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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낭만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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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7 20:18:12


노래 제목으로 접했을 때, "응?" 했던 조합이어습니다. (혹시나 해 체리필터 그 노랫말 다시 찾아봐도) 거리의 고양이가 화자인 게 분명 맞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맞지 않는 수식어라 여겼죠.
길고양이의 처지를 가까이 접해보기 전에도 우연히 맞닥뜨린 그들 행색은 거의 겁에 질려 도망가기 바쁘고 주눅 든 채 눈치 보던 게 대부분이었는데 낭만이라니, 뭔 소리 했습니다.
그런데 길냥이들 접촉하면 할수록 그리고 집의 고냥씨를 보면 볼수록 낭만고양이란 조합에 끄덕이게 됩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힘차게 하늘 향해 수직으로 치솟는 녀석들의 꼬리, 참치캔 하나에 똥꼬발랄해지는 명랑함, 조금 배 부르면 지들끼리 뒷발팡팡 투닥투닥 장난스런 싸움질, 절망스런 순간에도 침착해지는 놀라운 평정심..

차가운 공기를 칼의 날보다 더 서늘하게 가르는, 생을 걸고 싸우는 길냥이들의 먹이와 짝짓기 다툼 소리에 불편을 넘어 소름 끼침을 느낄 수 있습니다.(산을 이웃한 주택지는 고라니의 특유의 울음도 혐오의 대상이죠)
그럴 때, 인간이 내고 만드는 도시의 소음으로 어둠 너머 공포에 짓눌리고 삶의 질이 수명에까지 영향을 받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환기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애초 상당수 도시는 들이었고 산이었던 그네들의 삶의 터전을 인간이 치고 들어 와 만든 곳이니까요.
조금 덧붙이면, 몇 년 전 산중 가르는 지방도 옆에 살았는데 그때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가 자동차(+오토바이크)가 내는 소리와 행락객이 내는 유흥의 괴성과 정신 없던 노랫소리였습니다.
주변 인가 없어 조용했지만 그런 만큼 더 도드라지게 도로를 채우는 자동차 굉음은, 송이철이나 나물 채취 시기가 되면 끊임없이 어두컴컴한 새벽부터 울려서 사람은 알고서 소음만큼의 고통과 불편이지만 동물들, 새들, 나무들은 공포공포겠구나 싶을 정도더군요.

낭만 얘기하다 소음으로 빠지는 삼천포 흐름을 여기서 이만 끊어야겠습니다.
분명 사는 건 지난 날과 비교할 수 없이 누리는데 갈수록 팍팍해지고 죽을맛이란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 끝으로 낭만고양이의 사진 몇 장 덧붙입니다.


#배 고프다고 길 막으며 울던 녀석에게 밥셔틀 인연이 5년 지났는데, 그 전 버려진 교회에서 6~7년 넘게 쥐잡이 노릇했다니 사람으로 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든 길고냥씨죠.
많이 지쳐 보이는 녀석이 겨울 잘 지나 캣닙의 황홀함과 캔따개의 충성을 잘 받아주길 빌어봅니다. (스크래처로 쓰는 죽어 쓰러진 나무에 캣닙 뿌리니 세상 가장 제일 낭만고양이가 된 녀석의 이름은 레몬입니다. 첨 봤을 때 너무나 노랗게 빛 나서 레몬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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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1-17 20:27:33

녀석 엄청 장수했네요! 저희 동네 냥이들은 그렇게 챙겨 주고 보호해 줘도 2년 이상 가는 녀석이 거의 없어요.ㅜ 속상합니다.

WR
2
2020-01-17 20:35:36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1년도 못 봅니다 저 역시.. 교회 지낼 때부터 꿰고 있던 무덤가를 (그나마 터전이 없어지고) 차지해 특유의 친화성과 물 잘 챙겨먹는 고양이의 드문 미덕 덕분에 완전 길냥이가 됐음에도 아직 잘 버텨주네요. 녀석이 좀 더 건강히 오래 저를 길집사 삼아주고 혹여 죽으면 꼭 발견되어 마지막 길 보낼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2020-01-17 20:30:16

이글 보고 문득 10년도 넘은 옛날, 에노시마란 곳에 갔을때 찍었던 행복하게 나긋한 시간을 보내던 고양이들의 사진이 기억나서 하드 뒤적여서 올려봅니다.^^;

 길냥이도 포지션에 따라선 낭만적이기도 한거 같아요...(금수저 길냥이...?)

WR
1
2020-01-17 20:39:15

네, 사람처럼 운과 팔자 나름으로 길생명도 명암이 갈리겠죠. 사진 속 길고냥씨들처럼 이땅의 많은 길냥이들에게도 느긋하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도시의 휴식이 주어지는 그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2020-01-17 21:05:1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지사지를 통해 우리의 동반자들에 대해 좀 더   따뜻한 시선을 가지게 하는 글이네요.

WR
4
Updated at 2020-01-17 21:54:59

길냥이들 밥셔틀 하는 이들 상당수가 그 전까진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고백을 하곤 하죠. 혐오까진 아니어도 저 역시 그랬습니다. 어느 날 인연이 닿았고, 보는 만큼 알게 되고 또 알게 된 만큼 정이 고이니 역지사지란 게 절로 되더군요. 물론 인간이 이룬 도시에서 인간의 관점과 선택이 통할 수밖에 없다는 걸 수긍합니다. 다만, 차라리 무심할 뿐 그들에게 인간이 내면에 쌓은 폭력성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잘 읽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1
2020-01-17 22:05:35

건강하게 겨울 나길 바랍니다.
전 몰래 캔 하나 주고 도망 가는 소심이라 ...
담날 캔은 치워주고 다시 새걸루 ...
거의 마주치지 않아요

WR
1
2020-01-18 21:20:23

덕담 덕분에 레몬이 이번 겨울도 잘 이겨낼 것 같습니다 :-)  길냥이들과 되도록 거리를 두라고 하죠. 사람이 호의적이지 않다는걸 학습한 냥이들이 변고를 당할 확률이 낮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간단하게 치료약만 도와줘도 나을 수 있는 아이들이 그런 거리감으로 눈 앞에서 악화되다 잘못되는 걸 보면 무엇이 맞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답은 없지만요. 사라모해 님이 소심히 주시는 캔 하나로도 그 순간만큼 충분한 녀석들만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020-01-17 23:18:09

제목이랑 사진이...

WR
2020-01-18 21:21:44

냥이들 사진 달고 가면 웬만한 커뮤니티에선 좋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전 디피가 유일합니다만)

2020-01-18 09:15:07

잔잔하고 따뜻한 글이에요.

네마리의 길집사 노릇을 하고 있는데 밥 주는 녀석 중에 제일 나이 많은 녀석이 생각나는 글이에요.

절대 뛰는 일 없이 느릿느릿 걸어다니는 대장냥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녀석인데 

몇살인지 가늠은 안되지만 행동이나 표정에서 살아온 세월이 전해져요.

레몬이 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네요~^^ 

WR
1
Updated at 2020-01-18 21:26:34

예, 길냥이들 얼굴을 보면 또 행동거지를 보면 말씀처럼 세월이 느껴지더군요. 포쓰가 주변에 전해지는지 어린 냥이들도 기가 팍 죽는 게. 한편 한 해 한 해 지쳐가는 것도 보여서 안쓰럽기도 합니다. 파인더 님도 그러실 것 같습니다. 모쪼록 네 마리 냥이들 무탈하게 겨울 잘 나고 봄 맞아서 파인더 님 더욱 부려먹을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 (그리고 디피분들 덕담 덕분에 우리 레몬이 자기 아끼는 사람들 애정 받으며 좀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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