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오랜지꽃님의 발제에 대한 반론
1. 먼저 현재 논쟁이 촉발된 이유부터 지적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앞의 글의 요지는 아즈텍의 잔혹행위가 지나쳤기 때문에 망할만했다라는 인과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이는 그저 사적인 의견이 아닌 역사적 사실입니다. 주변 모든 부족들 입장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아즈텍은 스페인측과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했고, 이것은 아즈텍이 유난히 잔인한 제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본 전제(심지어 역사적 팩트인 것)마저 부정하는 분들이 계셔서 논쟁이 격화되었던 것이빈다.
2. 구세계(유라시아)의 일반적인 교전이라면 일부 학살이 존재하여도, 인신공양은 존재하지 않았고, 또 포로교환과 같은 협상도 존재했습니다만, 아즈텍인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스페인의 학살은 말씀하신대로 틀락스칼라인들의 모략에 의한 것으로 스페인이 유난히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잔인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3. 스페인제국의 공식적인 기본방침은 원주민의 권리를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1542년 제정된 법안에 따르면 총독은 (1) 원주민의 복지를 위해 노력해야하며, (2) 원주민을 노예로 삼거나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3) 현재 노예상태에 있는 원주민은 지체없이 해방해야 하며, (4) 노동에 임금이 주어져야 하며, (5) 거주지로부터 강제로 멀리 이주시키는 것을 금하는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법안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현지 총독도 있었죠. 페루의 피사로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법안은 현지에서 종종 지켜지지 않았고 이 법안이 집행되는 것을 감독할 기구도 없었습니다. 당시 통신수단과 스페인 관료제의 한계였죠. 물론 개별적인 콩키스타도르의 학살과 자의적 통치는 당연 존재했습니다만, 스페인 정부가 나치스처럼 의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원주민을 절멸시킨 적은 없습니다. 한편 영미권과는 달리 혼혈도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스페인 영미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개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4. 말라카술탄국의 예시는 적절치 못하며, 대항해시대 인도양에 존재했던 서양의 식민지들은 오늘날 관점에서 식민지였지, 사실상 소규모 요새 및 교역소에 불과했습니다. 당대 네덜란드나 영국상인들은 현지 정보를 어떻게든 자세히 확보하고, 현지의 유력자들과 친분을 맺으려고 했습니다. 현지 유력자들의 협력 없이 교역소나 요새를 새우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당대의 무굴제국이나 명나라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를 안보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도시국가들이 함락당했다고 해서, 당대 스페인이 독자적으로 대규모 영토국가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5. 아즈텍이 사람을 먹는 건 괜찮고, 스페인이 아즈텍을 먹는다(?)는 것은 안괜찮다? 이상한 비유입니다. 스페인은 아즈텍을 멸망시킨 것이지 먹은 게 아니지요. 그리고 국가의 정복은 인류역사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특히 19세기 이전의 정복들은 더더욱 더. 만주인들이 명나라를 정복한 것이 죄악인가요? 고려가 백제를 정복한 것은 죄악인가요? 오스만이 그리스와 발칸반도를 정복한 것은 죄악인지. 러시아가 카잔왕국(오늘날에는 현재 러시아의 심장부의 일부)을 멸망시킨 것은 죄악인지. 청나라가 준가르를 멸망시킨 것은 또 어떨지. 아니... 당장 조선이 북방개척(한반도 북부 여진족 정복)한 것은 무엇일까요.
6. 먼저 두가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노예제의 존속과 매매는 전근대사회의 보편적 현상이었습니다. 당장 조선의 경우에는 자국민을 노예로, 그것도 꽤 최근까지 유지했던 국가였습니다. 둘째. 노예무역의 산업화는 분명 17~18세기 서구 삼각무역의 독특하고 악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를 부정하는 학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주목할만한 부분은 이 노예무역을 도덕적 이유로 폐지하고 다른 국가도 못하게 강제한 것은 그 노예무역을 행하던 영국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점입니다. 소수의 목소리가 다수의 여론으로 확산된 것으로 민주주의 사회에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당대의 산업구조가 변화했다는 요인도 있지만, 당대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공론화되지 못했을 문제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노동운동가나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이 없다면 국가가 선제적으로 무엇을 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7. 물론 모든 인간은 문화권 불문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러왔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이나 중국, 나치독일 소련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를 시정하고 고치려는 노력이 있는가. 그런 여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있는가. 그런 개혁과 개선운동 그리고 여론이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가 또한 중요합니다. 서양문명의 장점은 그러한 여론을 주도하고 확산시키는 세력이 존재해왔고 또 이들이 목소리가 묵살당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를 학술적으로 가장 맹렬히 비판한 학자들도 서구측 학자들이며, 이들의 저서는 서구의 유명출판사에서 출판됩니다. 그리고 개개인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어쨌든간에 공적인 장소에서 소위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고 이를 암묵적 룰로 규정한 것 또한 서구사회입니다. 우리가 자유와 관용의 문화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개인주의 등을 옳다고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 문명이 역사적 경험으로 축적한 제도와 철학이 보편적 타당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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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영국이 못된 거는 현지 엘리트 양성교육이 부실해서라고 봅니다. 세익스피어가 애매하면 돈키호테라도 외우게 시켜야 하는데 이거 읽으면 자유주의가 너무 커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