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잡글] 유럽사가 너무 재미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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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3 16:59:40
물론 저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만, 왕조들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 하는 동양사와 달리 유럽사는 특유의 복잡함으로 인해 무척 재미있습니다.
유럽은 조그만한 대륙에 수많은 민족과 언어, 수많은 왕국과 도시국가들이 공존하던 곳이기에 에피소드가 굉장히 많고 다채롭습니다.
민족으로 보자면, 로마시대부터 굉장히 다양한 민족들이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검은머리, 붉은머리, 금발머리, 갈색머리...갈색눈, 푸른눈, 초록눈...수많은 인종들. 시리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장군의 묘비가 당시 브리타니아(영국)에서 발견되기도 했죠. 마찬가지로 중동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파괴 이전부터 로마, 마르세유, 톨레도, 세비야, 리옹 등의 도시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시대 이후에도 게르만인들이 라틴인들과 섞여살았고, 색슨인들이 브리타니아에서 왕국을 세우고, 또 노르만(바이킹)인들이 저 멀리 나폴리나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한편 동로마(비잔틴) 제국은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프랑크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죠. 사실 중세 초기 로마의 교황들 중 상당수가 그리스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언어로 보자면, 크게 로망스어계열/게르만어계열/슬라브어계열이로 나눌 수 있지만 라틴어가 일종의 공용어 역할을 했고, 그 이후 프랑스어가 공용어 역할을 한 게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어는 게르만어 계열임에도 얼핏 보면 로망스어 계열로 착각할만큼 로망스어 어휘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독일은 국왕이 프랑스어로 대화하길 좋아했음에도 후일 민족주의 열풍으로 독일어 부흥운동을 추진했었죠. 그 결과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네티즌을 누리꾼이라고 재번역한 것처럼, 독일도 라틴어 같이 생긴 단어를 순수독일어로 재번역하는 작업을 거쳤다고 합니다.
종교로 보자면, 기독교의 압도적 우위. 재미있는게 불교나 유교와는 달리 전 유럽에 일종의 일체감(?)을 부여했다는 것.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기독교를 매개로 하여 거대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공동체 의식. 물론 종교가 국가 간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같은 "문명권"이라는 의식은 심어줄 수 있었고, 같은 기념일, 같은 행사 등을 공유하면서 "공동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 당시 크리스마스 휴전과 같은 에피소드가 생길 수 있었죠. 마치 한중일이 전쟁을 하는데, 같은 명절을 매개로 하여 일단 휴전하기로 합의하자는 느낌?
정치로 보자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국왕과 귀족 교황과 황제 등이 서로 끊임없이 견제하고 경쟁하는 구도. 교황은 휘하에 군대가 없으면서도 왕과 황제들에게 일해라 절해라 그러고, 국왕은 형식상 절대군주이나 귀족과 자유도시들의 동의를 계속 구해야만 했죠. 더욱 놀라운 것은 국왕도 돈이 없어 상인들에게 계속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독일의 푸거 가문, 그리고 후일 전유럽에 명성을 드높였던 로스차일드 가문. 교황과 국왕 그리고 후일 국가(근대국가)를 상대로 돈을 빌려주면서 성장한 가문들입니다. 특히 군권/교권/금권의 분리 및 경쟁은 동양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권력의 원천이 다양하고, 경제를 담당하는 주체가 다양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베니스의 경우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의 수송을 담당하면서 이들이 먹을 음식, 필요한 자재, 기착지에서의 숙소 등의 로지스틱스를 담당하면서 엄청난 부를 얻었습니다.
다른 한편 프랑스 기사들이 창설한 성전기사단은 중동과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 내륙까지 방대한 네트워크를 보유한 군사조직이자 금융조직이었는데, 이들의 부를 질투한 프랑스 국왕이 정교하고 악랄한 음모를 계획해 이들을 몰락시킨 일화도 있습니다.
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네덜란드와 런던에 방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유대인 상인들의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이들은 매우 부유했으나 본인들의 국가 없이 유럽 각국에 퍼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어떤 프랑스인이 저술한 "유럽사 개괄(Voyage en Europe)" 이라는 책은 유럽의 전통적 유산에 그리스로마 문명과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무슬림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즉 유럽의 전통적 바운더리 안에 유대인과 무슬림도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또 다른 재미포인트는 19세기 유럽열강의 제국주의 경쟁과 20세기 초의 파국,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재건입니다.
지구 전체를 정복한 것만 같았던 유럽열강이 자멸하는 과정으로부터 비유럽인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죠.
루게릭병으로 별세한 역사가 토니 주트는 현대 유럽문명의 입장 티켓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했었는데,
세계대전과 민족주의 광기가 유럽에 남긴 상흔이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럽인들은 지난 5세기 동안 세계사를 주도하던 주체에서 오늘날 점점 객체화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이 21세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조율하는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해답을 내놓는지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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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문화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의 역사와 문화를 잘 모르면 후대의 역사가 어렵게 느껴지니까요. 물론 기독교 문화도 좀 알아두는 게 좋구요.
특히 고대그리스 관련해서는 한국어로 나온 좋은 책이 많지 않더군요. 그러니 대부분 어린 시절에 ‘그리스로마신화’ 읽고 중단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