려는 태도가 있다. 그 점이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필수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잘 안다. 물론 부시 행정부에서 활동하는 후반으로 향하며 이 태도는 독이 된다. 이런 드라마틱한 성공과 인간으로서의 타락은 한 편의 영화로서 매력적이라 굳이 없애려 들지 않는다.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뜻을 밝힌 감독임을 생각하면 이런 인정이 꽤 적나라한 고백이라 할 수 있겠다.



<바이스>를 보고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싸움을 하는 마지막 쿠키영상 장면은 그런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쿠키라서인지 이 영상은 이미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는데, 트럼프를 찬양하는 보수주의자에 맞서 진보주의자가 하필 힐러리를 운운하며 자기 입장을 말하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다. 실제로 딕 체니를 부통령에 임명한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미국 유권자들에게 '도덕성과 인간성' 을 성공적으로 어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버니 샌더스와 경쟁해서 승리했던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미국 진보진영은 과연 보수 공화당 구성원들처럼 사람들을 매혹시킬 인간적인 드라마가 있었는가? 정치가 자기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자각 못한 채 그저 <분노의 질주> 신작을 기다리거나, 트럼프를 두고 미국의 보물이라 말하는 이들에게서 거부당한 이유가 거기 있다고는 생각 안 해봤는지 묻는다.

 

 

 

 

 

물론 생각을 했다면 백악관 입성은 그들이 했을 것이다. 하지 않은 덕에 2000년대는 부시 행정부를 등에 업은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 등으로 인해 수많은 미국인이 이라크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며, 경제는 파탄났다. 그리고 지금은 '오렌지 대가리' 라고 조롱하고 씹어댔던 자가 대통령 된 지 오래다. 길티 플레져물이나 보며 세상 문제에 신경 끈 사람들의 무지함,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표를 얻기 위해 전략을 짜기는 커녕 계몽의 대상으로만 봤던 진보진영, 마지막으로 이 무심한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보수진영. 이 세가지 구성은 딕 체니 같은 악인이 권좌에 올라설 수 있게 만드는 시너지를 일으킨다. 그는 지지자들을 위해 언제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다. 언제든 전쟁을 일으키며 그들의 호전성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둘째 딸의 정계진출을 인정받기 위해 린과 함께 동성애 혐오를 방관할 수 있다. 첫째 딸이 배신감에 사무쳐서 울부짖건 말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방법으로서 대중을 무시하지 않고 최대한 만족시키는 쪽을 선택한 것. 인간 딕 체니의 드라마가 흥미로운 이유다. 동시에 마지막 장면에서 "당신들이 날 뽑았다" 며 요제프 괴벨스를 연상케하는 그의 말이 섬찟한 이유이기도 하다. 맞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정치인들로부터 간택 받았지만, 그를 간택한 정치인은 대중들이 뽑았다. 그 사실은 영원히 딕 체니가 자기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로 활용될 것이다. <바이스>에서 가장 많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당연히 딕 체니지만, 작품은 이는 기본 옵션일뿐 그를 막을 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를 뽑은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한다. 악은 바이스 프레지던트 뿐 아니라 바이스 프레지던트의 아내, 딸에게도 있으며 프레지던트에게도 있다고 말이다. 유권자 역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이 스스로가 곧 정의라고만 생각하고 악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딕 체니같은 인물은 언제든 다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로 오를 수 있다. 관객에게 가르치려는 태도가 과하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그렇게 느끼면 안 된다. <바이스>는 놀라울 정도로 덜 불쾌하게 잘 가르치기에 성공하는 작품이다.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라면 상대방의 자존감을 나락으로 떨어뜨려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한국사회가 필히 참조해야 할 정도다. 무거운 소재임에도 꽤나 유쾌하게 멕여서 모욕감을 덜 느끼면서 정신차릴 수 있다. 물론 체니에게 만큼은 속으로 기어이 이를 갈게 만드는 작품일 것이다.


 

p.s.


1) <바이스>의 삭제된 뮤지컬 장면은 현재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이 뮤지컬 장면은 스티브 카렐이 연기한 도날드 럼스펠드가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하는 딕 체니에게 워싱턴 정가에서 조심하고 주의해야할 사항들에 대해 말하며 서로 대화할 때 주위에 앉은 배우들이 두 사람 주변에서 뮤지컬을 하는 장면이었다. 결국 삭제되고 최종 상영본에서는 해당 장면이 스틸 컷으로만 등장한다. 이외에 린과 딕 체니가 처음 만나서 데이트를 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달달한 회상 장면도 있었다고 하는데, 재밌게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두 장면을 삭제하는게 좋겠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뮤지컬 장면의 경우에는 밴드 알라바마 셰이크스의 보컬리스트인 브리타니 하워드가 카메오로 출연했고, 회상 장면은 촬영감독과 음악가가 특히 공을 들였다고. 아담 맥케이 감독이 삭제하기로 마음먹는데 꽤 애먹었다고 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은근히 다른 작품들에 도움을 많이 주는 듯하다. <어스>에도 도움을 줬다고 알려져 있는데, <바이스>도 그렇고.



2) 보다가 좀 기이하다 싶었던 것이 리차드 닉슨을 연기한 배우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더라. 포드나 부시 대통령은 배우가 연기를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왜 닉슨은 흐릿하게 처리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했을까. 뭔가, 헐리우드에 닉슨의 얼굴을 제대로 묘사하면 안 된다는 금기사항이라도 있는걸까. 그런 건 못 들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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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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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3 15:43:24

생각해보니 에이미 아담스가 말씀대로 마스터에 이어 남자를 조종하는 여장부로 다시 출연하네요. 풍자와 고급진 조소로 무장한 이런 영화가 조만간 한국에도 만들어질수 있을지... 리뷰 잘 읽었습니다.

WR
Updated at 2019-04-23 16:49:03

엇. 아무도 댓글을 안 달 줄 알았는데 MC후니 님께서 달아주셨네요. 하하. 감사드립니다. 

 

<빅 쇼트> 하위버전인 <국가부도의 날>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실제 현실에서 무언가를 이긴 선례가 없기 때문에 풍자와 고급진 조소보다는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공분사기와 처벌을 보여주게 되는 쪽이 영화에서 효과가 더 있는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긴 합니다. 물론 <바이스>도 미국 현지에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으니 영화계가 대단하다기 보다는 이 영화가 특별한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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