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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블랙머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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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4:57

 

검사는 겁이 많아서 검사



[스포일러 있음]


양민혁 (조진웅) 은 서울지검에서 ‘막프로’ 라는 별명 아래 물불 안 가리는 수사를 펼치기로 유명한 검사. 어느날 그가 성추행 누명을 쓴다. 수사를 담당했던 피의자 박수경 (이나라) 이 사망했는데 그로부터 성추행을 당해 수치심을 느껴 죽었다는 것이다. 민혁은 누명을 벗으려 조사하던 중 박수경이 대한은행 직원이며 자산가치 70조원에 이르는 이 곳이 1조 7천억에 매각된 금융사기와 연관된 사실을 알게 된다. 피의자가 타살됐다고 의심한 양민혁은 매각 진행과 함께 해고된 대한은행 노동자들을 돕는 인권변호사 서권영 (최덕문) 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김나리 (이하늬) 변호사와도 첫 만남을 가진다. 그녀는 국내 최대 로펌의 국제 통상 전문 변호사이자 대한은행을 사들이려는 미국 스타펀드 측의 법률대리인. 민혁은 누명을 벗기 위해 대척점에 서 있는 나리를 설득하려 한다.

 


정지영 감독은 80년대부터 활동한 한국영화 감독들 중 몇 안 되는 현역이다. 희대의 작품 <까>를 만들고 대차게 까인 후, 오랜 공백 끝에 연출한 <부러진 화살>은 심각하고 도발적인 소재였지만 유머와 재미를 잃지 않아 꽤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이후 감독은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연출 행보를 보였다. 90년대 초에 남한 최초로 빨치산의 행적을 대규모로 면밀하게 다룬 <남부군>, 베트남전 후유증을 그린 <하얀 전쟁> 을 만든 역량을 살려 정치 / 사회파 영화인으로 입지를 굳히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감독에게는 스캔들 메이커적 기질도 있었는데,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블랙잭> 처럼 장르적 세련미를 부각한 연출작들이 표절 논란에 시달렸던 점을 생각하면 특유의 기질과 정치 사회 관련 소재들이 가장 상성이 잘 맞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감독의 복귀 후 연출작들이 사회파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는데 있어 다소 어긋났다는 인상을 준 점이다. <부러진 화살>은 사법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려고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들을 미화하거나 사건을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았고, <남영동 1985> 는 야만의 시대를 표현하려는 의도보다 고문 호러물 장르로서 더 매력적이었다. 2010년대 시점에서 보면 감독의 두 연출작들은 정치물로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체제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신작 <블랙머니>는 어떨까. 작품은 한국사회에서 그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덜 부각된 론스타 게이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 IMF 위기를 기점으로 한국에 외국 자본이 유입됐고 국내 자산을 헐값에 산 후 빠져나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훗날 외국 자본은 페이퍼 컴퍼니였고, 한국인들이 외국인인척 설립했다는 사실, 이명박 당시 정부 관료들도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론스타 게이트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재밌게도, 정지영 감독은 직접 론스타 게이트를 다뤘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고 발언했다. 아마 <블랙머니>가 소재에 매몰되어 받아들여질까 걱정 됐던 모양이다. 중심소재는 분명 론스타 게이트지만 작품이 그 부분만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은 론스타 게이트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박멸하거나 응원해야 할 세력을 나누는 화법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하면 해당 사건을 명확하게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할지 고민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이 권력집단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겪는 등 아슬아슬한 상황을 등장시키며 긴박감도 유지한다. 잊혀질 뻔한 중요한 사건은 이렇게 다시 한 번 상기된다. 작품은 이외에도 이경영과 문성근을 비롯해 조한철, 허성태, 고인배, 배장수, 이재용 등 한국영화 / TV 드라마의 이쪽 장르에서 대표할만한 악역 배우들을 고루 분포시키고 있다. 특정 사건과 관련된 소재, 악역 경력이 충만한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하기. 두 가지 요소를 이용해 손쉽게 공분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되려는 것일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작품은 공분을 사게 할 만큼 악역들의 행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념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역할을 주로 수행하는 배우는 대한은행 매각을 주도하는 이광주 총리 역의 이경영이다. <남영동 1985> 의 고문기술자 역보다 더 침착한 톤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면 헛소리임을 알면서도 악역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블랙머니>는 흥분하지 말고 이들을 봐주길 원한다. 작품이 국익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뷰로크라트들, 즉 관료들이 지닌 신념과 생각에 주목하는 태도는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지점이다. 이로서 주인공인 양민혁과 김나리도 약간 달리 보게 된다. 두 사람은 관료들과 비슷한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래서 민혁과 나리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을 방지하고 좀 더 객관적인 위치에서 보게 만든다.

 


변호사인 김나리야 악역으로 첫 등장하지만, 누명을 쓴 강민혁도 '검사동일체' 아래 누구보다 검찰조직을 믿는 사람이다. 민혁은 인권 변호사 선배 앞에서 매각 건으로 억울하게 해고당한 대한은행 노동자들의 단식을 의심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는 "검사가 니 편 내 편이 어딨어?" 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공정하다고 여긴다. 

 

 

민혁의 이런 모습은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고 말한 누군가와 더불어 요 몇 년간 검찰 신뢰도가 바닥을 치다 못해 지구 핵을 향하는 작품 바깥의 사회인식을 떠올리게 하며 묘한 씁쓸함을 전한다. 그는 정말 편 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일까? 그래서 중반부 넘어 민혁이 나리와 횟집에서 술을 마시다 각자 꿈을 이야기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장면들을 마냥 편하게 볼 수 없다. '통쾌극' 수식어를 붙인 한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블랙머니>는 연합하는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든든함에 냉소적 감성을 곁들인다. 민혁은 가족이 겪은 억울한 일을 계기삼아 검사가 됐고, 나리는 유학 중에 외국 법조인들의 오만함을 목격하고는 국위선양을 위해 국제 로펌 설립을 결심했다. 두 사람이 지닌 포부를 듣고 있으면 박수를 치고픈 마음 말고 의심이 생겨난다. 그들이 몸 담은 직업군이 정말 국익을 위해 노력했는가? 두 사람의 다짐은 허울 뿐이고 정작 집단을 변호하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블랙머니>가 론스타 게이트 소재를 통해 말을 전하려는 대상은 검사와 변호사들이다.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검찰과 '대한민국 검사' 타이틀이 부패 최전선에 있었다는 것. 엘리트 변호사이자 법정대리인이 웬만한 서민들도 알고 있는 '대한민국 금융시스템이 그렇게 허술' 한지는 몰랐다는 것. 작품은 알고 보면 일반 국민과 정부 관료 사이에 발을 걸친 채 계도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던 한 검사와 변호사가 가장 멍청했음을 자각하는 이야기다. 이것이 <블랙머니>가 충무로에서 생산된 '통쾌 오락 범죄물' 과 다른 지점이다. 작품은 정의로운 검사와 변호사가 통쾌하게 악의 축을 엿 먹이는 판타지를 믿지 않는다. 믿더라도 그 판타지를 잘 구현할 자신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간과했던 진실을 뒤늦게 안 두 사람을 보여주고는, 그들이 신념과 포부를 바탕으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를 더 중요하게 지켜보고 있다. 덕분에 최근 몇 년간 개봉한 한국영화들 중 가장 자비 없는 시선으로 검사와 변호사를 대하고 있다. 초반부만 해도 나름 으쓱하게끔 대접하고 있지만 중후반부 이르면 거의 벌거벗기는 수준이다.

 

작품의 통쾌함은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려는 집단이 특유의 오만함을 꺾고 비열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 불합리한 문제를 바꾸는 첫걸음은 자기 스스로와 주변부에 존재하는 불합리부터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자들과 못하는 자들이 걸러진다. <블랙머니>는 통쾌극이라는 이름 아래 구린 자들의 이미지 세탁을 쉽게 허락했던 충무로 영화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 씁쓸하지만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결말이 다소 퍼포먼스적으로 보이는 점이 흠이지만, 주제의식을 생각하면 이 또한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작품은 어째서 정지영 감독이 동년배들과 다르게 지금까지 현역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묵직한 결과물이다. 감각적이라서가 아니다. 그 나이대치고 덜 비겁한 작품을 만들어내서다. <블랙머니>가 그렇다. 쾌작이다.

 


p.s.


1) 정지영 감독과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인이 누가 있나 생각했는데 <하얀 거탑>, <금환식>, <불모지대> 등을 연출한 일본영화감독 야마모토 사츠오가 떠오른다. 야마모토 사츠오는 사회적인 소재를 다루는 스타일과 긴 상영시간 동안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휘어잡는 솜씨 덕분인지 별명이 '일본의 붉은 세실 B. 드밀' 이었다. 정지영 감독이 좋아할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블랙머니>를 보면 그도 이제 붉은 세실 B. 드밀이 되어 가는 듯 하다.


2) 주제가 '아리' 가 좋다. 다만 좀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정지영 감독은 제작자로 참여한 허철 감독의 <영화판> 에서도 그렇고, 뭔가 '아리아리 동동' 이라는 문구에 집착하는 것 같다. 아시다시피 <영화판>의 원래 제목은 <아리아리 한국영화> 였다. 그런 문구를 쓰면 좀 더 한국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듣다가 갑자기 좀 사이비스럽게 보였다.


3) 수능 전날에 <블랙머니>를 본 학생이 있다면 수능날 한 문제 맞췄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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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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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9 22:44:37

오늘 봤는데 최근 조진웅 작품 중 가장 재밌게 봤습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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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20 00:10:55

저도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퍼펙트 맨 보고나서 블랙머니를 생각하니 한층 더 선녀같이 보이더군요.

2
2019-11-20 00:49:25

복잡하고 흥미가 떨어질수있는 소재의 얘기를 아주 친숙하고 편하게 재미나게 관객에게 다가가려 애쓴 흔적이 보이더군요

WR
2019-11-20 08:16:45

그렇죠. 금융사기 건 뿐만 아니라 요즘 시의성을 생각해서 집어넣은 이야기까지 잘 버무렸더군요. 정지영 감독이 21세기에 만든 작품들 중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1
2019-11-20 08:28:41

원톱 조진웅이 이끌어 가는 시작부터 끝꺼지 쉴새없이 쪼는 맛이 있었습니다.
상황이 뻔한 고구마라 할 지라도 열무김치와 사이다를 먹여주는 샌스까지...
닉네임 아니 본명이 감독님이라 그런지 장문의 글도 어렵지 않아 대단한 내공이 느껴잡니다.^&*

WR
2019-11-21 00:33:54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비디900 님. 봉준호라는 감독은 들어봤지만 홍준호라는 이름의 감독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1
2019-11-21 08:24:54
비밀글입니다.
WR
2019-11-30 01:46:39

엇. 그러셨습니까. 그래도 그 성함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강재구 소령은 존경받는 분이고 강제규 감독도 데뷔부터 태극기 휘날리며까지는 폼 좋았죠. 그래도 민우씨 오는 날 보니까, 날이 갈수록 흑화되는 윤제균 감독과는 다르게 어떻게든 버티고 계시는구나 싶어 좀 안도했습니다.

 
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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