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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잡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일본 근대화와 조선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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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5-04-06 17:31:54

밑에 댓글로 쓰다가 글이 길어져서 따로 본문으로 올립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하고 널리 잘못 알려져 있는 역사 상식중에 하나가,

일본이 근대화를 먼저 성공하였기에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합병하였다 입니다.

 

 

침략 결심 시점을 놓고 보면, 이것은 단언코 틀린 이야기입니다.

침략 완수 시점을 놓고 보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본은 내전에서 사쓰마번-조슈번 연합군이 막부군을 패퇴시킨 시점을 근대화 시작인 메이지 유신으로 봅니다. 이게 1868년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사쓰마 vs 조슈의 내전이 계속되었으므로(서남전쟁), 이게 끝난 1877년을 메이지유신 완성시점으로 보기도 합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언제 결심하였는가.

1873년입니다. 메이지 유신 끝나고 혼란기 상황에서도, 태정관 회의에서 사쓰마와 조슈 양쪽이 모두 조선침략에 동의하였고, 그 시기를 놓고 지금 당장 침략하자는 사쓰마 (사이고 다카모리)와 지금 내전 막 끝났으니 조금 더 힘을 기른 후 침략하자는 조슈번으로 갈렸습니다. 이 갈등이 유명한 '정한론' 논쟁으로, 이 갈등이 몇년 뒤 사쓰마-조슈 간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계기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조선 침략엔 동의한 상태였습니다.

 

 

이게 얼마나 골때리는 일이냐하면,

 

당시 일본에 아직 헌법도 없고, 근대 국민교육 교육시스템도 없고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근대 행정기관도 없었습니다. 폐번치현령이 발표된게 불과 2년전 1871년인가 그럴껍니다. 근대적 통신 시스템, 근대적 교통 시스템도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에 철도 노선이 단 한개로, 1년전에 시범으로 설치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조선 침략 시기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일본 최초의 헌법 제정이 이보다 16년뒤인 1889년입니다. 

 

 

자기 몸도 못추스리는 놈이 왜 옆나라 침략부터 결심하는가.

조선을 침략해서 그 돈으로 근대화하자는 겁니다. 

이걸 놓고, 경제적으로 침략해가며 종자돈을 마련하는 한편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가자는 이토 히로부미 및 조슈번 의견이 있었고, 그럴 것 없이 바로 무력으로 침략하자. 내가 조선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조선 국왕앞에서 고의로 전쟁의 빌미가 될 만한 엄청난 불경을 저지르겠다. 내 한 목숨 던질테니, 이를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다오 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사쓰마번)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후 내전에서 사쓰마번이 패함에 따라, 일본은 시간을 두고 조선을 침략하자는 조슈번측에 권력이 넘어갑니다만, 그래봤자 십년쯤 뒤인 1883년 근방을 기약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조선이 일본에 보낸 신문물견학단이 술만 먹고 유학이나 논할 뿐, 서구문명을 배우는 데 관심이 없다고 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롱은, 아마도 당시 조선관리들의 정신상태를 보았을 떄 다분히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사신단이 정말로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서 공부를 하자고 하였을 때, 일본국이 가르쳐줬을 확률은 없었습니다. 이미 침략하자고 국론이 정해진 상태였으니까요.

 

 

조선은 이후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일본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청나라 끌어들이고(청일전쟁 1894년), 러시아 끌어들이는 바람에 (러일전쟁 1904년), 10년이 더 걸려서 조선 침략이 1905년에 완성됩니다. 이 발버둥이 없었으면 조선은 일본 계획대로 더 일찍 침략당했을 겁니다.

 

 

우리가 1905년을 기점으로 생각하니까,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해 있는 상태이고,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여 침략당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일본이 조선침략을 마음 굳힌 것은 자신이 근대화되기 이전입니다 (1873년). 

심지어 조선을 먹겠다고 청일전쟁을 벌이던 시점까지도, 일본은 헌법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제가 일본을 우리나라에게 있어서는 아주 위험한 나라. 침략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유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능력이 되든 안되든, 일단 조선부터 잡아먹고 보자는 게 반사신경처럼 튀어나오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언제 이룩된 것이냐. 조선침략을 위해 벌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전쟁배상금으로 일본은 근대화에 큰 도움을 받으며 근대국가가 됩니다. 애초 계획대로 조선침략하여 그 돈으로 근대화하자는 게 빙 둘러가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는 맞아떨어진 거지요.

더불어 경제적으론, 처음엔 영국제 모직물을 조선에 팔아먹는 중간상인을 하다가, 영국으로부터 중고방적기를 사들여와서 면직물을 만들어다가 조선에 팔아서 돈을 모아 근대화에 보태지요. 조선은 아직 가정주부가 물레질로 천 만들던 시기이니까, 영국제 기계 방적기에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 이외의 국가는 영국이 더 좋은 신형 방적기로 천을 만들어 직접 팔아먹고 있었기때문에(중국, 인도, 유럽, 아메리카 대륙 등), 영국이 처분한 구형 중고 방적기를 일본이 사들여 오긴 했지만 제품의 품질도, 가격 경쟁력도 영국산보다 처졌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운요호 사건으로 조약맺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약점을 잡은 나라 조선에 달라붙어 팔아먹는 수밖에요. 나중엔 그마저도 일제 국산기계로 생산시설을 대체하는 데, 역시 물품을 팔 데가 조선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피 빨아서 근대화가 된 케이스가 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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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WR
1
2015-04-06 06:43:58

간혹 보면, 일본애들이 자신들 정당화를 위해, 1873년 조선 침략 논의는 초기 정한론이었을 뿐, 이후 1880년대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진심으로 조선의 개화를 도왔다, 김옥균을 지원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부 바깥에 있었던 자유주의 사상가인 거고, 일본국 정부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침략 노선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2015-04-06 07:19:10

러시아는 쌩까는 바람에 전쟁배상금은 받지 못하고...지들도 안 주고 버티는 러시아를 어찌하지 못하고.... 1차세계대전에서 한 밑천 두둑히 챙겼다는..

2015-04-06 07:34:18

오~ 이것은 몰랐던 내용입니다. 단순히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여 조선을 참략한둘만 알았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니.. 근데 글중간에 갑오경장이라고 쓰신거.. 갑신정변을 잘못 쓰신거죠?^^

WR
2015-04-06 07:40:52

지적 고맙습니다. 제가 잘못 쓴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2
2015-04-06 07:38:01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의 정한론은 능력도 없이 나대는 사실 아떻게보면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의 그러한 논의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식민지화 구상은 영국에서 배워 온 것인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 모델을 이집트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18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 식민지화 또는 보호국화할지 몰랐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전 일본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메이지 초반이 마지막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WR
2
2015-04-06 07:44:45

일본인들은 그렇게 주장하지요. 걔네들은 자신들의 침략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자기네 태정관 회의록에 나와있는 침략 논의들을, 그건 그냥 공상이었어 라고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침략의 전단계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열강에 겁먹어서 힘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벌인 자기방어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대한제국이 병합된 것은 스스로 병합되고 싶다고 찾아와서 부탁하기에 받아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태정관 회의-청일전쟁-러일전쟁-조선합병까지 명확하게 일관된 노선을 걸었고, 조선을 식민지 만들려고 30년(1873-1905)에 걸쳐 일본이 노력했다 라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2015년 현재의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대한제국 합병은 합법적이었다 가 주류 이론이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자기방어적 전쟁이었다가 주류 이론입니다.

1
2015-04-06 08:14:35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 번은, 이미 17세기부터 류큐를 식민지화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경험이 있는 곳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전에 보였던 사쓰마의 활약은 류큐로부터 수세기 동안 뽑아 내 쌓아왔던 경제적 부유함 없이는 단언코 불가능한 것이어지요. 식민지화 모델을 구지 서양 열강에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일전쟁 이전의 정한론이 실력으로 뒷바침 되지 않았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습니다만, 그 의지를 의심할 여지가 있을까요?

4
2015-04-06 07:49:12

일본의 근대화는 네덜란드로 부터 난학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면서 이미 시작된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동남아 식민지 지배하는걸 보구서 식민지를 어떤식으로 다루는지지도 일본은 배웠구요 체계적인 시스템만 구축이 안되었을뿐이지 이미 근대화는 일본이 아시아국가들중에서는 제일먼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청나라나 조선이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모르고 자기네들만의 세상에서 허송세월 시간허비한거죠 근대화를 못해서 먹힌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있는데도 그걸 거부하고 변화를 두려워한 정치인들과 일부 기득권자들의 잘못된 판단이 결국 크나큰 상처만 국민들에게 준거죠

WR
2
2015-04-06 07:52:46

난학의 도입을 보고서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특히 현대 일본학계에서는 이걸 아주 필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리 말하자면 난학 최초 도입시기에 일본은 총기도 도입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었고, 하지만 사무라이 신분 구조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총기를 폐지하고 칼의 시대로 되돌아가 300년을 보낸 유일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일본이야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자주적 근대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난학 도입을 강조하지요. 총기를 발달시키지 못하고, 칼의 시대로 돌아간 것은 묻어두고요. 역사에는 양면이 모두 있습니다. 자국의 역사에서 잘한 것은 부각시키고, 잘못한 것은 감추려하죠. 근데 일본이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보고 자괴감에 빠지는 것은, 그게 우리가 살짝 속아넘어가는 면이 있을 경우에는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그걸 거부하고 변화를 두려워한 정치인들과 일부 기득권자들의 잘못된 판단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일본에 점령당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결론 말씀에는 100% 동의합니다.

2015-04-06 08:07:28

평소 궁금했던 것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일본의 조선 강제합병은 대동아전쟁 훨씬 이전에 이뤄진 것이라 1945년 일본의 패망과는 직접적으론 관계가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국제적으론 어떻게 일본의 패전과 거의 동시에 조선의 해방 &독립이 즉시 인정될 수 있었던 것 인가요? 역사 문외한이 질문 드립니다.

WR
1
2015-04-06 08:12:40

별개라고 안보니까 그렇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시작된 류큐합병(1879), 홋가이도 정벌, 대만정벌(1895), 조선 합병(1905), 만주 침략(1931), 중국 본토 침략, 태평양 전쟁까지 연결된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 중에서 류큐(오키나와)는 이미 인종이 멸절되었고 (류큐 순혈은 이제 없습니다. 일본인과의 혼혈만 소수 남아있습니다), 홋가이도의 아이누족도 멸절되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잡아먹은 상태 그대로 인정되고 있는 거고, 대만, 한반도, 중국 땅은 토해낸 거지요. 일본내에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반도 합병 까지는 정당화 하는 시각이 크고, 만주 침략부터는 침략이 맞다고 인정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내에서는 만주사변부터 2차대전 종건까지를 묶어서 15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5년 전쟁과 그 이전의 전쟁들은 묶어서 생각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조선 합병까지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거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물론 국제사회에서는 한 덩어리인 침략노선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일본더러 토해내라고 시킨 거였구요. 민족 자결주의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승전국인 영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식민지를 토해내고 독립시켜야 했으니까요.

2015-04-06 08:19:14

답변 감사합니다. 배워갑니다.

2015-04-06 08:10:57

개인적으로 서양(?) 기준으로 근대화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게 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체계에 억지로 끼워맞춘것 같거든요 다만 그 힘 있는 세력의 논리에 따라가야 하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구요

2015-04-06 08:48:59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것만 봐도 국력과 근대화와는 최소한 그시절에는 크게 상관 없었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WR
2
2015-04-06 08:43:43

일본이 조선 침략을 결심하던 메이지 시기는 역사책을 찾아서 보시면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골때리는 혼란기였습니다. 해마다 민란이 곳곳에서 수백건씩 일어났고 (거의 우리나라 동학난 시기에 버금갑니다), 일본이 망할 거라고 예상하고 집도 절도 팔아먹고 밤마다 술마시고 혼음 난교를 벌이는 촌락들이 생기고... 각종 사교도 횡행하였습니다. (바람의 검심 등에 나오는 것처럼 희망찬 새 나라 꿈을 꾸는...따위는 개뿔. 일본 역사책 찾아서 읽어보시면 저 시기 혼란은 아주 환타스틱합니다). 다카하시 츠토무의 만화 Sado(士道)가 이 시기 혼란을 그린 겁니다. 그 와중에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각 마을의 신사들을 때려부수고, 그 신사에서 받들던 신체를 버리고 천황가의 조상신인 천조대신 예하로 재배열합니다. 불교 사찰도 많이 때려부쉈습니다. 억불정책을 쓰고 신도를 권장하였습니다. 본래 일본의 신도는 우리의 서낭당처럼 향토 토속신을 모시는 개념이었는 데, 천황가 조상신인 천조대신을 모시는 이세신궁 예하로 편입시키며 신사 조직도를 만들었고, 여기서 걸리적 거리는 신사나 신체들은 때려 부쉈습니다. 이게 민란을 부추기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일본 신사의 신도는 근대화 이후에 급조되거나 변조된 것들이 꽤 있습니다. 그게 벌써 백년이 지났으니, 이제와서는 자기가 방문하는 신사의 역사를 캐들어가보지 않으면, 이게 진짜 신인지, 근대화이후에 급조된 것인지 알기 어렵지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쪽 관련 내용은 일본 불교사 뒤져보시면 튀어 나옵니다.

1
2015-04-06 09:03:42

우리 입장에선 솔직히 일본발 '근대화 신화'를 곧이 곧대로 믿어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봅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따져봐야겠죠. 솔직히, 뉴라이트 쪽에서 좀 대놓고 어차피 일본에게 먹힐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밀고 나오는 게 아닌지 의혹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2
2015-04-06 09:18:00

알아도 달라질 게 없다는게 문제 입니다.

3
2015-04-06 09:47:36

이보세요. 저런 장문의 글과 댓글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 할 불감증이면 조용히 다물고 있어요.

2015-04-06 13:23:07

볼때마다 닉행일치 쩜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2
2015-04-06 09:32:26

일본의 근대화 중 문화적 근대화의 경우 말쓴하신대로 대한제국 침략 전 까지 근대화를 완성시컀다고 보기 힘들지만, 기술적 측면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대한제국 침략 전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봐도 됩니다. 그리고 문화적 근대화 또한 정부 주도하에 강압적이고 신속하게 이뤄졌고, 비록 껍데기 뿐이라지만 굉장한 속도로 이뤄졌다는 점은 놀라울 정도 입니다. 일본의 소위 근대화란 침략과 대동아공영권으로 뻗어나감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고속 진화를 한 케이스라고 봐도 될 겁니다. 물론 이 대단한 근대화 덕분에 대동아공영권에 들어간 국가들 대부분(일부 국가들은 오히려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을 포함한 일본 자국민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안겨다주는 결과로 남게 되었지만요. 청일 러일 전쟁의 경우도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지연시켰다고만 보기에 국내의 지식인들이 저지른 헛짓거리들은 말도 못 합니다. 덕분에 조선-대한제국 국민들은 개죽음을 면치 못 했죠. 결정적으로 타국을 끌여들여 한반도를 전장터로 삼게 만들었고, 그것도 두번이나 반복하여 이 짓거릴 해댔다는 점은 이해불가 수준입니다. 이 인간들 학습능력이나 있는지 도통...

2015-04-06 09:46:22

사이고의 정한론은 그때가 대원군 집권기였고 병인 신미 양요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하는 점을 보면 그렇게 폐기된게 일본으로선 다행이었을지도요. 대원군 퇴진이 1873년, 강화도 조약이 1876년인데... 어찌 그리 허망하게 문호를 열어버렸는지..

2015-04-06 10:08:12

賣香人님의 글은 무조건 추천이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지금 세상을 어떤 식으로 보고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좋은 답이 되는 글입니다.

5
2015-04-06 11:24:53

늘 올려주신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허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 정론인 것 처럼 오랫동안 알려져 있어서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볼때 일본의 조선 침략은 오래전부터 논의 되어왔고 언젠가는 벌어질 기정사실인건 분명 했습니다만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건 다분히 사실과도 다르고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습니다. 일본에서 처음 정한론이 거론 되었던건 1870년 메이지 신정부가 조선의 사절을 파견했을때 흥선대원군이 이를 거절한뒤 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일본 사절을 받아들일수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참 황당하게도 도쿠가와 막부의 인장을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양놈의 옷을 입고 왔다는 등의 이유였지요. 신정부가 들어서고 그 사실을 알리는 사절을 파견했는데도 도쿠가와 막부 타령이나 옷을 핑계삼고 있었다는 것 부터가 당시 흥선대원군이 쇄국에 눈이멀어 정세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일이었지요.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간 사절의 일원이었던 외무성 관리 사다 하쿠보란 자가 분노에 차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제일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 당시 키도 다카요시로 이름을 개명한 유신 삼걸중 한명이었던 카츠라 코고로였습니다. 카츠라는 초슈 유신파의 필두이자 정한론을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의 제자이기도 했던 인물이었지요. 그리고 이 당시 사이고는 고향에 내려가서 아직 조정에 정부에 나오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카츠라는 흔히 정한론을 반대했던 인물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당시 초슈번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무력을 동원해 부산항을 개항시킨다라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거론했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습니다. 단지 당시 폐번치현 같은 큰 문제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정한론을 공식화하기는 무리였습니다. 허나 이후 몇년동안 지속적으로 조선과 외교마찰이 벌어지자 말씀하신 1873년 태정관 회의에서 정한론이 공식적으로 거론됩니다. 이당시 키도 다카요시(카츠라 코고로)는 해외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중 가장 서열이 높은건 사이고 다카모리 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외무성 관리인 우에노 가게노리는 조선이 계속 외교사절을 거부하고 있으니 거류민을 전부 철수시키던지 아니면 무력을동원해 정식 수호 조약을 강요하던지의 방법밖에 없다고 모두발언을 했고 참의였던 이다가키 다이스케가 거류민 보호를 위해 일개대대를 부산에 파병하고 그후 수호조약의 담판을 진행하자는 구체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런대 이 주장을 제지하고 나선게 사이고 다카모리 였습니다. 공식 각의에 남아있는 사이고의 발언 요지는 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절로 자신을 임명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그러자 그 전권대사는 군대를 대동하고 가야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사이고는 이마저도 거부했습니다. 대신 전통 무사의 격식에 맞는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어 가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문제는 당시 해외 사절로 나가있던 주요 각료들이 복귀한 뒤에 다시 논의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사이고는 분노에 차서 이 만큼이나 각료들이 모여서 이 문제 하나 결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지금 정부의 모든 일을 멈추고 문을 닫아야 한다는 강경한 발언을 합니다. 허나 결국 사이고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에 우여곡절 끝에 전권대사로 위임을 받았으나 결국 정치파벌 싸움에서 밀려난 사이고는 조선으로 갈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원인중 하나가 되어 사이고는 내각에서 스스로 사퇴하게 되고 훗날 서남전쟁이 발발할때 까지 낙향하게 됩니다. 본문에 언급하신 자신이 가서 죽임을 당하면 그때 군대를 보내서 조선을 정벌하라는 내용은 공식 각의에서 언급한 것이 아니라 강경론자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사이고가 보낸 편지에 언급한 내용인대요. 이건 그 발언의 진위를 잘 보아야 합니다. 이타가키는 군대파견을 주장하던 사람이었고는 그런 이타가키를 설득하기 위해 사이고가 내가 전권대사로 가서 죽임을 당한다면 그때 파병을 해도 늦지않다라는 설득의 말이라고 봐야 하죠. 왜냐하면 사이고는 공식석상에서 한번도 군대파병을 주장한 적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예를 갖춘 전권대사를 파견하고 군대 출병은 일관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1873년 사이고가 내각에서 물러나기 직전 태정관대신 산조 시네토미에게 보낸 시말서에는 라는 의견을 피력했죠.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사이고는 전권대사로 위임받지만 불과 며칠뒤에 이와쿠라 도모미를 위시한 반대파의 책략으로 무산되었고 직후 이에 실망한 사이고가 낙향하는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된겁니다. 즉 사이고는 공식석상에서 정한론을 주장한 적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일관되게 정식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예를 갖추고 외교를 도모하자는 주장을 펼쳤고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내각에서 물러난 사람입니다. 어째서 사이고가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로 낙인찍혔는가는 제가 정확히 답할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유신 이후 사실상 모든 권력을 쥐게 된 이와쿠라나 키도 같은 인물들이 서남전쟁이후 완전히 몰락한 사이고와 그 일파의 이름을 빌어 조선침략의 명분을 얻고 그 책임은 전가시키려한 목적이 아니었나 생각할 뿐입니다.

WR
1
2015-04-06 11:39:44

사이고가 조선에 외교사절을 보내고자 한 이유는 전쟁의 빌미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이고의 정한론은 이타가키 다이스테를 설득하고자 핑계를 댄 것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라고 말할려면, 그렇다면 외교사절을 보내서 구체적으로 조선과 어떤 길을 걷겠다는 것이냐 가 있어야 합니다. 근데 그게 사이고에게는 없었습니다. "부디 친분을 두터이 한 후 우리의 취지를 관철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싶다"가 일본수뇌부에서 한일합방을 돌려 말한 게 아니고, 다른 무엇이 또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키노 님의 이론이 맞을려면 사이고가 외교사절을 보내서 조선과 어떻게 협동을 해서 무슨 일을 할려 했다 라는 백업이 될 만한 내용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근데 백사십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런 내용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애시당초 조선과 화합하며 근대화 하는 방안이 일본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근대화과정을 돌이켜보면 , 조선을 수탈하지 않으면 근대화를 할 돈 자체가 마련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군사적 측면이든, 식량 측면이든, 산업 경제적 측면이든, 조선외에 돈 나올 곳이 일본에게는 달리 없었습니다. 사실 사이고의 정한론이라고 말하지만, 어차피 사쓰, 조 모두 정한론자였고 방법론 차이만 있었을 뿐이므로, 사이고 다까모리만 정한론이라고 말하는 것도 뻘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 정한론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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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11:53:26

전쟁의 빌미를 찾기 위했다는 것은 추측이고 일관되게 군대파견을 반대하고 정식외교 사절을 보내 외교를 해야 한다는 건 기록으로 남은 역사죠. 애초에 대화도 시작 못해본 상대하고 향후의 미래를 도모할 구체적인 어떤 그림을 그릴수 있나요? 조선은 당시 왜놈들과는 어떤 대화도 안한다. 사절도 안받는다라는 일관된 정책을 고수하는 입장이었고 그 고착된 상태를 깨기 위해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그 대화의 방법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하는 군대파견과 무력을 동원한 방법이 아니라 예의를 갖춘 사절을 보내 대화의 물꼬를 터보자가 사이고의 일관된 주장이었던 겁니다. 그럼 제가 되묻고 싶은데 애초에 사절도 안받는다 너희와는 말할 가치도 필요도 못느낀다라는 상대를 두고 이 이상의 어떤 방법이 있나요? 전쟁의 빌미를 찾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면 애초부터 대세가 무력을 동원하자는 방법이었는데 왜 그걸 굳이 반대하고 길을 꼬아서 가려 했을까요? 어차피 군대 보내서 무력으로 밀어 붙이자면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는대요. 분명히 일본은 조선을 어떤 식으로건 침략했을 겁니다. 그거야 저도 분명히 언급한 부분입니다만 그렇다고 그 의견에 동조한 적이 없는 사람까지 한대로 묶어서 말할 필요는 없지요.

WR
1
2015-04-06 11:59:05

정한론은 추측이 아니라 기록물로 남은 사이고 다까모리의 주장이죠. 그리고 대화도 시작 못해본 처지라서 어쩔 수 없었던.. 이라고 할 이유 자체가 없는 게,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의 의도는 명확히 드러나잖습니까. 1873년 태정관 회의, 1875년 운요호 사건, 1877년 서남전쟁. 즉 사쓰마 번이 아직 축출되지 않고 중앙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시점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불공정협약을 강요했습니다. 제 기억으론 이 시기면 일본 해군은 사쓰마번 관할일텐데요. 이것을 보면서도, 일본측이 외교사절을 보내 정중히 대화할려고 했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애들이 입발린 소리 하는 것을 말 그대로 애써 믿을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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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12:11:15

사이고는 이미 1873년에 실각해서 낙향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조정에 어떤 영향도 끼칠수 없는 상태였지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건 사이고의 정적이었던 내무경 오오쿠보가 전권을 잡고 있던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다시한번 말합니다만 적어도 우리가 알고있는 정한론 이란걸 주장한건 사이고가 아니란겁니다. 그 편지 하나만을 가지고 그게 사이고의 본심이다 말한다면 공식 기록으로 남은 다른 의견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겠죠. 대화의 물꼬를 트고 외교의 창구를 연 다음의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의 일이야 실제로 일어난 적도 없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야 알 수 없죠. 허나 공식 기록에 남은 사이고의 발언도 결국 실각하게 된 가장 큰 원인도 일관되게 무력동원 반대 공식외교 사절을 보내 대화로 시작하자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건 우리가 알고있던 정한론자의 주장이 아닌것도 분명하죠. 굳이 그러한 사실마저 본심은 다른거다 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만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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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12:22:36

제가 여쭤보겠습니다. 일본이 당시에 조선 외에 돈 나올 길이 있었습니까? 일본은 당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리고 이제 근대화를 해야 하는 데, 메이지유신까지 오면서 나라 내의 광산이나 각종 이권은 이미 유럽열강에 상당수 팔아먹고 빚을 진 상태였었고,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는 이미 서구 열강에 장악되어 시장 침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이 돈 벌 수 있는 데가 조선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옷감 팔아 쌀 퍼가다가 방곡령 나오니까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식량을 가져가려 할 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동남아나 중국으로부터 쌀을 가져올 수 있었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습니다. 동남아산 길다란 쌀은 일본 사람들이 싫어해서, 조선 쌀이어야만 했습니다. 돈 가져가고 싶고, 식량 가져가고 싶다고 하는 데 그걸 허락할 나라가 어디있겠습니까. 사이고가 내가 사절이 되어 말을 하여 교섭해 보겠다 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내가 가서 전쟁의 꼬투리가 될 만한 일을 벌이기 위함이다 라고 기록을 남겼는 데, 전자의 기록 '사절로 가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만을 믿는 것이 더 이상하죠. 흥선대원군이 친부 묘 도굴당해서 빡 돈게 1868년이었고, 쇄국정책 들어갔는 데, 사이고 자신부터가 존왕양이 외치다가 전쟁 패하니까 개화파로 급변한 얼치기인 상황에서, 빡돈 흥선대원군을 설득할 카드를 정한론 나오던 시점에서 단 한개라도 사이고가 갖고 있었습니까. 한 개도 없었죠. 참고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내려온 것은 정한론 후의 일입니다. 정한론이 9월인가 그렇고, 12월인가 쯤에 흥선대원군이 내려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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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12:33:20

저한테 자꾸 다른 답변을 요구하시는대요. 당시 일본의 사정이 어쨌건 그걸 타파할 방법으로 정한론이란걸 모두가 이의없이 동의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럼 사적으로 보낸 편지는 믿을만한 기록이고 공적인 자리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던 바는 믿을만한 기록이 아니라는 건가요? 하물며 그 대상이 유신으로 최고 권력을 쥘수도 있었던 사이고란 인물인데 굳이 대세인 무력동원을 따르지 않고 외교를 통해 대화를 시작하자고 주장하다 권력에서 팽 당한 사람인대도요? 몇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데요. 저는 우리가 알고있던 정한론이란걸 사이고는 주장한적 없다는 겁니다. 그가 외교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그 이후에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는지야 제가 알 재주가 없습니다만 분명히 우리가 알고있는 정한론이란걸 주장한 사람이 사이고는 아니란겁니다. 운요호 사건으로 본격적인 조선침략이 시작된 시기 이미 사이고는 권력에서 내려온 사람이었고 운요호 사건이란 것도 그가 일관되게 반대입장을 표하다가 결국 정적들에게 축출당하는 원인을 만든 방법입니다

WR
1
2015-04-06 12:33:52

그리고 운요호 사건 당시 사이고가 이미 낙향해있었다는 말은 맞지만, 사쓰마 번은 아직 낙향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이고 동생 쓰구미치가 남아서 정부에서 사쓰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
2015-04-06 12:38:23

그리고 당시 사이고를 제외하면 내각에서 권력을 쥐고있던 오오쿠보,키도,이와쿠라는 모두 사이고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난 정적들이었습니다. 만약에 진짜 사이고가 자살이나 다름없이 조선에 가서 죽어주고 전쟁의 빌미를 만들어 줄려는게 본심이었다면 꽃가마 만들어서 축제라도 열어주고 보냈을 겁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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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12:38:38

키노님. 님은 사이고가 정한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것이고, 사실 그 주장은 제가 일본애들 글에서 아주 숱하게 많이 보아온 바 있는 내용입니다. 그게 일본쪽에서는 널리 알려져있는 주장이란 거 본인도 동의하시죠? 그리고 제 주장은 이겁니다. 그 일본애들의 주장은 당시 조선 침략의도가 이미 존재했었다 라는 것을 회피해나가기 위한 변통으로 보이며, 1873년 정한론 논의 시점에서 이미 사쓰조 양쪽 다 정한론자였고, 방법론의 차이로 툭탁 거렸을 뿐이다 라는 겁니다. 사쓰조가 서남전쟁에서 싸운 게 정말로 정한론 때문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죠. 둘 사이가 유신 전에 이미 전쟁에서 맞붙었던 만큼 사이가 나빴었고, 그게 결국 터진 거죠. 근본적인 문제는 군제도와 신분문제였죠. 사이고는 사무라이를 남기고 싶어했고, 평민 징병론을 주장해온 조슈번은 사무라이를 없애고 싶어했으니까요. 그래서 사이고가 낙향해서 사숙을 차려 사무라이 정신 함양 어쩌고 한 거였고, 조슈는 징병제로 그걸 짓밟았죠. 사이고 실각의 원인이 조선에 대해 예의를 갖춰 사절을 보내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라는 말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1
2015-04-06 12:41:51

이미 폐번치현으로 번의 권력은 사실상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번의 필두의 사이고가 실각했는데 그 동생이 남아서 뭘 할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운요호 사건의 그 방법이란게 자신이 그렇게 반대하다가 실각하게 만든 그 방법인대도요? 그걸 이미 실각한 사람이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게 더 현실성이 없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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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12:54:44

하아 이야기가 자꾸 엉뚱한 것 까지 번지는대요. 서남전쟁의 원인이야 당연히 정한론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1873년 사이고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게 만든 원인은 조선의 사절 파견 문제였어요. 정확히는 해외사절로 파견나가 있던 이와쿠라,키도,이토 파벌과 부재중 정부를 이끌던 사이고,이타가키가 맞붙었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게 바로 사이고의 조선사절 파견 문제였구요. 이미 사이고가 조선사절로 간다고 합의를 본 상태였는데 이와쿠라가 꼼수를 부려서 자기 의견 즉 사이고놈 못보낸다는 의견만 들고 덴노에게 직접 상주해 버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열받은 사이고가 관직 집어던지고 나온거구요. 그러니까 조선에 사신단을 보낸 문제가 사이고의 실각과 낙향을 만든 원인인건 맞습니다. 그 이면에 있던게 반대파와의 정치싸움인거구요. 서남전쟁이야 그 이후 폐도령 부터 구 무사계급의 몰락이 원흉인거구요

2
2015-04-06 13:08:55

후에 조선침략과 수탈에 앞장섰던 인간들이 누구인지 보면 답이 나와요. 정한론을 처음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키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내무경 오오쿠보, 그리고 초대 조선총독으로 조선침략의 가장 큰 원인이던 이토 히로부미까지 이들 모두가 사이고와는 정적이었고 그 반대에 서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이고놈 좋은놈이야 이런 주장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던 정한론이란게 뭡니까? 무력을 동원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집어삼키자죠. 그런대 사이고는 이 방법을 주장한 적도 동의한 적도 없어요. 일관되게 반대했고, 그게 원인이 되어 실각했어요. 하지도 않은 주장을 마치 사이고=정한론자 라고 믿는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일본의 사정상 조선침략은 필연적이었다..........처음부터 이 주장은 제가 반대한적 없어요. 허나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는 보장은 없어요.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게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사이고가 현실을 똑바로 못보던 놈이라서 그런 주장을 한건지 아니면 진짜 평화적인 방법이 가능하다고 믿었던건지 아니면 외교를 통해 그 이후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까지는 제가 알수 없는 일입니다. 허나 분명한건 공식적인 모든 발언과 그로 인한 싸움으로 실각까지 했다는 사실은 내버려 두고 단지 사적으로 보낸 다른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편지 한장만 가지고 사이고=정한론자라는 주장은 그렇지 않다라는 주장보다 더 설득력이 없다는게 제 의견입니다. 사정상 리플은 더 이상 달지 않겠습니다

2015-04-06 12:18:58

일본학계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전 에도시대의 안정된 통치와 탄탄한 상업적 기반이 급속한 서양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의견이 많더군요..결국은 에도시대의 재평가죠.. 사실 조선은 상업에 있어서 너무도 뒤쳐저 있었고 기술자 천시에다가 관료계도 극도로 부패해 일본침략이 없었더라도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 었을것으로 여겨지네요..글고 마인드 자체가 일본 사람들은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가 매우 강한 문화고 한국은 유교적 근본주의 성향이 너무도 강했기에 외래문물에 대한 습득의 차이도 컸을꺼고요..

2015-04-06 12:41:45

이런 글을 보면 그때와 요즘의 모습이 많이 오버랩되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왜 우리 조상들이 멍청하게 나라를 빼앗겼늘까 했었는데 요새는 실시간으로 이해가 되는 동시에 결국 민족이나 국가는 자신들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는거구나 싶습니다. 이 시대의 일본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관심이 가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WR
1
2015-04-06 12:46:08

더 이상 댓글 달 방법이 없어서 여기에 이어 적습니다. >사이고가 실각했는데 그 동생이 남아서 뭘 할수 있었을까요? 에이. 왜 뻥을 치고 그러십니까. 사이고 쓰구미치가 남아서 해군을 장악하고, 그래서 사쓰마가 장악했던 일본 해군과 조슈가 장악했던 일본 육군은 뿌리깊은 갈등이 남아 그 이후 70년이 지난 2차대전중에도 서로 엿먹일 정도로 사이가 나빴는데요. 사이고 쓰구미치는 서남전쟁이 터질 당시에도 육군 중장이었고, 그 이후에 해군경으로 자리 옮긴 걸로 아는 데, 서남전쟁 2년전이면서 운요호 사건이 나던 1875년이면 권력이 쌩쌩하던 시점입니다.

WR
1
2015-04-06 13:02:34

이와쿠라 토모미의 꼼수 어쩌고는 진짜로 별개의 이야기인 거고요, 본 주제인 일본이 과연 조선 침략 의도를 갖고 있었는가, 사쓰마와 조슈 양 측이 다 침략의도를 갖고 있었는가로 돌아가서, 지금 키노님이 주장하시는 사이고는 예의로 조선과 대화를 하여 일본의 취지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니 정한론자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시는 데, 그 일본의 "취지"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이걸 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동양평화, 우호관계 이런 붕 뜬 소리 말고, 사이고가 사절로 가서 관철시키려고 했던 일본국의 국익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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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13:14:17

사쓰마가 조선 점령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태어나 처음 듣습니다. 사이고도 기본적으로 조선 점령에 찬성파였습니다. 사쓰와 조슈는 침략방법론갖고 싸운 거지, 조선 점령 자체에 이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이고가 하지도 않은 주장이라는 것은 키노님이 사이고가 폈던 주장중에서 조선에 시비 걸로 간다는 서한은 삭제하고, 대화로 풀려고 사절로 간다 쪽만 내세워서, 사이고는 정한론 편 적이 없다 하시는 거구요. 사이고는 엄연히 그런 주장을 폈습니다.

1
2015-04-06 17:30:17

제가 키노 님은 아니지만, 제가 이해하는 대로 키노 님 의견을 말씀하자면, 키노 님은 사쓰마가 조선 점령에 반대했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개인이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조기 정한론을 편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물론 사쓰마의 유신세력 중 주요 인물이긴 하지만, 태양왕 루이14세도 아니고 하다못해 해당 번의 번주도 아닌 이상 사이고 다카모리의 입장=사쓰마의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쓰마 세력의 대세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의견이 서로 다를 수도 있겠지요. 사쓰마 세력이야 당연히 정한론이 대세였겠지만, 사이고가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조기 정한론을 주장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 키노 님 주장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사이고의 서한들을 어떻게 해석할건지는 매향인 님과 키노 님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실 수는 있겠지만 그건 허용가능한 해석의 차이라고 생각하고요... 매향인 님이 키노 님의 주장을 약간 오해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주제넘게 참견했습니다 ^^

2015-04-06 13:45:44

좋은 글 감탄하며 잘 봤습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가 참 걱정이네요.

1
2015-04-06 17:31:54

디피가 좋은 점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까지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서 분야마다 어찌나 전문가들이 많은지 쉽게 넘어가는 일이 잘 없죠. 이번 글에서도 위에서 키노님이 정확한 사실과 분석으로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그런가 하고 넘어갈 뻔한 사실을 잘 지적해 주셨네요. 역사란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벌이는 일들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고 그래서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쪽에서 나오는 연구를 보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기도 하는데 정설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시간 많은 연구를 통해 어느정도 검증된 것이어야 하겠죠. 물론 정설이 뒤집어 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만... 역사건 어느 분야건 권위를 무조건 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매향인님이 참신한 해석을 던져주신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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