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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게]  [비평]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는 스필버그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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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2-04-23 23:01:38

(*스필버그에 대한 두 편의 글을 준비했습니다.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 두 글을 모두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는 스필버그의 영화들

‘나는 아버지에게 애정을 느낀 적이 없다. 그건 전적으로 아버지 잘못이고, 나는 아버지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나보다도 일을 더 중요시 했다. 그래서 나는 늘 괴로웠다.’ - 스티븐 스필버그 -

이렇게 밖에 이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겠다. 스필버그는 정말 이상한 감독이다. 이건 그가 만든 27편의 영화를 쭉 이어서 본 다음에 내가 처음 느낀 생각이다. 그의 영화들을 하여튼 어떤 테마나 스타일로 묶으려고 하면 그 사이에 마치 튀어나온 못처럼 한 두 작품이 그 질서를 가로 막는다. 이를 테면, 와 사이에 끼어있는. 혹은 과 사이에 끼어있는 . 그러나 하여튼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가족이다. 그런데 모두들 오해하고 있는 것. 스필버그는 단 한 번도 가족이 뭉쳐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스필버그 영화는 단 한 번도 해피엔딩으로 끝난 적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영화가 끝난 후에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의 문제다. 같은 말로, 스필버그 영화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언가가(그것이 영화 속의 인물이든, 물건이든) 자기 자리를 벗어나있을 때 시작한다. 그의 영화는 결국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테마 속에서 맴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결국 시간과 장소의 결합이 중요해진다.

그의 영화가 길에서 시작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스필버그는 초기작에서 하여튼 아버지를 집 밖으로 내보낸다. TV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극장에서 개봉한 그의 첫 번째 장편 대뷔작 에서의 첫 쇼트는 집을 떠나는 자동차의 시점 쇼트다. 의 주인공 데이브는 바퀴가 16개 달린 대형 트럭과 쫓고 쫓기는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그런 카 액션의 서스펜스가 아니라 무너진 가부장적인 질서이다. 데이브는 그의 아내와 다툰 상태이다. 데이브가 집으로 전화하는 장면을 보면, 아마도 데이브와 잘 아는 사람이 데이브의 아내를 강간하려고 했지만 데이브는 그 사실을 모른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내 뒤로 두 명의 아들이 보인다. 데이브는 집에 여섯 시 반까지 들어가겠노라고 말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데이브는 차를 포기한다. 그 자체로 거대한 남근처럼 보이는 대형 트럭의 공격에 데이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마지막에야 그 트럭을 절벽으로 내몰지만 거기서 남은 건 집에 갈 수 없는 아버지 데이브의 허탈함이다. 집에는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지만, 차가 없는 데이브는 집으로 갈 수 없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는 보다 직접적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버스가 들어온다. 크레인 쇼트로 카메라가 그 풍경의 전경을 잡을 때, 프레임의 한 쪽에선 고장난 차를 수리하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차를 잃어버린 데이브를 스필버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끌어온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차 안에서 일어난다. 루 진과 클레버스의 아들 랭스톤은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된 상태다. 랭스턴의 아버지 클레버스는 경범죄로 감옥에 가있다. 다시 말해, 랭스톤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범죄자이다. 아무리 루 진과 클레버스가 랭스톤을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래서 랭스톤을 찾는다고 해도 클레버스는 결국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스필버그는 클레버스를 감옥으로 돌려보낼 바에 차라리 클레버스를 죽여버린다.(물론 이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이 테마에 관심을 표한 것은 결국 클레버스. 즉, 아버지가 죽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엔딩. 클레버스는 죽고 살아남은 루 진은 경찰에게 붙잡힌다. 석양을 등지고 이 둘과 함께 여행을 떠난 경찰 맥스웰과 사건을 맡은 대장이 대화한다. 그리고 자막. ‘루 진은 감옥에서 몇 개월을 복역한 뒤, 정당한 방법으로 랭스톤을 되찾아 텍사스에서 살고 있다.’ 하여튼 스필버그는 루 진과 랭스톤이 한 집으로 들어가서 사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차라리 그걸 자막으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스필버그의 관심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보여주려는 것에 있다는 걸 이미 여기서 증명하고 있다.

는 좀 더 복잡하다. 아미티의 경찰청장 브로디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과 살고 있다. 브로디의 가족은 뉴욕에서 아미티로 이사를 온 상태다. 그리고 외부에서 상어가 아미티로 들어와 아미티를 자신의 영토로 삼는다. 다시 말해, 브로디와 상어는 모두 외부에서 아미티 내부로 들어온다. 그리고 상어전문가인 후퍼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다. 브로디가 상어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하는 건 자신의 아들이 공격을 받은 이후이다. 그리고 브로디, 후퍼, 퀸트가 내부로 들어온 상어를 잡으러 바다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상어와 퀸트가 죽는다. 브로디와 후퍼는 마지막 쇼트에서 아미티 해변가로 돌아오지만, 그들의 진짜 집은 아미티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여전히 아미티 내부에서 타자이다. 여기엔 자신의 집(영토)를 침범한 외부인에 대한 공포가 있다. 흥미로운 건, 원작 [죠스]에선 후퍼와 브로디의 아내가 불륜을 벌인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그 에피소드를 영화에서 삭제했다. 그 말은 스필버그가 이 영화는 외부인고 외부인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내부인들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바다로 향하지만 그는 배멀미가 있고 물을 무서워한다. 그는 실패한 가장인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를 믿고 집에서 기다리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브로디는 상어를 멋지게 해치우면서 자기의 트라우마를 제거해버린다. 여기에서 은밀하게 여성과 아이들의 위치는 사라진다. 남아 있는 건 남자들의 연대다. 그 다음 작품인 는 두 가족이 나온다. 하나는, 로이드와 로이드의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딸 한 명이고 나머지 하나는, 배리와 질리언이다. 로이드는 UFO를 보자 데블스 타워의 형상을 떠올리며 미쳐간다. 로이드는 가족을 버리고 외계로 떠난다. 그리고 배리에겐 아버지가 사라져있다. 실존적 아버지인 로이드는 배리와 질리언 사이의 가상의 아버지가 되는 동시에 외계로 떠나는 순교자가 된다. 그러나 결국, 남은 로이드의 아이들은 외계로 떠
난 아버지를 기다리며 하늘을 보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가정을 지키는 아버지는 이제 바다가 아니라 하늘로 떠난다. 은 그 방법이 기이하게 변이한다. 에서 집을 떠나 온 사람들은 군인들이다. 군인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혹은 질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 가족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는 베티 뿐이다. 베티와 사귀는 윌리에겐 부모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베티의 아버지 워드는 집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집을 파괴한다. 심지어 영화의 엔딩에서 워드는 정신이 나간 채로 집에 못질을 하다가 집은 형체도 없이 붕괴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 가족이 모두 모이는 장면은 이 엔딩 뿐이다. 다시 말해, 가족이 뭉치자 집이 사라진다. 아버지는 전쟁 때문에 미쳐버린다. 그리고 이 영화는 1944년이나 1945년이 배경이 아니다. 이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1941년이 배경이고, 워드의 가족은 그 후 4년을 더 살아내야 한다. 스필버그의 70년대는 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 집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아버지가 집을 부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하여튼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스필버그는 그걸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버지들은 집에서 너무 멀리 떠나거나(), 죽거나() 혹은 아예 지구를 떠나거나() 심지어 집을 부숴 버린다.() 그리고 집은 진짜 집이 아니다.().

로 시작되는 80년대가 되면 스필버그는 약간의 변화를 겪는다. 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집을 떠나 남미의 밀림을 헤맨다. 그와 같이 모험을 떠나는 메리온 역시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네팔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메리온은 특별한 거처가 없다. 집을 떠나는 건 인디아나 존스이다. 그리고 자기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성궤이다. 온갖 시퀀스가 전개된 후, 인디아나 존스는 미국으로 돌아오지만 그가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성궤는? 성궤는 그것이 원래 있던 이집트가 아니라 (4편에서 밝혀지지만) 네바다 주의 군수품 창고로 옮겨진다. 즉, 성궤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보관된다. 에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티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인공인 엘리엇은 어머니와 형, 여동생과 살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새 애인과 멕시코에 산다. 영화는 이티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세 남매의 고군분투를 담는다. 이티는 아버지라기보다 기적을 가져다주는 예수처럼 보인다.(이티는 손가락으로 엘리엇의 상처를 치료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티를 쫓던 과학자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있다. 이 영화에서 집을 떠나는 존재는 이티와 엘리엇의 아버지. 그리고 과학자이다. 에서 역시 인디아나 존스와 미국인 윌리는 그들의 집인 미국을 떠나 상하이에 있다. 인디아나 존스의 조수인 쇼티는 고아이다. 여기서 쇼티와 인디아나 존스는 유사 부자관계로 형성된다. 영화의 오프닝은 청나라 초대 황제의 유골인 누르하치를 중국인에게 돌려주는 장면이다. 하여튼, 유물은 자기 자리를 찾아 간다. 인도에 떨어진 인디아나 존스는 그 부족의 신성한 돌인 샹카라의 돌과 아이들을 어둠의 주술로 이곳을 지배하는 자들이 들고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인디아나 존스는 돌과 아이들을 그들의 자리로 되찾아 준다.



에선 좀 더 복잡하다. 이 영화에선 여섯 쌍의 가족이 등장한다. 자매인 샐리와 네티는 그녀의 남동생과 함께 양아버지와 살고 있다. 즉, 샐리의 친부와 친모는 없다. 그러므로 샐리가 낳은 두 남매의 아버지는 가짜 아버지이다. 샐리는 농장 지주인 존슨에게 팔려간다. 존슨은 아이들이 있는데, 여기서 이상한 건 이 아이들의 어머니는 영화에서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존슨은 셕에게 애정을 주지만, 셕은 새 남편을 데리고 온다. 셕은 블루스를 부르고 셕의 아버지는 찬송가를 부른다. 둘은 마지막에 결합한다. 이 영화에서 자신의 집에서 정착하며 사는 사람은 양아버지와 존슨. 존슨의 아들 하포. 그리고 셕의 아버지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들은 집이 있지만 그들의 아내 혹은 딸들은 집을 떠나 방황한다. 아버지의 권위는 아내와 딸들을 사라지게 한다. 마지막에 셕과 셕의 아버지는 화해하지만 여기에 여전히 셕의 어머니의 자리는 없다. 샐리 역시 그녀의 두 아이들과 네티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미국에서 사는 흑인들의 정신적 고향은 아프리카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진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네티와 샐리의 두 아이들이지만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샐리는 이들과 만나지 못한다. 의 장소는 상하이 내에 있는 영국 자치구이다. 주인공은 그곳에 사는 영국인 제이미이다. 그런데, 이 제이미는 영국에서 태어나 이민 온 아이가 아니라 상하이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다. 결국 이건 과 같은 이야기이다. 제이미가 진짜 집으로 돌아가려면 그는 영국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영화는 상하이에서 끝난다. 여기에서 집을 떠나온 것은 외국인과 일본인이다. 이상한 건 이 영화의 주요 캐릭터 중 단 한 명의 중국인 캐릭터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중국이라는 영토에 대해 타자의 위치에서 방황한다. 일본군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쟁에서 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배하자 일본군들은 차라리 자결한다. 일본이라는 태양의 제국은 태양의 빛과 같은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한다. 제이미는 상하이로 돌아와 부모와 재회하지만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에서도 역시 가족은 사라진다. 여기에서 다시 스필버그는 유사 부자 관계를 들고 온다. 하지만 여기서 아버지는 실존하지 않는 죽은 상태이다. (유사) 아버지는 (유사) 아들이 자신의 (유사) 아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떠난다. 그러나 하여튼 여기서 아버지는 실존하지 않는다. 은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집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아버지 헨리 존스의 지혜를 따라 영생불멸을 얻는다. 그리고 아버지 헨리 존스 역시 영생불멸을 얻는다. 성배는? 나치가 성배를 가져가려고 하자, 성배는 차라리 사라지는 쪽을 택한다. 자기 자리를 떠날 바에 사라진다. 그리고 부자 관계는 자기 자리를 찾는다. 이 80년대에서 이상한 건 를 제외한 영화들은 모두 시간을 이동한다는 것이다. 시리즈는 (3편의 오프닝인) 1915년부터 1938년을 따라 올라간다. 은 1909년에서 시작해 1937년에 끝난다. 은 1941년에서 시작해 1945년에 끝난다. 의 배경은 1989년이지만 이 영화의 원작은 1944년이다. 스필버그는 이제 집이라는 공간이 아닌, 1980년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간 속에서 스필버그의 가족들은 레이건 시대의 보수주의와 결합되어 80년대 말이 되자 가부장적 질서의 복원으로
마무리 된다. 80년대 초반에 사라진 스필버그 영화의 아버지들은 80년대 말이 되자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1년에 스필버그는 를 완성한다. 이 영화는 아마도 스필버그 영화중에서 가장 이상한 영화일 것이다. 의 주인공은 피터 팬이지만, 제목은 후크이다. 후크는 피터 팬과의 대결을 위해 네버랜드에서 수 십년의 시간을 기다린다. 동시에, 피터 팬과 같이 지내는 아이들 역시 (성장하지 않고) 네버랜드에서 피터 팬을 기다린다. 시간은 이제 정지한다.(후크는 모든 시계를 부숴버린다.) 피터 팬은 하늘을 날며 공간을 넘나든다.(런던에서 네버랜드로. 혹은 미국에서 영국으로.) 피터가 태어난 곳은 영국이지만 그는 네버랜드에서 성장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그의 아내 모이라 역시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간다. 집을 떠난 사람들은 그들의 자식인 메기와 잭이다. 아들 잭은 후크를 아버지로 여긴다. 여기서,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이항대립이 발생한다. 그 때 피터가 진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이다. 이 영화는 아버지의 권위를 되찾는 영화이지만 피터에겐 아버지가 상실되어 있다.(피터의 아내 모이라 역시 아버지가 없다. 어머니 웬디만이 존재한다.) 이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으로 이어진다. 해몬드, 그랜트, 엘리, 말콤은 바다를 건너 코스타리카의 쥬라기 공원으로 온다. 즉, 그들은 공간을 건너온다. 그런데 이 공룡은 수 십 만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온다. 그리고 해몬드의 손자인 팀과 렉스가 이곳으로 온다. 팀과 렉스의 부모는 이혼 소송 중이다. 즉, 두 남매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의 공원을 방문한 것이)다. 말콤 박사 역시 세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그는 미래의 말콤 박사의 아내를 찾는다고 말한다. 공룡들의 아버지는 과학자들이지만 과학자들이 사라지자 공룡들은 공원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사라진 아버지들. 에 나오는 거의 모든 가족들은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가 있어도 그들은 어머니보다 무능력하다. 나치들은 (아마도) 집을 떠나오자 미쳐서 유대인을 죽인다. 쉰들러는 부유한 유대인의 집을 구해 그곳에서 산다. 마지막 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집이 아닌 쉰들러의 묘지로 향한다. 나치들은 독일에서 폴란드로 공간을 건너오고 유대인들은 1945년에서 1993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와 쉰들러의 묘지를 참배한다. 는 아예 공룡이 섬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다. 시간에서 공간으로의 점프.

 에서 싱케이는 긴 재판 끝에 아프리카로 돌아가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은 몰살되었다는 자막이 등장한다. 싱케이의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죽는다. 싱케이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싱케이.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 그 둘이 결합되어도 그것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에선 아예 라이언의 세 형들은 전쟁에서 모두 전사한다. 그리고 이 집엔 아버지가 없다.(잠깐 등장하는 라이언의 집에선 어머니가 편지를 받는다.) 영화의 시작은 1998년의 노년의 라이언이다. 그리고 신이 이동하면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시퀀스가 이어진다. 시간에서 공간으로의 점프. 밀러와 그의 부대원들은 라이언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를 횡단한다. 그리고 라이언을 구하고 집의 가장인 밀러는 죽는다. 90년대의 스필버그는 시간과 공간을 뒤섞으면서 아버지의 존재를 희석시킨다. 아버지들은 70년대의 스필버그 영화처럼 죽거나(), 사라진다.(, , , ) 그러나 그걸 발견해내기 힘든 것은, 스필버그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아버지를 중심으로 놓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70, 80년대에 중요한 건 상어, 외계인, 유물, 흑인, 전쟁 그자체이지만 90년대가 되자 (를 시작으로) 중요한 건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질문이다. 아버지들은 모두 집을 떠난 상태에서 스필버그의 90년대는 지나간다.

그리고 2001년. 에서 데이빗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존재이다.(아버지는 하비, 어머니는 모니카이다.) 데이빗은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아버지는 증발한다. 데이빗은 어머니를 불러 오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건 데이빗의 환상이다. 스필버그는 하여튼 그것이 실재가 아닌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처음으로 집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들어오게 하면서 2000년대를 시작했다. 그리고 9.11이 2011년에 터진다. 여기서 스필버그의 근본적인 영화적 질문이 뒤바뀐다. (에도 그 조짐이 보였지만)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다. 아이들은 시대에 휘말린다. 에서 존 앤더튼은 아들 숀을 지키지 못한다. 아들이 죽고 존은 라라와 이혼한다. 존은 살인을 하게 된다. 에서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 에버그네일은 아들 프랭크 윌리엄 에버그네일 주니어의 사기 행각을 알고 있지만 아들을 막지 못한다. 아들 프랭크는 부모의 이혼을 겪고 자발적으로 집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아버지는 죽는다. 에서 빅토르 나보스키는 죽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뉴욕으로 오지만, 그는 공항에 갇혀버린다.

에서 레이 페리어는 이혼했고, 그들의 아이들은 로비와 레이첼을 보호할 어떠한 힘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부서진 집을 떠나 중산층이 자신의 아내의 부모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일 뿐이다. 에서 아브너는 자신의 집인 이스라엘을 떠나 뉴욕에 집을 얻지만 살해의 위협을 가득 안고 살아간다. 9.11 이후에 스필버그의 가족들은 철저히 부서진다. 집은 둘로 나뉘어지고, 고향은 폭력으로 사라진다. 은 아마 (와 함께) 가장 이상한 스필버그 영화일 것이다. 여기서 인디아나 존스가 하는 일은 크리스털 해골을 제자리로 돌려주는 일이다. 크리스털 해골은 성궤, 돌, 성배와 같은 신성한 유물이 아니다. 인디아나 존스는 유물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서 그 자신의 가족도 제자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외계인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인디아나 존스 역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3편에서 영생불멸을 얻은 아버지 헨리 존스는 2년 전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스필버그는 하여튼 어떻게든 아버지를 죽여버린다. 이제 아버지의 전통은 사라진다. 인디아나 존스는 그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 스필버그는 이제 공간과 시간의 자리를 이탈하는 테마에서 공간과 시간이 제자리를 찾는 테마로 이동하고 있다. 그건 자신의 80년대와 결별하고(죽어버린 ‘영생불멸’의 헨리 존스) 90년대를 거부한다.(시간에서 공간으로 건너뛰며 전쟁에 휘말리는 에서 전쟁이라는 테마 그 자체로 유지되는 ) 그리고 과 에서 스필버그는 그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의 보물은 하독의 저택에 있다. 보물을 찾기 위해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에서 알버트와 조이는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 두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고(), 가족의 희망을 본다(). 그런데 내게 이것이 이상한 건 이 두 영화는 영국이 배경이다. 미국에서 스필버그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의 다음 작품 이 그 대답을 던져줄 것이다. 은 스필버그가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자신의 테마와 부딪히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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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2-04-24 00:09:04

글 잘보았습니다.

2012-04-24 01:01:28
2012-04-24 06:29:09

스필버그를 겉핥기가 아닌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글인 것 같아 추천드립니다. 정말 진주 같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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