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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이 세상의 한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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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8:03

 

[스포일러 있음]

예술은 사회가 부여하는 한계나 제한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고자 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금기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함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난감함을 안기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제작한 일본영화나 애니메이션을 한국에서 관람할 때도 그렇다. 한국에는 전범국가인 일본에게 35년간 식민 지배를 당한 실제 역사가 있다. 해방 후에도 일본 자본에게 경제적인 부분에서 오랫동안 종속됐으며, 박정희 군부정권이 한일회담을 통해 받아낸 금전적 배상은 다른 식민지 국가와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이 적었다. 일본은 지금도 국제적으로 청산해야 할 과거사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는 눈치다. 사회적으로 우경화가 강해지는 현 일본 정치사회 입장에서 굳이 치부를 드러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만든 2차 세계대전 / 원폭 피해물' 이 한국에서 공개되는 자체만으로 공분을 불러 모으는 현상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코노 후미요 작가가 그린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작가의 외할머니가 개인적으로 겪은 체험을 만화화 하자는 기본 아이디어에서 창작이 시작됐으나 정작 그녀 생전에 직접 증언을 듣지 못한 탓에 철저한 고증조사를 거쳐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코노 후미요 작가는 외할머니가 당시 체험했을 법한 보편적 사례를 조사한 후, 이를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사회적 흐름에 맞춰 배치하면서 이야기를 구축했다. 완성된 최종 결과물은 일본 히로시마와 쿠레를 배경으로 한 홈 드라마이자 여성 스즈의 성장물, 일본 군국주의의 행태를 비판하는 형태가 됐다. 만화를 읽은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깊은 인상을 받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겠다는 의향을 보인다. 그는 직접 원작자인 코노 후미요 작가와 접촉해서 애니메이션 제작 허락을 받아냈으며, 이야기 역시 가능한 원작의 방향을 따랐다. 예산부족과 감독 나름의 판단으로 몇몇 부분은 달라졌지만 말이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20대부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명탐정 홈즈> 각본가로 활동했다. 훗날 미야자키 하야오의 조감독 생활도 거치고, 그 만큼 밀리터리 관련 고증과 지식을 꿰뚫고 있으므로 명실상부 '하야오 키드' 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감독의 2009년작인 <마이 마이 신코 이야기> 가 많이 알려진 편이다. 1950년대 일본을 배경이며 감독의 강점이 뛰어나게 발휘된 작품이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정서적으로 이해하고 고증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하는 솜씨가 그것이다. 극화와 다소 거리가 먼 그림체가 생생함과 어우러지며 '추억' 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큰 효과를 발휘했다. 원작만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감독이 충분히 매혹될 요소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추억. 전쟁. 밀리터리. 미야자키 하야오가 동일한 시대를 배경으로 <바람이 분다> 를 연출한 적 있으니 좋은 비교대상이 될 만도 했고.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한국 개봉 당시 흥미로운 반응을 얻었다. 원작만화는 별 말이 없었는데 애니메이션은 꽤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전범 국가이자 가해자로서 일본이 부각되는 마지막 장면이 원작만화와 달랐다, 원작은 해당 부분을 직접적으로 드러냈으나 애니메이션은 소극적이다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막상 감상했을 때는 애니메이션 판이 보여준 연출방식이 이해됐다. 자국 일본에서 극장에 찾아왔을 주 관객층을 고려한 연출방식으로 느껴져서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 의 초반부는 주인공 스즈 (노넨 레나) 가 고향 히로시마에서 보내는 유년기를 다룬다. 여기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제시하고, 유년시절을 행복한 추억으로서 소환할 수 있는 주체임을 어필한다. 스즈는 오빠 요이치 (오오모리 카나타), 동생 스미 (한 메구미) 사이의 둘째다. 그림 그리기와 공상을 하는 취미가 있고, 넉넉치 않은 형편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평범하지만 딱 한 가지가 비범하다.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지 염려될 정도로 '멍한 사람' 이라는 점에서다. 여기엔 스즈가 좋아하는 그림과 관련된 초현실적 장면들이 간간히 삽입되어 현실적 이야기와 어우러지는 데서 오는 이유가 크다. 작품이 시대적 생활상을 더욱 세심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스즈가 세상과 불화하며 살고 있다는 인상까지 줄 정도다. 

 

 

 

 

초반부에 이미 대표적인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스즈가 심심해하는 스미를 위해 그림 동화를 그려서 읽어주는 장면이다. 스즈가 도깨비에 의해 바구니 속에 담겨진 후 어디론가 가는 내용이지만 이는 온전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그녀가 실제로 시장에 갔던 기억을 극화시킨 형태에 가깝다. 도깨비 바구니 속에는 남자아이도 한 명 있다. 그는 바로 중매로 만나게 되는 남편 슈사쿠 (호소야 요시마사) 다. 훗날 슈사쿠가 군인으로 성장하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 찾아와 언급한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들이 오래 전에 스즈를 어디선가 봤고 한 눈에 반했던 것 같다' 는 이야기다. 물론 스즈는 끝내 슈사쿠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동화에서 등장하는 도깨비는 스즈의 멍함을 지적하며 무섭게 혼내곤 했던 오빠 요이치다. 역시 스즈가 군복 입은 도깨비를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 '도깨비 오빠 종군기' 를 그려 놓음으로서 훗날 요이치의 징병이 암시된다.

 

 

 

두번째는 유년 시절 스즈가 요이치, 스미와 함께 할머니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집안 어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낮잠 자던 스즈는 집 천장에서 꼬마아이가 내려오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다. 아이의 정체는 흔히 '좌부동' 이라 불리는 집 정령 '자시키와라시' 다. 전쟁고아같은 행색이 특징이고, 정령이다. 그러나 작품이 이를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보고 있으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통해 이세계적 존재를 목격할 수 있다는 식의 감성만 느껴질 정도다. 스즈와 자시키와라시가 만나는 장면은 꿈을 꿨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듯이 표현되지 않는다. 엄연히 직접 본 이야기를 진행하는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할머니는 자시키와라시를 본 스즈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쟁고아 같은 정령의 외형은 결말부에 이르러 흡사한 모습으로 다시 구현된다. 히로시마가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어머니를 잃은 신원불명의 꼬마아이가 등장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폐허에서 아이를 만난 스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직접 데려다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작품은 초현실적인 장면들을 꿈이나 플래시백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장면들과 뒤섞어 본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전개 방식은 애니메이션이 가질 수 있는 연출적 특권이다.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들 위험이 있는 공상적, 비현실적 장면이 현실을 비집고 들어와도 영화가 가진 리듬이 쉽게 깨지지 않는다.



스즈를 위주로 구현되는 초현실적 장면들은 <이 세상의 한구석에> 가 지닌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그녀가 순수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보고 있음을 부각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인식이 많이 떨어진다고 반증시키는 점이 그것이다. 시장에 다녀온 스즈 이야기처럼 그녀의 시선과 기억은 주로 콘티처럼 그려진 만화 (유년기), 수채화와 유화 (청년기) 등 그림으로 등장한다. 청년기는 남몰래 짝사랑하던 동네 소꿉친구 미즈하라가 해군에 입대한 형이 군함이 침몰해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우울한 마음에 바다를 쳐다볼 때가 대표적이다. 스즈 시선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은 바다는 아예 화려한 색감으로 칠해진 낭만적인 수채화다. 파도가 흰 토끼 모양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유년 시절 스즈가 자시키와라시를 보는 순간도 장면이 지닌 분위기와 별개로 정령의 남루한 옷차림이 먼저 인상에 남는다. 스즈와 정령을 감싸는 따뜻한 유년시절 정서적 분위기가 맥거핀 같다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이는 중반부에서 더 강하게 부각된다. 남몰래 미즈하라를 사모했던 스즈였지만, 끝내 결혼은 중매로 만난 슈사쿠와 하고 군항 도시 쿠레에서 만만치 않은 시집살이를 시작한다. 여느 날처럼 살림을 하던 스즈가 실수를 해서 귀한 설탕을 모두 없애버리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권고로 암시장에서 굉장히 비싼 값에 설탕을 구매한다. 스즈는 시장을 둘러보다 일본에서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대만 쌀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생필품값이 비싸지면 이 나라에서 앞으로도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결론에 이른다. 그 때 작품은 스즈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걷다가 어느새 길을 잘못 들었음을 보여주고는 낯선 장소로 이동시킨다. 화려하지만 아직 영업은 하지 않는 듯한 건축물이 있는 거리. 분 향기 물씬 풍기는 여자들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작품은 아예 몸에서 조그만 꽃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식으로 그들의 향기를 표현하고 있다. 굳이 설명하지 않지만 스즈가 윤락가에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미심장한 장소 이동이다. 여성 캐릭터가 암시장에서 앞으로 일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도착한 장소가 윤락가라니. 암시장과 윤락가는 전쟁이 지속될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어두운 풍경이 아니던가. 스즈가 목격하는 몸에서 꽃이 피어오르는 예쁜 사람들은 사실 매춘부들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끝까지 알아채지 못한다. 작품은 자시키와라시 장면과 달리 이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따로 있음을 알려준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과연 스즈라는 인물은 무엇을 대표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한구석에> 는 어느 관객층을 바라보고 있는가?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을 직접 체험한 쇼와 세대만을 주 관객층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의 제작년도에 맞게 헤이세이 이후 세대 관객들을 좀 더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쇼와 시대 말기부터 교육기관에서 만든 왜곡된 역사교과서로 공부한 세대. 자국의 불황과 함께 시작한 세대. 그리고 2차 세계대전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지 않은 세대. 멍해보이는 스즈는 쇼와 시대 인물이지만 헤이세이 세대를 대표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이 그녀의 시선을 거쳤을 때 어째서 아름답게 왜곡된 형태로만 보이는지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다. 



작품에서 스즈는 암시장에 다녀온 후 군인인 미즈하라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이미 형의 죽음을 겪었으면서도 가난 때문에 해군에 입대했다. 쿠레로 시집 온 스즈가 보고 싶어 방문한 미즈하라는 여전히 멍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평범함' 이라 말한다. 미즈하라는 스즈에게 앞으로도 그 모습 그대로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질까봐 행복했던 과거 모습을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염려에서 비롯됐으리라. 그러나 미즈하라의 못다한 사랑고백은 참혹한 기억을 아름답게 추억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박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은 유년기를 벗어나서도 소소한 웃음을 불러 일으키는 평온한 에피소드들을 삽입하지만, 성장한 스즈만큼 절정을 향해갔던 실제 전쟁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 전쟁이 본격화되며 주민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식량 배급이 줄어드는 등 삶이 훨씬 더 팍팍해진다. 스즈 역시 그림을 그릴 심적 여유를 잃어간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군함들을 스케치하는 행위만으로도 헌병에게 단속받을 정도다. 영화는 암울한 시기를 지속시키면서 과연 그 사회를 일상이라 할 수 있을지 되묻는 상황을 구축한다.  

 

 

 

 


정확히 1시간 12분이 되는 시점. 조카인 하루미와 함께 군함이 늘어선 바깥 풍경을 보며 안정을 찾던 스즈는 우연히 공중전을 목격한다. 역시나 스즈의 시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회화처럼 표현되지만, 평소와 다르게 현실왜곡을 방해하는 상황이 제시된다. 이번엔 조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스즈는 유사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하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그림으로 지금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 그림도구부터 떠올린다. 당면한 현실 앞에서 예술이 가진 낭만성이 현실회피의 수단만 된다는 사실이 제시되는 순간이다. 스즈 역시 그림에 관해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며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왔음을 알게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하루미를 얼싸안고 어쩔 줄 모르는 스즈를 구해주는 사람은 시아버지다. 그런데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서 그 역시 일본 전투기가 보여주는 성능에 감탄하기 바쁘다. 어떻게 보면 스즈가 평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해 보인다. 그녀는 시아버지를 바라보며 개인적 생각과 지금 당장 벌어지는 상황 사이에서의 이물감을 처음으로 감지한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인상깊다. 전투기 간의 공중전 장면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이 출현하는데, 여지껏 스즈의 시선으로 인해 낭만적인 화풍으로 표현되던 세상이 마침내 인상파로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대로 있어달라는 미즈하라의 부탁은 이뤄질 수 없는 약속이 된다.

 

 

 

생각해 보면 과거 낭만파 화가들은 밖에 나가지 않았다. 실물을 직접 보며 그림 작업을 하지도 않았다. 간단한 스케치 정도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실내 화실에서 작업하는 쪽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모델 정도만이 진짜였을 뿐 자연 배경은 다른 지역에서 본 것을 그려 넣는 등 대부분 상상의 산물이었다. 테마 역시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에만 국한됐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서양사회에서 혼자 밖으로 나와 자연을 바라보며 고고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는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가 반기를 들면서 변화했다. 그들은 어떻게 화가가 실물을 직접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냐며 반발했다. 그리고 그림이라면 당대를 담아야 하는 거라고 외치며 인상파의 태동을 알렸다. 물론 당시 아카데미즘은 낭만파적 화풍이 대세였으므로, 인상파는 대체는 커녕 기존 화풍으로부터 인정받기까지 꽤 많은 조롱을 견뎌내야 했지만.



<이 세상의 한구석에> 가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보여주는 화풍 변화는 스즈가 세상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다. 이전까지 스즈는 낭만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기에 '그럼에도 살아간다' 는 식으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자, 마침내 왜곡 말고 '지금 보는 그대로' 인 인상파적 자세로 주변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물론 작품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하다. 어느날 땅에 묻힌 불발탄이 터지는 장면을 삽입해서 스즈의 한 쪽 손과 하루미의 목숨을 빼앗는다. 작품은 여기서 또 한 번 화풍을 변화시킨다. 화면이 암전되고, 최종적으로 들어서는 시각적 형식은 다름 아닌 스크래치 애니메이션이다. 필름의 검은 젤라틴 막을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구현하는 기법. 물론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니 사실상 해당 기법을 재현했다고 볼 수 있지만, 충격을 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해당 방식은 스즈가 겪는 가장 끔찍한 고난을 묘사할 때 구현되기에 상당히 과격하다는 감흥을 준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애니메이션인데 일순간 기존 그림체가 개입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아서다. 기존 애니메이션 그림체로 그려졌던 스즈와 하루미, 두 사람이 지나던 장소들이 검은 바탕에 거칠게 그려진다. 여기엔 일말의 아름다움도 없고 현실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이라는 본질만이 남아있다. 이렇듯 작품에서 구현되는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들은 본편이 추구했던 형식마저 암전으로 만들어 버리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 2차 세계대전 당시를 살아낸 쇼와 세대, 당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헤이세이 세대에게 외치는 말이기도 하다. 전쟁의 기억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렇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한구석에> 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 외에 한 작품 더 비견될 수 있을 것 같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44년작 실사영화인 <육군> 이다. 기노시타 케이스케는 자국 일본에서 굉장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거장 영화감독이다. <육군>은 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동아 전쟁 3주년' 을 기념하고자 했던 일본 육군성 측 의뢰로 만든 국책 선전물이다. 한 가족을 중심으로 당시 일왕을 섬기며 대를 이어 애국충정의 길을 걷는다는 줄거리. 그러나 의외로 완성본을 본 당시 육군성은 엄청난 비난을 퍼부어댔다.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패전할 때까지 영화 관련 활동 완전 금지, 육군 정보국으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받는 가혹한 보복조치를 당해야만 했다.

 

*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1944년작, <육군>.

크라이테리언 사의 이클립스 레이블인 <Kinoshita and World War II> DVD 박스에 수록됐다. 

 

<육군>이 비난받은 이유는 전쟁이 벌어지면 사람의 일상은 당연히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견지하고 있어서였다. 군국주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국민과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군국주의에 관해 설파하고 일관되게 우수성을 칭송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도, 한 편으로는 다가올 피해를 염려하는 내면 묘사 또한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담아냈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 역시 <육군>처럼 주제의식을 굳이 직접 강조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세심하게 직조된 시각적 이야기 전개를 통해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다. 애니메이션 버전의 마무리가 원작만화와는 다른 뉘앙스로 연출된 점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 모두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고 히로히토 일왕이 패전 선언을 하면서 마무리된다. 스즈는 일왕이 인간선언을 하는 라디오 방송 목소리를 듣고는 납득할 수 없다면서 분노한다. 적기의 폭격으로 인해 한 쪽 손과 조카를 잃었기에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고 있어서다. 여기까지는 두 버전 모두 동일하다. 달라지는 지점은 스즈가 마을에 높이 걸린 태극기를 발견하느냐 마느냐에서다. 원작만화에서는 마치 스즈가 목격한 듯 태극기가 크게 클로즈 업 된다. 쿠레에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살고 있었고, 스즈는 자국이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여태껏 가해를 저지른 데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임을 알고 고통스럽게 운다. 원작 만화는 해당 장면을 통해 최종적으로 국가에 비판하는 데에 닿아있음을 드러낸다.


* 코노 후미요 작가의 동명원작 중에서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원작의 장면이 과할 정도로 정치성을 드러내고 있다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버전에도 스즈가 라디오 방송을 들은 후 분노하고, 마을에 태극기가 높이 걸려있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긴 하다. 원작에서 클로즈 업 됐던 태극기는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로 나오며, 스즈 역시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 그녀 스스로 전쟁을 겪는 동안 암시장에서 봤던 대만 쌀을 비롯해 자국이 침략을 통해 다른 국가로부터 약탈한 것을 먹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만든다. 애니메이션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스즈다. 



여기서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바람이 분다> 와도 겹치는 지점이 생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비행기 개발자였지만 결국 제로센 전투기를 만들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를 연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작의도로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열심히 그 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는 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바람이 분다> 가 개봉 후 반전 (反戰) 이상의 담론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음을 생각해볼 때, 오히려 후배인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이 선배의 발언을 잘 승화한 쪽으로 보인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 는 에둘러 가는 화법을 추구하지만, 민감한 소재에 대한 견해를 관객 몫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쇼와 시대를 넘어 헤이세이 이후 시대에까지 명확한 경고를 던지고 있다. 전쟁은 결코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억으로 남을 수 없으며,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이 없더라도 외면해서는 안되는 역사라는 점을 말이다. 전쟁을 마주하면서 순진하게 구는 태도를 향해 그래봐야 전범국가 국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작품은 각성을 요구한다. 군국주의 일본의 폐해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순간 당신이 원했던 일상의 평온함이 이용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과거의 만행을 망각하려는 사회에 대항하여 개인으로부터 각성할 수 있기를 유도하는 독특한 걸작이다.


 



p.s.


1)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일본에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비평,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지만 유명 각본가인 아라이 하루히코가 <아키타 쥬몬> 지에 '여전히 변함없이 일본은 전쟁 피해자라는 주제의 영화였다' 고 적은 것이다. (정확히 그는 <이 세상의 한구석에> 뿐만 아니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도 비판하면서 '관객이 제일 나쁘다' 고 결론맺었다.)


아무래도 6~80년대 시절 일본에서 직접적으로 군국주의를 후드려 패는 작품들이 여럿 나왔으니 그걸 최전선에서 직접 관람한 아라이 하루히코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럽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떠오르는 작품들만 나열해봐도 극영화는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야쿠자 군대> 와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군기는 똥구덩이 아래에>. 다큐는 하라 가즈오 감독의 <가자 가자 신군>, 만화는 나카자와 케이지 작가의 <맨발의 겐> 등이 있으니. 일본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한 작품들이었지. 다만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좀 다른 접근방식을 시도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2)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 덕분에 30분 분량이 추가된 확장판 제작이 성사됐고, 올 해 12월에 개봉예정이다. 스즈가 윤락가에서 친해진 매춘부 캐릭터 린이 있는데, 극장판에서는 그녀의 비중이 별로 없었다. 원작만화에서는 린의 비중이나 영향이 나름 큰 편이며 이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고. 30분 추가되면 확장판은 159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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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05-09 07:50:49

잘읽었습니다. 궁금한 작품이었는데 조금 알게 되었네요

WR
2019-05-09 12:27:57

잘 만든 작품입니다. 한국에서 너무 욕을 먹어가지고.. 그게 좀 안타깝더군요. 원작만화도 잘 만들었습니다.

1
2019-05-09 10:20:23

 보편적인 일본인의 정서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WR
2019-05-09 12:30:26

개인적으로는 <아사코> 볼 때 <이 세상의 한구석에>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방식을 취해서 얘기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일본 쪽에서는 이렇게 해야하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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