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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두번째 관람하니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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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22 16:19:11

영화 전체가 (영화에 쓰인)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과 구성이 같습니다.
'여름'은 총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죠.
1악장 Allegro non molto, 2악장 Adagio a piano Presto a forte, 3악장 Presto.
영화를 3개로 나누면, 시작부터 회상이 끝나는 부분까지가 1악장에 해당됩니다.
'여름' 1악장에서 이미 3악장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들이 쓰이고 있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갤러리와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2번의 재회'까지가 2악장입니다.
격렬했던 회상이 끝나고 조금은 담담해진
그래서 스스로 슬프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현재가 되어
엘로이즈와 다시 만나는(정확히는 둘이 따로따로 서로를 만나는) 부분.
그리고 영화에서 마지막 3악장은 실제로 3악장이 연주되는 엔딩이죠.
3분에 몇초 모자라는 3악장이 리얼타임으로 연주되면서 그에 맞춰
그 옛날의, 사랑으로 타오르던 여인(들)의 초상을 그리며 흐느끼는 씬.
이미 1악장에서 다 보여줬지만 다시 한번 그 사랑이
얼마나 격렬하고 아름다웠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비발디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 1악장에서 들려줬던 요소들을
더욱 휘몰아치며 들려주고 숨이 멈출 듯 하는 순간에 '여름'이 모두 끝나죠.
요 근래 몇년 사이 본 영화들 중 가장 뛰어난 엔딩이었습니다.
두번째 관람 때에도 엔딩 씬에선 정말 숨이 턱턱 막히더군요.

 

 

 


엄밀한 의미로 정의되는 '영화음악'은 이 영화에 없습니다.
2곡이 있지 않냐고요? 물론 영화에 사용된 음악으론 2곡이 있죠.
축제 때 여인들이 부르는 "La Jeune Fille en Feu(타오르는 여인)".
그리고 마지막 엔딩의 '여름' 3악장 프레스토.
그런데 이 음악들은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
영화 속 현장에서 실제로 부르고 연주되는 '소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화의 씬들에
감정과 완성도를 더해주는 BGM으로서의 영화음악은 없습니다.
두번째 보면서 알게 된 것 하나.
현장의 노래로 들리던 "La Jeune Fille en Feu"가 끝나갈 무렵
드레스에 붙은 불을 끄고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손을 잡는 순간
점프컷이 되면서 다음날 해변 바위길에서 두 사람의 손길로 넘어가죠.
그런데 여기에서 "La Jeune Fille en Feu"가 끝나지 않고
뒷부분이 계속 이어져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둘의 첫 키스!
유일하게 영화에서 BGM으로 음악이 사용된 순간.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좋았던 것으로 3가지를 꼽습니다.
도서관이 있고,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
(그런데 마리안느는 그건 죽은 노래들이라고 이야기하죠)
또 엘로이즈는 아마도 당시의 사회가 가진 계급주의, 귀족주의 등에
환멸을 느껴 수녀원으로 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사람들과 거의 말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죠.
그런데 마리안느를 만나면서 수녀원에서 좋아했던 3가지를 다시 경험합니다.
그것도 계급을 떠나서 둘이 평등한 친구(이자 연인)가 되어서 말이죠.
마리안느에게 책을 빌려 '오르페우스'를 읽고,
마리안느와 같이 축제에 가서 노래를 부르는 현장에 있고,
마리안느가 연주하는 '여름' 3악장을 듣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해주는 사람...
이게 연인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겠죠?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영화가 연인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사람 사이의 평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엔딩 전까지는 저도 셋의 우정이 더 와닿았어요.
귀족 엘로이즈 - 중간계급인 화가 마리안느 - 하층계급인 하녀 소피.
영화가 1시간 정도 지날 때까지 이 셋은 계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백작 부인이 밀라노로 간 5일 동안
셋은 계급을 떠나 여자로서,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평등해지죠.
개인적으로 엔딩 씬과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씬은
엘로이즈는 음식을 만들고, 마리안느는 와인을 따르고, 소피는 자수를 놓던
심지어 카메라 앵글마저도 셋을 나란히 배치해두고 찍은 바로 그 씬이었습니다.
 

 

 


부산영화제에서 받은 번역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조금 더 섬세하게, 등장 인물들과의 관계라든지
이런 것들을 번역해줬으면 초반부터 영화에 빠져들기가 쉬웠을 거예요.
백작 부인의 결혼 초상화를 마리안느의 아버지가 그렸죠.
그래서 엘로이즈의 초상화도 마리안느에게 연결이 되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아버지가 그리셨죠"라고 하니
이게 누구의 아버지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몇몇 있었어요.
틀린 번역은 아닌데 조금 더 이해를 높여줬으면 좋았을...
 

 

 


그 외 사소한 것들...

엘로이즈는 어쩌면 마리안느의 정체를 처음부터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어요.
초상화 모델처럼 늘 올려둔 손이라든지, 뜬금없이 의자에 가서 앉는다든지...
그런 장면들에서 슬쩍슬쩍 마리안느를 배려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줍니다.
 
마리안느가 촛불로 엘로이즈의 얼굴이 지워진 초상화를 여기저기 보다
불이 붙는 씬에서... 촛불에 타는 부분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입니다.
이후 엘로이즈의 심장이 사랑으로 타오를 것이라는 예언.
 
오르페우스의 "돌아보지 말아요", 28페이지의 그림, 여름 3악장 프레스토...
이 세 가지도 한번 더 반복되며 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요소로 쓰입니다.
영화나 소설의 기본적인 작법이기도 하지만
계속 영화에 사용된 비발디의 '여름' 3개 악장의 구성과도 닮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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