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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알라딘 (Aladdin)(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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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6:32

 

비선실세 하킴


[스포일러 있음] 

몇 주 전에 가이 리치 감독의 <알라딘> 을 막차 탔다. 이상하게 이 작품은 보기 싫었다. 아무래도 빌 콘돈 감독의 <미녀와 야수>, 존 파브로 감독의 <정글 북>으로 인해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에 가졌던 기대가 사라진 탓이 컸다. 그럼에도 <알라딘>은 흥미를 갖게 했다. 관객수만 해도 이미 천만을 넘긴 상태였고 <라이온 킹> 에게 자리를 내줬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작품 상영관까지 잡아먹으면서 국내 박스 오피스 역주행 중이었다. 막상 보니 명징하게 직조된 오락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작품 자체도 볼만하다. 애니메이션을 샷 바이 샷 수준으로 섬뜩하게 의식하려 들지도 않고, 뮤지컬을 하다 마는 것처럼 어설프게 보여주지 않는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신데렐라>와 더불어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한 모델로 (디즈니 내부에서) 자주 거론될 듯하다. 물론 백인 배우들을 최대한 줄이고도 흥행 성공과 관객의 사랑을 얻었으니 <알라딘> 쪽이 의의는 더 크겠다.


 

지니를 연기한 윌 스미스의 매력이 엄청나다. 뮤지컬 장면에서는 거의 <벨 에어의 프레시 프린스> 시절이 연상되며, 그가 등장할 때마다 작품 전체를 본인 콘서트장마냥 장악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실제로 가수 커리어도 대단한 배우지만 진지한 연기행보를 보여 왔으면서도 계속 젠체하지 않은 덕분에 더 잘 어울려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그 외에는 감독이 가이 리치라서일까. 자파와 알라딘으로 대표되는 뒷골목 인생의 정서를 쓸데없이 와닿게 그린 점이 눈에 띈다. 감독의 초기 경력을 탄탄하게 다진 작품들이 모두 물질적 이익과 성공에 집착하는 인물들이 모여서 왁자지껄 지질한 소동을 일으키는 범죄 코미디물이었다. 디즈니 작품에까지 일부 그 영향이 미쳐 있다. 여기서는 한층 진지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래서인지 마르완 켄자리 배우가 연기한 악역 자파가 은근히 마음을 끈다. 본인이 굳이 불쌍한 척 티내진 않지만 2인자, 순수 혈통 같은 단어 앞에 한 없이 열등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줘서 측은하고 인간적인 악역처럼 느껴진다. 하필 실사판에서 아그라바 왕국의 술탄을 맡은 배우도 <슬램덩크> 안 감독님 스타일이 아니라 거의 아미르 칸 같은 인상이라 자파가 한층 더 측은하게 보인다. 술탄한테 카리스마적인 면에서 밀리는 탓이다. 덕분에 자파가 그에게 최면을 걸어 자기 통제권 아래 두려고 할 때, 저저 나쁜놈 하는게 아니라 제발 성공하길 바라게 된다. '그래. 네가 그거라도 성공해야지. 못 하면 불쌍해서 어떡하니' 마음이다. 자파는 원작에서도 공주마음을 얻으려거든 왕자부터 돼야 하지 않겠냐는 대사 등을 통해 본의 아니게 알라딘에게 성공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실사판에서는 알라딘보다 더 현실적인 씁쓸함을 제공한다. 슬픈 악역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로 <알라딘>이 명징하게 직조됐다고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런 표현을 쓴 것은 현재 트렌드를 잘 반영하겠다는 듯 본편에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을 크게 한 스푼 퍼다 넣었기 때문이다. 92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판에서 주로 등장했던 아그라바 왕국 여자들은 주로 춤추는 무희 정도였다. 실사판은 무희 뿐 아니라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여자들도 스쳐가듯 보여준다. 과거에 비해 바뀐 모습이 보인다. 아그라바 공주 자스민도 그런 점에서 변했다. 단독 뮤지컬 넘버인 'Speechless' 가 생겼고, 애니메이션 판과 다르게 결혼을 비롯해 자기 입지에 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애니메이션 판 자스민도 꽤 적극적 성격이었지만, 철저하게 사랑을 찾는 공주로서의 측면에 맞춰져 있었다. 실사판에서는 좀 더 야망이 있다. 남자만 술탄이 될 수 있다는 관념에 사로잡힌 아버지가 강제 결혼을 추진하자 여자가 못 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며 항의하는 모습에서 확실히 다르다. 그녀가 부르는 'Speechless' 는 여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차별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곡으로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 원작 애니메이션 속 자스민 


그러나 실사판 자스민은 변화된 시대상을 대하는 현 디즈니의 얕은 인식태도를 증명하는 예시 쪽에 가깝기도 하다. 자기도 술탄 자격 있다고 아버지에게 대들지만, 정작 왕국의 수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력이나 통솔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자파에게 속지 않거나 '알리 왕자' 로 변장한 알라딘을 의심하는 행동이야 여주인공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그 외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스민의 '의도만' 돋보이는 경우가 많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그녀는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와 답답한 궁중생활에 질려 몰래 탈출했지만, 실사판에서는 과잉보호에 질린데다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확인차 탈출한다. 의도는 발전했지만 정작 그녀가 취하는 행동이 애니메이션 판과 차이가 없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멋대로 좌판에서 파는 사과를 집어다 굶는 애들에게 나눠준 후 아무렇지 않게 다른 곳으로 가다 붙들린다. 그러자 술탄에게 말해서 돈을 드리겠다고도 말한다. 애니메이션 속 자스민은 <로마의 휴일> 마냥 막 세상으로 나온 공주같은 느낌이라 이런 행동이 설득된다. 실사판은 '자기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 에 멋대로 빵을 나눠주고는, 경악하는 빵장수 앞에서 나는 돈이 없다며 배째라식 발언을 한다. 저 행동을 하고 궁으로 돌아와 아버지로부터 결혼을 강요받자 끊임없이 책 등을 읽으며 스스로 제왕학 공부를 했는데 왜 술탄이 못 되냐며 호소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영업자 면전에서 엿 먹이고 시장경제를 지하경제로 만들뻔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그녀가 읽은 책들에는 '물건을 사려거든 돈을 줘야 한다' 같은 문장이 없었나보다. 차라리 걸치고 있는 다른 장신구나 귀한 옷감이라도 대신 내주는 식의 대체 장면이라도 있었으면 그 자기주장이 웃기게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트루 라이즈> 중에서 

 


이외에 작품이 자스민의 당당함을 드러내겠다며 보여주는 대목은 중반부 연회 장면의 절도 있는 춤사위와 여유로운 표정 정도다. 실사판 <알라딘>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트루 라이즈> 에서 제이미 리 커티스가 속옷만 입고 춤 추다가 어느새 자기 육체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압도해 버리는 인식에서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트루 라이즈>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이미 리 커티스가 모르고 있었던 자기 매력을 자각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장면으로서 효과적이다. 그런데 <알라딘> 속 자스민은 다르지 않은가. 그녀는 제이미 리 커티스처럼 자아 찾는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자기 자존감이 넘치고 스스로 술탄감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만큼 후반부에 일차적으로 닥치는 왕국의 위기를 그녀가 해결하는 장면이 설득돼야 한다. 작품이 1~2분 정도라도 할애해서 자스민이 왕실 신하들로 충심을 얻었거나,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을 보여줬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런 장면을 삽입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텐데, 없다.

 


그래서 자스민이 후반부에 닥친 위기를 돌파하려고 왕실 근위대장 하킴에게 자파와 자신 중에서 선택하라고 외치는 장면이 뜬금없다. 이 때 자파 말을 따르고 있는 하킴에게 다짜고짜 너는 어릴 적부터 왕실에서 일을 했다고 소리치며 자기 권위에 관해 떠드는 것이다. 'Speechless' 는 능력이 있는데 이를 애써 외면하는 현실에 관해 분노를 터뜨리고, 여기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현을 위해 사용된 곡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치력이 아니라 혈통으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위기를 이런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열심히 그 노래 불렀나 싶어 보는 사람 괴롭게 한다. 보고 있으면 차라리 하킴이 차기 술탄으로서 더 자격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아그라바의 술탄과 자스민 공주, 자파까지 모두 그가 필요하다며 찾는데다 어느 쪽이 정의인지에 대한 판정도 하킴이 하지 않나. 하킴 입장에서 보면 그 상황에서 자스민을 선택했을 때 자파에게 험한 꼴을 당할 가능성도 컸을텐데 과감히 결단한다. 하킴 만세. 물론 작품은 여전히 자스민 띄워주기에 앞장서기 때문에 소용없다. 말미에서 아버지로부터 법 개정 가능하다는 확답을 얻어내어 그녀를 기어이 술탄 자리에 등극시킨다.

 


본편에서 보여진 부분만 따져보자면 결국 자스민은 술탄이 되기엔 영 능력 미달인데 왕족 혈통이라는 이유로 특권만 가져간 꼴이다. 작품이 선택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페미니즘의 역기능에 대해 고증할 의도였다면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과연 실사판 자스민 캐릭터를 두고 호평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불만족스러운 반응이 나왔어야 한다고 보는데, 시대에 걸맞는 변화라면서 호의적인 추세다. 뭐가 그리 만족스러웠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디즈니 사가 마법을 부리는 솜씨는 아직도 여전하다.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예시로 들기에는 너무 상태가 심각한 캐릭터로도 기어이 호응을 얻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 기업가와 매춘부의 로맨스를 미녀와 야수 이야기 식 화법으로 기어이 설득해낸 작품을 만들었을 때 이후로 가장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어떻게든 그 간극을 메우는 디즈니의 불가사의함 앞에는 어째 이런저런 얘기해도 다 무쓸모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난 생각하기를 포기하련다. 프린스 알리 패뷸러스 히 알리 아바브와 히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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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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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10:03:11

수려한 외모와 괜찮은 노래 실력, 노출도 낮은 옷 밖에 보여준 적 없고

화폐 경제조차 이해 못하는데 도대체 무슨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모르겠던데

페미니즘을 뭘 어떻게 잘 접목시켰는지 이해가 안 가는 설정이었습니다. 

그나마 거지가 술탄이 되거나 공주가 술탄이 되거나 마찬가지로 환타스틱(?)한 결말이라

재밌게 보는데는 별 문제 없었습니다만. 

WR
2019-09-16 14:31:26

뭐, 저도 이해가 안 갔는데 그냥 중간에 페미니즘을 부르짖는 듯한 노래 한 곡 맛깔나게 뽑아줬다고 '잘 접목됐다!' 생각하는 반응이 나온게 아닐까 싶습니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디즈니가 그런 쪽으로는 참 선수같아요. 사회적 이슈들을 전시해주는 것만으로도 마치 무언가 향상됐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죠.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 불가사의함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매번 아무것도 안 하지만 뭔가 많이 한 것 같은 디즈니의 술수에 감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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