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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윤희에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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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4:29


 

우리는 잘못이 없으니까



[스포일러 있음]

<윤희에게>는 사운드트랙부터 먼저 사서 듣고 뒤이어 극장에서 본 경우다. 뭐, 죄다 이 작품 사운드트랙을 다 사버려서 품절이 되니까 도리가 없었다. 음악부터 먼저 공략해야지. 작품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김희애와 나카무라 유코 이야기가 중간중간 교차되며 진행된다. <TV는 사랑을 싣고> 를 연상케 하는 윤희 (김희애) 의 여정. 그리고 쥰 (나카무라 유코) 입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적 감성, 지금 사회적으로 걱정해야 할 산더미같은 일들을 외면하고 고양이 따위나 걱정하는 작은 규모의 일본영화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친 느낌이다. <윤희에게>는 김희애와 나카무라 유코 간의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야기 스타일을 이원 생중계 하듯 넘나들지만 <러브레터>에 별 애착이 없어서일까. 한동안은 그냥저냥 감흥 없이 봤다. 윤희의 딸 새봄을 연기하는 아이오아이 그 여자 (= 김소혜) 가 안경 쓰고 잠깐 <중경삼림> 분위기 낼 때라던지, 아이오아이 그 여자 남자친구 (성유빈) 가 리폼이 취미라고 천연덕스럽게 얘기할 때는 옘병 못 봐주겠네. 이 무슨 대만과 일본 청춘 영화 혼종 흉내질이야 싶어 자리 박차고 나갈 뻔 했다. 저 나이 때는 발기된 고추를 주체 못하면서 땀냄새 풍기고 다녀야 하는게 맞는거고, 왕비가 누구인지도 모를 때잖아. 리폼은 무슨. 이러다가 '나는 등려군 음악 좋아해' 같은 대사도 나오겠구먼. 너희 세대에게 왕가위는 그나마 <일대종사> 가 가깝지 않니. 팔괘장 연습이나 해라, 아이오아이 김가야. 뭔 짓이야 저게.

 

 


* 선글라스는 성유빈도 쓴다. 갓 스무살 된 성유빈을 잠시동안 조진웅, 이성민 배우와 착각하게 만드는 마법의 선글라스 


한편으로는 이런 옘병같은 요소들이 나름대로 관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윤희에게> 의 상업적 장점이기도 하다. 작품은 '독립영화' 쪽으로 분류되어 있다. 독립영화들을 감상하면서 매번 안타깝게 느끼는 부분은 이들은 장사할 의향이 없는가 였다. 독립영화가 존재하는 목적이 창작자가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의도를 드러내기 위함이라지만, 영원히 그 진영에 머물 생각이 아니라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 즐길만한 거리를 던져주고 호응을 얻을 필요성도 있다. <윤희에게>는 나름대로 장사 좀 해보려고 노력한다. 머리에 피 좀 마르기 직전인 윤희의 딸 새봄과 애인 경수가 낡은 것을 고쳐쓰면 된다는 대화를 나누며 필름 카메라로 사진촬영 하는 설정부터 요즘 레트로 유행에 대한 반영을 생각케 한다.

 



그 외에는 모녀가 여행 간다는 컨셉으로 단기간에 다녀올만한 일본을 무대로 택한 점부터 어떤 식으로든 일탈의 매력이 생겨난다. 그리고 직접 체험해보라 한다면 짜증나지만 눈으로 바라보라고만 하면 평생 애정하며 봐줄 수 있는 것이 우중 풍경과 설경이다. <윤희에게>는 태고적 정서와 설경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일본의 자연적 장점을 살리면서 시종일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윤희와 새봄 모녀는 짧은 기간 머물지만 해외에서는 여러군데 묵어봐야 한다는 구실로 이 숙소 저 숙소 다 다녀본다. 소박한 규모의 탕에서 온천욕도 하고, 일본적 감성이 가득한 방에서 난로 틀어놓고 이불 뒤집어 쓴 채 추위를 벗삼아 떨어보기도 한다. 맛난 커피와 케이크를 먹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작품은 SNS적인 감성을 자극시키며 극적 사건이 별로 없는 잔잔한 흐름 속에서 은근히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있다.


혹 지루해진다 싶으면 '식빵' 이 연상되는 통통한 외형을 갖춘 반려묘 짐승을 프레임 안에 집어넣어 현혹시키기도 한다. 귀여운 것은 언제나 옳은 법인데 이 효과는 <윤희에게> 를 보며 별 생각이 없었거나, 혹은 작품이 싫을지라도 고양이 만큼은 귀여웠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대체 영화감상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실 수 있지만, 그렇게라도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쪽이 장사에 도움된다. 고양이 그르릉릉그 거리는 소리라도 집어넣으면 최소 상영관에 세 명 정도는 더 돈 내고 보러 온다는 얘기다. 쥰이 키우고 있다는 설정으로 등장하는 반려묘는 둘. 그 중 하나인 쿠지라는, 실제로 일본영화계에서 연기 잘 한다고 알려진 '폰즈' 라는 이름의 고양이다. 일본영화계에서 톱 클래스로 대접받는 연기묘를 데려왔고, 엔딩 크레딧에 아예 고양이를 별도로 빼내어 배역과 이름을 표기했다는 점에서 <윤희에게>가 흥행에 작정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내게는 고양이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 <윤희에게>는 아예 공식 스틸 컷에 고양이 폰즈의 단독 사진도 넣어뒀다. 


이렇게 작품이 흥행을 위해 준비한 비밀무기들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하나씩 공개된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지점은 나중에 등장하는 퀴어. 바로 동성애다. 여행 소재, 해외 로케, 베테랑 배우와 아이돌 출신, 고양이. 마지막으로 퀴어를 갖춘 독립영화. 이 정도면 극장가에서 흥행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굿즈를 싹쓸이 할 충성스러운 고정 관객들을 모을 수 있다. (그 중에는 영화사에 허락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굿즈를 제작해서 충성스러운 관객들의 지갑을 털어가는 불한당도 있다.) 혹은 2차 매체 시장에서 흥행하거나 유튜버들에게 가장 먼저 줄거리 요약 영상 등으로 간택될 조건을 갖췄다고도 볼 수 있다. <윤희에게>는 전반부에서 낌새조차 주지 않다가 마침내 어느 시점부터 윤희와 쥰을 왜 빨리 재회시키지 않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여죄수 사소리> 속 카지 메이코마냥 중성적 매력을 풍기며 검은머리에 올블랙 코트 차림으로 밤거리를 걷는 나카무라 유코.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 홀로 안절부절 못하는 김희애를 보며 뭔지 모를 의심을 키워갈 즈음, 본편에 동성애를 부와아악 들이붓는다. 이 들이붓는 후반부가 생각보다 강렬하다. 작품은 쥰과 윤희를 재회시키지만 육체적인 사랑 묘사나 직접적인 대사처리를 자제한다. 두 사람이 나눴을 애틋한 기억을 온전히 그들의 것으로 남겨두겠다는 듯 더이상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윤희가 쥰과 만난 후 본인 과거를 직접 고백하는 나레이션이 더 직접적이다. 마치 쥰과 윤희가 뭘 했는지보다 이 대목을 아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만 같다.


윤희의 나레이션은 <윤희에게> 에서 가장 적나라하다.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고 처절한 고난을 겪고, 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의 과거가 가감없이 드러난다. 놓치지 않겠다는 김희애 특유의 목소리가 보는 사람 귀를 잡아당기며 또박또박한 딕션으로 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하라는 듯 귓구멍에다 쑤셔 박아준다. 배우로서 김희애는 철두철미한 자기관리의 대명사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아들과 딸>, <완전한 사랑> 등의 TV 드라마에서 처럼 고난을 겪어도 어떻게든 감당하는 모습이었다. <윤희에게>는 반대다. 역시 별 문제 아니라는 듯 과거에 겪은 고통을 담담하게 읊지만, 실은 감당하다 지쳐서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기대를 갖지 않는 듯 소진되고 공허해진 모습이 그녀에게서 보인다. 그래서 본래 이야기를 숨긴 전개방식은 지쳐있는 윤희 캐릭터를 위한 배려로 느껴지기도 한다. 모녀가 함께하는 시간에 집중해서 그녀에게 안정과 평안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만월처럼 윤희도 온전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을 때, 진짜 그녀가 등장한다. 작품이 뜸을 들이는 태도를 보면 알게된다. 윤희나 쥰같은 사람들이 진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윤희와 쥰이 간만에 재회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자신을 그리워하는 상대를 통해 살아갈 가치를 확인하고 위로 받았으리라. 당신들의 욕망과 소망은 이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 사람은 이 자세를 잡아야 하고, 이렇게 넣는 거 맞죠? 어쩌다 보니 퀴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그런 부분들만 증명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윤희에게>는 그저 상영관에 찾아왔을 현실의 윤희들에게 당신들이 참아왔던 욕망과 소망을 조금이나마 알고, 드러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한다. 보다가 자리 박차고 나가고 싶게 만드는 오글거림을 선사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탈사회적 자세를 취하며 고양이나 걱정하고 현실을 달관하는 일본영화 영역에 머물러 이와이 슌지 감독 복장 터지게 만드는게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윤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더 나은 길로 갔다. 이해해주고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를 보여주며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수 있는 친구같은 작품이 되는 길이다.


p.s.


1) 원래 OST에 관해 언급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그래서 여기에나마 적어둔다.


앨범으로만 들으면 참 좋은 음악이었다. 그런데 본편에 삽입된 형태로 들으니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음악이 삽입되는 순간 영화가 KBS 단막극처럼 바뀌는 마법이 발생한다고 해야할까. 이 이물감을 뭐라 설명해야 할 지 잘 모르겠는데, 여튼 그랬다. 결국 김해원, 임주연의 <윤희에게> OST는 일종의 'Inspired By 윤희에게' 앨범으로 여기는 쪽이 더 좋겠다고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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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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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02 05:41:58

스포 만땅입니다


좋았던 점>
김희애의 날카로운 신경질과 시니컬한 표정
훗카이도에 가보고 싶단 생각을 또 들게 한 점
무색무취 고모 캐릭터
남편이 찐따면서도 살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은 거

싫었던 점>
아련한 아날로그 정서를 위해 선택한 건 알겠는데 요즘 필름카메라 따위를 누가 쓰며
전혀 요즘 애들스럽지가 않은 리얼리티 어쩔 건데
딸애는 겉멋이 든 건지 쿨병이 든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건들거리고
일본까지 따라가는 딸 남친의 불필요함
걔는 역할 자체가 없어도 되는 애였다고
일본 여주를 좀더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면 감정이입이 원활했을텐데
정신병원 얘기는 좀 지나쳐서 마이 불편했고
오빠란 사람이 악역인 건가
남편 애인까지 그렇게 나올 필요가 있었나?
암튼 이런저런 의아한 부분들 다 차치하고
윤희와 일본 여주에게 좀더 집중했으면 영화가 조금은 깊어졌을텐데
그 깊이까지 들어갈 용기가 없었나 능력이 안됐나 의지가 없었나
퀴어 겉핥기로야 괜찮았겠지만 진짜 그녀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었는지

WR
2020-01-03 00:38:01

아마 작품 자체가 윤희라는 인물 자체에 집중한 점이 컸다고 봅니다. 말씀대로 일본 여주 쪽 이야기는 좀 아쉽죠. 여자를 좋아한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족 중에 한국인이 있다' 는 설정이 등장한게 흥미로웠습니다. 일본은 저쪽이 더 비밀스러운가 싶기도 했고요.  한국에서는 실제로 지금도 동성애자라고 하면 가족들이 강제로 정신과 치료받게 하는 경우가 자주 있죠. 그래서 저는 윤희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설명하는 장치로서 확 와닿더군요. 

1
2020-01-02 05:42:04

심리 관점에서 봤을때는 (후전적인 요인으로)가벼운 자폐끼 마저 있어 보이던 윤희라는 사람이 과거의 사람을 만나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다시금 깨닫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죠 

WR
2020-01-03 00:26:09

말씀대로 궁극적으로는 윤희의 성장서사지요. 그래서 마지막에 오빠와의 장면은 윤희의 홀로서기라 감동적이면서도 좀 씁쓸했습니다. 오빠는 윤희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1
2020-01-02 09:36:09

영화관은 없어서 못보고 VOD올라왔길래 바로 사서 봤는데요.

잔잔해서 좋긴한데 너무 끝까지 잔잔해서...................맹맹한 영화였습니다. 

러브레터도 잔잔 연못위에 던져진 조약돌같은 임팩트가 있는데, 끝까지 그냥 심심하더군요. 

중견배우들이 그나마 연기력으로 살려준것같긴한데, 그것도 감독이 충분히 끌어내지 못한것 같습니다. 

오타루 눈풍경 감상용 영화라는 생각이....

WR
2020-01-03 12:14:02
하하. 실제로 오타루 눈풍경은 꽤나 상업적인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너무 잔잔한 이 작품에서 여행을 대리적으로 체험시켜주는 것이 장사하기에 좋았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잔잔했지만 괜찮았습니다. 김희애 배우도 이 작품 전작이 <사라진 밤> 이었음을 생각하면 <윤희에게> 쪽이 훨씬 낫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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