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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베트남전때 한국군이 미군보다 잘 싸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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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7-31 19:42:20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딱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중에 미국이 만족할만큼 참전을 해준다고 하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은 애초에 파병을 하고싶지 않았었지만 몇가지 이유로인해 파병을 결정하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가 전쟁중에 미국 정권이 교체되고 후임 국방부장관이 전쟁을 들여다보니

유럽 주둔군이나 타 지역으로 갈 물자와 군수자금까지 몰래 빼서 베트남전에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그말이 무슨말이냐면 미국이 이것저것 한국 사정을 봐줄 형편이 아니었던것이죠.

 

그래서 미국은 한국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파병이 안된다면 주한미군이라도 빼내어서 

베트남에 보내겠다고 한것이죠.

그당시 주한미군은 한국 입장에서 완전한 인계철선이었으므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서 

빠져나간다걸 상상조차 할수없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뭐 이런저런 연유로 인해 한국은 베트남 참전을 선언하게 됩니다.

 

첫 파병부대는 수도사단[맹호부대]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병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무슨 소리냐 모든 전투는 해병대가 선봉이다.

해병대가 먼저 침투한후에 본대가 들어가는것 아니냐...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해병대도 해병2여단[청룡부대]를 파병하게 됩니다.

그리고 9사단 [백마부대] 까지 파병을 하게 되지요.

 

당시 파월 한국군의 개인화기 무장은 M1 개런드 혹은 M1 카빈이었습니다.

M1 개런드 

 

 

M1 카빈

 

그런데 채명신 당시 파월사령관이 보니 미군들은 죄다 M16을 들고있었다는 것입니다.

M1 가지고 어떻게 AK47과 붙어라는 것이냐....우리도 총을 바꿔달라고 미군지휘부를 

설득을 시켜서 파월한국군도 전원 M16을 지급받게 됩니다.

 M16

 

Ak47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서 만행을 많이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느냐면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니네도 베트남가서 만행을 그렇게 저질러놓고도

매번 우리에게만 일제시대 만행이라고 떠들어대는건 아니지 않냐...이런 취지였었습니다.

 

만행이라고 표현을 하니까 좀 뭐하지만 전혀 없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는 그 사실 또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처럼 그렇게까지 심한 만행은 아니었습니다.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것도 아니고 그걸 자랑한것도 아니며 그런 행위를 찬양한것도 아니었습니다

월맹군과 교전시 일부러 포로를 잡지않고 전원 사살해버렸다던지...

아군을 죽이고 도망간 월맹군을 쫓다보니 마을에 들어가서 누가 월맹군인지 마을 주민인지

몰라서 사살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잔혹한 고문이나, 강간도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기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도합 80여건 피해자수는 

사망자 부상자 포함 9000명정도로 추산을 하고 있습니다.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우리나라 정부는 인정했습니다.

 

DJ는 양국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는 정도로...

노통은 우리 국민들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이 있다는 정도로...

그리고 문통도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

라고 밝혔습니다. 사실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베트남정부가 동족상잔의 

내부 문제가 부각되는게 부담스러워서 난색을 표해와 사과의 수위가 유감으로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우리 군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 가서 대민지원사업과 평정사업을 

했던것도 사실입니다.

대민진료 350여만명, 식량 2만여톤, 의류 46만점, 농기구 6400개, 가옥 및 교실 3300여동,

교량 132개, 태권도 보급 90만명, 경로및 어린이잔치 6800여회, 연예공연 2300회 등

 

각설하고...

한국은 그렇게 파병을 해서 무기도 새롭게 지원받고 월맹정규군과 베트콩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한국군이 파병을 왔지만 막상 미군은 시큰둥 합니다.

장비좋고 피지컬좋고 지원좋은 본인들도 이렇게 애를 먹는 베트남에서 

15년전 6.25전쟁으로 쫄딱 망해버린 그런나라에서 파병을 온거라 믿음직스럽지도 않고  

"얘네들이 뭔 도움이 되겠어?" 그런 생각들이었던거죠

그래서 파월 초반에는 미군에서도 후방지원이 그리 변변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12년간 수백만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 천명의 전사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월남군 그리고 미국까지 절망을 안겨준 월맹군의 요새 빈딩성 늪지 해안지역을

한국 해병대가 단 두시간만에 점령을 해버렸던 것이죠.

미국이나 프랑스 에게는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때 경험]

 

처음에 파병을 갔을 땐 한국군도 약간 어리버리 했을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중 한국군은 베트남전쟁에서 최대의 피해를 입게되는 상황을 맞습니다

바로 짜빈박 전투인데요 당시 한국 해병대는 월맹정규군과 베트콩등의 활동이

많은 지역 한가운데에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후 그곳으로 유인해서 섬멸하는 작전을

시도하려는 도중에 습격을 받은 전투입니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사상최악의 피해를 입었던 전투였습니다. 

전사 32명, 부상 30명이었던 전투죠. 

대대 군의관이 복부에 총을 맞았으면서도 부상자들을 치료해야했던 그런 처절한 전투였었습니다

이로인해 청룡부대는 한동안 모든 작전이 중지되게 됩니다.

 

이 짜빈박 전투 이후로 한국군은 확연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베트콩이나 월맹군은 베트남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스러운 전투에 능하다는걸 알고

한국은 그때부터 수색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숨어서 공격하려는 적들과 어디 숨어있는지 찾아내서 공격하려는 한국군과의 

피말린 전쟁이 시작된것이죠.

 

이 전투 방식이 미군과 달랐던 것입니다.

나중에 미국과 달리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그렇게 잘 싸웠던 이유에는 전투방식이

달랐다고 미 의원국방위원장이 증언을 하게됩니다.

한국군은 일단 공격을 받게되면 부대를 2개 혹은 3개 이상으로 나뉘어

공격을 해온 지점을 포위 압박하면서 공격을 해들어가 전멸을 시키는 전술인데

미국은 공격을 받으면 일단 뒤로 물러나서 포병이나 공중지원을 요청한뒤

공격을 들어가니 이미 그 자리엔 적들이 없을수밖에 없다...라고 말입니다.

 

미국은 분명 이런식의 게릴라 전투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중동에서의 전쟁은 미국이 완전 승리하는데 그건 사막에서는 숨을 때도 없고

험준한 지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폭격만으로도 전쟁을 승리할 수 있는데

정글이나 높은산등 지형이 험악한 곳에서는 그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프카니스탄이나 베트남에서 미국이 재미를 못본게 그런 이유라는 것이죠.

 

반면 한국군은 6.25때 빨치산 전문 담당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후 한국지형에서의 진투훈련만 해온 병력들이고요.

베트남 정글도 적응이 되면서부터 한국군에게 상대가 안된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군에게 요새면 요새, 위장마을이면 위장마을, 땅굴이면 땅굴

전면전도, 기습전도...다 털리게 됩니다.

노획한 월맹군이나 베트콩 문서를 보면 가급적 한국군과의 교전을 피해라고 되어있었다죠

특히 한국군은 백병전에도 능하니 비무장한 한국군과도 함부로 덤비지 말라고 쓰여있었습니다

한국군과 조우시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한 교전을 무조건 피해라고 교전수칙이 내려오니

당연히 한국군 주둔지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지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군이 주둔하던 베트남 중부지역이 전투가 가장 발발하지 않은 지역이었는데

주요거점이 아니다거나 중요군사목표 지역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한국군이 주둔해서

전투가 없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미군중에서는 한국군 주둔지로 가거나 그 부근으로 배치를 받으면 안심을 했다고하죠.

 

베트남전 한국군의 사상자 비율이 평균 1 : 24 였으며 미군은 1 : 9 정도였다고 보면

한국군이 얼마나 잘싸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군은 최대 1 : 100 까지의 전투도 했었다고도 하죠.

미군보다 훨씬 열악한 장비에 열악한 지원에 열악한 인원으로 미군이 수개월동안

하지 못했던 불가능한 작전들을 몇시간안에 착착 해내는걸 보면서 한국군이 

무섭다고까지 했었으니까요.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이나 한국에게나 서로간에 아픔이고 치유해야할 상처인거죠.

다행히 우리나라는 과거를 사과하기는 커녕 인정도 안하는 어떤 뻔뻔한 나라와는 달리

거듭 인정하고 유감의 뜻을 밝히고 여러가지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민국은 비전투병력 포함 총 30만명이 파병이 됐으며

항상 5만명 정도의 군대 규모를 베트남에  유지했었습니다.

이중 5000여명의 군인들이 전사했거나 실종됐고 7000여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사하신 모든 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에는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살벌했던 짜빈동 전투에 대해 글을 써볼까 합니다.

참고로 이 짜빈동 전투는 1967년 2월 14일 15일 양일간 짜빈동에서 벌어진

한국 해병대와 월맹정규군과의 전투입니다.

월맹군의 3개대대 이상의 병력 2400명과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 제11중대와 붙은 전투인데요

당시 제11중대 인원은 장교 10명 사병 284명 뿐이었습니다.

 

15일 새벽4시부터 시작된 이 전투에서 청룡부대 제11중대는  적 303명 사살, 포로 2명의 전과로

승리했지만 아군은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희생을 치뤄야만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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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7-31 19:44:44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정도의 글은 프차에 올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도 좋은 글인데 그 부분이 아쉽네요.

우리 집안에도 베트남전 다녀오신 분들이 계셔서 저 멀리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Updated at 2021-07-31 20:05:36

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린 승전국이라 사과는 필요없다
그리고 지들은 자국민에게 더하면 더한 만행이 드러날까 무서운점도 있었고
베트남국민은 자부심이 대단하죠 유일하게 미국을 이긴나라 그리고 중국도 이긴 나라라고요
친구 작은 아버지가 참전하셨다는데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엄청 화내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Updated at 2021-07-31 20:22:37

저희 아부지가 백마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파병을 다녀오셨습니다.

복무하면서 가져온 월남 돈이고 우표고

어릴때 몰래 제가 다 엿바꿔 먹었지요.

워낙 어린시절이라 기억은 안나지만

엄청 혼났을거라 추측합니다.  

 

2021-07-31 20:24:57

잘읽었습니다. 제 외삼촌께서 당시 전투병으로 참전후 돌아오셔서 그돈으로 집사고 택시면허 사셔서 살아오셨네요. 저희집같은 사례가 많지싶습니다. 저희 외삼촌도 명절때 전쟁얘기 1도 없으셨던게 기억납니다.

2021-07-31 20:42:32

잘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매우 기대가 됩니다

2021-07-31 20:44:02

재미있게 끝까지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21-07-31 21:03:59

베트남의 자존심같은거죠.
짜빈동전투도 베트남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한국과 전쟁을 떠올리기 부담스러울거애요.

2021-07-31 21:06:44

재미있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2021-07-31 21:10:44

많이 배웠습니다

2021-07-31 21:40:21

 파월 장병들만 불쌍한 파병이였죠.

그 당시 자신들은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 급여가 월 50불, 진실은 미국이 파병 댓가로 지불한 급여는 인당 월 500불 그중 90%를 박정희가 슈킹하고 10%만 지급한거죠.

월남전 기간동안 파월된 장병의 수가 총 30만을 넘는데 얼마나 해 처먹은건지 원...

고엽제 피해등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2021-07-31 21:41:24

이런글 넘 좋아요~~~!!

2021-07-31 21:57:41

베트남은 동양의 아프가니스탄인듯! 아시아판 제국들의 무덤...

2021-07-31 22:01:47

잘 읽었습니다.
80년대 해병 복무 당시, 준위, 일등상사 분들 중에 월남전 전투경험 있으신 분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 전해듣곤 했었습니다.
때로는 해병대 공식 전사와는 조금 다른 뒷 얘기도 있곤 했지요.
아무튼, 해병대 공식 전사에는 단 한번의 패전도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긴합니다.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Updated at 2021-07-31 22:36:38

집안에 꼭 한 두분은 참전한 이력이 있더군요... 워낙 가난해서 전쟁터에서 받은 생명수당이 국내로 들어오면 모든 가족을 살릴 수 있었던 때라... 확실히 미군들하고 한국군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세부 전술은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군은 위험이 생기면 일단 피하고 무차별 포격 후 들어가는데 반해 한국군은 게임방식을 베트콩과 월맹군식으로 맞대응했더군요... 적군과 똑같이 정글에 적응해서 지역을 평정하고 점령하는 땅따먹기 방식... 미군은 최근 이라크, 아프칸 전쟁까지도 파이어베이스 설치하고 기지만 지키는 전술이라 밤엔 적군 세상

2021-07-31 22:44:11

군대 있을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짜빈동 전투^^
우리 대대 주임상사는 전쟁도 안해본게 군인이냐고
하면서 선임하사등 엄청 갈구었는데 아무도 찍소리
못했습니다.

2021-07-31 22:44:23

가장 큰 이유가 전쟁중에 미국 정권이 교체되고 후임 국방부장관이 전쟁을 들여다보니....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케네디가 암살당했지만 후임은 같은 민주당의 존슨(LBJ)였고 국방장관은 케네디가 임명한 로버트 맥나마라가 유임되어 베트남 전쟁에 본격 개입했습니다.

2021-07-31 23:36:17

대략적으로만 알던 내용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이런글 너무 좋습니다 추천!!

2021-08-01 06:13:06

월남전 파병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이슈입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군사적으로도 그렇고 

남북관계에서도 그렇고

 

우선 한국이 산업화의 자금을 마련한 것이 월남전 파병입니다. 한일수교가 아닙니다.  이에 관한 연구보고서가 있으니 설명은 생략하고.

군사적으로는 한국군 현대화가 월남전에서 시작됐습니다. 위에 상세하게 설명했으나 역시 생략.

남북관계라면 60년대 말 남북간의 각종 군사적 충돌(일상화한 휴전선 교전, 1.21 김신조 일당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실미도 문제, 푸에플로 사건 등등)과 월남전 종식 후 최초의 남북공동성명 

2021-08-01 08:48:57

짜빈동 전투는 유명하죠

2021-08-01 09:50:56

처음 파병된 청룡부대와 백마부대원의 대부분이 초기에 괴멸될 정도로 타격을 입고, 추가 파병이 결정되어서 맹호부대등이 가게 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보네요...

Updated at 2021-08-01 10:38:44

 저희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분이 고엽제로 고통스럽게 살다 코로나 시국에 돌아가셔서..제 친구네 가족도 그렇고.... 월남전은 늘 마음 아프게만 다가오네요. 

2021-08-01 13:27:45

좋은 역사적 지식 배우고 갑니다

2021-08-01 13:46:21

긴 글이지만 재밌어서 단숨에 다 읽었네요.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

2021-08-01 17:29:56

 아...이런 사연이 있었네요. 웅장하고 뜨겁고 쓸쓸하고 슬프고 고맙고...

2021-08-01 18:31:36

덕분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상식이 넓어지네요.  감사합니다. 

짜빈동 전투도 흥미가 갑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또 참고로 베트남 전쟁시 북한군도 교관으로 참여하였는지도 부탁드립니다.

Updated at 2021-08-02 12:14:53

그때가 국민학교 3학년  (지금은 초등학교) 때였는데

대구라도 학생이 하도 많아서 건물증축기간에는 

큰 강당겸 체육관에 한학년이 오전반 오후반 으로 나누어 모아 수업을 했습니다

강당 뒤에는 큰 그림으로 퍄견된 부대 휘장이 걸려있어고요

이때 반이름을 백마, 청룡, 맹호 등 월남파병된 이름을 따서 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군가도 많이 불렀고요

50년 지난 지금도 아직도 입에 "맹호부대용사들아..."하는 가사가 떠오르네요 

그때는 항상이기고 있다고만 들었는데 나중에 월맹에게 

사이공이 함락당한다 하니 너무이상 하더군요 

 

외사촌형님이 지금까지 몃십년째 고엽제 후유증으로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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