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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사람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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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9-12 12:04:44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90년 초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의 칼 바람이 살갗을 찢을 듯 매서웠던 날씨였습니다.

은신처를 알아봐 달라는 서울 쪽 후배의 연락을 받고  수배 중이던 학생을 만났습니다.

꽤 늦은 밤이었고 사람들은 추위 때문인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서 너번 약속장소를 옮기면서 만난 친구는 꽤 앳띤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제가 구한 은신처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커피숍에서 거리로 나오던 중에 술에 취해 골목길 입구에 쓰러져 있던 행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쓰였지만 수배자를 데리고 있었고 더구나 가까운 곳에 경찰서의 공안관련 형사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파출소가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 학생이 아무 말 없이 그 술 취한 행인을 일으며 세워 부축을 하더군요.

그러더니 근처에 가까운 파출소가 어디 있나고 저에게 묻더군요.

제가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선배님,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사소하다고 자꾸 외면하면 결코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함께 그 취한 행인을 부축해서 파출소로 가다가 파출소 앞에 그 행인을 잠깐 앉히고 그 친구를 한참 멀리 있는 곳에 가 있어라고 하고는 저 혼자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희 사무실 담당 형사 놈 둘이 소파에 앉아 뭘 먹고 있더군요.

반색을 하면서 저를 아는 척을 하더군요.

술취한 행인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순경들을 시켜 행인을 안으로 데려오라고 하더군요.

" 역시 인간적이야"

차를 한잔 하자고 권하며 비웃는 것인지 진심인지 모르는 웃음을 짓는 형사들을 뒤로 하고 부끄러움으로 파출소 밖을 나왔습니다.

하늘의 별들조차 얼어붙어 귀찮음을 핑계로 내세웠던 저를 외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는 어렵게 은신처에서 한달 반 정도를 기거하다가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후배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은 적은 없지만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60대 초반의 아저씨가 도서관을 찾아왔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초라한 행색이었고 궁색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분은 도서관에 들어오셔서 혹시 책을 기증하려고 하는데 받아 줄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책이 많긴 하지만 주시면 기쁘게 받겠다고 했더니 잠시 후에 삼십여권의 책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도움이 되고 싶은데 이런 것 밖에 할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하다고 하시고는 가시더군요.

책을 정리하다보니 아마 그 책들은 버려진 것을 깨끗하게 먼지를 털고 가져오신 것이더군요.

대부분 너무 낡고 오래된 것이었지만 그 분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왔습니다.

두 권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 둘 수는 없어서 지난 번처럼 요양원 시설에 보내는 박스에 나머지는 넣어 두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예의는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하루였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였지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저에게 가르쳐 준 그 친구나 비록 어려운 모습이었지만 다른 이를 위해 마음을 내어 준 그 분이나 모두 제게는 스승인 것이지요.

예순의 나이를 앞두고도 행여 편견과 오만이 제게 앞서고 있지 않은지 돌아다 보는 시간입니다.  

 

 

 

 

 

 

 

 

님의 서명
철학자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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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6
2020-09-12 10:58:59

찡 하는 글입니다.
사실 실행에 옮기는 건 어려운 일이 잖아요.
취객을 구한 사람이나.. 상태는 안좋지만 그 책을 기부하는 그 마음..
두사람 공통점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이겠네요.

WR
1
2020-09-12 11:08:41

네 많이 생각하게 하루였습니다. 

 

6
2020-09-12 11:20:57

주말 아침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됩니다.

어리석게도 이렇게 계속 깨우쳐주지 않으시면

멍충한 생각을 하기에 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WR
1
2020-09-12 11:52:56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3
2020-09-12 11:46:38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괜히 뜨끔해지는 건 기분 탓이겠죠...)

WR
2020-09-12 11:53:46

네 감사합니다. 저 역시 늘 고민하고 반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ㅎ ㅎ 늘 이곳 디피에서요

5
2020-09-12 11:58:24

좋은글 감사합니다. 살면서 기본으로는 간직한다고 생각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잊어버리기 쉬운, 그런 걸 다시 일깨워 주시는 글이네요...

WR
2020-09-12 12:00:28

고맙습니다. 저 역시 매번 배우며 살고 있는 중입니다. 부끄러움의 연속이지요

3
2020-09-12 13:53:11

한번더 생각하게하는 내용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WR
2020-09-12 15:07:36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
2020-09-12 14:17:00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WR
2020-09-12 15:07:48

고맙습니다. 

3
2020-09-12 14:28:08

우리나라만 유독 술에 관대한것 같아요.
외국은 술 만취하는 사람은 경찰서에서 잡아가거나 완전 알콜중독자아님 만취할때까지 먹는 사람도 잘 없구요.
여담으로 우리나라 술 문화는 바뀌어야할듯 합니다.

WR
2020-09-12 15:08:44

네 저는 아버지가 엄청난 술꾼에다가 소위 한량이시라서 술은 아예 먹지 않고 있습니다.

2
2020-09-12 20:59:07

이래서 디피에 들어옵니다 여러 회원님들이 풍자와 해학으로 유쾌하게 풀어내시는것도 즐겁고 이렇게 진솔하고 감동적인 글 올려주신것을 읽으면서 또 세상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1
2020-09-12 22:44:54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감사하며, 늘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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