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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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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7:09

 

너를 나의 편에 서게 하마



[스포일러 있음]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미국에서 여자로서는 두번째로 대법관이 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젊은시절을 다룬다. 루스(펠리시티 존스) 는 1950년대 후반에 여자도 학생으로 들이자고 결정내린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아홉명의 여학생 중 하나다. 그녀는 하버드에 재학하면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도, 졸업 후 로펌에 이력서를 돌릴 때도 끊임없는 성차별을 겪는다. 결국 변호사의 꿈을 잠시 접고 럿거스 대학에서 법과 양성평등을 가르치는 교수로 살아간다. 시간은 흘러 1970년대의 어느 날. 루스는 남편 마티 (아미 해머) 가 건넨 신문기사를 읽는다. 연로한 어머니를 모셔왔던 소시민 찰스 모리츠 (크리스 멀키) 가 남자라는 이유로 보육비 세금 공제 신청을 거부당했다는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법에서 남자는 아내가 중증 장애를 앓고 있거나, 사별했거나, 이혼해야만 공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성별에 기초하여' 라는 말로 성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미국사회. 그로 인해 노모를 모시는 일을 여자 뿐 아니라 남자, '비혼 남자' 도 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대학교수 시절에 법적으로 180개 가까운 성차별 조항이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 바 있던 루스는 찰스 모리츠를 통해 법에 만연한 차별을 없앨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녀는 무료로 변호를 자청하고 재판을 준비한다.



이 작품 개봉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반가웠던 부분은 미미 레더 감독 신작이라는 점에서였다. 유년시절만 해도 극장가에서 자주 거론되던 연출자였는데 다시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냉정히 보면 미미 레더는 스티븐 스필버그로부터 발탁됐다는 점이 컸을 뿐 작품 자체는 어중간하게 뽑아내던 감독이다. 그러나 그 어중간함이 끊임없이 의외의 위치를 점하는 개성있는 감독으로 보이게 했고, 흥미로운 생각거리들을 제공했다. 요컨대 극장용 데뷔작인 <피스메이커> 는 임무완수에 대한 쾌감 이전에 이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98년작인 <딥 임팩트> 는 하나라도 더 때려부셔야 하는 재난 블록버스터지만 인물들이 만든 잔잔한 드라마가 높은 비중으로 등장했다. 신작 <세상을 바꾼 변호인>도 그렇다. 작품을 보면 처음에는 법정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기물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뚜렷하게 몰두하지 않고 설렁설렁 다룬다.

 


요컨대 작품에서는 실제 역사 속 네 가지 판례들이 언급된다. 백인학교와 흑인학교를 분리시키는 행위가 합법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대표예시가 된 '플레시 대 퍼거슨',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례. 살인사건이었지만 여자를 배심원 참여를 제한시키는 것이 차별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자리가 된 '호이트 대 플로리다' 판례. 여자라는 이유로 변호사 개업 면허가 거부된 것이 적절한지를 묻는 계기가 된 '브래드웰 대 일리노이 주' 판례가 그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이야기 진행 중에 위 판례들을 인용 차원에서 속사포처럼 언급한다. 그런데 평상시 판례에 관심갖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나. 다른 나라 사례라면 더더욱.


호이트 대 플로리다 판례는 해당 재판에서 살인자 그웬돌린 호이트를 변호했던 도로시 캐니언 (캐시 베이츠) 배역이 직접 등장하니까 그나마 기억되는 편이다. 그러나 나머지 판례들은 보면서 메모장에 적어두지 않으면 쫓아가기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판례 언급 뿐 아니라 법률 용어들과 재판 전략들도 그런 식으로 나온다. 기본 교양이라고 여겨서일까. 아니면 감독이 일반 관객에 대한 배려 없이 연출한 탓일까. 알 수 없다. 재판 장면 역시 끝나기 20분 전쯤에 등장해서 그제야 법정물답게 변하는데, 주제 하나를 두고 양측 변호인단이 서로를 압도하려 논리를 주장하거나 고민하는 재판 특유의 재미가 상실되어 있다. 그런 연출들이 재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유발시키는 힘인데, <세상을 바꾼 변호인> 속 법정 장면은 거의 '루스와 판사들과의 대담' 에 가깝다. 긴즈버그의 성장과정과 위기 역시 상당히 간략히 묘사됐다.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남편 마티가 고환암 판정을 받는 위기가 닥치는데, 그는 어느 순간 완치되어 있고 10여년의 시간이 자막 하나로 훌쩍 흘러가는 식이다. 일반적인 기대치를 만족시킬 생각이 없는 작품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원제가 바로 '성별에 기초하여' 인 'On The Basis Of Sex' 라는 점이다. 작품은 성차별을 합법화했던 시대적 풍경을 담는 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


 


시대배경으로 1970년대가 되어서야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유도 그런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자기 가치에 따라 사회가 변화되길 원했던 사람들이 승산 있는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방아쇠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당겼지만, 작품은 그녀를 선구자이자 슈퍼우먼으로 띄우는 데는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보다 훨씬 전부터 성차별의 부당함을 외친 도로시 캐니언을 비롯해 변화를 일으키려 했던 다양한 나이대와 성별, 집단 속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어서다. 아이러니 하지만, 초반부에서 루스를 깔봤던 어윈 그리스월드 (샘 워터스톤) 하버드 로스쿨 학과장조차 학교에 여성을 입학시키는 제도를 만들고자 10년간 노력했다는 일화가 소개될 정도다. 작품은 루스의 생각과 행동이 동조를 받는 만큼 다른 일을 망칠 수 있다는 반론도 듣게 하며 의견이 교환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녀의 딸인 제인 (케일리 스패니) 과 남편 마티의 비중도 큰 편이며, 어째서 여자가 소수자인지를 되물으며 흑인인권에 더 신경쓰자고 외치는 시민자유연맹의 멜 울프 (저스틴 서룩스) 조차 의견을 개진할 정도다.


 

그는 변호인 경험이 처음인 루스를 위해 모의 재판을 치뤄주다가 재판장들 앞에서 좀 웃어줄 수 없겠냐고 하는데, 이런 모습들은 자칫 그녀를 우습게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 정도 충고는 나쁘게 그리지 않는다. 남자 중심적인 시대에서 여자가 발언할 때 마주하거나 대처해야 할 상황일 수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재판을 치뤄본 사람으로서 불리한 상황을 방지시키는 전략적 조언이다. 그녀는 멜의 조언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너무 커서 타인에게 공격적이었던 처음보다는 누그러진 태도로 재판에 임한다. 그녀를 위한 재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혼 남자인 찰스 모리츠를 위한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판사들 성질 까칠하거나 더럽기는 어느 국가나 비슷하며 그들에게 거부감을 안겨주지 않는 일은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필수 전략이다. 이렇게 루스는 끊임없이 타인과 의견을 공유하고 충돌하면서 점점 단단해지며 말미에 이르러 진짜 프로페셔널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운동가가 아니라, 결정권자들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이를 활용해 그들을 설득하는 변호인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물론 이런 연출방식에 대해 실망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루스가 속 시원한 발언을 쏟아내며 주체적으로 성차별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 중에는 남자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녀 또한 헤테로적 사랑을 하고 그 묘사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등등. 불만족스러워 하는 반응이 있더라. 보통 그런 부분들을 상쇄시키려면 작품 속 여자 캐릭터들을 커플링 맺어주거나, 남자가 개입할 여지를 철저히 배제하고 그녀들이 다 하는 식으로 대리만족 시키면 될 일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그런 장르가 아니며 시대나 사람 또한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잘 안다.

 


* 사실 위의 불만들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는데, 처음에 배급사인 CGV 아트하우스가 괴랄맞게 홍보해서 욕 먹은 적이 있다. 포스터 보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아니라 어디 패션계 종사자처럼 보일 정도다.


포스터 속 루스는 마지막 찰스 모리츠 재판 출석할 때의 의상을 입고 있다. 근데 사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시절에 회갈색 양복 입고 재난 지역 기자회견 갔다가 언론에 보험 팔러 왔냐며 집중포화를 맞아 공식적으로 해명 해야했던 것처럼, 정치권이나 검경, 법원 쪽에서는 옷 잘입는게 중요하다. 법원의 경우에는 재판할 때 피고인, 변호인이 옷을 단정하게 잘 입는 것도 판결에 일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니까 홍보할 때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는데, 아마 CGV 아트하우스는 작품 본편을 안 봤거나 재판에 대해 잘 모르나 보다. 하필 마지막 재판 장면 의상을 입혀놓은 포스터에다가 '포멀한 날' 이라 적어놨으니. 그냥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외적으로 꾸미는 데만 관심있는 인물로 생각하는 건가, 편견이다 같은 식으로 욕 먹을 법 하다. *

 


마지막 재판 장면도 그런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처음 시작될 때는 재판장과 변호인 사이 거리감과 높이 차이가 눈에 보인다. 루스와 마티는 네 수문장을 물리치고 거대한 성벽을 열어야 하는 것만 같다. 그러다 점점 네 판사들과 루스 간의 클로즈 업 샷으로 바뀌어 가면서 어느새 재판정의 거리감과 높이 차이는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녀가 말하는 만큼 상대방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 들어보면 꽤 일리있는 의견들이다. 루스는 그들의 법 철학적 바탕을 존중하면서 권유를 하며 판사들의 생각을 바꿔나간다.


그런 점에서 <세상을 바꾼 변호인> 은 70년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동시대에도 유의미할 생각들을 남긴다. 마지막부분에서 실제 언급이 등장하지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자신의 "성을 우대해 달라는게 아니다. 그저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 는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양성 평등 지지자인 사라 그림케의 말을 꾸준히 인용해왔다. 필요한 것은 차별을 없애기 위한 '설득' 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설득 대신 차별당하는 자기 처지를 무기로 삼아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품은 그렇게 변화를 요구하거나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에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라는 예시를 보여주며 현재를 점검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딸 제인과 "당신이 해냈다" 고 말하는 남편 마티에게 "우리가 해냈어" 라고 하는 루스의 마지막 모습이 인상적인 이유다. 작품은 긴즈버그를 통해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전한다. 10여년 만에 돌아온 미미 레더 감독은 이번에도 관객을 만족시켜야 하는 상업적 작품들을 감독했으면서 살짝 비껴 의외의 지점을 짚었다. 그 꾸준한 비껴감이 가슴을, 혹은 머리를 친다.



p.s.


1) 새삼 세금 관련 법이 미국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요리조리 혐의를 잘 빠져나가던 갱스터 알 카포네에게 8년간 감빵생활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도 탈세 혐의 였으니... <세상을 바꾼 변호인>도 세금 공제를 시작으로 규모가 스펙터클하게 되지 않았나. 세금에 대한 법처리를 굉장히 가볍게 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다 보니 언제나 신기하게 보인다.


2) 리뷰 부제는 강영란의 책 <나를 너희 편에 서게 하라> 를 변형했다. 내용은 별 관련없다.



3) 실제 일화였을테니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아미 해머가 연기하는 마틴 긴즈버그가 고환암으로 쓰러져 펠리시티 존스에게 간호를 받아야 하는 설정이 재밌었다. 연기자가 아미 해머라서인지 '보호해주고픈 모성 본능 불러 일으키고 먹여 살리고픈 거대 머슬남' 스러운 판타지가 가미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내 눈에는 신장 2m짜리 심영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망치 씨는 저 덩치에도 보호본능 불러 일으키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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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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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6:19:46

요즘 페미니즘 영화나 페미니스트적 요소가 들어가 있는 영화는 뭔가 사이다적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하고 남자들은 죄다 나쁘고 찌질한 사람으로 그려놨던데 이 영화는 꽤 현실적이고 담담하게 그린 모양이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1
2019-06-27 17:32:36

2016년 <고스트 버스터즈>가 그랬고

2019년 <걸캅스>가 그랬죠.

WR
2019-06-27 19:52:13

<걸캅스>는 지지난주 토요일에 마침내 보게 됐는데..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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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20:49:39

<걸캅스>에 대한 홍준호 님의 신랄한 리뷰도 기대됩니다!

WR
2019-06-28 21:11:49

어.. 어으음...

WR
2019-06-27 19:45:04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MC후니 님. 말씀하신 그런 남자 캐릭터들도 갈등유발을 위해 나오긴 합니다만, 억지를 부려서 악인이라기 보다는 당시 시대에 만연해있던 의식을 그려내기 위한 용도라서인지 이해가 되더군요.

1
2019-06-27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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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WR
2019-06-27 19:29:38

하지만 탄창 둘 다 문제가 있었다면..

 

여튼 아미 해머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거인같은 사람이 돌봐달라고 누워있는데 보고 있으니 당장 죽 끓여서 먹여주고 싶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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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2 12:09:24

그래도 나중에 아들을 낳았지요^^

1
2019-06-27 19:19:56

영화적으로 몇몇 아쉬움이 있었지만 중점 사건에 집중해서 비교적 자세히 묘파해낸 연출은 영화내내 생각할 거리를 주며 집중할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얼마전 본 다큐 <RBG>의 장면들이 상기되면서 상호 중첩되는 느낌이 있어서 더 집중이 되더군요.

WR
2019-06-27 19:53:09

안 그래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도 봤었어야 하는데 그걸 못 봤습니다. 그 작품은 긴즈버그의 대법관 시기도 다루고 있으니까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프리퀄에 해당하는 걸까 생각하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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