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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차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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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의 구석구석]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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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8-13 11:30:01

어릴때 명절이면 '이 나라에 진정한 애국자는 이승만 박사 뿐'이라고 일장연설 하는 분들이 계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도 대체로 그러했지요. 나이가 들면서 이승만이라는 위인의 활약상?을 알게되고 또, 그를 진정한 애국자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친척)분들이 그닥 존경받을 만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경우들이 많아서인지 저 역시 부정적인 잣대로 평가해 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판 하려거든 먼저 제대로 알고나서 하자'는 생각이 점점 자라게 되면서 최소한 책 두어권 정도는 읽어보고 판단하려다 보니... 독서리스트만 무거워지고 진도는 안나가고ㅜ.ㅜ

인알못, 역알못이었던 제가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몇년이 될지 몰라도 한국기독교의 초기 역사, 그리고 식민사관 과 관련된 내용은 계속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 글 역시 그런 흐름 가운데 '이승만'이라는 개인에 대한 잘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조명해본 글입니다.

※ 아마추어의 글이다 보니 '학문적' 관점에서 틀린 점도 있겠고, 논란이 되는 내용의 한쪽만 서술하게 될 가능성(고의던 실수던 간에) 도 있습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은 겸허히 받겠습니다.

 

 

우남(雩南) 이승만

혹자는 國父라 부르고 싶어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局部라 부르고 싶어할 그 인물!

위키에 등록 되어있는 그의 직함을 찾아보면...

대한민국의 개화파·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교육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이보다 더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분이 또 있을까 싶네요. 해방이 되고 나서의 행적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배웠던 적 도 일부러 찾아본 적 도 없었지요.

그러다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대해 찾아 보던 중 20대 때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청년 이승만의 행적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대로 정리해서 올려보고자 했었는데... 황금같은 여름휴가가 벌써 절반을 넘어가고 있기에 오늘 안올리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라 급히 써 봅니다.

 

1894년 청일전쟁, 10년 뒤인 1904년 러일전쟁.

이 두 전쟁은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지만, 우리는 졸지에 전장(戰場)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던 억울한 사건들이도 했습니다. 이 두 전쟁을 겪으며 조선의 민중들은 나랏님과 군인들 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허무한 현실 속에서 서양에서 들어온 교회에 보호를 기대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1894년 이전, 세례교인 180명이었던 장로교는 1896년, 2000명으로 성장하였고, 1906년 이후 56,000명으로 급성장하게 된 것이죠. 청일전쟁 중 가장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평양에서 교회는 피난민 수용소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렵 교회 입구에는 십자기(十字旗) 혹은 성조기(星條旗)는 내거는 사례가 나타났으며, 이 후 동학농민군이 지나다가 외국인을 만나러 교회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 민중들 뿐 아니라 유식계층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이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힘을 빌어 개혁/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지요.

우리가 잘 아는 독립협회는 서재필, 윤치호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는데, 이후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 등의 대중집회를 거치며 점차 체제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에 수구세력은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결국 정부는 1898년 12월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를 해산시키면서 독립협회의 개혁운동도 중단시켰으며 독립협회 지도자들도 체포하기 시작하였는데, 수구세력들은 1899년 1월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이승만의 체포를 비롯하여, 1904년 초까지 몇차례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내면서 개혁파를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투옥되기 전부터 이승만은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지만 아직 기독교인은 아닌 상태였습니다. 이승만이 체포되자 선교사들은 그의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감옥에 기독교 서적과 교양서적을 넣어주며 그를 도왔다고 합니다.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도 이에 동참하였고, 이를 계기로 한성감옥에는 도서실이 마련되었다죠. 이승만을 비롯하여 함께 투옥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고, 이후 1904년 러일전쟁 전까지 대부분 석방 되면서 이때부터 관료사회에 까지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점점 마수를 뻗쳐오는 일본 및 서구열강의 세력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서양의 선교사들은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승만 역시 이때만 해도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활발히 움직이던 열혈 애국청년이었겠죠.

 

이후 시간은 흘러흘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구미열강들은 파리에서 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회의를 개최하죠. 잘 알려진 '파리 강화회담' 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들이 패배한 동맹국에 관련하여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열린 회담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로 보였겠죠. 그러나 실상은 열강들의 이권만을 위한 회의가 되었고 독립을 꿈 꾸던 수 많은 식민지와 민족갈등을 겪고 있던 곳들은 무시 됨으로 인해 이후 많은 나라들이 사회주의로 돌아서는 등, 제2차 세계대전의 밑거름이 되어버린 자리가 되어버렸지만 그런 실상을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인국민회의라는 단체에서도 참석할 대표로 민찬호, 이승만, 정한경을 선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그 때 주축이 되었던 신한청년단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단원의 상당수가 상해한인교회의 출석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이승만 역시 당시 신한청년단의 단원은 아니었지만 이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합니다.

상해한인교회와 어떤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까지는 조사하지 못하였지만, 그 시기 이승만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1903년 초 하와이에 도착한 농업이민을 시작으로

한국인의 미주지역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 8월 이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역 7,400여명이 하와이 및 캘리포니아 지역에 도착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특히 감리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감리교 차원에서 적극 홍보하였다고 함)

하루 10시간씩 채찍 아래서 죄수처럼 노동을 해야했지만 한국인들은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였고, 특히 2세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특유의 교육에 특화된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합니다. 당시 세워졌던 학교(한인중앙학교)의 2대 교장으로 1913년 이승만이 취임하게 되죠.

이렇게 뭉친 한인해외교포들은 당연히 임시정부 뿐 아니라 서간도 지역의 동포들에게도 구제금을 보내는 등 민족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업을 위해 대한인국민회(1909) 등 상호부조와 민족운동을 위한 단체들이 점차 조직되기 시작하였는데, 박용민이 이끌던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의 지지자를 규합하여 1921년 대한인동지회를 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슬슬 먹구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데 민감했던 이승만은 감리교에서 독립하여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학교와 교회를 만드는 데 이어 교민조직까지 만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와이 한인 기독교 및 교민사회는 크게 분열되는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생활해보신 분들은 교민사회의 분열이라는게 얼마나 큰 혼란과 고통인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한인 장로교인들은 1906년 부터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1909년 클레어몬트에 저렴한 기숙사를 열고 한인 유학생들의 학업을 도와주면서 감리교와 장로교의 연합교회로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24년 이승만이 로스앤젤레스로 오면서 이 교파연합이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교파를 넘어 연합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도 또 영속적이기도 오려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파괴왕'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군요.

 

또 다시 세월이 흘러 식민지 시대의 막바지&태평양 전쟁의 시대가

한반도를 덮쳐옵니다. 이때부터 독립운동史에서의 이승만의 활동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의 활약?은 눈에 띄는 부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1936년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 까지는 일제의 식민지정책도 점점 강하고 분명하게 드러나던 시기이다보니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던 시기였지만,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몰래 추진하던 단체가 있었으니,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입니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의 국내조직으로, 친목단체라는 겉모습과는 달리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실력 배양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의 국내조직으로, 겉으로는 산업진흥을 표방했지만, 속으로는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국내동지 확보, 계몽활동 전개를 통한 독립운동 지원이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1938년 즈음, 이 두 단체는 모두 일제에게 발각이 되었는데, 관련자들 대부분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다 보니, 총독부도 이를 계기로 이들을 '전향' 시켜 이용하고자 협박과 회유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검거된 지 6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이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과 교회의 변질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후 '친일파 청산' 문제에서도 이때의 사건이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보다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생각보다 다양하게 활동하였던 열혈 애국청년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적극 지지하는 미국쪽 지지세력들, 특히 한국에서 활동한 상당수 원로선교사들로 부터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위원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받게 됩니다. 태평양전쟁기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과 국민회 중심의 反이승만 계열이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였는데, 선교사 및 그 자녀들의 입장이 어느정도 반영된 결과인 듯 합니다.

 

너무 무거운? 내용들만 있는 것 같아 양념으로 한가지...

3.15 부정선거의 주역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은 아는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이승만(장로), 이기붕(권사), 최인규(집사, 내무부장관)...

홍보역할을 담당한 '목사'도 있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공식직함은 아니었던 것인지 다시 찾지 못하여 적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 입니다.

 

논문도 아닌지라 따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은 곧바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시작점이 되고 있기에 아직도 여러가지 연구와 평가가 진행중이겠고, 저의 개인적인 판단 역시 당분간 바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친일역사의 청산'의 시작과 끝이 바로 이승만이고,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소리들이 어느정도 모이고 나서야 제대로 된 청산 작업도 시작될 수 있다고 봅니다. 미래를 향한 제대로 된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제대로 평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물들,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첫 걸음이 되겠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잘못된 역사를 고치겠다면서 '괴물을 잡기 위해 또 다른 괴물과 손을 잡는' 그런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도서 : 한국 기독교의 역사 I, II (개정판)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 기독교문사

 

(엉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서명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Veritas liberabit vos.
ἡ ἀλήθεια ἐλευθερώσει ὑμᾶ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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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8-13 11:28:06

선추천 후감상..

 

이승만을 국부라 칭하는 최재형의 마음으로 읽어보겠습니다..  ^ ^;;

WR
2021-08-13 11:33:27

감사합니다. 참고로 '국부'에는 두 가지 메뉴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2021-08-13 11:34:27

 본문 중간에 센스있는 오타가 있으시네요.

 

제가 사는 성남시와 위례 신도시 사이에 약진로라는 도로가 있는데요. 여기 새로 지어지는 전철역 이름을 우남역으로 하려다가 반대에 부딪혀서 백지화되었다는 소식이 기억납니다.

WR
2021-08-13 11:35:20

혹시 방금전 제가 수정한 부분이 아닐런지요... 

2021-08-13 11:35:49

어쩐지...

WR
2021-08-13 11:36:59

매의 눈을 가지신거 인정~

2021-08-13 11:37:50

제대로 읽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2021-08-13 11:42:17

 "3.15 부정선거의 주역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은 아는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이승만(장로), 이기붕(권사), 최인규(집사, 내무부장관)..."

ㅜ.ㅜ 

WR
2021-08-13 11:50:41

그 흑역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기에
'ㅇㅇ시를 하나님께~' 라는 말들이 계속 나오는 것이겠죠

2021-08-13 11:48:18

앗, 오타잡을 기회가^^.

 

저는 박정희 대통령은 나름대로의 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냥 왕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2021-08-13 11:52:29

이승만도 공은 있습니다. 단지 과가 수없이 많기에 없어보이는거죠.

WR
2021-08-13 12:13:22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치켜세우고 싶은 사람들 조차도 그의 공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거 같습니다
까면 깔수록..

그런데 '공'의 재평가 및 홍보도 하지 않으면서 국부로 세워야된다고 말하는 것은 말(言)이 아니라 말울음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저는 청년 이승만에 대해서는 재평가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지더군요 비록 그 이후 파괴왕 테크트리를 탔더라도 말이죠

2021-08-13 12:17:27

저도 청년 이승만은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는게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WR
2021-08-13 12:22:13

그런데 우리가 왜 청년 이승만을 이렇게 홍보? 해주고 있는 걸까요?

이런 것들이 다 정리가 되고 나서야 '反共卒業' 같은 책도 나올 수 있겠지요?

2021-08-13 20:05:23

청년 이승만을 재평가해야 한다면 청년 박정희도 재평가 해야죠. 박정희는 1939년에 문경공립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기도 했지만 딱 그때뿐입니다. 곧바로 때려치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결국은 만주군 장교로 일본제국을 위해 복무하게 되죠.
이승만이 아무리 청년시절에 잘했더라도 결국엔 이나라 초대 대통령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헌법을 두번이나 멋대로 뜯어고치고(발췌개헌과 저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로 종신집권을 획책하다 4.19혁명으로 쫓겨났으니 청년시절로 한정하더라도 재평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WR
2021-08-14 00:48:19

바로 그것입니다! 빨치산 행위까지 했다는 박정희의 행적에 대해 그를 숭상하고 있는 무리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떠받들고 있으니..

2021-08-13 14:23:4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도 점점 변하고 있긴 합니다. 오래전 진보학계에서는 청년기부터 해방전까지의 행적도 부정할 정도로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는데 많이 달라졌습니다.
해방후에 귀국시 남한에서의 위상이나 대접을 보면 넘버원이죠. 그건 어찌됐든 청년기나 그 이후의 횔동을 긍정적 또는 다른 덕립은덩가들 만큼 인정해주는 공감대가 정치인 지식인 들 및 인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로 먹은게 아니죠.
초기 청년 개혁가 시절의 활동은 목숨을 담보로 할만큼 위험했고( 고종은 전제정에 위배되는 이들의 활덩을 아주 무서워했기 때문레 강력하게 차벌했습니다. 뒤끝이 심해서 개화피나 덕립협회장을 사형시켜버렸죠.물런 고종이 무수히 안팎으로 왕권 위협을 받아서 노이로제에 시달린 까닭도 있긴 하지만요)
미국교회(주로 남부 장로, 감리)의 도움도 많이 받고 미국사회에서 정착하면서 빅용만 등 다른 지도자들과 충돌하고(야비한 짓도 하죠) 독립운동을 분열시킨 책임도 크지만 중국이니 힌반도에서 벌어졌던 상황 즉 지도자들 및 운공단체의 분열과 뒷통수치기는 상수야서 딱히 이승만만 비판하기도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해방후 그 많은 정치 사회단체가 난립한것도 그 예이지요)
아무튼 저는 해방전까지의 이승만 평가는 굳이 따지자면 공이 더 크다고 봅니다.

WR
Updated at 2021-08-13 14:33:25

어쩌면 이승만을 부정하는 것이 진짜로 부정 할만해서라기 보다 이념(혹은 정치적목적)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 역시 지양해야겠지요 그리고 해방전 까지의 공 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건국절이니 건국의 아버지니 하는 무리들에게 추앙받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과대평가 되었다에 한 표 입니다

2021-08-13 15:12:19

박정희 숭배하는 인간들까진 어떻게 봐줄만 합니다만 이승만은 차원이 다르죠. 이승만 이놈새퀴 부관참시가 마땅합니다.

WR
2021-08-13 15:53:37

반민특위 무력화, 전쟁 나고나서 한강다리 끊고 도망, 3.15 부정선거 등등
대통령 되고나서의 행적들만 보면 화 나는게 정상이지요

그럼에도 일본 및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써왔던 독립운동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도 재평가가 필요할 것 같아요
그동안 두 번의 군사정권 그리고 이명박근혜 정권을 지나 오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이승만에 대해 잘 모르는 이유는 (그들조차) 그의 행적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생각 됩니다

2021-08-16 20:55:42

WR
2021-08-16 20:56:50
2022-11-26 20:35:09

 탈리샤샤님 글에서 타고와 잘 읽었습니다. 위에 파고바지철철님의 글도 그렇고 평가받을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한겨례 사장을 지내셨던 송건호 주필의 "서재필과 이승만"을 보면 이승만이 어렸을 적에도 뭐랄까 좀 영악하고 이기적인 모습이 있었다고 쓰셨던 걸로 기억을 해요..ㅎㅎ

WR
2022-11-26 23:03:53

영악 정도가 아닐듯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보고자하는 후손들에게 너무나 혹독한 평가를 받고 있다보니 깔땐 까더라도 다시 봐줘야할 부분은 다시 봐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까야하는데 그동안 몰라서 못깠던 부분들은 계속 찾아내야한다! 가 제 속마음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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