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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일상]  그때 그 시절 음악방송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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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22:50:19

 

다행히도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아니지. 무사한 건 아니었다. 뒷 머리칼에 이물질이 떡지어 있었던 게 수업 도중 드러났다. 하지만 모두가 웃었으니 그럼 다행인건가? 

 

며칠 간 방송을 쉬었다. 몸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내지 않고는 다시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술을 마시다 술이 나를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고. 어렴풋한 기억에 길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던 것 같고. 구토를 했고. 그가 근처 모텔로 나를 데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모텔에서 그는 나를 바로 두고 나갔던 것일까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일어났을 때 내 옷차림새를 생각하면 별 일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이론적으로는 그 상황에서 무슨 일을 벌였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무슨 일을 벌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수일 만에 방송을 열었다. 

 

그날은 오랜만이어선지 리스너 너댓 명이 들어왔다.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그는 오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힘겹게 모은 음반들에서 킬러 트랙들을 엄선해 올린다. 

 

쏘니 보노의 음반 중에서 한 곡. 지금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곡이다.

 

 

쏘니는 배우이자 싱어로서 유명한 셰어의 전남편이다. 백인이지만 블랙 뮤직에 탁월한 팝 싱어였는데, 이 음반은 유독 약냄새가 폴폴 난다. 

 

 

모처럼 음악에만 집중하며 방송을 했고, 방을 접어야 할 시점에 그가 들어온다.

 

공개창이 아닌 쪽지로 그가 말을 건다. 

 

"계속 밖에서 들었어. 불편할까봐."

"불편해? 뭐 때문에."

"고상한 척, 이쁜 척 하는 년들에게 둘러싸여 알콩달콩 재밌게 노시라고."

"비꼬는 거냐, 질투하는 거냐. 그 정도로 비꽈선 나한텐 별 효과가 없어.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시시하게 논다. 그나저나 그날 얘 때문에 고생헸겠다. 

지금은 좀 어때? 괜찮지?"

"응. 별로 열이 높은 건 아니었는데 자꾸 보챘나봐. 아직 어려서."

"그래, 그날 숙박비는 네가 계산했을 것 같은데. 그건 다음에 내가 술한잔으로 ..."

"오케이. 다음에 ..."

 

그렇게 다음이 이어졌다. 다음 만남은 청평이었다. 

뻔한 그림이 그려진다고? 30대 유부들의 그렇고 그런?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친구의 집이 그 근처였고, 아이 때문에 내가 만남의 장소를 배려했던 것이

그곳이었다. 차를 가지고 간 것은 그날은 어떻든 술 마시지 않고, 집에 들어오기 위한 나름의 장치기도 했다. 

 

"나이가 몇이야? 그 정도는 내가 알아도 되잖아. 혹시 너무 많으면 누나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해서."

"음. 사실 나이는 너랑 같고, 학년은 하나 빨라. 빠른 68이라... 그런데 나이는 동갑이니 편하게 불러도 돼"

"야. 우리 대학 동기 중에도 말까는 67들 많아. 빠른이면 당연히 친구지."

"그건 그렇고. 시간 되면 지금 구리 쪽으로 갈 수 있어? 내 후배가 거기 음악 카페를 하는데. 지금 가면 문 열었을 거야. 거기서 한 잔 하고 싶은데."

"갈 순 있지. 그런데 난 차 때문에 술은 못마셔."

"대리하면 되잖아. 대리비 얼마나 한다고."

"대리? 한번도 안불러 봤는데... "

"야. 나같은 섹쉬한 누나가 술한잔 하자는데 음주 운전을 걱정해서 술을 안마셔? 고자 인증이냐?"

 

순간 쪼잔한 놈처럼 되버렸다.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그래 마시고 대리하자. 까짓 것.

 

마셨다. 이번엔 음악이 나를. 

지하 음습한 공간에 그윽한 담배 향과 버번 위스키 향이 나를 흠뻑 적셨다. 

 

거기서 내가 갖고 간 음반으로 신청곡을 하나 했다.

 

 

당시 나는 중동 음악에 꽃혀있었다. 터키의 얼킨 코레이나 oud라는 악기를 구사하는 존 버버리언 같은 뮤지션들에게. 데블스 앤빌이라는 팀은 1967년 결성되어 단 한장의 음반만 남긴 팀으로, 프로듀서가 그 유명한 펠릭스 파파랄디였다. 앨범 전체를 다 좋아하지만 유난히 좋아했던 곡 하나. 

 

 

이제껏 락 음악은 영미권이 독점한 줄 알고 있었지만 파면 팔 수록 영미권 음악은 커다란 전체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요한 일부긴 했지만 결코 전부가 아니었다. 남미, 중동, 아시아

소위 3세계에도 너무도 훌륭한 뮤지션이 많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던 시기다. 

 

좋다. 좋아. 음악과 술만 마시면서 살고싶다. 

 

그렇게 음악과 술에 흠뻑 젖은 나는 제데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누가 흔들어 깨운다. 

"형님. 술 좀 깼어요? 언능 일어나셔아 저도 마감하고 집에를 가죠."

"어? 누구세요?"

"여기 사장인데, 지금 새벽 네 시가 넘었거든요. 동행한 분이 들어가시면서 영업 시간 끝날 때까지 자게 두라고 말씀하셔서 지금껏 기다렸어요. 단골분 부탁이라 조금 더 기다린 거예요. 그런데 ..."

 

"아. 그래요? 미안합니다. 근데 제가 차를 이곳에 두었는데. 지금 이 시간에 대리 부르면 사람이 올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지금 이 시간이면 아마 장거리는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댁이 어디신데요?"

 

몸도 피곤하고, 대리를 한다고 해도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건 와이프의 잠을 깨우는 짓일테니 그냥 근처에서 뭉개야겠다.   

 

집이 멀리 떨어져서 만날때마다 외박이다. 계속 이렇게는 곤란한데. 

다음엔 내 집 근처로 부르던가 아예 만남을 갖질 말던가 해야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계산을 그 친구가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을 것 같다. 

 다음엔 내 근처로 불러서 빚 갚고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님의 서명
스피노자처럼, 바타이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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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4-04-25 23:06:48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추억에 취하고~~~~

WR
Updated at 2024-04-25 23:40:21

취하면 전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솔직해지고. 순수해지고. 자연이 되고. 돌려 말하면 짐승이 되고. 

1
2024-04-25 23:34:05

음악의 선율과 함께 낭만이 넘쳐흐릅니다~~~ 

넘 믓지네요~


WR
1
2024-04-25 23:39:49

그러게요. 다시 그런 낭만을 느끼고 싶습니다. 

1
Updated at 2024-04-26 00:12:47

보통 빠르기로 녹음 후에 0.7배속으로 재생한 듯한 쏘니의 곡은 정말 약 냄새가 심하네요. 데블스앤젤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황량한 서부극의 한 장면이 배경화면처럼 떠오르고요. 

 

어떻게 정리될 것인가, 다음 연재 기다리겠습니다^^ 

WR
1
2024-04-26 00:43:15

어찌보면 홍상수 영화처럼 모노크롬에 무미건조하고 시시껍절한 이야긴데, 기대하진 마세요. 글을 쓰면서 가끔 스스로 닭살 돋고 오그라듭니다. 너무 속보이는 이야기이고, 아무리 넌픽션이래도 이렇게 재미 없어도 되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극적인 씬이 곧 등장하긴 합니다. 연재 중 가장 텐션있는 ...

1
Updated at 2024-04-26 01:10:37

그 텐션에 대한 기대를 또 주시네요. 거지 반 신상 다 드러내는 솔직한 기술에 슬쩍 음악 얹으시는 게 이야기는 그저 노래 소개를 거드는 수준이니 항상 선추천하고 나중에 음악 들은 다음에 댓글 쓰고 있습니다.

1
Updated at 2024-04-26 10:59:33

어학보다 문학 전공하셨으면 어땠을까... 필력이 좋으셔서 상상해봤습니다.

보통 어학 전공자들이 맛깔나는 글은 잘 못 쓰잖아요.

혹시 문학으로 전향하셨는지요?ㅎㅎ

 

적고 보니 이상한 말이네요.ㅜ

WR
2024-04-26 18:57:47

어학 전공 아닙니다. 인문학 공부하려면 마르크스 프로이트 소쉬르가 기본이라 깔아둔 지식이긴 합니다.

2024-04-26 23:13:12

인문학의 일파인 어문학과 출신인 저는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는 어문계열인을 아직 못 봤는데, 정말 노력하셨나 봅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소쉬르에 화행이론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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