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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병주 -허영심이 만들어낸 사람 좋은 어릿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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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4-04-22 18:20:54

 

https://youtu.be/yz_AW4XtyK0?si=EcfN_DJwW2uCMb7b

 

위 동영상을 접하고 입맛이 써서 모처럼 진지하게 글을 써봅니다. 

 

 활자로 된 것이라면 무엇이던 남독하던 어린 시절에, 책 많이 읽던 외삼촌의 책장에서 찾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을 정신 없이 읽었습니다. 이병주는 그야말로 글을 술술 읽기 쉽게 잘 쓰는 타고난 문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읽기 어렵더라도 생각할 여지를 만들고 독특함이 있는 글들을 사랑하게되지만 책을 막 읽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이만한 길잡이가 없죠. 그 뒤로 관부연락선, 행복어 사전 등의 굵직한 장편들, 그리고 수십편의 중단편들도 구해지는대로 읽었습니다.  

 

 이 정도로 어떤 작가를 깊이 읽게되면 보통은 더 좋아지기 마련인데, 저는 반대로 점점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딴은 그럴 만도 합니다. 이병주는 대한민국 지성사에서 대표적인 어용지식인이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박정희를 비판하다가 옥고를치르고서도 나중에는 전향하여 친정부적 스탠스를 가졌고 전두환과는 막역한 사이로 신군부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 후반부에  꽤 많은 재산을 모아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기도 했죠. 그러나 나이가 들면 이런 인생을 산 사람들에게도 어떤 피치못할 곡절이 있었겠거니 하면서 평가가 부드러워질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병주는 그런 나이듦의 관용으로도 자리를 찾아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습니다. 저한테는요.

 

 이병주의 소설을 읽다보면 가장 빈번하게 부닥치는 것이 천재 컴플렉스, 영웅 컴플렉스였습니다. 이병주는 다작하는 작가로, 그런 작가들이 피할 수 없는 작가와 작중인물의 미분리를 겪는데, 그의 소설에는 어렸을 때부터 나폴레옹을 의식했다는 에피소드가 빈번하게 나옵니다. 이병주는 당대로서는 꽤 똑똑하고 가방끈이 긴 지식인이긴 했지만, 자신이 바라는 만큼 똑똑하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인격이 미숙할 때 "돋보이고 싶어서" 벌이는 일은 뻔 합니다. 흉내를 내는 것이죠. 읽지도 않은 책을 읽는 척 하고, 알지 못하는 사상을 아는 척하면서 주워 삼키면서 코흘리게들에게 큰 사람인 것처럼 메소드 연기를 하는겁니다. 메소드연기는 자신이 마치 그 연기의 대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는 연기죠. 동네 코흘리게에거 쇼콜라라는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면서 "이제 너도 쪼매난 지식인이 되었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고, 소설 속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협소설의 인물들처럼 과장되었고, 심지어 작중에서 작가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1.5배쯤 부풀려서 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혹시 고도의 야유는 아니었을까 꼼꼼히 살펴도 그런 흔적은 발견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허세가 순진한 사람들에게 먹힙니다. 아직 경험이 일천해서, 혹은 충분히 공부한 경험이 없어 모든 것을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자격이나 지위, 혹은 양으로 밖에 평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요. 이병주는 확실히 그런 점에는 강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내지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을 다녔고, 대학교수였으며 언론사 주필로서 2천편이 넘는 사설을 남겼고, 소설가로서는 베스트셀러를 포함한 80여 편의 작품을 창작했으며 말년에는 대통령의 측근으로 사회적 지위를 누렸으니까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며 1년에 600권 정도의 책을 읽고 서평을 내기도 한 다독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러니 코흘리게들이 보기에는 대단해보였기도 하겠죠. 

 

 그러나 그의 그러한 외관에 숨겨진 내면은 남루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푸코의 사상을 주제삼아 멋드러진 평론을 한편 쓰고 싶다"는 어이없게 천박하여 오히려 순수해보이기 까지 하는 백치미를 보이는가 하면(단언컨데 이 인간은 푸코가 하는 이야기가 뭔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소설에서 간간히 자신을 실명으로 언급하면서 과대포장하고, 은근히 여성편력을 자랑하는듯한 암시를 줍니다.(이병주는 키가 160대 초반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환상이 빠짐없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지리산의 두 주인공은 작가가 소싯적에 성취하지 못한 엘리트코스(일본 내지 명문고-제국대학 유학 코스)를 밟았거나 그 이상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수재들이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는 당시에 만권 이상의 장서와 수 천 장의 레코드 컬렉션을 가진, 문화적 취향과 지식교양, 그리고 부를 두루 갖춘 르네상스형 인물이었으며,그가 그린 젊은 대학생들은 뭔가 모르게 미모의 여성들과 교제가 쉬운 매력을 풍기는 젊은이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당시 남성들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성 비하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인물들로 작가는 이들을 별  거부감 없이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너무 거칠게 단순화한 면이 없진 않지만 제게 이병주의 소설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지적 허영에 목마른 초보독자들을 위해 지식인소설로 가장된 무협소설이라는 겁니다. 

 

 거기다 표절이나 피상적 아이디어의 도용 문제도 있습니다. 나중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등장했을 때 지리산과 관련하여 표절시비가 붙은 적이 있습니다. 지리산이 태백산맥보다 먼저 출간이 되었으니까요. 문제가 된 것은 작중 남부군의 활동에 대한 핍진한 묘사였습니다. 실제 경험자들의 구술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들과 생활상, 생리가 묘사되어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곧 이병주의 남부군 묘사는 실제 남부군 출신이었던 이태의 미출간 원고가 후일 남부군으로 출판되면서 표절임이 밝혀졌었습니다.  이태의 육필원고가 출간되기 한참 전, 출판사를 기웃거리던 이병주가 원고를 접하고 무단으로 도용한 것이었죠. 오히려 조정래는 그저 참고자료로 활용했을 뿐 직접적인 표절은 없었습니다. 그의 대뷔작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도 그 당시 유명했던 로렌스 더럴의 알렉산드리아 사중주의 분위기를 아무 개연성 없이 따온 것이 의심 됩니다. 이 소설은 박정희와 각을 세우다 경험했던 재판과 옥중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인데 이 소설의 무대가 하필 북아프리카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진 도시에서 벌어져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소설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그저 낯선 외국 도시로, 꼭 배경으로 등장해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병주가 쓴 글이라는 것이 대저 이런 수준입니다. 그러니 평단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대중소설가로 머물렀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중에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광범위한 표절로 위명이 깍인 문학사학자이자 비평가인 김윤식은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논문모음에서 이병주의 지리산을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평가는 대충 이랬습니다. "역사주의나 리얼리즘의 골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허깨비들의 말장난"이라고요.(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비슷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이병주를 지금도 한국문단이 가감없이 치부를 밝혀야 할 흥미로운 작가라 생각합니다. 이병주의 삶과 멘털리티에는 한국 근대화 세력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있으니까요. 제가 이병주를 싫어하는 개인적인 이유는, 허영심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부작용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부풀리고 속이면서 정보를 왜곡하는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보와 감정이 건강한 방식으로 흐르는 일을 크게 방해합니다. 지금 SNS시대의 이 불행한 광경, 사람을 스팩으로 평가해서 화려한 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이 시대, 학벌, 직업, 부를 위해서라면 자존심과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마저도 저버리는 세상에서 이병주를 반면교사해서 얻는 교훈은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병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박정희 숭모회만먕 이병주를 찬양하기 위해서 모임 씩이나 조직한 일부 봉사같은 얼치기 학계, 문화계 인사들의 행동을 접하니 쓴 웃음만 입가에 멤돕니다. 태백산맥은 읽으면서 지리산은 읽지 않는 것이 원전은 읽지 않고 아류를 읽는것이라는 말에 헛웃음만 나옵니다. 허세가 없는 인생은 너무 서글프다고요? 아닙니다. 허세를 부려야 하는 삶이 서글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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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2024-04-19 12:19:59

이런 자들의 계보를 이인화, 진중권 같은 이들이 계속 이어나갔죠.

WR
1
Updated at 2024-04-19 12:51:31

이인화는 확실히 모든 면에서 이병주과죠.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하고 곡학아세했다는 점에서는 진중권도 마찬가지고요. 

3
2024-04-19 12:50:54

진중권이 이인화 까면서 떳던 것도 코미디죠^^ 그놈이 그놈인데 말이죠^^

1
2024-04-19 12:23:53

한국사회가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자격이나 지위, 혹은 양으로 평가하는 사회이긴 하죠... 

WR
2024-04-19 12:48:22

이렇게 감식안이 없는 사람들이 많으니 사기군들이 많을 수 밖에요.

1
2024-04-19 12:42:11

지리산을 읽을 기회없이 남부군을 읽었고, 최수종 배종옥이 출연한 드라마 <행복어사전>은 본 것 같은데도 가물가물한 게 아득한 8,90년대 같습니다. 그때는 그랬던 사람들이 많았지요.ㅎㅎ

WR
2024-04-19 12:49:28

행복어사전이 어쩐지 제목이 낯익긴 했는데 드라마로 만들어졌었군요.

1
2024-04-19 13:06:59

제가 이런쪽으론 밑천이 얕아서 처음 들어보는 작가입니다. 지리산 정도만 제목을 들어봤네요.

 

늘 rockid 님 글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

WR
2024-04-19 13:29:32

흥미로운 작가이긴 합니다. 반면교사로서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24-04-19 13:08:12

책과 담쌓고 살아오다보니 안읽었어도 되는 작가와의 인연도 안생기는 장점도 있군요

WR
2024-04-19 13:30:07

안 읽어도 후회없을 작가이긴 합니다.

1
Updated at 2024-04-19 14:04:43

허세라는건 예나 지금이나 늘 존재하기 마련이긴 합니다만 이분의 경우 허세도 능력이라고 봐야 하는건가요? 뭔가 잡다한 것들이라도 알아야 끼워라도 맞추고 말씀하신거 처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먹히는거니깐요.
영어와 불어에 능통하고 이런저런 지식도 해박한거 보니 영어도 모르면서 타임지 들고 다니는거 보다는 쬐끔 나아보이긴 합니다만. 소설이나 창작도 허구를 빙자한 허세가 들어가있긴하죠. MSG라고도 하더라고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여전에 어디서 본 건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읽었다고 거짓말하는 책이 조지 오웰의 1984라고 하더군요.

WR
1
2024-04-19 14:02:51

그런가요? 1984는 재미도 있고 읽기 어렵지도 않은 책인데 신기하네요.

2
2024-04-19 13:36:54

좋은 글 자주 올려주세요. 관부연락선 읽을 때 다작 쓰기로 유명한 소설가로만 알았습니다

WR
2024-04-19 14:03:07

감사합니다. 종종 글 올리겠습니다. 

1
2024-04-19 13:45:53

그래서 옛 어르신들 말씀이 맞나 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요.

WR
1
2024-04-19 14:04:30

잘 모르면 세상 무서운줄도 잘 모르니까요. 어렸을 때 대체로 말이나 행동이 가벼운 건 이해가 가죠.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다면 좋은 사람이나 글을 많이 만나보지 못해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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