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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일제의 조선은행 금괴 약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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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5-23 23:44:07

밑에 댓글로 쓰다가 

이 얘기를 한번도 상세하게 써 본적이 없다는 게 생각나서 따로 본문으로 올려서 씁니다.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순둥이였고, 일본은 얼마나 그악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조선은행 금괴 약탈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애들이 한 것 보면 딱 명박이 스타일입니다.

 

 

1. 때는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뀔 때입니다.

고종황제는 근대화를 위해서는 화폐 유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태환화폐 시절입니다. 고종 황제가 대한 제국 명의로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금괴를 보유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이에 고종황제는 내수사 자금을 박박 긁었고, 돈이 모자라자 우리나라의 관세 수입을 프랑스에게 담보로 제공하고 화폐 발행 재원을 마련합니다. 그런데도 화폐를 발행할 금이 모자라자 고종은 금 본위제가 아니라 은 본위제를 채택해서 화폐를 발행합니다 (당시에 이미 운산금광 등은 미국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이 등장합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근대화에 성공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대한제국이 미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 차관을 얻는 것을 가로막고, 대한제국에 일본이 급조한 식민지용 화폐 '제일은행권'을 쓰라고 강권합니다. (제일은행권은 화폐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불태환 지폐였습니다.) 대한 제국이 제일은행권을 쓰려하지 않자 군대를 동원해서 강제로 쓰라고 압박합니다.

 

그래도 대한제국이 버티자, 일본은 시중에 대한제국 위조화폐를 만들어 뿌립니다. =_=

대한제국은 버티지 못하고 화폐가 망가지며, 상업 근대화에 실패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은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반면에 조선은 자력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무능해서이다 라고 생각들을 하는 데... 그게 일부분 맞기는 합니다만, 일본이 조선 망하라고 워낙에 엄청나게 수작을 부렸습니다. 

일본 스스로는 근대화를 이룩할 재원이 없자 중고 영국제 기계방직기를 들여와 조선에 기계 포목을 비싼 값에 팔아서 재원을 축적해서 경제와 산업 근대화에 성공하고, 반면에 그 와중에 조선이 근대화하는 것은 실패하도록 위조 화폐를 찍어다 조선에 뿌렸으니까요. 

일본 제국께서는 아주 꼼꼼하시고, 불법에는 성실하셨지요. =_=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제국의 금화…대한제국 화폐의 슬픈 역사 - 서울경제TV, 2016. 2. 12

http://www.sentv.co.kr/news/viewn/564465

 

"광무(光武) 5년(1901년) 2월 12일, 고종황제가 칙령 제4호를 내렸다. ‘화폐조례’로 반포된 칙령의 골자는 금본위제도 도입. 본위(本位) 화폐를 금화로 정하고 20환과 10환, 5환의 3종을 뒀다. 보조 화폐인 은화는 반환과 20전 두 종류를 발행하고 백동화(白銅貨)와 적동화(赤銅貨)를 하위 화폐로 삼았다.


재위 38년째,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에 나선 햇수로는 17년째. 이준 열사의 사위인 유자후가 발간한 ‘조선화폐고(1930)’에서 화폐전문가로 평가됐던 고종은 화폐개혁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신식화폐조례(1892), 신식화폐발행장정(1894) 등 수차례 화폐개혁안을 내놓고 은본위제도를 시행한 주체도 고종이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국사학)의 ‘고종황제 청문회’에 따르면 개혁 군주 고종은 통화제도의 안정 없이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화폐제도를 일신하려 애썼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실패다. 양질의 금광이 많았으나 외국인에게 채굴권을 넘겨버린 터. 금본위제도 시행의 기본 자산인 금(金)이 없었다. 인하대 오두환 교수(경제학)의 ‘한국 근대 화폐사’에 고종의 화폐개혁이 실패하는 대목이 자세히 나온다. 대한제국은 우선 전환국에 인쇄과를 설치해 지폐 발행을 준비하는 한편 재원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해관세(海關稅·관세)를 담보로 프랑스 회사로부터 500만환을 빌리는 차관계약(1901년 4월)도 맺었다. 


대내외 준비에도 화폐개혁과 차관 도입에 실패한 이유는 일본의 끈질긴 방해 공작 탓이다. 대한제국이 미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 돈을 빌리려 할 때마다 일본은 길목을 막았다. 결국 화폐조례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화폐개혁용 차관을 막은 이유는 자국 통화체제로의 편입이 방해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대한제국의 화폐개혁을 무산시킨 일본은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을 침투시켜 식민지용 불태환지폐인 제일은행권을 통용시켰다. 대한제국이 이를 거부하자 군함을 동원해 찍어눌렀다.


결국 대한제국은 금본위제도를 공포하고도 금화는 상징용 몇 점만 발행했을 뿐 악화(惡貨)인 백동화를 남발해댔다. 액면가는 2전 5푼이지만 제조원가는 5푼에 불과해 막대한 화폐주조차익을 남길 수 있는 백동화(白銅貨)를 마구 찍어댔다. 일본인들도 니켈과 간단한 압연기만 있으면 제조 가능한 백동화를 대량 위조해 물가 앙등을 거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약과. 

러일전쟁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1904년 8월 대한제국을 윽박질러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며 탁지부(재무부) 고문으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앉혀 재정에 관한 전권을 휘둘렀다. 재정고문 메가타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보다 더 한국을 수탈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정적으로 광무 5년(1905년) 7월부터 시행된 화폐 정리(구권과 신권의 교환)는 조선의 상업을 마비시켰다. 화폐교환을 알리는 관보(官報)라야 달랑 30부였다. 일반 신문에도 화폐교환 소식이 실리긴 했지만 3,000부 남짓한 발행 부수로 영세상인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백동화 960만원과 엽전 432만원 등 1,442만원에 이르는 교환액의 90%는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이 가져갔다.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조선의 상인들은 큰 손실을 입고 파산하고 말았다. 본격적인 식민지 수탈에 앞서 상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화폐 주권 상실은 경제 종속을 가속시키고 종국에는 한일병탄으로 이어졌다.


1896년부터 40년간 순금 80여톤을 채굴했다는 운산 금광산 등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실패로 종결된 115년 전의 대한제국의 금본위제도 시도는 옛날 얘기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으나 간교한 이웃 일본의 행태는 여전해 보인다. "

 

 

2. 여기에 또 하나의 후속담이 있습니다.

 

대한 제국이 일본 손에 들어갔을 때, 대한제국의 화폐 발행용 금과 은 등은 그대로 일본에 먹혔습니다. 그 금과 은을 기반으로 일본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은행을 설립하여 화폐를 발행합니다.

고종 황제는 나라가 망하는 판인 데, 이 돈을 다 쓰고 죽어야지 라는 독한 생각을 못했어요. 나라에 백성이 있고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화폐 발행의 근원이 되는 금/은은 남아있어야 된다는 상식적인 생각을 했죠.

 

그런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 일본 놈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했습니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을 통보한 1945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은행 본점은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여 조선은행 명의의 유가증권 47억엔을 싸그리 일본 도쿄 지점 명의로 옮깁니다. 화폐 발행의 근거가 되는 자산을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 다시 일어서면 일본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기존 화폐 보유고의 두 배에 해당하는 대량의 화폐를 찍어내어 시장에 뿌려 경제를 망쳐놓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식량과 물자를 긁어다가 일본 본토로 가져갑니다. =_=

 

 

조선은행 대부분 자산 도쿄지점 이체… 결국 일본 국고로 - 한국일보, 2015. 3. 17

http://www.hankookilbo.com/v/bfd320bfd6e944efaae049cd1d05d4a4


"일본이 연합국에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사실상 항복을 통보한 1945년 8월10일 경성(서울)의 조선은행 본점은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인 이사들은 본점 명의의 유가증권 47억엔을 도쿄 지점으로 서둘러 이체키로 결정했다. 이 같은 긴급조치를 취한 이유에 대해 당시 조선은행 부총재였던 호시노 기요지(星野喜代治)는 “그대로 나둬서는 나중에 곤란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이 자산이 도쿄 지점으로 옮겨진 후 파장은 너무나도 컸다. 경성 본점이 가진 유가증권은 5,100만엔에 불과한 반면, 도쿄 지점 보유분은 56억엔으로 급증했다. 더욱이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조선은행권은 남한에서만 87억엔이나 유통됐지만 경성 본점이 이에 대한 발권준비로 확보한 자산은 7억엔에 불과했다. 돈은 넘쳐나는데 돈 값이 종이 값보다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산의 대부분을 일본에 남긴 빈털터리 중앙은행을 안고 신생 대한민국은 출항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툭하면 ‘금괴’를 빼앗겼다고 분통을 터뜨린 것도 다름 아닌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을 반환하라는 의미였다. 한국측 대일 청구권의 핵심을 차지했던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은 그러나 한일회담에서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일본 정부에 의해 그 대부분이 몰수된 후 일본인 주주 등에게 분배되었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군총사령부(GHQ)의 크래머(Raymond Kramer) 대령은 1945년 9월30일 조선은행을 ‘식민지 금융자산의 동원과 금융조작’을 통해 일본 군국주의를 지원한 ‘첨병’으로 규정하고 일본 내 지점에 대한 폐쇄를 명령했다.


이처럼 청산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특히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한 제4조가 윤곽을 드러내자 GHQ는 1950년 11월 이들 자산을 사실상 동결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이 자산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가 제기한 ‘특별협정’의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향후 한일 간에 논의해 처분하길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고 일본이 주권을 되찾게 되자 일본 국내에서는 그때까지 ‘전범’ 취급을 받았던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을 주주, 예금자 등 일본 내 이해관계자들이 나눠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분출했다. 공직에서 추방됐던 전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는 일본 국회에서 “조선은행은 결코 조선의 은행이 아니다. (일본) 국내 법인이다. 주주의 권리를 무시하고 당시 경영자를 배제한 채 함부로 청산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일본 정부도 1953년 8월 폐쇄기관령을 대폭 완화, ‘미 점령군’이 채워놓은 조선은행에 대한 ‘족쇄’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호시노는 조선은행의 특수청산인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돈’이 생기자 온갖 아이디어가 난무했다.구경영진은 주주의 권리를 내세우며 후계은행의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맞서 한반도에 재산을 남기고 빈손으로 돌아온 일본인들은 이 돈을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쓸 것을 요구했다.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통산상은 일본의 미래를 위한 대규모 과학기술 펀드를 만들자고 했다. 자민당 국회의원들은 중소기업진흥은행이나 무역센터, 국민차육성회사 등 대형 국가프로젝트를 창출하는데 쓰자고 주장했다.


이처럼 조선은행 재일자산을 둘러싼 이권다툼이 치열한 가운데 1956년 일본 대장성은 청산잔여금의 대부분을 국고로 환수키로 결정했다. 이는 그 해 일본의 예산안 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당초 이치마다 히사토(一万田尙登) 대장상은 1조엔 이내의 긴축예산을 명언했는데 실제 일반회계는 1조349억엔까지 늘어 세수 확보가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은행 재일자산은 청산잔여금 67억엔 가운데 50억엔을 각종 납부금이나 세금 명목으로 일본 국고에 환수된 후 남은 17억300만엔이 주주에게 귀속됐다. 일본 정부가 취한 50억엔을 1945년 해방 당시의 환율(1달러=15엔)로 적용하면 공교롭게도 1965년 한일협정에서 일본이 청구권 명목으로 한국에 무상 지급키로 한 3억달러를 약간 넘는 금액이다.

 

한편, 조선은행 재일자산은 청산잔여금의 75%를 일본 정부에 납부한 후 남은 17억엔으로 1957년 4월 일본부동산은행으로 거듭났다. 일본부동산은행은 이후 일본채권신용은행으로 은행명을 변경해 오랫동안 활동하다 1998년 이른바 버블 붕괴로 도산했다. 일본채권신용은행은 2000년 6월 재일한국계 기업인 손마사요시(孫正義)가 이끄는 소프트방크로 넘어가 아오조라은행이라는 간판을 달고 조선은행의 일본 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이 패망할 때 조선 은행에서 가져간 돈이, 

이후 한일수교때 우리가 일본에게 식민지 배상금이라고 받은 돈보다 많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배상금이라고 돈 한푼 안 쓴 겁니다. 

조선 은행 돈으로 남한에 지급하고, 그러고도 돈이 남았죠. 게다가 그렇게 돈을 주면서, 이건 일제시대 징용 근로자 월급이라고 주장하여, 징용 근로자 임금 권리를 전부 무효화시켰습니다. 

 

일본애들 아주 꼼꼼해요. 

자기 돈은 한 푼도 안쓰고, 남의 돈으로 뺑뺑이 돌리면서 뜯어먹고, 그런 다음에 돌려줄 때에도 다른 명목을 갖다붙여서 한번 더 뜯어먹죠. 명박이 스타일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뭐... 조선은행 돈을 포기하면서 저 돈을 받아와놓고서, 경제개발 자금 확보했다고 자화자찬한 박정희 없이는 성립이 안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선을 한 번 뜯어먹고(대한제국 국고의 금은 흡수), 

두 번 뜯어먹고(조선은행 자산 약탈), 

세번째로 뜯어먹고 (한일수교때 징용근로자 임금권 박탈) 가셨으면서도

그 와중에 조선에 재를 뿌려놓고 가는 꼼꼼함까지 보이셨으니 (조선의 식량과 물자를 일본 본토로 실어가고, 화폐 발행을 남발하면서, 일본의 전쟁빚을 조선 명의로 돌려놓고 튐), 과연 일본이라는 말이 안나올 수 없습니다.

 

1944년 9월에 조선은행의 화폐발행고가 22.6억원이었는 데, 1945. 8. 14일 광복당시엔 화폐 발행고가 48.43억원으로 두 배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늘어났는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08_0070_0010_0030&whereStr=

 

"광복 직후에 조선은행권, 즉 지폐가 남발(濫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금융 기관에 대한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여 현금 수요가 급증하자 이들이 22억 원에 해당하는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은행이 일본의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다른 금융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대량의 유가 증권을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여 회수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미군정이 조선은행 접수를 통해 통화 발행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통화 남발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군정이 1946년부터 재정 적자를 보전하고자 조선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정부 대상금 형식으로 차입함에 따라 통화 남발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조선은행이 미군정하의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정부 대상금으로 대출을 하게 되고, 또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거액의 대출을 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통화 남발은 계속되었다." 

 

 

풀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것 같고 망한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은행에서 돈을 빼갔다. 그걸 무조건 화폐를 찍어서 감당했다 (=화폐가치가 떨어졌다).

 

2. 일본이 진 빚을 조선은행으로 몰아넣었다. (= 일본의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타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던 유가 증권들을 조선은행권으로 사들여서 회수하였다).

 

이제 식민지 조선에서 철수하여 일본 본토로 돌아가야 하는 데, 패전했으니 일본도 아수라장일 것이잖아요. 그 부담을 덜기 위해, 일본 정부가 진 전쟁빚을 조선에다가 몰아넣고 떠난 겁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을 때 조선은행권은 일본 본토에서도 받아들여지는 화폐였습니다. 일본 화폐와 1:1로 교환 가능했죠. 그런데 조선은행권을 대거 발행해서 뿌리고 물자를 긁어갈 때 쯤에는 조선은행권과 일본 화폐의 교환을 막아놓고 갑니다.  일본 애들 꼼꼼합니다.

 

 

3. 미 군정이 들어온 후, 화폐를 무제한적으로 찍어내서 자기들이 쓰는 돈을 처리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조선은행 화폐 발행고가 48억원이었습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들어와서 조선은행 접수할 때 화폐 발행고는 85억원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주인 없는 무주공산인 한달동안 일본이 계속 마구 찍어낸 거죠 (일본은 항복했지만 미군이 화폐 제조 원판을 접수할 때까지 여전히 화폐 발행권은 일본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폐를 뒷받침할 금은과 물자는 일본 놈들이 싹싹 긁어간 반면에 화폐 발행량만 4배로 늘어났으니 화폐가치는 폭락했습니다. 광복 직후 우리나라 경제는 초인플레에 시달리며 혼란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더 악화시킨 게 미 군정의 개판 운영이었습니다.

 

 

일본이 죽인 조선 경제, 미 군정이 확인 사살 [해방일기] 1948년 6월 19일 - 김기협, 2013. 6. 19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9034

 

미 군정 2년이 지난 1947년 말 시점에서 조선은행의 화폐발행고는 300억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85억에서 네배로 늘어난 것이죠.조선총독부가 패망전에 1년동안 화폐 발행고를 두배로 늘렸다고 그랬잖아요. 미 군정은 조선 총독부 말기 급으로 돈을 마구 찍어내서 썼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경제는 초인플레와 식량부족, 폭동 등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945-1947년 사이에 남한 내부에 폭동과 공산주의 소동이 벌어졌던 것은 이 미친 듯한 경제혼란이 밑바탕입니다. 물가가 일년에 576% 오르는 데 폭동이 일어날 수 밖에요. 

이 혼란은 미 군정에서 벗어나 정부 수립후, 화폐 발행량이 통제되면서 점차적으로 잦아듭니다. 

 

"서울 도매 물가 지수의 상승률이 1945년 576%, 1946년 378%, 1947년 198%, 1948년 62.9%, 1949년 36.8%에 달하였다. " 

 

일본은 우리나라 망하게 할려고 화폐를 마구 찍어서 뿌리고 갔다고 치고, 미 군정은 왜 이렇게 미친 듯이 화폐를 찍어내서 썼느냐.

남한을 망하게 할려고 작정을 한 것도 아니고, 미국에서 구호 원조물자 들여다가 뿌리면서 도와주는 판국이었는 데 말이죠. 답은 부패와 무능 때문이었습니다. 미 본토는 한국에 원조물자를 보내고 있었지만, 한국 현지의 미 군정은 진짜 장난 아니게 부패했었고 무능했었거든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16
Comments
4
2018-05-23 10:58:30

 저놈들 도망갈때 화폐 찍어내는 바람에 조선경제 박살난것도 악질이죠. 


4
2018-05-23 10:59:03

솔직히...매국노 매국노하지만....찢어죽일 매국노가 맞다고 봐요....

8
2018-05-23 11:00:39

근대 대한민국이 망가진 근본적인 이유가 일본이죠

그런데 아직 그 일본을 찬양해 마지 않는 세력이 많죠,

1
2018-05-23 11:01:15

애초에 체급차가 엄청난데 조선꺼빨아막어서 근대화했단얘기는 어울리지않는듯해요

WR
4
2018-05-23 11:05:54

일본 경제발달사를 읽어보시면 나옵니다.

 근대화 챕터를 찾아서 읽다보면 일본 근대화가 어떻게 조선과 연관되어 있는지 나옵니다. 

4
2018-05-23 11:08:18

그당시 경제발전은 대부분 다른나라 약탈해서 발전하는게 유행이였죠...이마 동남아구까애들꺼도 다 빨아먹었을걸요....우리나라가 완전 쪽 빨리고...

1
2018-05-23 11:05:21

정말 꼼꼼하고 악날하게 털어 먹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8-05-23 11:16:52

뺐긴게 지 지분 챙길려고 했던 것도 있구요. 일본보다 잘사는 게 복수죠. 약탈재산 돌려줄 것도 아니구요

2
2018-05-23 11:24:18

저런건 꼼꼼하게 우리 국민들이 알아야 하는데.....

국민들이 어떻게 저런 걸 알 수 있겠어요?

결국 방송이나 언론에서 저런 걸 제대로 보도해야 하는데

방송, 언론이 썪었으니.....

에휴~~

 

매향인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2018-05-23 11:26:21

저는 한국인이기에, 도저히 일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 빠는 ㅅㄲ들.. (인간 중에서) 제일의 악질로 봅니다.

 

1
2018-05-23 11:29:51

역사는 전쟁과 약탈의 악순환이죠....지금도 그렇구요....솔직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힘을 길러놓는 것만이 살길....

2
Updated at 2018-05-23 12:53:40

그런데 한일관계의 역사를 봐도.. 너무나도 일방적이죠.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구요.

 

저런 나라에게 친근감을 느낀다는 게.. 저는 같은 한국인의 테두리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 악에 똑같이 악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 악은 선으로서 이겨야죠.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삶의 수준은 일본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최소한 주인의 의식이 있으니까요. 비판도 발전도 다 거기서 비롯하는 거죠.)

아무리봐도 이제는 우리가 더 선진국, 선진시민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평화시대엔 하나의 한국-한민족으로 세계를 선도해나가야죠. ^^

6
2018-05-23 11:32:33

 폐망후 일본으로 도망가기전에  엄청난량의 돈을 찍어서 그돈으로 

문화제,금등 어머어머하게 실어 갔습니다 ...

 

심지어 돈찍어내던 놈이 과로사 할정도 였다고 합니다 ..

 

섬나라 개새기들은 그냥 쓰나미(천벌)가 답입니다 ...

2018-05-23 11:47:17

잘읽고갑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 정도면 충분히 자세히 다루어도 될만한내용인데요. 이런부분이 아쉬워요. 중 고 국사교육이 근현대사를 날로먹는게 아닌가 씁쓸합니드.

2018-05-23 12:11:47

 좋은 분석 글입니다.   항상 매향인 님의 글에서 많이 배웁니다.

 

2
2018-05-23 13:52:59

저런데도 일본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보면 화가 날 정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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