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DVD] 에반게리온 리뉴얼
글: 박창선 (lachess@nownuri.net)
2002년 겨울, 처음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DVD는 많은 면에서 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다준 작품이었다. 우선 제작사 측에서 강조했던 화질 개선이 생각보다 미미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그 효과를 전혀 보지 못했고, 기타 자막과 같은 부분에서도 만족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기존판이 발매되는 중에 날아든 일본에서의 에반게리온 리뉴얼 발매소식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화질 향상을 위해 전면적인 재 텔레시네 작업을 비롯해, 최신 돌비 디지털 5.1을 지원하는 사운드 포맷은 기존판을 구입하고 있던 팬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발매되기 수개월 전부터 리뉴얼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나돌고 있었지만, 그 소문이 우리나라까지 들어오지 못해서 벌어진 결과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속은 듯한 느낌도 들지만, 에반게리온 리뉴얼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은 마스터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화질과 음질을 가진 DVD로 제작할 수 있다는 점과 그동안 가이낙스가 마스터를 잘 보관하지 못한다는 소문을 일시에 잠재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퍼져있는 소문과 달리 가이낙스는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마스터를 나름대로 잘 보관하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에반게리온 리뉴얼이며, 비교적 좋은 화질을 보여주는 도 이 같은 사실을 잘 뒷받침해준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가이낙스가 모든 마스터를 LD로 보관하고 있다’는 말은 일본 잡지에 실렸던 글이 잘못 와전되면서 퍼진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언급하면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리뉴얼의 리뷰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우선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은 기존판 출시 당시 DP 리뷰를 통해 자세히 썼던 관계로, 이번 리뉴얼의 리뷰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질, 음질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자, 이제 신세기 에반게리온 리뉴얼 DVD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번 리뉴얼을 위해 캐릭터 디자이너인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새롭게 그린 일러스트를 각 장의 메인 메뉴로 이용하고 있다. 메인 메뉴화면을 제외한 여타 부분들은 일본판 DVD와 비슷한 컨셉으로 디자인됐다. 동일한 일러스트레이션이 자켓을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단조롭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통일성이 있어 나쁘진 않다. 음성 디폴트가 돌비 디지털 2.0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5.1 채널 음향을 만끽하고 싶다면 Set up에서 재설정을 해야 한다.
이라는 작품의 역사적인 의의로 볼 때 기존에 발매되었던 제품은 모자람이 많다. 그리하여 착수한 작업이 바로 영상 리뉴얼 작업이다. 16mm 필름으로 제작된 에반게리온 TV시리즈는 우선 필름을 비디오 신호로 전환시켜주는 ‘텔레시네’라는 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번 작업에서는 보다 좋은 화질을 위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드라이(Dry) 텔레시네’ 방식이 아닌 특수 용제를 이용해 화질 열화를 최대한 방지하는 ‘웨트(Wet) 텔레시네’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방식을 통해 전체적인 필름의 질감이 향상되고 필름에 있던 흠집들이 효율적으로 제거되면서, 텔레시네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최소한으로 막았다. 그리고 필름으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자주 발생하는 화면 흔들림을 잡기 위해 ‘레지스트레이션 핀’이라는 것을 이용해 필름을 보다 강력하게 고정시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왼쪽이 리뉴얼 / 오른쪽이 기존 화면
위쪽이 리뉴얼 / 아래쪽이 기존판
DVD를 플레이 시켜보면 오프닝과 엔딩이 본편보다 훨씬 좋은 화질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바로 오프닝과 엔딩의 경우 16mm가 아닌 35mm 원판 필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고해상도 영상을 실현할 수 있었고 발색 및 암부 디테일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본편 전 26화 전체를 HD 리마스터링 프로세스를 통해 고화질을 실현했다.
다만, 제 16화의 경우 현상소에서 16mm 오리지널 네가를 분실하는 바람에 35mm 인터 네가에서 텔레시네 작업을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색 보정 작업을 비롯해 최대한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과정을 거쳐 오리지널에 최대한 근접한 영상을 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화질이 약간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오리지널 네가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예고편 중 일부도 오리지널 네가가 분실되는 바람에 전에 만들어 두었던 D2 마스터(과거 LD 제작에 많이 쓰였다)를 이용했다. 그래서 예고편에 따라 화질에 편차가 있다.
16화의 이미지
이번 리뉴얼 작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스태프들이 직접 참여하여 모든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을 비롯하여 마사유키, 츠루마키 카즈야 조감독이 직접 텔레시네부터 색 보정, 음향조정의 모든 리뉴얼 작업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색보정 작업에 있어서는 안노 감독이 직접 셀 화와 제작 당시의 색채설정 자료들을 가져다 놓고서, 한 장씩 한 장씩 뜯어보며 오리지널 셀 화에 가장 가까운 색을 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특히 그가 가장 주안점을 둔 색은 바로 붉은색과 검은색인데, ‘붉은색은 더욱 강렬하게 검은색은 더욱 샤프하게’가 바로 감독의 의도였다. 그리하여 에반게리온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피의 색’이 적과 흑의 적절한 배합에 의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밖에 셀 화의 리페인트를 비롯해 필름의 재촬영도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복잡하고도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을 통해 이 탄생하게 되었다. 기존판과 비교한다면 우선 화면 흔들림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사라졌다는 점과 완벽에 가까운 발색이 최고의 장점이다. 다만 감독이 의도한 영상으로의 구현을 위해 전체적인 컨트라스트비가 올라가면서, 어두운 장면에서의 세세한 작화 묘사가 상당부분 묻혀서 자세히 구분하기 힘들다는 점이 아쉽다. 또 산뜻하고 투명한 셀 애니메이션 고유의 특징이 많이 사라지고, 샤프니스 강조에 따른 링잉 노이즈가 많이 증가해 다소 껄끄러운 느낌을 보여준다. 때문에 각자의 디스플레이의 특성에 맞게 영상기기를 조금씩 조정하면서 감상할 필요가 있다. 밝기, 컨트라스트, 샤프니스 조절을 통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영상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이런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새롭게 발매되는 은 작품이 끌어낼 수 있는 한계에 근접한 최상의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감독이 원했던 이상적인 색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진정한 에반게리온의 묘미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영상 리뉴얼과 더불어 음향 리뉴얼의 주안점은 바로 5.1 채널화이다. 에반게리온 TV시리즈는 기본적으로 2채널 스테레오로 제작되었다. 과거 발매된 어떤 매체도 5.1 채널을 지원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당시 LD가 5.1 채널이 가능하긴 했으나 지금과는 다르게 연결이 복잡하고 앰프도 비교적 고가였다) 모든 소프트들이 2채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을 아끼면서 적당한 효과를 원했다면 아마 2채널 스테레오 음향을 슬쩍 돌비 디지털 인코더를 이용해 채널 분리만 시켜주는 간단한 방법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 방법을 이용하면 음향설계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어색한 음장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번 리뉴얼 작업을 망치는 일. 가이낙스는 이번 리뉴얼 작업을 위해 5.1 채널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 즉 대사, 음악, 효과음을 전 26화에 걸쳐 하나하나 재작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바로 오리지널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모든 작업을 처음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음악을 5,1 채널로 새롭게 믹싱 작업을 했고, 대사 역시 새롭게 녹음한 부분이 많이 포함됐으나 주요 캐릭터들의 대사는 오리지널판과 동일한 것을 사용했다.
2채널 스테레오에서는 너무 복잡해서 넣을 수 없었던 대사 같은 것들이 집중적으로 재녹음이 되었는데 특히 네르프 본부 발령소에서 스태프들이 방송을 하는 소리를 비롯해, 학교에서의 생활 소음 등이 새롭게 추가됐다. 이런 추가 녹음을 위해, 메인 캐스트 중에서는 ‘하야시바라 메구미’가 직접 참가하여 네르프 본부의 슈퍼컴퓨터 MAGI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 외, 다양한 추가 대사들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을 비롯한 몇몇 스태프들이 직접 연기하기도 했다.
효과음 부분에서도 새로운 음을 추가해, 보다 높은 임장감을 들려준다. 특히 전투씬에서의 폭발음 같은 경우에는 오리지널 스테레오보다 박력 넘치는 음향을 들을 수 있다. 다만, 오프닝 음향은 우퍼 레벨이 높은 관계로 우퍼 성능에 따라 부밍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조절이 필요하다. 의 5.1 채널 음향은 단순히 극적 효과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스테레오 음향에서 구현하지 못했던 정보량을 감독이 의도했던 수준으로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리어의 울림이 기대했던 것보다 못하다고 하여 불만을 가지지 말고 어떤 소리가 각각의 채널에서 나오는지 귀 기울여 들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번 에반게리온 리뉴얼 DVD에서는 기존의 오리지널 스테레오 음성과 새롭게 재녹음 된 돌비 디지털 5,1 음성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비교 감상의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스페셜 피쳐 부분은, 본편에서 극장판이 제외된 관계로 극장판 관련 스페셜 피쳐 영상은 모두 빠진 상태로 출시된다. 때문에 극장판 중간에 삽입된 실사 영상에 관련된 스페셜 피쳐와 극장판 선행 비디오가 빠진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일본에서 TV시리즈의 선행비디오로 출시가 되었던 Genesis 0:0 IN THE BEGINNING이 빠진 점은 상당히 아쉽다.
그 외 AR(후시녹음)용 러쉬 비디오와 논 텔롭 오프닝, 엔딩, Trailer 15초 버전 & 30초 버전은 모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보너스 디스크에 수록된 것은 아니지만, 본편의 마지막 8번 디스크에 수록된 22곡의 5.1 채널 BGM 모음집은 에반게리온에서도 주옥같은 음악들만 엄선해 들려준다. 요즘 많이 나오고 있는 SACD나 DVD-AUDIO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에반게리온의 음악을 5.1 채널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스페셜 피쳐는 아니지만 기존판에 빠져있던 21~24화의 비디오판 영상(추가 영상 버전)이 같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불만이 많았던 팬들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추가 영상 버전
기타 자막 같은 부분에서는 일단 기존판에서 좀 더 마니아를 존중하는 쪽으로 수정된 것 같다. 장면과 관계없는 대화와 화면에 대한 자막은 과감히 삭제하였으며, 에바 각 기체에 대한 명칭도 영호기, 초호기, 이호기로 일괄 수정되었다. 캐릭터 간의 호칭에 대한 부분도 수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필자가 가진 샘플이 1차분과 2차분이 섞인 상태로 들어와 명확한 판단이 어렵다. 명쾌한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겠지만 일반인과 마니아, 양쪽 모두가 수용할 수 있을만한 자막으로 수정되길 기대한다.
작년 이맘때쯤 DP에 일본 뉴타입의 부록으로 나왔던 체험판 DVD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우리나라에도 꼭 리뉴얼판이 다시 출시되기를 기원했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이렇게 정식으로 에반게리온 리뉴얼이 출시된다고 하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기존판에 실망했던 사람들 그리고 진정한 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타이틀이다. 특히 1995년에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의도했던 모든 것이 2003년의 최고 기술을 총동원해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재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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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제가 가장 좋아 하는 작품 ^.^ 기대 만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