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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여인의 그림자〉 (L'ombre des femme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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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19 19:14:06


필립 가렐은 누벨바그 '이후'를 묻는 대표적인 시네아스트이다. 이때 그 질문은 관객인 우리를 항한 것인 만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살인'의 질문이 따라다닌 누벨바그 세대와 달리, 그를 뒤따른 자신의 세대에겐 '살인'의 흔적을 '자살'이 대신하고 있다. 자살로 죽은 이가 없는 누벨바그 선배들과 달리 후배들은 장 외스타슈와 샹탈 아커만의 죽음에서 보이듯이 '자살'이라는 두 글자가 유령처럼 이들을 쫓아다닌다. 이를 두고 가렐은 "죽음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이며, 남에게는 줘서 안된다."고 했었다.[1] 자살이라는 비극 뒤에 자신에게만 그것을 허용하겠다는 믿음, 다른 사람에겐 그것을 줘선 안된다는 (살인) 그의 믿음을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며 느낀 바와 연결짓고 싶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나를 포함해 많은 영화광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첫 이유는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이었고, 두번째는 필립 가렐 전시전이었다. 3개월에 걸쳐 열린 이 전시전의 부제는 '찬란한 절망'이었다. 필립 가렐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부제를 보고 감탄했을 것이다! 그의 영화 다수는 비극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남녀 간 어긋나는 사랑, 마주치지 않는 시선에서 그는 절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형용할 수 없는 얼굴들, 빛과 어둠의 여백이 잡아내는 절망의 공기, 그 속에서 그는 희망을 찾는다. 비극에서 찾는 희망, 사적인 영화로 인물에게 진정한 연민을 이끌어내는 것의 가렐의 영화라 생각한다.

여기서 난 감정을 얘기하고 싶다. 사실 영화라는 폭력적인 매체에서 감정은 매우 중요하고 미묘하며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영화는 스크린에 투영된 것으로서, 우리에게 전지적인 권한을 주는 '척'하는 것이자, 보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우리의 착각을 이용하는 매체다. 그래서 되려 격한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 영화를 고민하려면 우린 되물어야 한다.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 영화적 속성에 따른 것일까?'와 같이 말이다. 이런 논의를 거칠 때,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데 있어 가렐의 영화는 가장 아름다운 사례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사적이기 때문에 솔직하지만 자신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여기서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순간 흐르는 정적, 쇼트 혹은 시퀀스의 충돌, 자세와 제스처에서 드러나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가렐의 동지였던 외스타슈는 영화를 만들지 못해 죽고 만다. 그의 죽음은 절망 속 희망을 찾지 못한 이의 것이며, 영화에 대한 간절함의 상징같은 것으로 남았다. 반면 필립 가렐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고 흑백 필름으로 찍는 그의 영화처럼 흑으로 덮인 세상에서 백을 찾은 것 같다. 가렐의 영화에서 〈새벽의 경계La frontière de l'aube, 2008〉까지 주인공은 자살한다. 그의 다음 작품 〈뜨거운 여름Un été brûlant, 2011〉에서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살며 우연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으려는데 사는 인물의 놀라움은 그 삶의 지속을 통해 〈질투La jalousie, 2013〉에서 더 큰 변화를 알린다. 그의 신작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L'ombre des femmes, 2015〉에서 가렐은 아예 '자살'을 영화 밖으로 밀어내버린다. 이런 그의 결단을 보며 난 이 시네아스트의 변화를 끊임없이 긍정할 것이라 다짐했다.

필립 가렐은 화가처럼 인물 간의 파토스를 선으로 긋고, 솔직하며 거짓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말인즉슨, 그는 자신의 영화의 사적인 성격을 뻔히 내보임으로서 마치 관객과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의 주관성을 인지시킴으로서 은밀함의 불가능을 고백하는 감독이라는 것이다. 이런 특성이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영화가 〈질투〉다. 〈질투〉는 가렐이 어린 아이였을 때, 가렐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여자를 두고 있었던 일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린 어린 아이의 시점 쇼트를 본다. 조그마한 열쇠 구멍으로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별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고 우리는 영화 내내 아버지와 그의 여자친구 간 사랑 이야기를 본다. 둘이 사는 조그마한 집, 한 방 속에서 대화하는 남녀의 쇼트가 반복해 등장하는데, 항상 문틀이 보인다. 이때 우린 마치 아이의 시점 쇼트처럼 남녀를 몰래 보는 견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린 알아차린다. 가렐은 관객과 자신의 거리를 좁히는 데 뚜렷한 한계를 인지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이 거리의 특징은 사실 가렐의 영화에서 다층적으로 작용한다. 어긋나는 시선, 유지되는 걸음걸이의 간격에서 드러나는 두 인물간의 (정서적) 거리가 영화 감독과 관객으로 번지는 것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가렐은 〈뜨거운 여름〉 부터 모든 작품을 시네마스코프로 찍었다. 시네마스코프로 인물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는 흥미로운 문제다. 이는 풍경을 잡는데 가장 좋은 비율이지만, 클로즈업을 자주 쓰는 감독들은 기피한다. 이 비율로 찍으면 결국 프레임 가운데에 인물을 잡거나, 얼굴을 클로즈업할 시에 여백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렐은 이런 딜레마의 화합을 가져오는 감독이다. 그에게 여백은 고독에 빠진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며, 쇼트의 '공기'를 담아내는 요소다. 그리고 이런 '공기'는 화면의 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뜨거운 여름〉은 눈이 부실 정도로 원색이 진한 컬러 영화다. 반면 〈질투〉와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은 차가운 흑백 영화다. 이것은 계절의 공기를 담아낸 영화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여름의 영화라면 후자는 겨울의 영화다.

필립 가렐은 이 영화를 두고 '남성에 못지 않은 여성의 리비도의 문제로 보는, 평등을 위한 영화'라 했었다.[2] 가렐은 이 평등을 이뤄내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두 이미지를 보여준다. 바람 피는 남자와 여자의 이미지, 그리고 당당한 남자와 자책하는 여자의 이미지다. 이는 둘의 자세와 제스처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피에르와 마농이 함께 실내 공간에 있을 때 항상 마농은 서 있고, 피에르는 앉아있거나 누워있다. 뻔뻔한 남자와 안절부절한 여자의 모습이다. 이 구도는 마지막에 마농이 피에르도 바람을 피고 있었던 걸 알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순간 전복된다. 서로 싸운 후 당황한 피에르는 서 있고, 마농은 앉아 있는 쇼트가 등장한다.

다음은 피에르와 엘리자베스의 관계를 보자. 여기서도 가렐은 불평등한 성 역학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피에르는 (특히 엘리자베스를 만날때) 차갑고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엘리자베스는 항상 그를 원하고, 그의 집 밖에서 감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감시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숨는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와 부끄러워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반복되고 있다. 이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엘리자베스가 마농의 바람을 목격할 때이다.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 사진기 속 커튼을 쳐 자신을 가리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창피해하는 여자의 모습이다. 같은 욕망에 대한 상반된 남녀의 태도, 반복되는 그 역사의 문제는 단순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여기서 '반복'은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한 역사를 (의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같은 장소의 반복이기도 하다. 같은 장소를 지나는 인물 사이 파토스가 튕기고 역학이 바뀌는 것을 우린 목격한다. 이것은 인물들이 매일 오고가는 장소보다 특정 쇼트에서만 비춰지는 장소들에 있어 더 효과적이다. 엘리자베스가 마농의 바람을 목격하는 것은 같은 장소를 반복해 지나가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된다. 그러면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인물들이 계단을 오갈 때를 주목해보자. 오르고 내리는 계단은 여기서 중요한 성과 역학의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다. 계단을 지나는 순간들을 유심히 보면, 두 파토스가 어긋나고 마지막에 충돌하는 이 영화의 역학이 모두 계단에 담겨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계단은 총 세 번 등장하는데, 처음 등장시에 마농은 바닥에 떨어진 시트지를 목격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피에르가 바람피고 있던 것을 알아차렸다. 계단이 두번째 등장하는 장면은 그녀가 자신의 불륜상대를 데리고 집에 올라가는 장면이고, 마지막은 서로의 바람을 확인한 두 남녀가 화나 싸우는 장면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남녀의 역사는 모든 가렐의 영화가 그렇듯이 궁극적으로 모아지지 않는 파토스, 다시 말해 고독에 대한 영화임을 보여준다. 한 인물만 등장하는 장면들, 홀로 걷고 홀로 존재하는 장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유다. 또한 가렐은 여럿의 대화 장면에서 두 인물이 대화할 때, 한 사람만 쇼트에 담고 다른 인물이 외화면으로 처리해 옆의 누구와 말을 하지만 혼자 있는 인물의 초상을 캔버스에 그리듯이 찍는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영화의 두 순간을 이의 연장선에서 보고 싶다. 이 영화에서 페이드는 딱 두 번 쓰이는데 두번 다 홀로 남은 부부의 모습이 담긴 쇼트에서 등장한다. 피에르와 마농만 남겨진 쇼트는 페이드 아웃처리 되는데, 이것은 기묘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단 둘이 있는 시간은 길게 느껴지고, 그만큼 어색하고 외로워보인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내레이션이다. 먼저 피에르와 마농의 내레이션은 딱 한번씩 등장하는데, 둘다 자기 위로이자 포장이다. 마농의 목소리 나레이션은 그녀가 피에르에게 다른 이와 잠자리를 가진 것에 대해 거짓말한 후 바로 등장하고, 피에르의 내레이션은 자신이 바람 폈다는 것을 인정한 후 부인과 이별한 다음 장면에 등장한다. 다음으로, 여기엔 제 3자의 내레이션이 계속해 등장한다. 재밌는 것은 이 내레이션의 목소리가 필립 가렐의 아들 루이 가렐의 목소리라는 점과 이 목소리의 입장이 피에르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렐이 아들의 목소리를 빌려온 것을 영화의 사적인 근원을 고백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그것 만을 이유로 보기엔 좀 심심하다. 아마도 이것은 극을 벗어난 남성의 목소리로 피에르의 뻔뻔함을 대체해 단순한 남녀의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의 역사로 확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고 싶어진다.


내게 있어 가렐의 영화는 '방의 영화'[3]이자 '침대의 영화'고, 결국 '시선의 영화'다. 유운성 평론가는 가렐이 '영화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얼굴을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일이 왜 그토록 힘든 것일까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4] 나는 이 말을 조금 바꿔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시선을 한 화면에서 보여주기 어렵다'고 하고 싶다. 피에르와 마농이 헤어지는 쇼트에서 피에르는 우는 마농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바로 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애써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더니 연이은 쇼트에서 마법같은 장면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가렐은 마치 '한 화면 속 시선의 화해'가 불가능하다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 벽을 정리하고, 홀로 걷고 밥을 먹는 피에르의 이미지가 나오다 갑자기 그가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는 어떤 무(無)의 순간이 나온다. 더 놀라운건 이어지는 쇼트다. 다음 쇼트에서 마농은 프레임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한 시선을 포기한다. 이렇게 다른 시공간에 있는 마농이 마치 피에르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쇼트가 연결되었다.

다음 장면, 피에르는 마농의 어머니를 만난 후 홀로 걷다 잠시 멈추며 좀 전과 같은 무(無)의 순간이 등장한다. 거의 같은 쇼트가 반복된 것이다. 그런데, 전과는 다르게 이어지는 쇼트는 처음에 비어있다. 그러더니 마농이 오른쪽에서 프레임 안으로 입장해 왼쪽을 향한 시선을 오래 유지한다. 다른 쇼트에서 나마 이어지는 둘의 시선은 재결합을 예고하는 것이자, 앞에서 가렐이 말한 일종의 평등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 밖에서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마지막의 기적과도 같은 재결합은 좁혀지지 않은 걸음의 간극을 유지하며 걷던 남녀의 걸음걸이가 담긴 장면 중 유일하게 서로를 보며 걷는 장면이다. 또한 둘이 포옹하는 순간은 피에르가 처음으로 미소를 띠는 순간이다. 이 화합을 보며 난 가렐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의 침대 위 위대한 남자는 없다'. 영화의 제목을 번역하면 '여인의 그림자'이다. 여자의 그림자/그늘 아래 있는 것은 남자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그것을 알려준다. 영화의 레지스탕스로 등장한 노인의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즉, 영웅인 척한 남자의 역사는 거짓이었다는 거다. 이 사실을 피에르에게 말해주는 것은 마농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함께하자 부탁하며 여자의 그늘아래 있음을 인정한다. 희망적인 엔딩은, 새롭게 결합한 그들이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쓰길 바라고 있다.

[1] 필립 가렐, 〈필립 가렐 마스터 클래스〉
[2] 필립 가렐, 〈가렐과 친구들, 영화를 생각하다〉
[3] 필립 아주리, 〈필립 가렐 마스터 클래스〉
[4] 유운성, 《내 곁에 있어줘 : 필립 가렐과 고독의 인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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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5-01 00:38:17

1월에 이 영화 보고 전작들을 볼려니 필립 가렐 전작은 구하기가 참 힘들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WR
2016-05-01 09:29:03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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