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게] 한국 하드보일드 영화의 최고봉 '킬리만자로'
스타일리쉬(맛깔나는 인스턴트) 하드보일드 영화 '다만악'을 보고 아쉬움이 남아 기억을 더듬다가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냉혹한 현실의 비정한 하드보일드 영화로는 2000년 작인 '킬리만자로'야말로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0대 젊은 시절의 오승욱 감독이 만든 무시무시한 데뷔작이었지만, 끝없는 어두움과 우울함으로 결국 10만도 넘기지 못하는 흥행 참패를 했습니다.
처연함 그 자체인 박신양과 노랗게 물든 안성기가 피를 뒤집어쓰며 삶의 바닥끝까지 추락하는 비극을 보고 나면 한동안 그 먹먹함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특히..
박신양은 2004년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혁과 창호라는 이질적인 성격의 형제를 유머러스하게 연기했다면, 킬리만자로에서는 해철과 해식이라는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조차 모호한 쌍둥이를 내면의 혼돈과 분노를 끌어내어 연기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박신양만의 진중하고 깊이 있는 좋은 연기를 보여왔지만, 이 영화만큼은 대체 가능한 배우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오승욱 감독은 15년의 긴 공백을 지나 2015년 '무뢰한'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안타깝게도 겨우 40만 관객에 그치면서 또다시 흥행에 고배를 마십니다.
전작이 미쳐 날뛰는 수컷들의 피바다를 보여주는 생짜배기 하드보일드 느와르였다면, 이번엔 하드보일드에 멜로라는 정서를 녹여 칸의 여왕 전도연과 달콤 쌉싸름한 김남길로 방향을 살짝 틀어 대중과의 거리를 좁혀보려 합니다만.. 어김없이 마지막엔 비루한 인생들의 잔인한 파탄을 소름돋게 보여줍니다.
전작에서 박신양이 폭발하듯 끓어 오르는 연기를 보였다면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차갑게 식어가는 메마르고 건조한 연기를 보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거친 세상과 악다구니로 맞서던 혜경은 자신을 사랑했던 준길과의 관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스며들듯 나타나 주변을 맴돌던 재곤이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을 보낸 후 불쑥 던진 한마디에 그만 흔들리고 맙니다. 그 순간 전도연의 알듯 모를듯한 표정 연기는 숨죽이며 지켜보는 관객 모두를 한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이 영화 최고의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오직 전도연이라는 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명연기.
아시는 것처럼 재곤 역은 이정재에서 김남길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박신양이 이 배역을 맡았다면 1998년 작 '약속'에 이어 또 어떤 둘만의 앙상블을 보여줬을지 궁금합니다.
오승욱 감독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의 감상주의적 작가라는 비판적 시각(평식 형님..)도 있긴 하지만..
저에게만큼은 처연한 하드보일드 영화에서 그 어떤 감독도 넘어설 수 없는 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또 한 번 관객의 심장을 서늘하게 할 작품으로 다시 돌아오시길 빕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디피님들이 계실까 봐 씨네21 기사 링크합니다.
- 형사가 깡패가 되어 돌아온다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4029
- [코멘터리] “피바다 영화에 위안받은 관객들 고마워”, <킬리만자로>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7081
- 피아노 전주부터 가슴이 먹먹해지는.. 박신양이 부른 OST [너에게]
( ※ 스포주의 : 4분 20초 동안 영화의 전체 내용이 다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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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이런 글도 써 주셨지요.. (먼산..)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6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