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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삼국의 건국연도 사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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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2 18:36:44

신라 기원전 56년

고구려 기원전 36년

백제 기원전 18년

 

이렇게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고구려가 먼저 건국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꼭 진실을 기록한다고 볼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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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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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2 18:41:46

삼국사기에는 그렇게 적혀 있죠

그런데 광개토대왕비문에 삼국사기에는 없는 왕이 3~4명 있다! 근데 누군진 모름

아무튼 그럼 20년 정도는 넘는다고 가정할 수 있으니까요

전 광개토대왕비문에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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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6-22 19:02:46

고대사 쪽은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1) 백제 고이왕은 누구의 아들이냐?? 사서에서는 개루왕의 막내 아들이라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120살은 족히 넘는 다는 것이 함정... 그렇다면 고이왕은 개루왕의 손자 혹은 증손자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간에 한두 세대를 건너뛴 것이 아닌가 판단이 됩니다...

 

2) 고구려 태조왕도 최소 118년을 사신 왕이시죠... 그래서 고구려 고주몽-태조왕 이후 계보 가문과 유리왕~모본왕대는 다른 가문으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많더군요... 가문 교체가 이루어지다보니 왕의 자리가 장시간 공백기를 가졌다고 보더군요.. 반대로 고이왕처럼 중간 한두세대 생략된 것일 수도 있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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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6-22 19:10:40

2020년 현재에도 대한민국 건국일 시빗거리인데,
삼국 건국연도는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겠죠.
삼국사기는 다분히 신라 위주, 친 중국 사관일테니까요.

2020-06-22 20:16:20

그렇다고 삼국사기가 단순히 사대주의 사관이라며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봅니다. 삼국사기가 기전체 사서인데, 삼국의 역사를 황제의 역사에 해당되는 "본기"로 저술하고 있거든요.(고구려본기,백제본기,신라본기 등등...) 심지어 고구려본기가 10권이고, 백제본기와 신라본기가 6권 분량이에요

1
2020-06-22 20:21:16

그렇죠. 당연히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고, 얼마나 수용할지의 문제겠죠. 아쉽게도 고구려나 백제가 기록한 사서가 남아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백제 관련 단서가 일본에 조금 있는데, 왜국 역시 날조와 왜곡에 능하잖아요...

1
2020-06-22 20:26:04

일본서기가 그래도 교차검증용으로는 귀중한 사료죠. 굳이 비유하자면 복어같은 사료랄까요? 환단고기같은 위서들에 비하면 훨씬 역사서 가치가 높다고 봅니다.

Updated at 2020-06-22 20:29:45

맞습니다. 환 자 들어가는 것들은 사서라기보다는 판타지 소.... 에구 이 표현도 싫어할 분들 있을까 모르겠네요.

한반도 도래인들이 고대 일본에서 주류로 남았다면 기록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판도가 자금과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
Updated at 2020-06-23 00:13:12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사 연구의 기본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으나 대체로 기원 3~4세기

이전의 기사들은 사료비판을 통해 보정을 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고대인들이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게 그정도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기록 전에는 사적이 구전되었으며 그 내용 역시 신화적 요소가 섞인 경우가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삼국사기 초기 기사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사료비판과 고고학을 통해서 보정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2020-06-23 10:01:48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 아닌가요.

일본서기 임나일본부 이야기가 삼국사기에는 없으니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해서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비에 '출자 북부여'라고 해서 북부여까지 계산하면 건국연대가 올라가지 않을까합니다.

Updated at 2020-06-24 22:41:46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을 부정하더라도 그 주장에 대한 검증과 연구를 거쳐 

부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5년이 지났습니다.

세대가 두번 바뀌는 세월이지요.

 

그런데도 현재 학계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쪽은 

서강대 이종욱 교수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초기기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자 그대로' 라는 말입니다.

 

"100만 대군이 쳐들어왔다."

는 기사를 보고 진짜 100만명이 쳐들어왔다고 해석하는게 문자 그대로 해

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실제 100만명이라기 보다는 아주

군사가 많았다는 관용적 표현이라고 생각하는게 보정을 통한 해석입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사는 기원전부터 대체로 4세기 이전 기록을 말합니다.

이때는 삼국의 사람들이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시작하기 전입니다.

 

문서로 된 역사기록이 없었으므로 옛 사적은 입에서 입으로 전래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살이 붙기도 하고, 여러 사건들이 뒤섞이기도 했을겁니다.

 

그리고 역사 기록 이전의 시대는 신화와 설화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누가 알에서 태어났다느니, 날짐승으로 변신해서 격전을 치렀다느니, 

120살을 넘게 살았다느니, 귀신들이 구원을 해줬다느니 하는 기록들이 남게 

된 것입니다.

 

신화적 기록들은 문자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국내외의 자료들과 교차 검증을

통해서 사료비판을 진행할 필요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물, 유적으로 보완

적 연구를 수행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사들은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으나, 고대인들이

역사를 기록한 방식을 따져보면 충분히 건져낼 수 있는 사적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건국 신화를 통해서 고대 사로국에 대표적인 6개의 부족들이 있

었고, 그 부족에 속하지 아니한 혁거세 집단이 마치 알에서 태어나듯이 기존의

부족들을 초월한 세력을 갖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

를 갖고 있으며, 그 정확도도 뛰어납니다. 상당수의 기사들이 금석문 등을 통해서

그 신빙성을 검증받았습니다.

 

반면, 역사기록의 틀이 잡히지 않았던 아주 오래된 사적들은 거기 쓰여있는 그대로

가 아니라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보정과 검증을 거쳐 역사적 진실을 추출해낼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초기기록을 포함하여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Updated at 2020-06-25 10:27:46

맞습니다.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연구와 검증을 해서 비판하고 그게 받아 들여지면 정론이 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한 연구나 검증이 얼마나 이루어졌고 그게 학문적으로 합리적인지 사실 전 많이 알지 못합니다. 이미 가정을 두고 초기에는 나라 기틀이 세워지지 않아 부정확 할 것이다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려면 모든 나라의 역사서들도 이 가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십습니다. 유독 삼국사기에만 이런 잣대가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김부식의 역사관은 제쳐 두고라도 당시 왕에게 바친 역사서 이므로 당대 여러 사서로 교차검증 작업을 거쳤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뢰가 있다고 보고 연구와 검증을 통해 옥석을 가려 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사료 유물 연구와 검증 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초기 불신론을 심어주었고 그게 고정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서가 없었습니다만 요약하면

나라 초기이기에 부정확할 것이다라는 가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합리적 연구나 검증이 아니다.

왕에게 바친 역사서이므로 기본적으로 신뢰성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차차 연구와 검증으로 밝혀나가면 된다.

정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길고 좋은 답글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20-06-25 13:21:42

글쎄요...

일제강점기는 이미 75년 전에 끝났는데, 그동안 우리 대학에서 연구하신 연구자들, 학자들, 교수님들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가정'을 검증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셨을까요? 

학계는 연구하고 검증하는 곳이지 '가정'하고 뭉개는 곳이 아닙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의문은 굳이 학자들까지 갈 것도 없이 일반인들도 읽다보면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는 기록입니다. 

 

삼국사기는 논문이 아니라 레퍼런스입니다. 김부식 당시 전해지고 있던 국내외의 여러 사서들과 사적들을 모아 취사선택하여 알맞다고 생각되는 기사들을 모아 레퍼런스를 만든 것입니다. 그 김부식조차 초기의 일부 기록들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만 입수된 자료에 그렇다고 적혀 있으니 그대로 삼국사기에 옮겼다고 써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문제를 식민사학자들과 엮는 것은 정치적 프레임입니다. 식민사학이라는 거부감 드는 개념과 초기기록 불신론을 연결시켜 평판을 떨어뜨리고, 반론을 억제하려는 정치적 프레임입니다.

 

식민사학과 반대로만 하면 올바른 역사학이 되는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역사는 감정으로 하는게 아니라 이성과 합리로 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당시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375) 기록입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에는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적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라는 백제보다 역사기록이 더 늦습니다.

 

문자로 역사기록을 시작했다는 것은 중앙집권화가 되고 국왕과 왕실의 권위가 강력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 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 전에는 지방세력과 부족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왕실의 권위가 강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각 지방마다, 또는 부족마다 섬기는 신이 달랐습니다. 국력이 중앙으로 모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합니다.

 

가정을 하는게 아닙니다.

 

2020-06-26 10:38:44

김부식의 고기 인용 부분 의문점은

1.외교 전쟁, 천문, 기상 기록으로 볼 때 정식 역사책은 없어도 기록물 존재 가능성

이를 바탕으로 중흥군주인 근초고왕때 고흥의 서기로 정식 편찬

2.근초고왕 이전 기록은 문자기록 없어 믿기 어렵다 하는데

정작 삼국사기 초기기록도 고흥서기 기록이 아니고 중국이나 다른 수많은 사서 참조했을 정황.  

믿지못할 기록으로 쓰이지 않았으니 믿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봐야. 즉 초기기록 부실과 큰 관계 없어 보임 .

이정도 이구요.

 

그리고 사학과의 학자, 연구자, 교수님들의 많은 노력과 성과물은 인정됩니다. 그리고  그 권위에 기대어 검증을 다했을 것이다는 생각은 효율적이고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전공자이시거나 현업에 계시다면 주제넘어서 죄송합니다.

Updated at 2020-06-26 10:53:17

1. 앞 댓글에서는 '가정'하는것을 비판하셨는데 이번에는 기록물 존재 가능성이라는 '가정'을 대입.

2. 중국의 역사서에 한반도 관련 기록이 없지는 않으나 소략하고 단편적임. '수많은 사서'가 혹 국내사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결국 백제인들이 기록한 것이거나 백제인의 기록으로부터 인용한 기록일터. 따라서 근초고왕 이전에 역사기록이 없었다면 성립하지 않을 논리.

 

역사학계의 학자, 연구자, 교수님들이 식민사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이론에 대한 연구, 검증을 하지 않았을거라는 '가정'을 하고 계신거라면 그건 말릴 수 없지요. 이 경우엔 '역사학계'에 있지 않은 분들의 저서를 읽으시거나 직접 연구하시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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