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자동
ID/PW 찾기 회원가입

[영화리뷰]  파업전야 (1990)

 
8
  1242
Updated at 2020-01-10 20:28:17

 

* 원래는 위 영상으로 만든 리뷰입니다. 

아래 글은 영상의 텍스트 버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상과 텍스트에 있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데, 

영상 쪽을 봐주시면 좋겠지만 싫으시다면 텍스트를 보시지요. *

 

 

빼앗기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 싸워라

 

 

한국독립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작집단이 있다. 이름하여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음악평론가 강헌, 명필름 대표 이은, 영화감독은 <이태원 살인사건>의 홍기선, <고고 70>의 최호, <알포인트>의 공수창, <접속>의 장윤현 등 훗날 문화예술계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당시에는 각기 다른 대학교 영화동아리에 속해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모여 영화도 운동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결성된 제작소였다. 이름은 황해도에서 구전되는 장산곶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륙에서 쳐들어온 매와 구렁이떼들에 맞서 싸우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장산곶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전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7~80년대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황석영 작가의 소설 <장길산> 덕분이다. 해당 전설은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며 백성들의 구원자가 된 황해도 구월산의 의적 장길산 이야기에 차용됐고, 장산곶매는 곧 민초들의 끈기에 대한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지금과 달리 대학교가 많지도 않았던데다 진학하기도 힘들었던 시대.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은 지금 같은 모습을 포함해서 부당한 국가에 맞서거나 사회를 좀 더 좋게 바꾸고자 뭔가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영화제작소 장산곶매의 행보도 이와 비슷했다.


 

 

* 불세출의 명리학 대가시지만 장산곶매가 그런 곳인지는 예측 못하셨다.*


 

당시 일반적인 한국독립영화들처럼 16mm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한 장산곶매는 장편극영화 세 편에 중편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었다. 첫 작품은 5.18 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트라우마를 다룬 극영화인 1989년작 <오! 꿈의 나라> 였다. 이후로 당대에 끝없이 외면당했던 교육과 사회정치, 노동문제를 전면으로 다룬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영화들은 시나리오부터 조지고 보는 당대 심의제도를 볼 때 결코 극장에 정식으로 개봉할 일이 없을 것이므로 '공동체 상영' 을 택해 대학가와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상영됐다. 그러니까 이번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 4K 해상도로 복원된 <파업전야>는 처음으로 정식개봉 하는 셈이다.


 

<파업전야>는 장산곶매의 최고 히트작이다. 그럴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그 계기는 서울 혜화동에 있었던 '예술극장 한마당' 에서 처음 자리를 잡고 상영했을 당시 공권력에 의해 필름을 압수당한 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굳이 민감함의 정도를 따지자면 5.18을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 쪽이 더 심해 보이지만, 의외로 그 작품은 상영 당시 재판부에서 정부의 필름 압수 시도를 기각한 바 있다. 당시 노태우 정부 입장에서 전두환 정부와 다르다는 점을 어필하는 용도로 5.18을 활용하기에 적당했으므로 나름 유하게 풀어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문제는 풀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88 올림픽을 개최하고 산업발전 측면에서 최고조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더 빼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노동자들에게 노조와 파업의 중요성을 말하는 작품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심지어 무료 관람이었으니 이건 막아야겠다 싶었겠지.

 


 

어쨌든 <파업전야>는 마틴 리트 감독의 1979년작인 <노마 레이>의 영향을 받은 작품처럼 보인다. 물론 한국에는 개봉하지 않은 작품이라 당시 제작진들이 봤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작품들을 보며 카메라 움직임을 연구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는 장면이 <노마 레이>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이는 게 단순히 내 기분 탓은 아닌 듯 하다. <파업전야>는 <노마 레이>와 반대의 전개방향을 취한다. 그 작품은 샐리 필드가 연기하는 노마 레이라는 노동자가 노조운동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노조운동가가 빨갱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한국의 현실에서 이런 성장 서사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그래서 <파업전야>는 무기력한 현실 속에서 회사의 개처럼 살던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그가 노조에 관해 생각을 바꾸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입부에서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임을 외치며 노조 결성을 부르짖다 끌려나가는 노동자를 보여주는 장면도 그가 외친 발언보다는 끌려나가는 행위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한국 회사에서 보는 일상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본론을 꺼낼 생각은 없고, 다만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현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익숙하게 만드는데 공을 들인다.

 


당시 노동운동은 '공산주의 의식화' 로 치부되며 주류 TV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왜곡된 바 있다. 작품이 노조 활동의 숭고한 의미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노조를 계획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연출로 상영시간 상당부분을 채운 것은 이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다. 노조에 회의적인 노동자 한수와 열성적으로 노조활동을 하는 애인 미자가 연인 관계로서 나누는 섹스 장면이 대표적이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직접적인 묘사가 없는 가소로운 표현수위지만 아무리 노동자들의 일상을 묘사한다고 해도 섹스 장면까지 넣어야 겠느냐며 장산곶매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당대 주류 한국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가 맥락없이 벗기기 였으니 그 수준과 비슷해 보일거라 생각했었나보다. 다행히 <파업전야>에서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행위로서 보여진다. 한수가 일하는 공장에서는 같은 노조원끼리 연애를 하고, 사상에 관해 치열하게 토론 하기보다 축구를 통해 서로를 돈독하게 만드는 식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설문조사에서 남녀 임금 차별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를 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작품에는 공장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노동운동가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사는 서민이 있을 뿐이다.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는게 아니라, 그저 내 여건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참여할 뿐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그리고 의외로 혁명이나 노동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연애감정인데 이런 사회운동을 다룬 작품에서 연애라는 소재가 간과되는 측면이 있었다. <파업전야>는 이 부분까지 수월하게 표현한다. 그렇게 노동영화이자 일상물로서 자기 위치를 충실히 유지하며 노동운동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춘다.


 

물론 일상물이라는 의미는 한 개인의 일상과 주변 일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법이고 뭐고 휴지조각으로 아는 당대 헬조선 노동현장의 처참한 일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덕분에 노동자들에게 향하는 탄압도 열심히 묘사된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실제로 회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휴업하는 바람에 정상 조업 재개 투쟁을 한창 벌이고 있던 한독금속 회사 공장을 촬영지로 삼아 사실성을 더했다. 소규모 무대에나 쓸 법한 주피터 라이트 조명으로 거대한 공장 내부를 비춰야 했다며 제작진은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밝기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안 좋은 의미에서 그 현실성이 잘 부각된다. 공장 작업반장과 이사진들의 협박으로 밥도 제 때 못 먹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노조 결성 소식을 들은 이사진이 발 빠르게 어용노조를 만들어 맞불을 놓으려는 것 또한 일상이다.


 

예나 지금이나 주류 언론은 노동자들의 노조와 어용노조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며,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노조 결성에 관해 회의적으로 느끼게 만들곤 했다. 그런 점에서 <파업전야> 는 이 노조와 그 노조가 다름을 구분시키고,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수를 보여주며 끝내 그가 내리는 선택을 설득력있게 진행시킨다. 한수의 갈등은 당대 정권과 언론이 수출역군과 경제활성화를 내세우며 미화시키기에 바빴던 기업권력의 음흉한 면모를 드러내는 순간이자, '어째서 노조가 우리에게 필요한가' 를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연출로서 부족함이 없다.



이런 작품이다 보니 노태우 정부는 상영저지를 위해 진압경찰과 헬기까지 동원했다. 작품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공연장 허가가 취소됐고 관객은 봤다는 이유로 연행과 구금, 심지어 일하던 회사에서 해고당하기까지 했다. 장산곶매는 이에 맞서 일명 '<파업전야> 탄압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 를 결성 후, 상영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대학교에서 상영될 때는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필름을 사수했고,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며 상영장에 진입했을 때 상영 책임자들은 영사기와 필름을 챙겨 탈출하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SNS도 없던 시대이니만큼 가만 놔뒀으면 볼 사람들이나 보고 끝났을 작품이었다. 어찌 보면 당시 권력자들의 호들갑이 <파업전야>가 3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고 당시 천원짜리였던 팜플렛을 팔아 1억원의 수익을 내게 만든 셈이다.


 

 


<파업전야>는 이후로도 세상이 필요로 할 때 몇 번 더 소환됐다. 사실 지금도 이 작품은 존재감을 드러낼만한 시의성을 갖추고 있다. 매번 따라붙는 이야기지만 작품이 공개된지 30년인데 아직도 한국사회가 바뀌려면 멀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게 나아진 부분이 있다면 아마 노동법 공부했다는 이유로 정부기관에 부당하게 끌려가 고문당하는 시대는 아니게 되었다는 점. 아직까지는 그 뿐이다. 다만 이번에 첫 극장개봉을 위해 다시 소환된 <파업전야> 복원판은 과거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올 해 영화 / TV 드라마 쪽에서 몇몇 노동문제가 논란으로 부각된 바 있다. 한국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스태프들이 과로로 인해 부상을 입거나 끝내 사망에 이른 경우가 있었고, 어떤 스태프는 드라마 제작사를 노동착취로 고발했다가 내부에서 감시당하기도 했다. 영화계는 고작 몇 년 전에야 표준계약서가 도입됐는데 이제서야 표준근로기준법도 도입된다며 자화자찬 하는 중이다. 머리를 쓰건 몸을 쓰건 예술이란 원래 중노동이었고, 영화 현장은 막노동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 쪽은 노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최전선에서 만들어 왔으면서 정작 노동권리가 보장되는 영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 안치환의 명곡 '철의 노동자' 가 울려퍼지는 <파업전야>의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으면 영화 / 드라마 / 영화제 분야에서 일어난 스태프 혹사에 관한 일화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넷플릭스의 <킹덤>, 아래 인스타그램 글을 나오게 만든 TVN의 <아스달 연대기> 등등.


우습게도 90년대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촬영할 때도 '우리는 예술하는 사람' 이라는 명목으로, 무려 전태일 이야기를 촬영하면서 노동 혹사가 자연스러웠다. 영화 / 드라마 분야는 '철의 노동자' 란 노래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가? *

 


독재사회에 대한 저항운동이자 평상시 받아들여졌던 노동현장에 관해 영감을 주는 식으로만 기억되던 이 작품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새로운 시의성이 부여된 것 같다고 해야할까. 마침내 첫 개봉하는 <파업전야>도 이런 식으로 되물을 수 있다. 작품이 만들어진지 30년인데 어째서 그동안 한국영화 현장은 바뀌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영화 또한 노동의 산물이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노동자다. <파업전야>는 여태까지 이상할 정도로 접점이 없었던 영화계 종사자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한 편의 영화가 된다. 장산곶매 일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나이들어 갔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만든 <파업전야>는 지금도 새롭게 영감을 주는 고전으로 남았다. 최소한 이 작품은 시대에 부끄럽지 않다.

 

 

p.s.


1) 극장에서 상영하는 4K 복원판은 정작 나 사는 동네에서 개봉하지 않았으므로, 2008년에 발매됐던 DVD로 다시 봤음을 알린다. 후줄근한 DVD지만 발매 당시에는 작품이 한층 화사하게 보인다고 호평이 자자했는데 복원판은 확실히 작정하고 작업했으니까... 예고편 영상으로 봐도 장난이 아니더라. 영상자료원을 통해서 블루레이가 나올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2) 다시 감상해보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작품에서 금방 지나가지만 먼저 노조활동을 하던 한수의 애인 미자가 다른 노조원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 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사적으로 더 이익을 누리기 위해 노조 활동을 하는 것이면서 5.18의 슬픔을 이용하는게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업전야>는 그 장면을 통해 노조는 결국 사회적으로 소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연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노조는 자기네 회사 투쟁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노조, 혹은 사회단체. 혹은 성소수자 단체 관련 행사나 투쟁 등에도 참여하고 돕기도 하더라. 그런 연대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3) <파업전야>의 공동감독 중 이은기 감독은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단편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뙤약볕에서 노동을 하다가,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이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다 사망했다. 

4
Comments
1
2019-05-03 01:32:24

세상에 이런 고퀄의 글이라니...스크랩해놓고 다시봐야겠네요. 저 멤버들의 배후에 심재명 대표가 있을거라 추측도 해봅니다.이은 감독이 속좀 썩혔더란 소문이 ^^ 여하간 정성글 잘보았습니다.

WR
Updated at 2019-05-03 15:20:43

그러고 보면 심재명 대표는 이은 감독과의 만남을 94년의 결혼으로 설명하고, 연애 시절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굳이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뭔가 숨겨진 장산곶매 멤버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본 인터뷰에서는 심재명 대표 스스로 남편 만나 사람 됐다고 이야기하더군요. " 결혼하기 전에는 워낙 다혈질이기도 했어요. 극장에서 일할 때는 욕쟁이라고, 욕 좀 그만하라고 그런 말도 들었어요. 남편 만나서 사람 됐죠. (웃음)"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원도 기다리겠습니다. 후후.

1
2019-05-03 10:01:16

대학 때 이 영화를 상영회 한다고 전경과 대치하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야말로 전쟁이었습니다. 화염병이 날라다고 전경, 백골단과 페퍼포그들은 교내에 진입하여 미친듯이 최류탄도 쏴대고...결국 아주 늦은밤 어찌어찌하여 아수라장이 된 교내에서 결국 보기는 했었지요. 당시 그 파업전야를 이렇게 디피에서 글로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WR
1
2019-05-03 15:19:50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년 쯤에 DVD가 처음 출시됐을 때 예스24 쪽에서 잠시동안 작은 연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간단하게 쓰긴 했었습니다. 그 때도 '감회가 새롭다' 는 식으로 댓글을 달아주신 DP 회원 분들이 계셨습니다. 깡깡하게 님의 댓글을 보니 확실히 그 세대에게 각별한 기억이 있는 작품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파업전야> 가 DVD화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카 덕이 일정 부분 있지요. 하하. 그 분의 행태를 보면서 장산곶매 멤버들이 다시 한 번 <파업전야>가 나올 때라고 느꼈었다죠. 후원 감사합니다. 더 좋은 글을 쓰겠습니다.

 
24-04-24
 
421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