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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 19세기 프랑스인의 눈에 비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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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19 12:45:49
샤를 달레는 프랑스외방선교회 소속으로 19세기 초중반 동남아 등지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가 저술한 "조선교회사"는 그의 전임자의 저술을 다시 모아서 편집 및 보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의 전임자는 다름 아닌 한국 천주교의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를 세례한 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의 저서는 서문 1권과 교회사 9권, 총 1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인데 한국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함께, 조선에 천주교가 언제 처음 들어왔고, 천주교도가 어떻게 확산되고 또 탄압받았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에 대한 지리인문학적 개괄은 이 방대한 저서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19세기 초중반 프랑스인이 보았던 "조선"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요약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먼저 조선의 위치 (위도 등) 와 자연국경 (백두산, 압록강, 황해, 동해 등), 그리고 국토의 면적 등을 소개하고 이렇게 시작합니다. 

"코리아(Coree)라는 이름은 중국어 Kao Li에서 유래했다. 조선인들은 고려라고 발음하고 일본인들은 고라이라고 발음한다. 이 명칭은 이전 왕조의 명칭이며, 1392년 탄생한 현재 왕조의 공식명칭은 "조선"이다. 이 나라는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나라이다. 초기 네덜란드인들의 지도에서는 섬으로 묘사되었다. 과거 중국의 강희제는 만국전도를 완성하기 위해 조선국왕의 협조를 구하였으나 별로 소득이 없었다."

또 조선의 자연경관을 예찬(?)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조선은 산이 많은 나라이다. 어디를 가든지 산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선 어디에서든 숲을 찾아볼 수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숲은 나라 북부에 집중되어있다."

다른 한편 조선에 광산이 많음을 암시하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산맥에 분명 금광, 은광, 구리 등이 많을 것으로 보이나, 이를 채굴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왜 그런가 하니 혹자는 나라를 최대한 가난해보이도록 하여 외적의 야욕을 저지시키기 위함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정부가 수도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지역에 다수의 인력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이 민간광산업을 금지한 것은 맞지만 18-19세기부터 민간채굴을 허용했다고 알고 있는데, 실제로 제대로 채굴산업이 진행되지는 못했나봅니다. 

교통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산이 많은 이 나라에는 도로 및 교통수단이 부족하다. 대부분 자기 거주지 주변만을 경작하며, 따라서 큰 도시는 매우 드물다. 평소의 생산량은 백성의 필요에 거의 미치지 못하며 기아는 흔한 일이다"

조선의 주요 경작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감자에 대한 기록이 흥미롭습니다.

"감자는 최근에 전래된 작물이나, 조선인 대부분 감자를 모르고 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나 정부는 감자의 경작을 금하고 있다."

실제로 감자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820~30년 사이라고 하는데 감자경작 금지는 처음 듣는 일입니다. 무슨 연유로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조선의 주요 동물 중에 호랑이를 언급하고 있는데 매년 호랑이에 의해 희생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 여름에는 곤충이 너무 많아서 성경 출애굽에 나오는 이집트의 재앙을 연상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외모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은 몽골로이드 외형을 하고 있으며 중국인보다는 일본인과 유사하다. 코는 낮고 광대뼈는 도드라지며 얼굴은 둥글다. 머리카락은 보통 검은색이나 갈색 또는 밝은 갈색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은 수염이 없고, 있다고 해도 풍성하지 않다. 키는 중간 사이즈이며 정력적이고 쉽게 지치지 않는다. 북부지방 사람들은 거의 야만이라고 할 정도로 강건하다."

저자는 조선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 이후 바로 역사로 넘어갑니다. 

그는 처음에 사람들이 조선인과 조선어가 중국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했으나, 지금보니 두 언어는 완전히 다르고 오히려 몽골쪽에서 온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와 태조왕건에 의한 고려건국을 언급하고 있으며 몽골제국의 고려복속, 그리고 몽골제국의 와해 이후 명나라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의 대두 및 조선의 건국(1392)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은 도쿠가와 정권과 조선의 관계를, 조선이 일본에 조공을 하는 관계로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강화는 조선측에 굴욕적인 조건으로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선이 정기적으로 파견한 수신사를 조공단으로 보았습니다. 

이어 병자호란과 청나라와 조선의 군신관계, 그리고 청나라 사절단이 오면 치러야 하는 비용과 의식과 의례 등을 소개하며 조선과 청나라는 "군신(Kounsin...알파벳으로)" 관계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공관계"에 대해 꽤 인상적인 부분들은 언급하고 있는데 가령 조공을 받는 자보다 조공하는 자에게 가는 선물이 더 크다고 말하며, 또 황제는 조선국내정치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원나라는 심하게 간섭한 적이 있으나, 이는 현지인들의 큰 반발을 초래하였음을 언급하면서, 명나라는 보다 명민하게 조선을 속국보다는 '동맹국'처럼 대우해줘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사적으로는 만주인 청나라의 연호가 아닌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1637년 이래 전쟁이 없었음을 언급하며 조선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약하고 빈곤하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광산채굴 금지 또는 외국인과의 접촉 금지 모두 이를 위해 시행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한편 전쟁이 없고 평화가 지속되었기에 역사는 주로 궁중암투의 역사가 되었으며 이에 다양한 파벌들이 생겼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파벌들을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누고 그리고 다시 서론과 노론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귀족은 반드시 이들 파벌 중 하나에 속해있으며, 이들간의 증오는 계속 세습된다고 말합니다. 외국인인 그가 어떻게 이런 당파들을 알게 되었고 이들의 특징을 어떻게 알게되었는지 무척 궁금하군요.   

또 그는 천주교로 개종한 이들은 대부분 남인들이었고, 대탄압의 시대 당시 남인들이 몰살당하고 노론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시 그의 주된 관심사였던 천주교의 도래와 전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정치에 대해 설명하면서 왕의 신체가 신성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 사례로 프랑스인들이 자국의 국왕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는 것을 보고 조선관료가 크게 놀랐다는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성불가침성과 절대적인 권력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실상 정치를 주무르는 것은 "귀족(양반)"이라고 말하며 왕의 실제 권력은 약한 편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조선의 궁궐의 누추함(?)에 대해 얘기하면서 파리의 일반시민들도 살기 꺼려할 것이라며 힐난하는데, 당대 서구인의 인식 대부분 그러하였으니 딱히 문제삼을 것은 없을 거 같습니다. 

그는 조선의 관료제를 설명하면서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석의정(영의정을 잘못 표기한듯)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조, 형조, 병조, 호조 각 정부부처의 기능과 책임을 서술하고 조선의 수도 한양과 각 지방의 명칭(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그리고 해당 지방의 주도(州都)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 지방에 파견되는 관료들의 명칭과 기능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론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누구나 관료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실제로는 귀족들만 채용된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군사는 천시되는 것으로 귀족들이 기피하는 직군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그는 조세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각종 세금은 명목상 낮은 수준이지만 실제로 징수업자들이 징수하는 액수는 터무니없이 크며 심지어 한 관리는 자신이 징수한 금액을 기록도 하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명목상 낮은 세율과 이의 폐단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법제도 관련해서는 귀족과 평민을 재판하는 재판소가 다름을 이야기하고 "금부"라는 곳은 "반역죄"를 다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일화는 "도둑질"에 대한 것인데, 3일 이내로 신고하면 도둑 맞은 재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으나, 3일 이후에 신고하면 보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른 한편 부정부패가 막심하여 힘있는 자들은 전혀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 또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중국의 막강한 영향을 말하면서, "국민적(National) 교육"이 전무하다고 말합니다. 고전은 조선의 고전이 아닌 중국의 고전을 공부하고, 언어도 국문이 아닌 중문을 공부하고, 역사도 국사가 아닌 중국사를 공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경우 한 명의 독재자 밑에 다수의 평등한 사람들의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반면, 조선의 경우 왕과 평민 사이에 다수의 귀족이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카르텔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과학과 언어 그리고 미술에 종사하는 특수계급이 있다고 말하며 이들은 대게 세습되며 조선사회에서 일종의 중간계급(Middle Class)을 형성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조선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록 모든 서적과 문학 그리고 과거시험이 중문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국가의 공문서와 귀족층은 중문만을 사용하고, 국문은 천시된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과의 "종속관계"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평민과 귀족층 자녀들은 어려서 "국문"을 배우고 이를 통해 천자문을 외운다고 언급합니다. 그리고 한글로 된 서적이 거의 전무하고, 조선인과 외국인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여 조선어가 서양의 "동약학자"(Orientalist)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프랑스 선교사들만이 조선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이들의 언어를 배우고 소통했다면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조선어의 문법과 문자에 대해 방대한 설명을 하는데, 가히 조선어입문이라는 교과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세하고 전문적입니다. 어격(Datif, Instrumental, Accusatif, Nominatif 등)과 형용사, 현재형, 미래형, 과거형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또 조선어로 "주님의 기도"를 쓰는 법 및 읽는 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텬쥬경
ThionTsioKiong

하ᄂᆞᆯ에게신우리아비신져여네일홈의거륵ᄒᆞ심이
Hanare kiesin ouriapisin tsiaio Ne irhomeue koreukhasimi
나타나며네나라히림ᄒᆞ시며네거륵ᄒᆞ신뜻이
Nathanamio Nenara hinimhasimio nekoreukhasin Tteulti
하ᄂᆞᆯ에셔일움갓치따희셔또ᄒᆞᆫ일우여지이다
Hanareseio Iroumkattchi Ttaheueseiotto Hanirouiotsiita

아울러 조선의 사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귀족, 평민, 노예 등 세 계층이 있음을 언급하고, 이 중 귀족의 전횡과 부패, 거만과 탐욕을 맹렬히 비판합니다. 그리고 조선인구의 거의 1/3가 노비였다고 비판하는 요즘 일부의 견해와 달리, 19세기 프랑스인은 의외로 노비가 적었다는 점을 말하면서 그들의 처지는 비교적 인간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평민보다 양반집의 노비가 훨씬 윤택했다고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산업과 무역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화폐경제는 거의 전무하며, 도로사정은 매우 낙후되어 있고 수레나 바퀴를 이용하지 않으며, 이렇다할 산업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만 종이제작 기술은 중국을 뛰어넘는다고 말하면서 매우 칭찬하고 있습니다.

무역은 한편 거의 전무한 상황이며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일부 밀무역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로 해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선교사들도 이 해상루트를 통해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여 전부 소개해드리기 벅차네요. 나름 꽤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가 이 책의 서문에 불과하며 진짜 본론은 기독교의 전래와 확산 그리고 박해입니다. 임진왜란 때 처음 천주교가 알려지고, 18세기에 이벽과 이승훈 그리고 정약전 등을 통해 확산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서론보다는 이 본론 부분이 더욱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조선의 천주교도 양반들이 무슨 말을 했고 프랑스 신부들에게 무슨 말을 건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며 이들이 한문으로 차마 적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생각들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죠. 

본론도 언제 한번 시간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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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1-19 12:38:38

이방인의 시각으로 본 우리의 모습은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물론 당시 서구인의 시각에서는 극동의 비문명국으로 묘사되었을 가능성이커서 걸러봐야겠지만은요.

 

본문에 올려주신 조선교회사는 검색이 안되는 걸 보니 아직 국내에는 번역이 안된모양이네요.

 

아마 원서로 읽고 계신것 같은데 번역하셔서 출간해보심이?? ㅎㅎ 

 

 

2019-11-19 13:20:34

흥미가 가서 읽고 싶습니다.

번역판이 아직 없는 상태인가요?

Updated at 2019-11-19 14:30:32

감자의 경우... 조선 후기에 보급이 되어졌지만 (찾아보니 1820년대네요.)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쉬쉬하면서 몰래몰래 재배하던 품목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재배기술도 부족했고, 신품종이어서 조세대상도 아닌 관계로 한반도 북부지역에 한정되어져서 몰래몰래 재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재배금지령이 내려진것입니다.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작물을 재배시키려고 했던 거죠...

 

그리고 감자 재배가 한반도 남부로 확대된 것은 1880년대 선교사들에 의해서였습니다.

 

4
2019-11-19 14:29:31

당시 풍물과 역사 제도 국제관계를 면밀히 파악한 것은 그것이 “기독교를 앞세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사전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해먹을게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자기가 남들이 모르는 지역에 대해서 전문가라는 것을 어필해서 책을 많이 팔아먹고 여기저기 자문하고 돈받고 유명해지기 위해서 세계 방방 곳곳에 대해서 자세한 탐방기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지요.

당연히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데는 한계가 있으니 “소스” 몇군데가 있을텐데 그들의 생각이나 편견이 많이 반영됩니다. 게다가 흥미를 자아내게 하기 위해서 MSG도 좀 치고 그러는거죠

2
Updated at 2019-11-19 14:37:24

너무 피해의식적으로 보시는 것 같네요...

선교사들이 선교를 할때 그 지역 풍속같은 것을 세세하게 기록하였으며 그 지역에 혹은 교황청에 보고가 되어지고 그 자료를 모아서 책을 내며 돈을 모아 선교자금을 하거나 새로운 선교사를 모을 자료로 쓰곤 했죠..

 

그 뒤 제국주의자들이 그 책을 자료삼아 침략을 한 것입니다. 그게 그소리다라고 하시겠습니다만...

 

아프리카의 침략을 가속화 한 것이 선교사 리빙스턴이 의료사업을 하면서 남긴 자료덕분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그 선교자료로 아프리카인들에게 더 많은 문화 혜택이 갈 수있게 하려고 했지만, 그 자료를 받은 미국인 스탠리는 제국주의들이 아프리카 내륙까지 미치게 만들죠.

스탠리를 욕해도 리빙스턴을 욕하는 사람 없습니다... 

4
2019-11-19 15:02:51

피해의식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그러합니다. 소위 탐험가라는 것들이(실제로는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장이죠) 이런 지역에 뭐가 있다라고 보고하면 그 다음으로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밑밥 깔아놓고 다음에 상인과 군인들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건 그냥 공식이에요 피해의식 어쩌고도 아니고요 물론 당시 개개인들은 본인의 부와 명성을 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서 활동한거겠지만 결국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역할을 수행한 겁니다.

WR
2
2019-11-19 15:18:03

현재 이미 학계에서 사장되고 있는 견해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인, 관료, 군인, 선교사 등의 이해관계는 상충되고 달랐습니다. 이 서로 다른 집단이 동일한 목적이나 계획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게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한가지 확인할 수 있는건 당시 서양의 기록문화가 굉장히 꼼꼼했다는 것입니다. 군인이든, 상인이든, 선교사든 모두 아주 자세하고 방대한 기록물을 남겼습니다. 

2019-11-19 15:20:37

전쟁사도 시간, 분단위로 기록이 되어져 지금도 연구가 되어지고 있다니... 정말 무섭기도 하더군요...

2019-11-19 14:31:59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1
2019-11-19 14:42:39

코리아는 고려때 벽란도를 드나들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부르던 이름입니다

Updated at 2019-11-19 16:35:54

님의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에 늘 감탄합니다.

님의 정체가 궁금해지기도 하는군요. ^^

 

전주시내 신흥고등학교 건너편에 선교사 묘역이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고 숙연해지면서, 종교 여부를 떠나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근대화에 기여한 노력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곳에는 당시 지금 아프리카 이상으로 열악한 생활환경이었던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풍토병과 부족한 의료시스템때문에 사망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특히 어린자녀들의 무덤앞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kjyoun24/221345608194

 

예수회 선교사에 관한 글이라서 개신교 선교사에 대한 감상을 잠깐 적어보았습니다.

 


2019-11-19 17:40:40

서울에도 합정동에 선교사 묘지가 있지요..바로 옆 절두산 성지와 더불어 둘러보기 좋은..

2019-11-19 21:23:47

굉장히 흥미로운 데요 잘 읽었습니다

2019-11-20 00:35:55

 음....구황이 나라의 중요정책이라 고구마와 감자를 퍼뜨리고 재배에 대한 책도 나왔다는 얘기는 봤는데요.

감자경작 금지는 좀 상충되는 얘기라 의아합니다. 조선후기면 대동법이 시행되고, 보가 발달하며 밭도 논으로 바꾸던 시기였을텐데 세금문제였을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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