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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게]  [전기] 프랑수아 트뤼포의 유년 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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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2-09-04 20:48:36

이 글을 '영화공간 보기드문'에서 상영 중인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의 강의를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그의 모든 일대기를 그리기는 너무 방대해서, 트뤼포의 어린 시절부터 를 만들 때까지의 일대기를 아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이 글은 앙트안 드 베크와 세르주 투비아나가 쓴 [프랑수아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과 로버트 쉬네이큰버그가 쓴 [위대한 영화 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 이야기], 장 피에르 장콜라가 쓴 [프랑스 영화사], 제프리 노웰 스미스가 쓴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 김호영이 쓴 [프랑스 영화의 이해], 자크 오몽이 쓴 [영화 감독들의 영화 이론], 영화의 전당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강의한 '전투적 영화광으로 산다는 것:프랑수아 트뤼포'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1932년 2월 6일 파리 북쪽에 위치한 앙리-모니에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트뤼포의 탄생은 가족에게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트뤼포의 외갓집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는데, 트뤼포의 어머니인 자닌 드 몽페랑은 트뤼포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트뤼포를 낳고 3년 동안 트뤼포의 어머니는 유모에게 트뤼포를 맡기고 데이트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고, 자닌 드 몽페랑은 롤랑 트뤼포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됩니다. 뭐, 물론 아주 어릴 때의 일이라서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주 어릴 적에 이미 상처를 받은 트뤼포는 죽을 때 까지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이 트뤼포의 계부는 등산에 빠져 있어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지독한 트뤼포의 친모는 외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이 부부는 어린 트뤼포를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외할머니는 손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평소 독서를 취미로 하던 트뤼포의 외할머니는 트뤼포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트뤼포가 가족이랑 다시 재회한 것은 세계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파리에서 물러난 후인 1942년이었습니다. 가족이 이렇게 모인 건 그 사이에 트뤼포가 믿고 따르던 외할머니가 죽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트뤼포 가족은 클리낭쿠르 가의 굉장히 작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트뤼포의 말에 따르면 이 아파트는 에서 드와넬이 살던 바로 그런 아파트라고 합니다. 게다가 트뤼포가 살던 이곳은 홍등가였습니다. 고작 열 살 밖에 안 되던 트뤼포는 창녀들에게 관심을 가져 홍등가를 빈번히 출입했고, 이 때의 기억은 아마도 트뤼포의 평생 동안의 삶의 범주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범주를 넓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트뤼포는 10살 때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혁명적인 사건을 겪게 됩니다. 이미 10살 때 천 편이 넘는 영화를 봤던 트뤼포는 그 전까지 같은 영화를 두 번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트뤼포가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빼먹고 마르셀 까르네 감독의 라는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가 너무 별로여서 정말 실망을 가득 안은 채 집에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 마침 집에 트뤼포의 숙모가 와있었답니다. 그러면서 숙모는 이 어린 트뤼포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저녁에 라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고 합니다. 학교를 빼먹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말을 못하는 트뤼포는 어쩔 수 없이 숙모 손에 이끌려 이 영화를 다시 보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그 영화를 보게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트뤼포는 영화를 두 번 이상 봐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트뤼포 본인이 1940년대 중반에 적은 노트에서 그는, 앙리 조르주 끌루조의 를 13번, 클로드 오탕라라의 을 7번 봤다고 적어놨었습니다. 트뤼포의 영화에 대한 애정은 거의 신앙과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에 대한 탈출구였을 것입니다. 트뤼포의 부모는 트뤼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트뤼포도 가족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트뤼포는 12살 때 하루에 세 편의 영화를 보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거의 영화관에 살다시피 했습니다.

트뤼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프랑스 영화는 결국 장 르누아르와 로베르 브레송이다.’ 그리고 자신은 장 르누아르를 따라 갔습니다. 실제로 트뤼포가 미국에 거주할 때, 같이 LA에 거주하던 르누아르의 집에 트뤼포는 거의 매일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으며 에선 장 르누아르의 의 클립을 집어 넣기도 했습니다. 트뤼포가 장 르누아르를 따르게 된 것은 아마도 개인적인 이유도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트뤼포는 1945년에 을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후에 트뤼포의 삶을 바꾸게 됩니다. 트뤼포가 10대 때였던 194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는 일종의 시네클럽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1936년 앙리 랑글루아가 만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무성 영화의 프린트들을 수집하고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트뤼포 역시 1944년부터 시네마테크에 다니기 시작했고, 1948년엔 본인이 ‘세르클 시네만’. 그러니까 ‘영화중독자 서클’이라는 이름의 시네클럽을 만들게 됩니다. 트뤼포가 16살 때의 일입니다. 여기서 첫 상영을 할 때, 트뤼포는 직접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찾아가서 르네 끌레르의 과 루이스 뷔뉘엘의 와 장 콕토의 의 프린트를 빌리러 갔습니다. 그러나 돈이 모자랐던 트뤼포는 프린트를 대여하지 못했고, 그러자 본인이 직접 장 콕토에게 편지를 보내 프린트를 들고 와 관객들에게 상영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장 콕토가 이 16살짜리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관객들에게 장 콕토가 온다고 홍보를 했던 트뤼포는 관객들에게 거의 맞아 죽을 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트뤼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프린트 대여료를 벌기 위해 트뤼포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에 몰래 들어가 타자기를 훔치기도 하고, MGM사무실에 직접 찾아가 필름을 공짜로 빌려와 돈을 갚지 않기도 했습니다. 결국 트뤼포는 경찰에 붙잡혀 기 느메르 소년원으로 보내집니다. 여기서도 트뤼포는 멈추지 않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직접 작성한 찰리 채플린과 오손 웰즈에 대한 글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나이 17살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 소년원에서 트뤼포는 자신의 첫 영화에 대한 영감을 얻습니다. 그 기 느메르 소년원의 입구에는 ‘레 케 트리앙 상코’.라는 글이 적혀져 있다고 합니다. 바로 라는 뜻입니다. 프랑스 격언 중에 ‘아이들은 400번 맞아야 어른이 된다.’라는 것에서 따온 글입니다.

트뤼포는 소년원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시네클럽에 들어갔습니다. 이 당시 어머니와 극심하게 사이가 나빴던 트뤼포는 계부인 롤랑 트뤼포의 도움으로 집을 구해 혼자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브젝티프49’라는 시네클럽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트뤼포는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앙드레 바쟁이었습니다. 이미 트뤼포는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인 1948년 11월에 ‘노동과 문화’라는 협회에서 앙드레 바쟁을 처음 만났었습니다. 하지만 곧 소년원에 들어간 트뤼포는 바쟁과 오랜 시간 교류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원에 나오고 나서 바쟁을 다시 만난 트뤼포는 이후 바쟁이 죽을 때 까지 그와 아주 깊은 우정을 맺습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트뤼포가 군대에 있었을 때의 일일 것입니다. 여자 친구와 결별한 뒤 프랑수아 트뤼포는 홧김에 지원병으로 군대에 입대하지만, 규율에 맞춰 규칙적으로 사는 삶을 살지 않았던 트뤼포가 군대에 적응할 리가 없었습니다. 트뤼포는 설상가상으로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사이공으로 배치될 뻔 했습니다. 그래서 트뤼포는 탈영을 시도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트뤼포는 탈영을 한 당시에도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봤다는 것입니다. 이 쯤 되면 거의 광적인 열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트뤼포는 두 번 탈영을 시도했고, 군 입대 전에 시도한 무수한 자살 시도 때문에 정신병원으로 옮겨질 뻔 했습니다. 그 때, 트뤼포를 구제한 것은 바로 앙드레 바쟁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문화계의 저명인사이자, 사르트르의 친구였고, 프랑스 가톨릭의 깊은 신자였던 앙드레 바쟁은 직접 상원의원과 군 간부를 설득시켜 트뤼포를 군에서 제대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트뤼포는 바쟁이 거주하던 집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앙드레 바쟁은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 장 마리 로두카와 함께 1951년 창간한 [까이에 뒤 시네마]지에 트뤼포를 대뷔시켰습니다. 트뤼포는 1953년 3월부터 [까이에 뒤 시네마]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쓴 첫 번째 비평은 데이비드 밀러가 감독한 라는 미국 영화에 대한 짤막한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1954년 1월. 트뤼포는 [까이에 뒤 시네마] 1월 호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이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 글의 한 단락을 짧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쓴 유용한 각색만을 생각할 뿐이다. 오랑슈와 보스트는 근본적으로 문학가이며, 여기서 나는 그들이 영화를 과소평가하고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마치 경범자에게 일자리를 주면서 그를 재교육시킨다고 생각하듯이 시나리오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항상 경범자를 위해 그를 미묘함으로 치장하면서 현대 소설의 보잘것없는 가치를 만드는 이 뉘앙스의 학문으로부터 ’최선을 다한다‘라고 생각한다.’ 이 글이 [까이에 뒤 시네마]에 발표되자마자 격렬한 찬반 양편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트뤼포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프랑스 영화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뤼포가 글에서 언급한 두 사람. 오랑슈와 보스트는 각각 장 오랑슈와 피에르 보스트라는 시나리오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트뤼포가 글 후반부에 언급한 샤를 스파크, 앙리 장송, 롤랑 로덴바크, 로베르 시피옹, 피에르 라로슈 등의 인물들은 당시 문학 작품을 각색했던 시나리오 작가였습니다. 트뤼포는 이 사람들이 영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이 아니라, 문학의 관습을 영화로 그대로 옮겨 놓고만 있다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었습니다. 트뤼포는 영화인이라는 직업은 연출을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영화에서 연출의 요구를 전면에 배치해아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훌륭한 문학 작품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가 예술 영화.’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감독의 지위는 시나리오 작가보다 아래에 있었습니다. 1930-40년대에 파테, 고몽과 같은 거대 영화사가 파산 직전에 몰렸을 때, 프랑스 영화계를 구원한 작은 규모의 동시 상영관과 단편 영화 상영관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자 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1946년. 당시 프랑스에 3당 체제를 이끈 사회당, 공산당, 기독교 민주당 중에서 나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던 공산당이 가장 득세한 가운데, 다른 두 개의 당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인 뱅상 오리올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프랑스의 4공화국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4공화국 시대 때의 여러 개혁 정책이 시도된 가운데, 영화 산업에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1946년에 국립영화센터가 건립되었고, 칸 영화제가 다시 개최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트뤼포는 시네 클럽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 가운데, 알렉산드르 아스트뤽이라는 영화감독은 ‘영화에서 오퇴르. 즉 작가는 영화 작품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영화감독이며, 영화감독은 마치 작가가 만년필로 자신의 예술을 써 내려가듯, 영화감독도 카메라로 자신의 예술을 써 내려가야 한다.’라고 주장한 ‘카메라-만년필’을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깊이 공감한 트뤼포는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의 마지막 단락에 ‘영화감독이 작가들의 시나리오를 보충하는 부차적인 역할을 부여하던 프랑스 영화의 경향을 질 적인 전통으로 규정하고 그런 경향에 반대하여 감독에게 창조적 역할을 강조하는 ’작가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트뤼포에게 영화 작가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개념은 앙드레 바쟁이 주장한 ‘영화에서의 리얼리즘’과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에서 인위적인 사고를 부여하는 몽타쥬 편집을 비판하면서, 관객에게 다층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장면 세팅. 즉, 미장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미장센을 통해 영화를 현실과 접목시키려 한 오손 웰즈, 장 르누아르, 찰리 채플린,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트뤼포가 앙드레 바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때문이었습니다. 1951년 당시에는 두 개의 판본이 존재했습니다. 하나의 판본은 세계 2차 대전 때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 난 필름들을 모아서 개봉한 판과 또 다른 판본은 앙리 랑글루아의 노력으로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의 판본을 모두 모아 시나리오에 맞춰 장 르누아르의 감수 아래 재복원한 판본이었습니다. 트뤼포는 군대에 있을 때 이 두 가지 판본의 차이를 비교 분석한 비평을 [까이에 뒤 시네마]의 전신인 [가제트 뒤 시네마]의 비평 공모에 보냈습니다. 이 글을 감명깊게 읽은 앙드레 바쟁은 프랑수아 트뤼포는 군대에서 전역 시켜서 [까이에 뒤 시네마]에 대뷔 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까이에 뒤 시네마]에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트뤼포가 시네 클럽에서 만났던 친구들.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끌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가 함께 포진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트뤼포가 주창한 ‘작가 정책’을 옹호하며 그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만신전의 위치에 올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프레드 히치콕, 프리츠 랑, 장 르누아르, 자크 베케르, 하워드 혹스, 로베르토 로셀리니, 아벨 강스가 거장의 타이틀을 달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에릭 로메르는 ‘연출가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까이에 뒤 시네마]라는 올림푸스 산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까지 말했고, 자크 리베트는 ‘하워드 혹스의 최고 졸작이 존 휴스턴의 최고 걸작보다 낫다.’라고 독설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앙드레 바쟁은 이 비평 자세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앙드레 바쟁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까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이 모두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 새로운 시대의 평론가들은 기꺼이 자신이 만드는 영화를 위해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것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트뤼포는 자신이 만든 이 규율을 본인 스스로 실천했습니다. 트뤼포는 이미 1954년. 이라는 단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촬영은 (무려) 자크 리베트였고, 편집은 (무려) 알랭 레네가 맡았습니다. 하지만 트뤼포는 영화를 만든 후 자신의 영화에 만족하지 못했고, 자신의 집 옷장에 필름을 처박아 놓았습니다. 이 영화로 의기소침해진 트뤼포는 이젠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시기에 트뤼포는 거장들의 영화 현장에 방문했습니다. 장 르누아르가 과 을 만드는 현장을 방문했고, 막스 오푈스의 현장을 방문했고,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오페라 를 준비하는 현장을 방문한 후, 로셀리니를 위해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습니다.(물론 영화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동시에 [까이에 뒤 시네마]의 동료 필진들이 하나 둘 씩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56년에는 에릭 로메르가 를, 자크 리베트가 을 만들었고 1957년에는 장 뤽 고다르가 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클로드 샤브롤은 그의 동료들 중 가장 먼저 두 편의 장편 영화. 와 을 만들었습니다. 트뤼포는 점점 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욕구가 커졌습니다. 그는 1958년. 자신의 유년 시절을 배경으로 만든 단편 영화 로 주목을 받은 후, 1958년 11월. 그의 첫 장편 대뷔작 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해 칸 영화제에 상영되어 심사위원장 장 콕토로부터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눈물을 흘리며 ‘이 영화를 앙드레 바쟁 선생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앙드레 바쟁은 트뤼포가 의 촬영을 시작한 1958년 11월 10일. 40살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오프닝에 트뤼포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영화를 앙드레 바쟁에게 바칩니다.’라는 자막을 올렸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영화감독일 것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하루에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이틀에 하나의 글을 쓰고 일주일에 세 건의 책을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죽을 때까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어쩌면 한 명의 무모한 인간이었으며, 어쩌면 거의 영화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정신적 지주가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영화에 대한 애정이 사라질 때면 트뤼포의 영화를 꺼내 볼 것입니다. 그것이 트뤼포가 우리에게 전해준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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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22:53:57

잘읽었습니다. 오래간만에 고퀄의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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