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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윤희에게(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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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20 03: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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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알려졌던 제목은 [만월]이었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고 티저포스터가 공개될 무렵에 바뀐 제목인 [윤희에게]로 소개됐다. 올 초에 촬영을 시작해서 9월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뒤 11월 14일에 정식개봉을 했다. 영어제목은 제작단계에서 진행했던 원래 제목으로 간다. [Moonlit Winter]. '달빛이 비치는 겨울'이란 뜻이란다. 개봉단계에서 제목이 바뀌는 일은 무수히 많으니 [윤희에게]의 수정된 제목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가뜩이나 독립영화라서 배급망을 사수하기도 힘들텐데 그 뜻을 바로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 [만월]이란 한자어 제목보다는 [윤희에게]가 접근성 면에선 유리하다. 함축적인 의미의 [만월]이 극 정서와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윤희에게]가 내용과 겉도는건 아니니 이 정도면 전략적으로 잘 바꾼 제목같다.

 

무인기에서 표를 발권하면서 영어제목을 처음 봤다. 영어제목은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입장권에 표시된 영어제목을 보면서 원래 제목이었던 [만월]을 되새기게 됐다. 어느새 [윤희에게]란 제목이 적응돼 입장권의 영어제목을 보면서 아, 원래 제목이 [만월]이었지 했다. 영어 제목으로 [윤희에게]를 사용했으면 국내와 달리 윤희란 한국 이름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졌을 것이다. 임대형 감독은 제작단계에서 사용했던 [만월]이 한자어라 직관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서 고심 끝에 영화 도입부에서 편지를 읽는 나레이션의 첫 말인 '윤희에게'가 영화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제목이라 판단하여 영어제목과 다른 한글제목을 짓게 되었다고 밝혔다.  

 

[윤희에게]는 영화로 연기경력을 시작하여 브라운관 대스타로 자리잡은 김희애의 10번째 영화다. 199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스타였던 김희애가 중년의 나이에 이렇게 영화로 풀릴 줄 누가 알았을까. 5년 전만 해도 김희애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스타였다. 동시대 안방극장을 휘어잡았던 채시라와는 다른 중년의 연기경력이라 눈길이 간다. 2014년에 [우아한 거짓말]로 영화계에 복귀했을 때 이렇게 꾸준히 영화를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중년여배우가 설 자리가 없는게 국내 영화계의 현실인데 김희애는 주연급으로 다양한 분야의 영화에 참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더군다나 이번 작품은 김희애 최초의 독립영화 출연이다. 김희애같은 상업적인 드라마 배우가 퀴어정서가 스며있는 독립영화에 출연하여 전에 없이 절제된 연기까지 보여주다니 방송사 연기대상 세 번 수상하던 드라마 시절 때보다 훨씬 보기 좋다. 배우로서의 도전정신이 엿보인다. 현재 시점에서 브라운관 대스타였던 김희애의 마지막 텔레비전 드라마는 3년 반 전의 [끝에서 두 번째 사랑]. 그 뒤 김희애는 세 작품 연속으로 영화만 했다. 내년 초에 [부부의 세계]로 4년만에 텔레비전 드라마에 복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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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는 간편하게 요악하자면 김희애 판 [러브레터]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아류라고 보긴 어렵다. 막상 보고 나면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직전에 편지 소재로 교묘하게 끼워맞춰진 국산 멜로물의 이와이 슌지 기시감은 별로 들지 않는다. 편지를 매개로 두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겨울의 세계를 오가며 담담하게 전개되는 차분한 드라마의 정서에서 [러브레터]같은 겨울을 대표하는 멜로물이 살짝 떠오르는 정도다. 감독이 [러브레터]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긴 했는데 [러브레터]를 멜로의 교과서적인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이 정도 겹치는건 이해할 수 있다. [러브레터]도 24년이 지난 작품이니 1990년대 후반에 줄줄이 나온 최루성 멜로물의 편지 소재에서 느껴진 표절의혹과는 다른 오마주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단체급식소 조리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기 보다는 견딜 뿐인 중년여성 윤희는 곧 졸업을 앞둔 고3 딸을 혼자 키우고 사는 이혼녀이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윤희는 갱년기는 아니지만 지쳐있고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다. 숨을 쉬니까 살아가는 것일 뿐이고 책임질 대상이 있다보니 현실의 의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일 뿐 그녀의 내면을 가득 조이는 무기력한 기운이 해소될 것 같지가 않다. 술에 취하면 습관적으로 찾아오는 전남편의 끊어지지 않는 집착도 진절머리가 난다.

 

삶에 대한 희망이나 의지없이 오로지 체념하는 삶에 자신을 가두고 사는데 익숙해져버린 자폐증세의 윤희에게 어느 날 평생을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친구에게 편지가 온다. 고등학교 시절의 특별한 관계였던 동성친구 쥰에게서 온 뜻밖의 편지였다.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 태어나 학창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쥰은 오타루에서 수의사로 일하며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이모가 집안을 정리하던 도중에 우연히 부치지 않은 윤희에게 보내는 쥰의 편지를 우편함에 넣으면서 비밀스러웠던 이야기가 두 공간을 오가면서 하나씩 밝혀진다.

 

윤희는 동성애에 억압적인 한국의 정서에 짓눌려 젊은 시절 집안의 강요로 억지로 이성과 결혼했다가 이혼을 하게 됐고 동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수년간 정신과 치료까지 받은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자신의 욕망을 누르면서 삶의 희망까지 놓아버린 여자다. 그녀도 오랜 시간 쥰을 그리워했지만 젊은 시절 쥰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도 그녀였으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쥰은 가끔씩 그립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는 윤희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부치지 못할 편지를 자기치유 차원에서 써내려 갔을 뿐 과거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편지를 작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계기로 이모가 편지를 부치게 됐고 그 편지를 한국의 윤희 딸인 새봄이 읽게 되면서 수십년간 끊어졌던 윤희와 쥰의 관계에 국면을 맞는다. 쥰의 이모, 윤희의 딸 새봄,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가 윤희와 쥰의 해후를 돕는다. 이제는 묻어둔 그리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은 삶의 희망을 찾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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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는 정서적인 밀착감이 좋은 작품이다. 퀴어설정을 깐 작품이지만 퀴어소재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결국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인간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성 회복을 다루고 있다. 사회가 허용하지 않은 어린 시절의 금지된 연애가 아니더라도 [윤희에게]에서와 같은 인간관계는 동성관계에서건 이성관계에서건 가족관계에서건 어느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다. 상처를 입은 채로 끊어졌던 옛 관계가 우연한 계기로 수십년만에 엮여지게 됐을 때 가슴에 묻어두었던 지난 관계의 회복을 선뜻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랜 세월 그리웠던 사람과 막상 재회하게 되는 현실의 순간이 두려워 만남이나 연락을 주저하게 되고 머뭇거리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기억 속에 박제된 추억이 훼손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은 욕망, 추억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쥰을 향한 윤희의 소극적인 모습은 이해가 된다. 수십년만에 만난다 해서 달라질건 없고 이미 현재의 삶에 안주하게 된 상황이라면 굳이 재회할 필요가 있을까. 만났다 치자. 결국 지난 기억들을 회고하는 하룻밤 대화에 그칠 것이고 그간 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의 가치는 손상될 것이다.   

  

윤희는 쥰의 편지를 받고 오타루 여행을 계획하지만 꼭 쥰 때문만은 아니다. 무기력하게 주저않은 현실의 비루하게 망가진 삶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쥰의 편지를 핑계삼아 오타루 여행을 딸과 가게 된 것도 있다. 여행의 끝에 그녀는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급식소 영양사와 뭔가 특별한 관계가 아닌가 싶은 윤희이지만 활력을 잃어버린 고목같은 그녀의 삶은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윤희에게]는 구조상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켜 그려나갈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과거는 부치지 못한 편지나 나레이션으로 간단하게 요약되는 정도고 현재의 상황에 집중한다. 초반에 오타루와 지방 소읍을 오가며 전개되다가 윤희가 급식소 조리원을 때려치우고 오타루로 가게 되면서 윤희 모녀가 머무는 숙박업소와 쥰의 공간을 번갈아가며 잡아낸다. 새봄을 따라온 경수가 등장할 때는 오타루에서 벌어지는 마법과도 같은 소극처럼도 느껴진다. 아기자기하며 여행지의 낭만을 소박하게 담아냈다.

 

윤희 딸의 이름은 상징적이다. 새봄. 윤희가 꿈꾸는 내일의 희망을 은유한 이름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고 있는 시점에 극이 끝나고 여행지에서 돌아온 윤희는 기계적인 삶을 벗어나 의지적으로 남은 생을 계획한다. 새봄은 외로운 엄마가 걱정돼 부모가 이혼하는 과정에서 엄마와 사는 것을 택한 발랄한 딸이다. 새봄은 엄마가 잃었던 사랑과 인간성의 온기를 되찾아주기 위해 오타루 여행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결국 쥰을 보지 않고 귀국하려던 엄마를 속여가며 중매쟁이로서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 쥰과 윤희가 여행 끝에 재회했다고 해서 특별히 관계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해후를 통해 현재의 삶을 인정하고 묻어두었던 자아, 자신감을 되찾는다. 이는 곧 희망, 삶의 희망을 의미한다.

 

새봄, 경수, 마사코는 두 여주인공의 움직이는 방향과 선택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변부 인물을 벗어나 이야기의 활로를 개척해준다.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관계회복을 통해서 영화는 사랑하며 사는 삶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윤희와 쥰이 조용히 흘리는 눈물에서 사랑의 힘이 증명된다. 손편지, 필름카메라 등 아날로그적인 소품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드라마틱한 감정 표현에 능숙한 김희애가 감정연기에 있어 특유의 기름기를 상당부분 덜어내고 배역의 고독한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울림있는 호연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스산한 겨울과 눈덮힌 오타루의 환상적인 겨울 풍경을 대조시키는 초반의 배경묘사가 근사하며 딱 필요한만큼의 배경설명과 과거의 복기, 배역에 접근하여 여백의 힘을 살렸다. 그러면서도 저예산 독립영화의 겉멋에 빠져 등장인물의 침잠한 내면에 갇혀 있지 않는다. 퀴어설정에 대한 의무감으로 괜한 키스신 삽입이나 동성애적인 암시를 풍기려고 애쓰지 않는 태도도 마음에 든다. 담담하면서도 절제미가 돋보인다. 필요이상의 기교를 남발하지 않는다. 감정의 흐름이 깔끔하게 통제돼 있다. 정적인 온도를 내내 유지하며 차분하게 전개되지만 지루하지 않다. 캐릭터의 힘과 서사를 지탱시켜주는 정서적 마력이 극적인 호흡을 불어넣어준다. 영화가 끝나면 한동안 남는 여운에 금세 자리를 털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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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19-11-20 07:47:40

...(선략)...

저예산 독립영화의 겉멋에 빠져 등장인물의 침잠한 내면에 갇혀 있지 않는다.

...(후략)...

괜히 있는척 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어 나가는 전개 때문에 영화가 더 품격있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심지어 새봄이랑 경수가 사이좋게 개그물을 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2019-11-20 08:40:18

OST도 구입했는데 블루레이도 꼭 나와줬으면 좋겠습니다~~나온다면 플레인에서 나오겠네요~~~

 

2019-11-20 10:53:23

영화가 다시 되새겨지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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