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광고업계 20여년, 식당 사장 그리고 폐업
참 이젠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는 프차인지라 눈팅러가 간만에 넋두리 한번 올립니다.
광고업계에서 20년 넘게 일했었고요, 막판엔 작은 대행사에서 임원을 3년 정도 했습니다.
이대로는 제 명대로 못 살 것 같아 퇴직을 했고요, 체인점 식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5년 반이 흐르고 어제 마지막 영업을 마무리했습니다.
2억1천만원 투자해서 통장에 남은 돈은 아무것도 없고 받게 될 보증금 3천5백 남았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적자로 인해 땡겨쓰고 빼먹은 돈이 1억 정도 됩니다. ㅜㅠ
작년 2월부터 코로나로 인한 타격이 명치를 때렸습니다.
처음 식당을 오픈할 당시는 나름 자신이 있었습니다.
광고업계에 있을 때에는 TVCF제작이 주 업무였고, 제 회사를 차려 몇 년 승승장구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업계에서도 일부만 아시겠지만 저는 특이하게도 그때 외국 CF를 수주받아 제작하는 프로덕션을 했었습니다.
그때 솔직히 꽤 많이 남았어요. (일은 증말 힘들었지만요)
당시 제가 데리고 있던 PD들 작품 수당을 제작 마진의 30%를 줬습니다.
우린 그때 못해도 작품당 3천은 남겼으니까 9벡만원을 작품수당으로 줬어요.
거기에 기본급이 2백5십이었으니까 한편 제작하면 월 지급액이 1천만원이 넘어갔습니다.
그때가... 2006년 2007년 정도였는데요, 그 돈이 하나도 안 아까웠습니다.
당시 국내 CF 프로덕션들 작품 수당이 대체로 몇십만원이거나
실장급 정도 되어야 인센티브 계약을 했거든요.
업계 친한 친구들은 저보고 미친거 아니냐고 했었어요.
하지만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죠.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허다하고,
허구헌날 편집실에서 날밤 까고, 말도 안돼는 수정 요구에 정신이 피폐해져서
새벽에 혼자 비싼 바에 가서 양주 한 병 다 비우곤 했었습니다.
해외촬영 떠나러 공항가는 길에서 전화받고 황당하게 되돌아왔던 일...
홍콩은 맨날 미팅하러 당일치기로 왔다갔다 했어요.
차마 필설로 다 옮기진 못하지만 나만큼 산전수전 공중전 거친 놈 있음 나와보라 그래!
막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까짓 식당 하나쯤 뭐... 그런 생각 했어요.
와... 근데 식당 해보니까 와... 이거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요. 딴 세상이에요.
내가 알던 그 세계와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달랐습니다.
처음 오픈할 때 저는 딱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놀려고 했어요.
결론은요? ㅎ 5년반동안 1년에 딱 이틀 쉬었어요. 설날하고 추석.
저는 못 놀면 죽는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제가 처음 오픈할 때 투자했던 권리금을 조금이라도 회수하고 싶어 버티고 버텼는데요,
아, 지금 이시기에는 미련 갖지 말자 생각하고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마지막 영업을 마치고 혼자 이것저것 정리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군요.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에 참 소중하고 귀한 경험 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인간적으로 좀 더 겸손해지고 성숙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돈이 없어도 알바생들 시급은 올해 9천5백원, 9천원씩 줬습니다.
내가 데리고 일하는 애들 최저시급 주는게 쪽팔려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몇백원 차이이긴 하지만요.
지난 5년반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애들 월급 밀린 적 단 하루도 없었고,
거래처 대금 지급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지급했고,
월세 하루도 안 밀리고 송금해왔습니다.
그렇게 하느라 저는 피가 마르는 날이 많았지만 그건 제 의무고 책임이고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어제 저녁, 주변 상인분들께 인사드리며 저희 음식 포장해 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텅 빈 가게에 나가 사부작 사부작 남은 정리를 했고요.
참 해도해도 끝이 안 나더군요. ㅎ
이렇게 제 인생의 한 막이 마무리되는 느낌입니다.
자꾸 주변에서 이제 뭐 할꺼냐고 물어보는데 정말 당분간 걍 놀고 싶어요.
힘들었어요. 많이.
돌이켜보면 징역살이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줄 모르고 스스로.
넋두리에 덧붙여, 혹여 지금 자영업을 처음 해보려 계획 중인 분이 계시다면요,
- 절대 서두르지 마세요. (본인만의 오픈 스케쥴 정하지 마세요) 정말 많이 살펴보고 관찰하세요.
스스로 미리 긍정하지 마세요. 계속 의문을 품고 확인하세요.
- 점찍은 가게나 지역이 있다면 평일 낮, 오후, 저녁, 밤, 주말 낮, 오후, 저녁, 밤 유동인구 추이를
체크해야 해요. 일 이주일 정도로는 어림 없어요. 자신이 잘 아는 곳이라고 자만하지 마세요.
주변에 학교가 있다면 방학 시즌이 어떤지 꼭 살펴봐야 해요.
- 필요 인력을 잘 점검하세요. 특히 내가 누군가에게 필히 의존해야 하는 업종이라면 돌발 상황에 대비한 플랜 B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주방장(점장, 매니저) 빵꾸내는 날 가게 쉬어야 해요.
- 혼자 1인 운영하면서 월 매출 1천만원인 가게, 매니저(주방장 or 점장)와 알바 고용하면서 본인도 일하고 월 매출 2천인 곳, 그리고 직원 대여섯명 고용하면서 월 매출 5천인 곳은 실질적으로 수익상 별 차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용 직원 늘어나고 매출 규모가 클수록 신경쓸 일, 스트레스, 예기치 못한 비용, 리스크 부담이 커집니다. 근데 남들이 볼때 직원 많고 월매출 5천인 사장이 때돈 버는 줄 알아요.
- 내가 하기 쉬운 건 남들도 하기 쉽습니다.
- 배달은 이제 필수 같습니다. 배민, 쿠팡이츠에 대해선 느낀 바를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릴께요.
- 박리다매는 규모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근데 규모가 커지면 리스크와 비용도 함께 상승합니다. 지금 박리다매로 잘 하고 있는 매장들은 그 궤도에 안착해있는 곳들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 수준까지 도달하는데 개거품 눈에 보입니다.
- 온라인 마케팅은 이제 인스타와 유투브가 대세 아닐까 합니다. 블로그는 맛집 검색에 따른 보충제 역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 식자재 원가를 30% 이하로 맞추는 건 이제 쉽지 않습니다. 소비자들이 가성비를 따지는 기준이 매우 매우 보편화되고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리고 이 평가가 온라인과 모바일 파도를 타고 사진과 함께 너울너울 퍼져갑니다. 맛과 콸리티에 자신있다면 차라리 가격을 확 올리는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정도라면 이 가격 인정 - 막 이럽니다 ㅎ) 이도저도 아닌 채 어중간하면 딱 망하기 쉽습니다. 저희 가게에서도 가장 비싼 메뉴가 정말 많이 잘 팔렸습니다.
어, 어찌 두서없이 쓰다보니 제 반성문같네요... -,.-;;;
먼저 쓴 맛을 본 아재의 개인적 소감 정도로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백수 생활을 당분간 만끽하고 싶습니다...
다음에 뭘 또 시작하게 되면 이곳 프차에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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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으셨습니다. 좀 쉬시고 난뒤 자영업 스토리 편하게 썰을 푸실수 있는 시간 꼭 오실거라 믿습니다. 지금은 오롯이 본인만의 시간을 즐기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