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2
블루레이‧DVD
ID/PW 찾기 회원가입

[영화리뷰]  [영화리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3
  711
Updated at 2020-04-04 01:27:38

로나 19 사태로 극장가가 그 어느때보다 한산합니다. 박스오피스를 살펴보니 눈에 띄는 작품이 있더군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여전히 상영되고 있고 어느새 15만 관객을 모았더라고요. 이시국에 극장에 방문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VOD 서비스도 시작되었으니 아직 못보신 분들은 감상을 추천드려 봅니다.

 

 

조용하게, 담담하게,
그러나 불꽃처럼 강렬하게 

 

 

사각사각. 목탄이 종이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공격하듯 들려온다. 이어서 몰아치는 파도소리. 작고 조용한 영화일 줄 알았건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작부터 감상자의 신경을 건드리며 관심을 잡아끈다. 파도를 헤치고 도착한 곳은 어느 외딴 섬, 정확히 어느 시기의 어느 곳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장면이 치밀하게 계산된 것처럼 보이는 촬영과 때때로 과장된 듯한 소리가 만들어내는 생생한 현장감이면 충분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작은 공간에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세 여성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다. 자신의 뜻과 달리 갑작스럽게 찾아온 결혼을 앞두고 방황에 빠진 엘로이즈, 결혼 상대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엘로이즈의 어머니의 주문을 받아 섬으로 찾아온 마리안느, 그리고 이 둘이 사는 저택을 관리하는 소피.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사건’이랄 만한 일이 없다. 아니, 사건이라 말할 수 있는 일에는 담담하게 넘어가는 이들의 감정이 파도가 일 때는, 서로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을 때 뿐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멜로 영화다. 비록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지만 극도로 고립되고 위축된 엘로이즈의 곁에서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마리안느의 눈길은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눈길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지속되던 마리안느의 일방적 시선과 엘로이즈의 웃지 않는 얼굴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능동적 시선을 보내면서 변화한다. 작가와 모델이라는 일방적 구도는 동등한 두 인격체의 관계로 변화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두 사람의 관계는 타오르기 시작한다.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며 주고받은 대화에는 흔히 말하는 상투적인 연애 멘트가 담겨있지 않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과 바다를 비추는 햇살과 시선, 거칠게 부서치는 파도, 창문을 흔드는 바람과 같은 감정이다.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조금씩 움직이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긴장이 기쁨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설명은 필요 없다. 오고가는 눈빛과, 행동의 작은 변화는 감상자에게 백 가지 말보다 많은 것들을 전해주었으니.

 

그 후로, 둘 사이의 말과 행동은 변화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웃음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은 두 사람이 협업으로 변화한다. 구체적 대상을 표현한 회화를 볼 때 우리는 그려지는 대상을 얼마나 닮았는지, 그리는 작가를 얼마나 담았는지 여부를 함께 평가기준으로 삼는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더욱 생명력을 얻게 된 회화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함께 만들어낸 자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엘로이즈를 담고 있는 만큼이나 마리엔느를 담은 작품이 되었다.

                    

 

회화 제작 과정에서 이어지는 대화도 변화한다. 서로의 정체를 알기 위한 견제구와 같던 대화는 어느새, 두 사람의 감정을 구체화 하는 역할로 변화한다. 대화는 내가 프랑스 영화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핵심을 직접 말하기보다 그 주변을 빙빙 돌며 이야기 하는, 정도가 심하면 ‘현학적인’ 대화에 질려 버리는 그 방식 말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초상을 보면서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사랑이란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원래 그럴 수밖에 없다고. 사랑을 느낀 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할수록, 자신이 느낀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수록 사랑의 형태는 더욱 또렷해지고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세상을 향한 문을 닫고 있던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자신의 세상에 초대한 이유는, 그리고 마리안느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여럿 일 것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과, 선택권이 사라진 삶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이와, 그를 인격체로 존중하며 가까이에서 도와주는 이의 등장, 그리고 사실상 고립되어 보낸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립된 개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마리안느의 모습. 마리안느는 ‘여성’ 작가로서 가지는 시대적 한계 안에서 활동하지만, 자신만의 기술을 바탕으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전문인인 그에게 동경과 부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엘로이즈가 닫은 문은, 마리안느가 말한 ‘화가 난’ 표정은 자신을 감싸는 격식, 허울을 향한 것이었고, 그 너머에서 등장한 존재는 그에게 웃음과 행복을 찾아 주었다.

 

비록 그 해방이, 그 사랑이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일지라도 엘로이즈는 단단하게 굳어버린 허울 넘어의 불처럼 타오르는, 파도처럼 몰아치는, 초원처럼 탁 트인,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찾고자 했고, 마리안느는 울타리 넘어로 엘로이즈를 인도했다. 그렇다면 마리안느는? 그가 독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성정체성을 추측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추가 증거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성이었기에 엘로이즈의 섬에 들어설 수 있었고, 그곳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진실된 감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니까. 두 사람과 가장 반대 항을 이룬다고 할 이성애자 남성인 나 역시도 그들이 울고 웃을 때 함께 울고 웃었으니까.




그리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성 영화다. 말 그대로 여성의 영화다. 2시간의 상영시간 동안 등장하는 대사를 가진 남성 캐릭터는 3인 뿐이며, 그들의 대사는 모두 합쳐도 두 손이면 꼽는데 충분할 것이다. 이들은 ‘여성들의 섬’에서 진행되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기능적 역할만 할 뿐이다. 가부장제 질서에 편입되어 딸이 만난 적도 없이 사위로 결정된 이에게, 결혼 전 자신이 그랬듯이, 딸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부탁하여 집을 지키던 하녀 소피와, 딸 엘로이즈, 그리고 화가 마리안느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초상화 그리기’라는 임무를 부여한 백작 부인 역시 역할을 다하고 섬을 떠난다.

 

섬에 남은 것은 귀족의 딸과 귀족에게 고용된 중인 정도의 신분일 화가, 그리고 하녀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지만, 타인의 방해가 없는 섬에서 이들은 서로를 구별짓지 않고 동년배 여성으로서 함께 한다. 영화의 여러 인상적인 장면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소피가 꽃모양 자수를 놓고 있는 식탁에 마리안느가 와인을 들고 다가와 와인잔에 술을 따르면, 엘로이즈가 빵과 치즈 등을 들고 찾아와 요리를 시작하는 대사도 얼마 없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귀족이 요리를 하고 하녀가 자수를 놓는, 역할이 역전된 장면임에도 화면을 채우는 것은 편안함과 친근함이다.

 

세 사람의 연대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특히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공통된 압박에 기반한다. 심지어 엘로이즈가 겪는 고통의 원인인 결혼식을 진행하는 백작부인마저, 당대 결혼 관습으로 인해 여성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마리안느에게 토로한다.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는다. 이미 등장인물들의 속에 녹아있으니까. 영화가 하는 일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감정을 담아냈던 그 섬세한 눈길로 그들의 삶 역시 담아내는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리냐는 엘로이즈의 질문에 답한 ‘여성은 중요한 주제를 그리도록 허락되지 않고, 여성이 그리는 주제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라는 말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연애감정과 함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을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소피의 존재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사이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 영화의 목표였다면 소피가 겪는 임신과 낙태 문제는 서브 스토리로서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피의 고민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놀라지 않는다. 아기를 낳고 싶은지 물어보고 그렇지않다는 답변을 듣자 백작부인이 섬으로 돌아오기 전에 낙태하기 위해 도울 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마녀’라 불렸을지도 모르는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낙태를 위한 약물요법을 받고 온 소피의 곁을 지키던 엘로이즈는 갑자기 낙태시술을 하던 자세를 재현하고 마리안느에게 그림으로 그리라고 말한다. 낙태로 대표되는 여성의 문제는 단순히 호들갑을 떨 가십거리나 금기시 되어야할 천한 문제가 아니라, 기록되어야 할 삶의 진지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최근 개최된 ‘세자르 영화제’는 10여 건의 아동 성폭행 혐의로 미국에서 도주하여 유럽 생활 중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감독상을 주었다. 〈나는 고발한다〉를 제작하며 자신의 처지를 누명을 쓴 드레퓌스에 비유하여 논란이 일었음에도 말이다. 객석에서 ‘브라보 폴란스키’라는 외침이 나왔을 때 ,엘로이즈 역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자로서 영화제에 초대된 배우이자, 아역 배우 시기 성추행 피해자이자 폭로자인 아델 에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행사장 바깥으로 나갔다. 셀린 시아마 감독을 비롯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관계자들, 그리고 뜻을 함께 하는 동료 영화인들 역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셀린 시아마 감독과 아델 에넬 감독이 실제 연인 관계였던 것만큼이나, 여성 예술가로서 마주해야 하는 사회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기반을 이루는 생생한 현실인 것이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 세 사람만이 저택에 남아있던 섬의 며칠은 억압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일시적으로 허락된 해방 공간 이었을 것이다. 엘로이즈가 다시 자기 자신을 잡아낸 그곳에서 마리안느 역시 엘로이즈로 인해 예술적인 성장을 이뤘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탄생시킨 그곳의 행복은 앞만 보며 나아가면 무언가 변화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 현실을 보는 순간 끝이 난다. 행복하고 편하게 누워있던 엘로이즈가 다시 사회가 정한 규칙으로 들어설 때, 코르셋을 채워주는 마리안느의 짧은 손길에는 어떤 감정이 담겼을까. 섬을 떠난 후에도 두 사람의 감정은 이어지고, 영화관을 떠난 관람객에게도 이어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외딴 섬에서 세 여자에게 일어나는 열흘 남짓의 이야기를 담은 작고, 정적인 영화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강렬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꽉 찬 영화가 또 있을까. 절대 숨길 수 없는 유화 냄새를 등장인물들은 맡지 못하는 것처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엄밀한 정합성이나 고증을 추구하지 않는다(〈기생충〉에서 술 냄새를 맡지 못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대신 영화가 담아낸 것은 생생한 감정이며, 보기 드문 성취를 이뤘다. 조금씩은 과장된 듯 한 여러 음향들은, 그로 인해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에 선 이는 파도소리에 사로잡혀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사랑에 사로잡힌 이가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창작의 환희에 빠진 이가 다른 것은 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담은 모습은 객관적 사실과는 다르지만, 자신에게 느껴지는 주관적 사실에는 더욱 부합한다. 배경음악이 아닌 여러 음향들로 영화를 채우며 현장감을 강조하던 영화에 음악이 등장할 때, 그 폭발력은 또 어떠한가(엄밀히 말해 이 두 장면의 음악도 ‘배경’음악은 아니다). 관람자를 둘러싼 소리는, 탁월한 촬영마저 감각하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치밀하게 설계된 꽉 찬 영화를 볼 때면 장면 장면을 해부하고 싶은 욕망에 빠지곤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라면 그렇게 보는 것이 이상적인 감상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은, 지금까지 길게 늘여놓은 이야기들을 뒤로 젖혀 놓고, 타오르는 불꽃의 뜨거움과 밝음을 날 것 그대로 다시 감상하고 싶다. 그 불꽃이 타오르고 남은 재 까지도 사랑하고 싶다.

 

                    

NO
Comments
아직까지 남겨진 코멘트가 없습니다. 님의 글에 코멘트를 남겨주세요!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