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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근면성실한 친일파 이규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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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8-19 16:21:03

신념형 친일파 박중양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번에는 근면성실한 친일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화로 사람을 보니, 마치 친일파를 위한 변명처럼 오해할 여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친일하면 여명의 눈동자 스즈키같은 기회주의자를 떠올리기 쉽겠지요. 그 전형성에 묶이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이규완은 세종 네째 아들 임영대군 15대손이라고 하지만, 몰락하고 끈 떨어진지 오래라 글 공부도 못했습니다. 기골이 좋았던지라 박영효의 눈에 들죠. 박영효의 보디가드가 되어 구한말 대모험을 겪게 됩니다. 

내가 일생을 통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가장 신뢰할 동지(同志)는 이규완이다. 그는 참으로 솔직하고 의협심이 뛰어난 열혈호담(熱血豪膽)한 사람이었고, 비범한 역사(力士)이기도 했다.

박영효

이규완은 처음엔 기술을 배웠습니다. 청나라 상해로 가서 기계 수리 기술을 배워오죠. 역시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김옥균은 쿠데타 계획을 하고 청년들을 일본에 보내 군사교육을 받게 합니다. 갑신정변 직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이규완이 영 미심쩍었나 봅니다. 이규완을 불러 일본도를 보여주며, 당대 최고의 실력자 민영익 하나 잡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할 수 있느냐 떠 보죠. 이규완은 칼을 받고는 민영익 잡고 나도 죽겠다 말하며 바로 뛰쳐나갑니다. 서재필은 말리느라 진땀을 뺍니다. 빠꾸 없는 성격인 겁니다. 민영익은 에릭 닮은 걸로 유명한 인물이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칼을 휘둘러 여럿 죽입니다. 민영익에게도 칼을 휘둘러 큰 상처를 남깁니다. 민영익은 이때 27군데 자상을 입습니다. 호러스 알렌의 응급 치료를 받았고, 서양식 지혈과 봉합 수술로 살아나게 되죠. 고종은 양의술에 감탄해,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이 설립됩니다.

이규완은 김옥균 무리와 함께 일본 망명을 떠납니다. 망명지에서 김옥균, 박영효는 어리고 끝발없는 이규완, 서재필에게 시중들라 시키죠. 이규완은 그게 무슨 혁명가의 자세냐며 들이받고 김옥균의 사과를 받아냅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 말라,  평생을 이어가는 신념이었습니다.


보디가드로서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암살을 위해 일본에 온 대한제국 자객 이일직을 붙잡아 놓고 인두로 고문하며 줄줄 자백을 받아내죠. 정도가 지나쳤는지 도리어 폭행으로 구속되어 법정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어쨌든 이규완이 아니었으면 박영효는 김옥균처럼 효수 당했을 겁니다.


박영효가 복권되자 이규완도 경무관으로 채용됩니다. 이때  대원군 손자 이준용이 사주한 김학우 암살 사건이 터집니다. 이규완은 빠꾸없이 바로 운현궁을 덮칩니다. 한 성격하는 대원군은 어딜 고종 사촌을 잡아가냐며 고래고래 소리치죠. “너희는 종정경(이준용)이 주상과 숙질간임을 정녕 모르느냐. 당장 물러가렸다.” 이규완이 어떤 사람인지 대원군이 몰랐죠.


이규완은 대원군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흠신 두들겨 패고 포박해 끌고 갑니다. 이때 이준용은 아까 그 인두고문을 당한 것 같습니다. 한 20일 정도 말이죠.

갑신정변 때의 칼부림을 기억하는 고관대작들은 은근히 이규완을 두려워 했습니다. 송병준은 이완용에게 “불알 잘 간수하시오. 저 검은 옷 입은 순사가 누군지 아시오.” 농담 아닌 농담을 합니다. 


박영효가 몰락하며 다시 일본으로 미국으로 떠돌게 됩니다. 시대적 한계에 부딪힌 개화파 지식인들은 깊은 환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각자가 이 환멸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죠. 이완용처럼 적극적인 부역에 나선 이도 있고, 윤치호처럼 계몽운동에 나서는 이도 있습니다. 서재필처럼 미국인 필립 제이슨의 삶을 선택한 이도 있었죠. 이규완은 그들과 다릅니다. 조선인은 일을 열심히 아주 열심히 해야한다고 믿습니다. 고강도의 자조론입니다. 망명지에서 이규완은 열심히 일을 합니다.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그 열심히 일하는 수준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실근면과 수준이 다릅니다. 이때, 나카무라 양잠 농장에서 일하다 이 집안의 서녀 나카무라 우메코와 결혼합니다. 이 결혼으로 훗날 엄청난 미스테리로 남는 일이 벌어지게 되죠.


이규완은 한성을 들락거리며 고종 폐위 쿠데타 모의를 알립니다. 이승만도 포섭되죠. 그 결과 이승만은 이때 처음 체포되는데, 이규완에게 미국 망명 상담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규완에게 제대로 배웠으면 땀 흘려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텐데요.


정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 부당함에 분노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노의 방향을 일본보다는 무기력하고 게으른 조선인에게 돌렸던 것 같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들어오면서 이규완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지위가 올라가니 궁상맞은 성실함이 돋보입니다. 퇴근후엔 지게 지고 일을 합니다. 점심 대접을 받으면 “이 세상에 공짜 밥이 어디있느냐”며 거름을 옮겨주고 집을 나섭니다. 관사는 고아원으로 개조하고 집에서 걸어서 출퇴근합니다. 열차는 항상 3등칸. 남은 여비는 장학금으로 기부합니다.


성실함은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그 밑바탕에 조선이 게을러 천벌받아 망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조선인은 ‘게으른 본성’을 가져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똥지게를 메고 가다 노닥거리는 사람을 보면 그 앞에 엎어버립니다. 유지들이 기방에서 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름 만지던 차림으로 끼어들어가 판을 깹니다. 술, 담배, 도박은 시간을 허비하고 영혼을 좀 먹는 것으로 봤습니다. 야구도 싫어했죠. 오락 따위 인생에 없었습니다.


이론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규완을 설득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입은 옷은 넝마같은데, 때 타지 말라고 물까지 들였기에 중국인 잡부로 오해받기 일쑤였습니다. 체면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하며 맞춘 구두를 평생 기워가며 신죠. 도청 화단에 똥지게를 메고와 거름을 주고 남는 거름은 집에 들고 갔습니다. 빨래물은 물론이고, 똥, 손톱, 때 어느 것 하나 버리는 걸 용납 못했습니다. 작은 나무토막이라도 보면 깍아서 이쑤시개라도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아들 둘 결혼식도 돈 아끼느라 같은 날에 치루게 했습니다. 축의금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의 자유연애도 지지했고, 며느리들 신분도 상관없었지만 그 집안에 들어간 며느리들은 고생이 많았을 겁니다. 

빨래는 집에서 하고, 빨래를 빤 물은 모아 두었다가 다시 쓰던가, 거름에 섞어서 밭에 주든지 퇴비에 끼얹도록 해라. 때도 다 재물이니라.

조선인은 열심히 일해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일본인과 똑같은 권리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총독부에도 끊임없이 요구를 했죠. 

조선인의 부력(富力)이 내지인과 필적하게 납세 및 기타 국민된 의무를 행하게 된다면, 어찌 내지인과 똑같이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겠는가. 참정권을 획득함은 물론이고, 비록 국무대신이나 주외(駐外)의 외교사신을 조선인이라고 못할 자가 없다고 믿는다.

죽을 때까지 그 성실함은 이어집니다.

내가 죽거든 입던 옷 그대로 너희들 형제의 손으로 메어다가 파묻어라. 그리고 장례비는 나의 소신인 10원을 넘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모은 재산만큼은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교육 사업에 투자, 선용하여라. 그렇게 한다면 나의 묘에 비록 비석은 없을 지라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인사하고 갈 것이다. 세상에는 흔히 생전 자기 묻힐 묘자리를 보아두고 비석까지도 준비하는데, 그런 자들은 인생을 거짓 살았기에 끝까지 거짓으로 살려는 행위인 것이다.

말년에는 중풍에 걸려 누웠지만 한 순간도 쉬지 않았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손을 움직여 어망을 짜며 소일했습니다. 어느날 자식을 불러 미루나무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언제 내가 죽을지는 모르나 내가 죽거든 저 미루나무로 관재(官材)를 하라. 관재가 마련되었으니 굳이 관을 새로 살 필요가 없어서 장례비 10원을 5원으로 내리고, 그 이상 넘지 않도록 하라.

이규완의 자조론은 뼛속까지 진심이었습니다.

나의 과거를 회고하건대 국가, 사회를 위해서나 후손을 위해서나, 너희들을 위해서나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일러 무능한 인간이었다. 이러한 무능한 인물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 어찌 다액의 돈과 재물을 소비하면서까지 장의(葬儀)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것은 또한 나에게만 국한된 일이다.


양반임을 자부하고 의식주에 한 가지도 궁함을 모르고, 무위소일하여 부귀영달의 꿈을 깨지 못하는 부유층은 물론, 그들과 합류하여 허송세월하는 자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를 아는가? 관혼상제에 과분한 돈과 재물을 들이는 것이 다른 한국 동포들의 생활을 피폐케 하는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후라도 이것을 시정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일찍부터 천하 사방을 돌아다니며 다스리려는 큰 뜻이 있음.

직무에 충실하고, 신념과 기절(氣節)이 당당함, 신식 학문에도 어느 정도 견식이 있고 품성이 영특함, 함부로 사람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며, 자기의 신조를 행함에 있어서 과단성이 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음. 한편으로 조선인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배짱이 있는 사람.


너그럽게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없고, 어질게 부하를 복종시키는 덕망이 없음.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여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정책과 함께 하였고, 親日을 신조로 삼았으며, 조선인 상당수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변절(變節) 성향이 없는 것 같음, 강직하고 고집스런 성격의 소유자.

이런 극도의 성실함을 어떻게 비판하겠습니까만, 이런 성실함은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할 식민지인의 태도이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한국 근대사에 특이한 미스테리를 하나 남겼습니다.

나카무라 우메코. 이규완과 결혼하여 개명한 이름 이매자. 이매자의 아버지 나카무라 이치는 미국에 파견된 일본 외교관이었다고 합니다. 나카무라는 스페인 왕손 출신 마가렛 고츠를 만나 이매자를 낳았습니다만, 일본에 본처가 있는 것을 들켜 헤어집니다.


이매자는 26살에 출생의 비밀을 알고 어머니를 만납니다. 마가렛 고츠는 캐나다로 오라고 했지만 남편의 뜻에 따라 거절하죠. 1928년 마가렛 고츠는 사망하고 유언장이 경성에 날아 옵니다.


“사랑하는 내 딸 우메코, 언제든지 캐나다에 와서 유산을 상속받도록 해라. 우메코가 상속받을 유산은 2억 달러이다. 그동안 나를 보살펴온 양녀가 있는데 그에게도 일부 유산을 줬으며 너의 재산은 양녀가 관리하도록 했으니 안심해라. 미스터 페인을 만나면 모든 일을 살펴줄 것이다. 양녀나 페인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이 이어졌고, 이규완은 1946년 이매자는 1949년 사망합니다. 한국전쟁중에 미군 폭격을 맞아 유언장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2억 달러.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3조원이라고 합니다. 당시 캐나다 경제규모의 3.3%. 수상할 정도로 큰 액수입니다. 마가렛 고츠라는 실제 인물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고, 허황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유산이 정말 있었던 것일까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하필이면 무식할 정도로 근면성실 솔직담백한 이규완 집안의 이야기라서 솔깃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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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08-18 22:53:17

영락없는 타짜의 아귀군요..

힘좋게 생긴 관상이네요.. 평생 식복은 타고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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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 23:35:39

좋은데 재미나기까지 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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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02:10:23

분도님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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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05:49:52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분도?혹 본명(세레명) 이신가요?

1
2019-08-19 09:16:53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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