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아버지와 장인어른
독재 이야기 하다보니 몇년 전, 상견례가 생각나네요. 저희 아버지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입니다. 경북 고령군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중학생때 할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셔서 고등학교에 진학 못하고 5천원인가? 들고 자전거로 대구로 오셨다고 합니다. 왜 못가셨냐고 여쭤보니 큰아버지(장남)께서 “내 자식들(사촌들) 먹여살리기도 빠듯한데 니 공부까지 못시켜준다.”고 하셔서 먹고 살려고 대구로 오셨다네요. 섬유공장에서 일하셨고 거기서 지금의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하셨어요.
장인어른은 59년 생으로 고향은 경북 성주군이셨는데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셔서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때 국가에서 한참 산아제한정책을 하던때라 육군 현역이셨던 장인어른의 아버님은 일찍 정관수술을 받으셨다고해요. 그래서 장인어른은 1남 1녀의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셨어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정도 공부머리가 있으셨던지 장인어른은 공학계열의 대학원까지 나오셔서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셔서 울산으로 내려오셨고 현재는 울산의 한 전문대에서 실습 수업 위주로 강사를 하고 계세요. 방학때는 특강도 나가시더라고요.
상견례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라떼는...’이 나왔는데 군대 이야기가 나왔어요. 아버지는 군생활을 줄일려고 해병대에 자원해서 입대하셨는데 그게 79년도였어요. 그해에 1212사태가 일어났었는데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는 해병대의 대우가 박정희때보다 훨씬 떨어저버렸다고 전두환을 별로 안좋아하시더라구요. 518민주화운동(아버지는 아직 광주사태로 부르십니다 ㅠㅠ)때도 다행히(?) 투입은 안되셨고요(다만, 부마항쟁때는 부산과 마산쪽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때 장인어른은 대학생이셨어요. 공학계열이라 그런가 아버지가 직업군인이라서 그런가는 모르겠지만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는 안하셨다고 하시더라구요.
만약 그시절 아버지가 육군이었고, 장인어른이 학생운동가였다면 상견례 자리가 어땠을까요?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식들 결혼자리라 큰 문제가 안되었을수는 있었겠지만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던 흉터가 아파왔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재에서 독재로 넘어가던 시기에 누구는 군인으로, 누구는 대학생으로 살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피해자겠지요...
Et in terra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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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이자 한편으론 한국현대사의 주인공들이셨지요 한명 한명이 만들어 온 대한민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