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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리나라의 번역서에 관한 아쉬움과 방어적 독서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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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9-19 13:05:53

 먼저 저는 영어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제대로 번역 출판을 해 본 적도 없는 평범한 독자이며, 영문 원서를 그럭저럭 읽기는 하지만, 한글이 훨씬 편한 일반인임을 고백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정보가 영어로 생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바로 영문을 수월하게 정확히 읽는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으나, 영문보다는 한글이 편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번역서가 있다거나 유튜브에 한글자막이 지원된다면 반갑고 먼저 찾아보게 되는 것이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현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시간 번역서와 번역물을 조금만 신경써서 보아오신 분들이라면 가끔 그 품질의 조악함에 뜨악하시고 경계와 불신의 마음을 갖게된 경험들이 꽤 있으실 것 같습니다. 번역본을 읽다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가거나 문맥과는 틀린 문장들이 나타나고 그것을 원문으로 찾아보면, 그것이 원문의 문제나 나의 이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였던 경험을 자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류의 종류와 심각성은 다양한데, 내용을 전혀 다르게 번역하거나 심지어 정확히 반대 뜻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고 때로는 중요한 문장을 마음대로 날려 버리거나 없던 문장을 자의적으로 삽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제대로 이해한(이해했다고 착각한) 역자가 의미를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하겠습니다만-. 이게 문학서적이면 어느 정도는 문학적 허용으로 의역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제가 주로 읽는 서적은 IT서적이 대부분인데도 이런 상황이 많이 보입니다.

 

이런 식의 경험이 많다보니, 저 같은 경우에는 번역물을 볼 때에는 먼저 원서부터 찾아놓고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읽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전자출판의 시대를 맞이해서 대부분의 원서의 경우는 쉽게 아마존에서 전자책으로 저렴하게 구입하거나, -비록 불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번역본은 이미 구입했으므로- 이런저런 경로로 해적판 전자책을 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먼서 서문을 읽으며 번역의 품질을 가늠해 보곤 합니다. 번역자가 한글은 제대로 쓰는 사람인지 -실제로 의미는 잘 읽어내지만 한글 실력이 안되어 번역을 못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 문맥은 잘 맞는 문장들이 이어지고 있는지 등을 봅니다. 그러다 한두번 덜컥 하는 부분이 나타나면 원서를 대조하며 봅니다. 이런 부분에서 번역의 오류가 나타나면 그 빈도수에 따라서 번역서를 계속 읽을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정말 중요한 책이면 원서를 위주로 힘들더라도 읽고, 그렇지 않다면 그 책은 없는 셈 치거나 대충 읽으며 언제든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슬렁슬렁 읽어 나가고, 이상한 문장이 나오면 원서를 대조하며 확인하며 읽습니다. 

 

  하도 엉터리 번역서에 많이 데이다 보니, 왜 우리나라의 번역서들은 이렇게 대충 만들어지고 번역품질이 떨어질까 하는 고민도 해 보고 여러 의견도 많이 찾아봤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출판시장이 너무나 작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IT같은 전문분야는 더더욱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책 한권을 제대로 번역하는데 정상적으로는 몇개월이 소요될 수 있는데, 인세는 몇백만원밖에 못 받으니 사실상 IT서적을 번역할 수준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묵묵히 일하는 분들 말고는 제대로된 번역시장이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서들이 꽤 많이 나오는 이유는 명성을 얻기위해 책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분야의 책을 번역했다라는 것을 하나의 타이틀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엉터리건 뭐건 번역을 해서 내고 자기 이력서에 한 줄 올리면 목적 달성이고, 그런 타이틀을 이용해 강의를 하거나 취업을 하는데 써먹기 위해 책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에는 손쉽게 책을 내는 구조를 갖춘 교수와 대학원생의 조합이 있는데 제가 가장 경계하는 부류이기도 합니다. 교수가 자기의 명성을 이용해 유명한 책을 계약하고 챕터로 쪼개서 대학원생들에게 나누어 번역을 시킨 후 제대로 감수도 안하고 교수이름으로 내는 책들이 시중에는 꽤 됩니다. 이런 책들은 대체로 최악의 번역품질을 보여줍니다.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정말 중요한 책 중에 이런식으로 망가져서 책이 쓰레기가 되어 나와있는데 그걸 모르고 구입해서 읽으며 사람들이 이책은 너무 이해하기 어렵다며 한탄하는 모습을 가끔 봅니다. 이해가 갈 리가 있겠습니까? 책 페이지마다 오역이 서너개씩 나오고, 정반대의 뜻으로 틀린문장이 뒤죽박죽인데요. (그 와중에 편집자가 성실해서 윤문을 잘 해주면, 한글로는 문장단위로는 잘 읽히는데 뜻은 안통하거나 모르겠고 이게 번역문제인가 내 문제인가 싶은 환장의 콜라보가 나오기도 합니다.ㅎㅎ)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내가 이런 책을 냈다는 한 줄이 중요하기 때문에, 번역단가가 싸도 계약을 하고 또 품질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며, 대체로는 번역할 실력도 안되기 때문에 본인은 성실히 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쓰레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공을 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도 엉터리 번역서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모 프로그래밍 커뮤니티의 매니저를 몇년하고 영국에 유학하여 공부하고 벤처 창업가이기도 한 모씨의 번역서는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이런 현실이 앞으로 나아질까를 생각해보면 그다지 나아질 것 같지는 않고 그저 각자가 영어실력을 키우거나 경계하며 머리를 더 열심히 굴리며 읽는 수 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은 멀었지만 언젠가는 자동번역이 지금의 번역가들의 평균보다는 좋아질 날을 기다리는 것이 그나마 희망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류로 점철된 수준낮은 번역서에 대해서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뭔가를 얻고 좋아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원서를 대조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번역서의 오류를 잘 모르고 읽을 것이고, 아무래도 원서가 좋은 책이라면 그래도 제대로된 정보가 8~90%이상 있다면 그래도 얻을 것이 많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보통은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심각한 케이스에서는 좋은 책을 이렇게 망쳐놓고 자기 커리어에 한 줄 추가하는 데 소비해 버린 역자에 대한 분노가 치솟을 때도 있습니다. 또 이런 어렵고 보상도 적은 환경에서도 묵묵히 좋은 책을 찾아서 성실하게 번역을 해 내는 소수의 번역자들과 출판사들에게는 정말 고마움과 존경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복잡한 생각들이 번역서를 볼 때마다 들곤 합니다. 

  아침에 유튜브 자막을 보다가 이상해서 원문과 대조하다가 해도 너무하네 하며 이걸 번역자막만 보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를 생각하다가 쓰게 된 글이 길어졌습니다. 누군가의 자발적인 번역으로 추가된 자막이겠지만, 이런 실력을 가진 사람은 왜 여기에 자막을 넣었을까? 심심해서? 이 사람이 넣지 않았으면 좀 더 잘 하는 사람이 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면 이렇게라도 넣는게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오랜기간 번역서를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을 적는다는게 쓸데없이 긴 글이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대책을 논하거나 희망을 적어볼까도 싶지만 그만한 고민은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그만 마무리하며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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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1-09-19 13:12:24 (220.*.*.29)

"책 한권을 제대로 번역하는데 정상적으로는 몇개월이 소요될 수 있는데, 인세는 몇백만원밖에 못 받으니 사실상 IT서적을 번역할 수준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묵묵히 일하는 분들 말고는 제대로된 번역시장이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제대로 번역하려면 꼬박 5개월이 걸리는 책인데 번역료가 500만원 600만원 이래요. 이러면 사명감과는 별개로 물리적으로 좋은 품질의 번역이 나올 수 없죠. 먹고 살아야 하니 다른 일도 해야 하고요. 한달 내내 죽어라 매달려서 백만원 받는 일이면 사명감과는 별개로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WR
2021-09-19 13:18:01

네, 그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서 참 어려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시며 꾸준히 좋은 책을 내는 분들은 정말 그 직업이 적성에 맞고, 전문적으로 많이 하시다보니 효율도 많이 올려서 짧은 기간에 품질을 뽑아낼 수 있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1
2021-09-19 13:33:08

경제서적 읽다가 너무 이해가 안가가지고 영문판을 샀는데
오히려 영문판은 문장이 단순하더군요
번역을 구글번역기를 돌려서 낸건지…
그런데 상황보면 그냥 내가 영어공부 열심히 하는게 빠르겠다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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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9-19 13:45:01

이름꽤나 알려진 사람인 경우에는 그냥 이름만 얹어 놓은 경우가 꽤 많습니다.

 

돈을 목적으로 번역하지 않기 때문에, 분량으로만 따지면 아마 국내최대 분량을 번역했을겁니다.

유투버들이 열심히 퍼가서 영상만들고 있다는 제보가 계속 들어오던데, 어차피 지식공유용이기 때문에 그러라고 하고 있습니다. 

초보고양이집사를 위해 고양이전문서적 2권을 번역 중인데 dp에도 공유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3주째 게임에 빠져서 70% 선에서 그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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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9-19 14:26:32

대학 때 저를 가르쳤던 어느 교수가 몇 년 전에 번역서를 냈더군요.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봤는데 읽어보고 든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한테 배웠었구나 하는 자괴감

좀 충격이었습니다


영어를 좀 할 줄 안다고 번역을 잘 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번역톤 자체가 어디 미국이나 영국 사람이 한국말 배워서 하는 번역인 줄 알았네요. 국어를 이래 못 쓸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대학교수나 되시는 양반이. 예로 드신 분들이야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번역이 엉망으로 나올 수 있다 치지만 대학교수쯤 되면 딱히 그런 정도도 아닐 것 같은데 사명감 같은 게 없으신 건지

 

책도 누가 읽을 것 같지도 않은 굳이 번역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책이던데 누가 돈을 줘서 억지로 한 건가 싶은 느낌도 살짝 들긴 하더군요

그러기엔 책 권수도 많고 좀 방대하다 싶긴 했습니다만(근데 번역은 왜 그 모양이었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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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9-19 17:34:36

본문 내용에 다 공감하고 심각하다고 봅니다. 수십년 된 고질병도 있구요. 그런데 최근 10년 사이에 젊은 번역자들의 우리 말(문법, 어휘력, 어법 등) 능력이 눈에 띄게 저하되고 있는 것 같아서 이 점도 좀 우려스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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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9 19:01:20

예전에 창비에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같은 책이 나왔었는데, 이와같은 번역평가서들이 계속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도서 번역의 현실이 이러한데 하물며 유튜브같은 무검증 컨테츠의 번역은, 약간 과장해서 100% 오역이라 생각하고 불신합니다. 사회정치적 의도로 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많을거구요.

2021-09-20 05:34:21

별모래님 덕분에 조악한 번역의 원인을 알 수 있게 되었네요. 저는 외국 거주자로 아무래도 영문 서적을 더 많이 접하기는 하지만 역시 한글 번역서가 더 편한데 가끔씩 엉망인 것들이 있어서 번역자의 실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그렇게 단순 생각했었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군요. 이렇게 또 하나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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