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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차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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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재밌게 봤습니다(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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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10-22 15:08:09

뭐 내용이야 본 사람들이 대부분 얘기하는 바와 같이 중세판 라쇼몽입니다. 리들리 스콧의 중세물 전작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전쟁은 주가 아니라 철저히 부 역할을 합니다. 내용의 주는 가족과 우정과 중세적 관계들에 대한 드라마입니다. 물론 비주얼리스트 리들리 스콧이 잡아내는 미감은 여전히 끝내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거의 연극을 보는 느낌으로 보는 게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중세 영화가 아니라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전쟁이 주가 아니고 거대한 장면이 없다는 것뿐, 내용은 중세적 삶과 풍광, 제도에 충실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드라마에 집중합니다. 따라서 중세 전투의 장엄함이나 쾌감보다는 중세 기사들의 생활사와 디테일에 관심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부분에 초점을 줬기 때문에 재밌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프랑스가 배경인데 유창한 영어를 쓰는 인물들은 영 그렇긴 합니다. <킹덤 오브 헤븐>이나 <로빈후드>는 주인공이 영국인이거나 배경이 영국이어서 그런 이질감은 없었습니다만, 리들리 스콧 또한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하는 걸로 퉁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혹은 리들리 스콧 입장에선 영어를 유창하게 쓰는 현대 프랑스 영화들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영화는 남자에게 종속된 여자의 신체를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드라마기도 합니다. 그 신체는 남자의 명예, 중세적 가치 등이 집약된 것이죠. 그리고 여자는 그러한 중세적 상황에 대해 괴로워 하며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선언합니다. 어찌 보면 지금 현대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 무고의 문제가 수백 년 전에도 그대로 반복된 걸 드러내는 셈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여자들 뿐만 아니라 남자들 또한 그러한 중세적 제약들에 묶여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자크 르 그리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마르그리트의 강간 장면은, 가해자의 시선으로 설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대인이 보면 상당수가 저건 그냥 강간이네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마르그리트의 시선에서는 그보다 더 명백한 강간 씬이기도 하죠. 그런데도 르 그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한 일이 사랑이었으며 강간이 아니었다고 절규합니다. 뒷배경 없이 독학하여 고위직에 올라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중세 기사도 문학에 심취한 그로선 자신의 행위가 강간이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끝까지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낭만 저변에는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욕망들이 서려 있었죠. 그 점이 바로 이 중세 영화가 드러내는 체제에 대한 고발이자 전근대적이었던 중세 문화에 대한 비판, 그리고 중세 세계의 재현에 대한 충실함이자 현대적 우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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