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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엑시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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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6:19

 

니맛도 내맛도 없다



[스포 있음]

8월 초 어머니 생신날 오리 백숙 사 드리고 극장에 모시고 가서 <엑시트>를 관람했다. 난 가족과 영화를 보는 경험이 너무 싫다. 처음 세운 계획은 <기생충> 막차를 타는 것이었다. 부모님께 그 작품의 끔찍함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서 앞으로 영화 보자는 소리 절대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 작품이 극장가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이걸 보고 말았다. <엑시트>는 원래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으로 선정되어 독립영화로 완성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이상근 감독이 과거 류승완 감독 연출부 출신이라서인지 결국 스승의 영화사인 외유내강에서 장편 데뷔를 하게 됐다. 외유내강은 류승완 연출작을 주로 제작하면서 다른 감독 작품을 한두편씩 맡는 편이었지만, 올 해는 다른 감독들의 <사바하>와 <엑시트>를 먼저 내놓으며 영화제작사로서 본격적인 욕심을 내고 있다. 전형적인 재난물로 예상됐던 <엑시트>는 시사회에서부터 후한 평가를 받았고 정식 개봉 후에도 성공적으로 호응을 이어갔다.

 


<엑시트> 는 '류승완 계열' 강점인 탄탄한 취재, 관찰을 통해 한국사회 속 풍경과 구성원들을 재난과 엮어서 바라본다. 초반부터 고두심과 박인환이 연기하는 부모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으로 TV 리모콘 사수 못하는 아버지, TV 조선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메모하는 어머니로 첫등장 시키는 장면은 탁월했다. 일일드라마들도 놓치고 있는 디테일로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올 줄 안다. 그렇게 관객들과 교감하고 이 세상이 젊은이들 살기에 얼마나 좆같은지를 일상 속 풍경에서 찾아다 보여주는 솜씨도 뛰어나다. 전문적인 사회경험에서 찾지 않기 때문에 보는 동안 나 젊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꼰대질 하기도 힘들다. 가족관계에서 대화 물꼬를 트거나 걱정하는 마음에서 뱉는 말이 듣는 사람에게 참혹한 기분을 안길 수도 있음을, 거의 눈과 귀에 쑤셔 박듯 직접화법으로 전달한다. 덕분에 재취직을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부모님 극장에 모시고 전반부를 보는 경험은 정말 몸서리가 처지는 수준이었다. 근 5~6년간 한국사회 속 청년의 풍경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엑시트> 초반부를 꼽겠다. '우리 상황이 곧 재난' 이라는 대사, 유독가스가 테러가 발생했는데도 익숙하다는 듯 흡연실에서 담배 피우며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직장인들을 찍은 숏은 짤막하지만 강렬하다. 개인적으로 느꼈던 괴로움과는 별개로 <엑시트>가 캐릭터를 만들고 시대를 묘사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로 고민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디테일과 분위기 조성은 컨벤션 홀에 고립된 사람들이 구조되는 지점까지만 빛을 발한다. 의주의 도움을 받아서 용남이 다시 클라이밍을 하는 장면은 묘한 긴장감과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취업은 커녕 사는데도 별 쓸모 없던 암벽 타기 기술을 도심 건물에서 활용해야 하는 순간이다. 유독가스와 더불어 '재난' 으로 명명된 막막한 현실을 살고 있던 용남과 의주의 처지는 닥쳐온 위기를 더욱 커 보이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덕분에 액션 장면들에 생사를 넘나드는 위태로움이 더해진다. 작품은 전반부에서 코미디와 재난 액션, 드라마를 절묘하게 배합하고 있었다. 그런데 용남과 의주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후반부가 시작되자 놀라울 정도로 힘이 빠진다. 헬기가 고층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먼저 발견하고 구조하는 풍경에서 보여주는 씁쓸함, 용남과 의주가 학원에 고립된 아이들을 구하려 노력하는 장면처럼 인상적인 대목이 몇몇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전반부보다 쳐진다.

 


연출을 맡은 이상근 감독은 이런 발언을 했다. 재난 영화 특유의 전형적인 장치를 기대했겠지만, 이미 많은 영화를 통해 피로도가 높아졌다고 봤기에 가급적 그런 부분들을 배제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엑시트>는 재난물에서 나올법한 장면들이 거의 없다. 유독가스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를 찍은 숏도 없다시피 하고, 테러를 저지른 악역의 사연이나 신파도 끼어들지 않는다. 덜어내려는 시도를 보고 참신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작품은 그로 인해 공백이 생기는 부분들을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관해서 따로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후반부를 용남과 의주가 가스를 피해 달리는 전개로 진행하면서 병원으로 옮겨진 전반부 등장인물들 상당수는 비중이 없어진다. 용남 아버지 일행의 이야기가 서브 스토리로 진행되긴 한다. 유독가스가 퍼지는 도시 건너편에서 발만 동동 구르거나 사건을 바라보는 역할만 할 뿐 그닥 특별한 전개가 없다. 후반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드론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지만, 이를 제외하면 용남 아버지 이야기는 여러번 발만 구르는 동일한 상황의 반복이다. 박인환 배우의 연기력에 의존하려 했던 것 같은데, 극영화에서 현실적 행동방식을 고수하는 행위는 작품을 늘어지게 만든다.

 


작품 속 재난인 유독가스 관련 묘사도 비슷하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여주지 않는데는 성공했지만, 가스가 지닌 위협적인 존재감도 약화됐다. 후반부 설정을 생각하면 유독가스가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미세먼지 유발용 고등어 굽는 연기처럼 보인다. 가스 전용 테마 음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서 별다른 긴장감도 없다. 위기가 위기처럼 보이지 않는 탓에 전반부에서는 강점이었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디테일이 후반부에서 인정투쟁으로 변질된다. 요컨대 후반부에 유독가스가 갈비집 환풍구를 통해 올라오는 기발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들은 환풍구로 올라온 연기를 보게 되는데 잠시 당황해서 허둥지둥 할 뿐 적당히 위기를 넘긴다. 작품은 한국적인 요소들을 통해 재난이 확장된다는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정작 서스펜스나 스릴을 연출하는 데는 무심하다. 게다가 후반부는 건물을 넘나드는 장면 등에서 상대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이나 세트 활용도가 많아지는데, 시각적으로 인위적인 티가 많이 나서 헛웃음이 나온다. 실제 건물에서 찍은 장면조차 그렇게 보일 정도인데, 마치 <지구 중심의 헤라클레스> 같은 마리오 바바 감독작 감상하는 기분이다.


<엑시트> 후반부를 보며 나는 무엇을 기대했나 생각해 봤다. 장르는 재난물이요,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것은 유독가스다. 주인공들을 압박하는 총체적인 알레고리로 승화시키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그걸 납득시키려면 기본적으로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감을 유지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전반부는 테러가 막 발생하고 나서 가스로 고통받는 사람들, 도시가 아수라장이 되는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에 공포와 위력이 바로 와닿는다. 그런데 후반부 쯤 되면 가스가 위험요소였는지 가물가물 해진다. 정작 용남과 의주가 가스를 피해 달리는 전개에 온 힘을 쏟는 것이 후반부 아닌가. 가스가 지닌 위협적인 면모를 재부각 시켰어야 했다. 그런데 작품은 가스의 존재감이 약해지는 일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자꾸 사회문제를 반영한 텍스트에 관심을 쏟는다. 드론이 등장해 용남과 의주를 카메라로 찍고, BJ들이 이를 보고 생중계하는 장면은 그런 연출의 정점이다. 처음에는 아들과 의주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려는 용남 아버지의 부탁으로 드론이 활약했지만, 곧 재난 위기에 처한 사람들조차 컨텐츠화 해서 즐기고 있는 한국사회를 보여주는 용도가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유독가스만큼 섬뜩한 반영이지만, 작품의 기본적인 상황설정에 더 충실했어야 하는 것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중요하고 두려운 건 유독가스잖아. CJ ENM 에서 다이아 TV를 운영 중인만큼, 홍보 차원에서 BJ들을 보여주라며 기업으로부터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해당 장면을 연출했다면 감독님은 헛기침을 세 번 해 주시기 바란다. ...할 리가 없지.


 


* 마리오 바바 감독의 <지구 중심의 헤라클레스> 에서 주인공들이 줄에 매달려 이동하는 장면 


<엑시트>는 재난 장면을 매끄럽게 다듬기 보다, 한국사회를 고증하는 텍스트를 많이 담고 있다고 인증하는 쪽에 더 많은 관심과 집중을 하고 있다. 덕분에 작품 후반부는 영상미는 돈 많이 들인 마리오 바바 감독 연출작처럼 보이지만 바바처럼 '영화' 를 보고 있다는 느낌은 주지 못한다. 마리오 바바는 저예산의 한계 속에서도 본래 의도했던 상상력을 전달하려 애썼다. 외적으로는 어설프더라도 하나의 미학으로 관객을 납득시켰다. 그에 반해 <엑시트>는 주객전도된 느낌이다. 작품이 스스로 생각 많이 하고 만들었다는 점을 내세우려고 텍스트를 부각할 때,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주인공들의 절박한 질주는 점점 어설픈 놀이처럼 보인다. 전반부에서 용남이 처음 가족을 구하기 위해 컨벤션 룸 건물을 올라갔을 때 보여줬던 긴장감 넘치는 연출은 모두 사라진 뒤다. 후반부 하일라이트인 용남과 의주가 목숨을 걸고 멀리 있는 고층빌딩을 향해 줄을 타는 장면은 스릴 넘치지도, 웃기지도 않는다. '우스운' 수준이다. 그렇게 작품은 니 맛도 내 맛도 없어진다.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 를 보는 동안 자꾸 '<부당거래> 이후 류승완 감독작들' 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는 <부당거래>를 시작으로 류승완 감독이 갑자기 정의에 눈 뜨면서 어울리지 않는 괴이한 행보를 지속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상근 감독도 작품을 연출하면서 그 영향 아래에 들어가 있다. 물론 외유내강 영화사와 <엑시트>가 보여준 시도는 한국영화계 입장에서 긍정적인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단과 관객이 함께 성원을 보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전반부에서 좋은 감각을 유지하던 작품이 후반부에서 고유한 영화적 미학을 포기한 채, 사회와 관계 있는 작품으로 보이려고 인정투쟁 하는데 신경쓴다면 이를 좋은 영화로 규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평단도 작품이 올바른 텍스트를 보여주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띄워주는 듯 한데, 내게 <엑시트>는 처음과 달리 결말에 이르렀을 때 더이상의 영화적 흥분도, 재미도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이다. 그저 '현실적이다', '교육적이었다' 고 생각하게 된다. 이만큼 취재하고 디테일을 삽입했다는 자의식을 보고 싶진 않았다. 난 영화를 보고 싶었다.




p.s.


1)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이런 스타일. 그러니까 장르에 충실하면서 배경으로 한국 사회 돌아가는 것도 보이는 작품은 아직까지 장훈 감독의 <의형제> 쪽이 더 나아보인다.



2) 임윤아 배우 연기는 좋았다. 배우로서도 10년 짬밥인데 지금도 헝그리한 느낌을 잘 살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우는 연기가 그랬다. 아이돌 연습생 시절의 처절한 기억, <너는 내 운명> 찍을 때 골수가 무한생성되는 말도 안 되는 대본을 읽고 느꼈을 울분, 그럼에도 드라마 흥행작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가졌을 처절한 자괴감. 그런 것을 끌어왔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엑시트>에서 임윤아의 우는 연기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자꾸 납뜩이 '쪼'가 보여서 거슬렸던 조정석 배우보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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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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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7:08:33

저도 사실 일그만두고 재취업 준비중이라 이 영화 가족들이랑 볼까하다가 설정때문에 그냥 친구랑 봤습니다 하하
아무리 그래도 재난영화인데 도시전체를 뒤덮은 유독가스의 위협이 전반부에 비해 그리 압도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안나와서 좀 현실감이 떨어지긴했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용남 의주에게만 집중해서 이야기나 러닝타임이나 컴팩트하게 쳐낸게 이 영화의 흥행요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WR
2019-09-16 15:02:17

아앗.. MC후니 님도 그러시군요. 그래도 MC후니 님께서는 저보다는 필시 쓸만한 일을 훨씬 많이 하셨을 것이니 재취업에 아무 문제 없으실 겁니다. 건투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보시는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셨습니다. 가족과 함께 보니까 제게는 코스믹 호러 수준이었습니다.

보는 동안 요즘 영화계 트렌드에 대해 좀 걱정이 되더군요. 자기네들 나름대로 착한 영화를 만들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더 잘 만들 수 있었던 영화를 의도적으로 못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영화 안에서 좋게 만들고 있다고 해봐야 그건 비현실적 세계고, 잘 하려면 현실에서 스태프들 대우나 더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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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3 09:11:01

 

개인적으로는 '혹시나' 하고 갔다가 '역시나' 했던 예상의 범주를 맴돈 '그저 그런 영화 중의 하나'였습니다.

 

WR
2019-09-16 15:03:58

즐거움 님도 그러셨군요. 저는 초반부는 재밌게 봤었기 때문에 즐거움 님보다 실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중후반부는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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