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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스포가득)나는 왜 테넷이 불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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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9-18 20:52:24

극장을 나오면서

왠지 찜찜했다.

분명히 재미는 있었다. 비행기는 컸고, 폭발도 했고, 그것도 여러번 폭발했다.

(이건 농담이다. 비행기는 결코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를 본 지 몇 일이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그런 나의 생각을 놀란이 만든 거의 모든 영화에 대입시켜봤다. 

거의 들어맞았다. 

지금부터는 그 이야기를 할까한다.


난 이 영화(테넷)를 보고 나서야 겨우,

놀란의 영화를 볼때마다 (그가 영화가 잘 만들긴 했지만, 근본적 차원에서) 

뭔가 나와 맞지 않다는 감정을 느꼈던 이유를 발견했다.

 

왜냐하면 테넷은 드러내 놓고 놀란감독의 가치관을 드러내는(거의 커밍아웃하다시피)

영화였기 때문이다.

 

난 내가 불편했던 이유가, 

놀란감독의 가치관이

운명론(혹은 결정론) 쪽에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최근에 그쪽으로 더 많이 기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놀란의 모든 영화에는 운명론적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은 나의 가치관과는 상당히 다르고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다시 말해 나는 그의 영화가 문제라는 것도 아니고, 영화에서 드러나 그의 가치관이

문제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만든 그의 영화(배트맨, 인터스텔라, 덩케르트 등)가 어느 정도 균형감각을 유지했다면, 

이 영화는 그런 균형감각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테넷이란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선언을 하고 훈수를 둔다.

 

영화가 인버전에 대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 받아들이라"

미래를 미리 알고 싶어하는 주인공에게 영화는 이야기한다.

"미래는 정해져있다고,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라고"

"무지는 우리의 힘이야!" 

이정도면 물리법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영화의 플롯은 주인공의 자유의지를 거세하고,

알고자 욕구도 억압하며,

과거로도 갈 수 있고 미래 일도 알수 있지만,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말도 안되게 암울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놀란은 왜 이 시기에 

(코로나로 인해 종교에 대한 권위가 점차 추락하고 있는,

혹은 코로나와 인류가 전쟁에 가까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시기에)
이 영화의 개봉을 감행했을까?

물론 시나리오쓰는데 오래 걸렸다고 했으니, 타이밍이 그냥 맞아들어서 일수도 있지만,

테넷을 보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놀란은 인터스텔라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우리는 해답을 찾을것이다."라고 했던 사람이

운명론적, 결정론적 가치관을 가질리 없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문제해결 능력을 칭송한 사람아니었던가?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아니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을 이끌었던 건,

어느 고도의 문명이 만들어놓은 웜홀이었고, 인간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계획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걸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그 유명한 책장씬 아니던가?

책장 뒤에서 매튜 메커너히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게다가 그것도 그가 거기에 갔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종의 

패러독스 같은 상황이다.

결국 그가 우주선을 타기전부터 모든 것은 정해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테넷과 동일하다.

모든 것은 정해져있고,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덩케르트도 배트맨도 메멘토도,

그의 영화를 자세히 곱씹어보면

주인공은 운명이란 것에, 혹은 거대한 흐름에 맞서기 보다는

어쩔수 없지라는 태도, 혹은 좌절, 또는 달관으로 일관한다.

메멘토 마지막 장면에서 사실을 알게된 주인공은 자신의 병을 고치거나

자신의 죄를 늬우치기는 커녕

그 상황을 계속 끌고가는 행동을 한다.

 

쓰다보니 길어졌는데,

다시한번 말하지만, 놀란은 영화를 잘 만든다.

재미있고 창의적이며 시각적으로 흠잡을 때가 없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 깔려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은

내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균형감각을 지키던 그의 전작과 결이 다른 테넷을 보고서야

내가 왜 테넷을 보고,

혹은 그의 전작들을 보고

"왜 난 뭔가 찜찜하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의문이 풀렸다....

는 이야깁니다. 주절주절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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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7
Updated at 2020-09-18 20:52:54

좋은 감상이네요. 저는 주인공들을 운명에 대한 순응자라 보지 않습니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그리고 테넷을 봐도 그들은 거대한 운명 앞에서 몸부림치고 마침내 무언가를 이루는 주도자들이었다고 생각해요.

3
2020-09-18 20:55:59

 좋은 글 추천드리고 갑니다. 여러 면에서 저랑 의견이 비슷하시네요

4
2020-09-18 21:14:48

동감합니다. 

 

영화 초반에 주도자의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이 이 영화가 가지는 근본적인 단점인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복잡한 설정에 비해 세계관 확장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한 영화라서 

 

재관람 의지가 안드네요. 

WR
4
Updated at 2020-09-18 21:42:54

세계관의 확장이 불가능하다... 격하게 동감합니다.

개인적으로 "그 때 그 장면에서 주인공이 이랬으면 어땠을까? 혹은 저러면 어땠을까?"하는 여운을 남기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게 불가능합니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있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패틴슨의 가방엔 빨간 끈이 매어질 테니까요. 


2
2020-09-18 21:16:45

와우 신선한 시각이네요!! 

7
Updated at 2020-09-18 23:05:30 (122.*.*.94)

전 주인공이 주도성을 점점 찾아가며 결국 주도자가 되는 입장과 캣이 약점 잡히고 끌려다니다 결국 주도적인 행동을 하는 관점들을 보면 결코 영화가 운명론을 말하는거 같지 않더라고요. 현실적이고 정해진 운명들을 답습하는 과정에서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거 같았습니다.
보는 사람들에 의해 영화의 감상과 주제가 바뀔 수 있다는게 흥미롭고 놀란 영화를 보면 지극히 냉정한 현실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려내면서도 한줄기의 빛을 꺼버리진 않더군요..
놀란은 영화는 딱 한가지로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폭넓고 다양하게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는걸 추구한다던데 곱씹을수록 깊이 있게 잘 만든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
2020-09-19 00:51:24

글 느낌이 정성일 평론가가 떠오르는 문체네요. 쉬운 정성일?...

2020-10-03 23:23:10

이런 감상방법도 있네요 무릎을 탁 차고갑니다

2020-10-28 21:30:39

타임머신으로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일을 바꿨다고 했을 때
실제로는 과거를 바꾼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일어나야 했던 일이라고 설명하는
단선적(?) 우주론에서는
운명론을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게 정해져 있는 것 같지만,
그 우주 속에서 플레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충분히 발현하면서 살고 있는 셈이죠.
시간에 대한 물리학적인 탐구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놀란의 테넷은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하는
놀라운 영화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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