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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측은지심은 불이익을 감수하는 데서 출발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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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06:55:51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을 수 없다는 우스개가 우스개로 끝나지 않는 것임을 각박해져가는 현실 속의 삶에서 많이 절감하지요. 지난 8월 쯤에 시작한 공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마지막 단계를 남겨두고 있는데 아마도 11월 초순은 지나야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 무렵 초인종이 울리길래 나가봤더니 말쑥한 청년 - 당연히 미국청년이죠 - 이 서 있었습니다. 이웃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데 소개를 한다면서 명함과 리플렛을 건넵니다. 보통 관심없다고 말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는데요, 다저녁에 초인종 누르는 것은 엄연히 실례거든요.

 

이번엔 호의적인 태도로 명함을 받아들고 몇명이나 회사에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4-5명이 있고 프로젝트매니징을 하고 나머지는 하청 준다고 하네요. 떳떳하게 이야기하며 자기네 포토플리오를 보여줍니다. 이게 정상이지 생각하면서 그래 피플은 아메리칸들이냐고 하니 대부분 우크라이나 등, 슬라빅이다라네요. 멕시칸들 모두 어디로 가고 주변에 우크라이나 사람 천지냐, 나도 집 고치는 중인데 사람들은 좋더라 하지만 마감 수준이 별로다 라며 문간에 수리하고 페인트칠한 부분을 발로 가리켰죠. 쳐다보더니 자기가 보기에도 별로였는지 어느 회사냐고 묻습니다. 그 회사는 너처럼 서브컨트랙트한다고 밝히지 않고 거짓말로 자기네 회사에서 다 한다고 했었다. 매니징도 엉망인데 퀄리티는 더 엉망이다 그래서 어느 회사인지 밝히기는 어렵다며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좋았다. 동시에 마감이 엉망이다. 매니징은 원청인데 하청의 기술이 별로인데 사람들은 좋았다.

 

여기서 딜레마에 빠집니다. 나는 바보인가, 나는 화가 나지 않는가, 나는 돈을 썼지만 정당한 서비스를 받지 못했으며 정당한 수준의 돈을 받지 못하고 노동을 제공한 사람들에 연민을 느낀다. 다시, 나는 바보인가.

 

아래 링크는 저희 집에 일하러 오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 대해 쓴 글입니다.

https://dprime.kr/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4716310 

 

알고봤더니 저 노동자 모두 언어의 울타리에 갖혀 같은 우크라이나 동포에게 저렴한 품팔이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철거담당 알렉스는 일이 끝나 다시 오지 않는데 철거하면서 일부 파손된 부분을 원청인 쌤에게 복구할 것을 요구한 상태입니다. 원청 담당자인 쌤이 해결해야하지요.

 

페인트 담당 알렉스하고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학교 입학했다는 6살배기 딸래미 주라고 한국과자도 줘보내고 아이 읽히라고 집에 있던 파핀북스 대여섯권도 함께 들려보냈습니다. 마스킹테이프작업하는 날 왔던 아가씨가 예상했던 대로 부인 맞더군요. 너 한 서른 됐냐 물었더니 딱 서른이랍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24살에 가졌다는 이야기이고, 전쟁 통에 미국에 온 지 10달 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그러면서 각 종 면허증을 보여주더군요. 대단하다고, 전쟁은 슬픈 일이지만 미국은 너와 네 가족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줄 것이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페인트가 엉망이라 클레임을 할 때마다 밤 어두울 때까지 일하는 통에 먹을거리 내어주며 이야기하다 보니 그가 보여준 정성으로 부족한 기술이 덮어지더군요. 100프로 만족은 아니지만 큰 문제없이 마무리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기술은.... 한참을 더 노력해야 되겠지만 남의 나라에 온 지 10개월 밖에 안됐는데 이 정도면 '아빠로서' 존경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저 바보죠. 사람이 보이니 불이익이 감수됩니다. 음식에 책에 과자까지 쥐어보내기까지 하면서 그들이 잘되길 바랍니다. 맨 땅에 맨 몸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데 일거리를 거듭 맡아야 기술도 늘것이고 아이도 멕일 수 있겠죠. 처음부터 베테랑 기술자가 될 순 없고요.

 

알렉스가 재작업했던 부분은 그가 데려온 마크라는 어시스트가 대충처리한 부분들인데요. 알렉스와 마크의 관계와 달리 데크 작업은 또 요상한 관계입니다. 올렉이 하청을 받아 슬라빅을 부려 일을 합니다. 올렉은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슬라빅과 또 다른 한명이 거의 모든 일을 합니다. 알렉스나 올렉이나 같은 처지이지만 올렉은 푸르고 깊은 눈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말'만 합니다. 궂은 일은 슬라빅이 다 하죠. 슬라빅은 하청계약자도 아닌 인부로 보입니다. 억척스러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그에게 저는 할 말을 잃습니다. 

 

두 달이 넘어가면서 무감각해집니다. 비가 와서 못하고 배달이 잘못돼서 반송과 재주문 때문에 지연되고 하면서 깔끔한 일처리가 되질 못합니다. 

 

가만히 생각합니다. 화가나면, 손해나면 그래서 어쩔 것이냐고요. 화가 나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은 더욱 이상하고. 다만 마음 편할 정도로 불이익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 자족해야지 않냐고 전쟁터에서 쫒겨온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냐고, 일거리를 줄 처지가 된 게 다행스러운 것 아니냐 하며 생각을 정리합니다.

 

불이익을 감당한다는 것이 측은지심이라면 기꺼이 발심(發心)하겠노라고.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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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3-10-28 07:29:23

사적으로 가까워지면 공적으로 까다롭기가 힘든가 봅니다.

어느정도 공사구분은 되야 하는데 쉽지 않죠

WR
2023-10-28 07:35:20

사람 나름이겠죠. 더 거칠거나 뻔뻔한 사람들도 봤었습니다.

1
2023-10-28 08:01:11

측은지심은 불이익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건 안보건 어떤 타인에게 온정을 배풀고 싶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반면 불이익을 참지 못하는건 불이익이 나의 선을 넘느냐 안넘느냐로 갈린다고 봐야겠죠.

심적으로 넉넉한 사람은 본인이 좀 크게 불이익을 봐도 '이거 손해본다고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수준으로 참고 넘어가지만

애초에 그 선이 없다시피한 사람은 티끌같이 아주 작은 불이익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손해를 안보려고 하고...

 

다만 심적으로 넉넉한 사람이 측은지심도 더 많이 가지는 편이고

아주 티끌같은 마음을 가진 놈들에겐 측은지심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합니다.

WR
1
2023-10-28 08:05:48

그래서 제목에 출발과 말미에 발심을 썼지요.

혼자 용쓰면 바보고 적어도 감수할 만한 불이익에 민감해지지 않는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잘난 기부뉴스 떠들썩하지 않아도 훈훈하지 않을까하는요.

불이익과 측은지심은 상황으로 연결될 뿐 전혀 다른 개념이 맞습니다.

1
Updated at 2023-10-28 09:02:06

그 기회로 인해 그런 마음을 얻으실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인생에 있어서 크나큰 이득입니다! ^^

WR
2023-10-28 11:30:53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땀 뻘뻘 흘리며 산길 걸어올라가면서 정리된 생각입니다. 산을 다니면서 사람 좀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2
2023-10-28 09:24:06

어제는 머리 지끈거리게 만드시더니

오늘은 이렇게 마음 따뜻하게 해주시는군요...^^

WR
1
2023-10-28 11:31:41

인용글 쓰긴 제가 쉽고, 오늘 경우가 제 머리 지끈거린 결과지요^^

1
2023-10-28 09:52:30

"사람이 보이니 불이익이 감수됩니다"

21세기 거의 모든 종류의 차별과 형오의 시작점이 아닐까 싶어요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인식.. 그 시작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가 아닐런지요..

그리고 오늘 글의 핵심은 아니겠지만 (어떤 계기에 의해) 출발한 측은지심의 발목을 붙잡는 첫번째 문턱이 바로 '불이익의 감수 여부' 가 되겠지요

WR
2023-10-28 11:34:14

생각의 단초는 '불이익을 용서 못하는 사람들이 망친 사회를 어떻게 훈훈하게 할 수 있을까'였어요.
나는 내가 겪을 불이익에 어떻게 반응했던가, 또 앞으로는? 자문을 계속 했었죠.

1
2023-10-28 12:58:38

맞습니다 이익/불이익의 관점으로 글을 쓰신 것이고.. 그런 관점으로 읽다보니 자꾸 저의 관점이 끼어들더군요

1
2023-10-28 12:44:24

정도의 문제죠.

보통은 그냥 손해 보는 맘으로 살면 세상이 편하긴 합니다.

악착같이 손해 보지 않으려 해봐야 사실 대부분은 큰 이익도 아니구요.

맘이 편하려면 좀 너그러워 지면 편해지긴 하더군요.

 

WR
1
2023-10-28 13:06:24

상대가 불분명할 때 세상을 적대시할 것인가? (예:업자, 용팔이등에 대한 반응), 불이익울 배척하는 그런 생각이 파다하다면 너무 빡빡하지 않은가, 어떤형태로든 나름 우리 모두 '업자'이지 않을까? 뭐 이렇게도 생각했답니다.

2023-10-28 15:27:08

빡빡하지만 전 피해 가는 방법을 씁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주는 피로도가 높다고 생각해서 사람도 쓸데없이 많은 인간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많이 정리했지요.

또 피곤한 사람이 많다고 여겨지는 곳...말씀하신대로 용산 업자 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은 가지 않습니다

그냥 비싸게 사는게 때론 정신건강에 훨씬 편하고 또 이렇게 아끼는 금액이 크지 않을수 있더라구요.

디피도 피로도가 높은 곳... 시사정치는 글을 남기지 않습니다.

거기도 어마무시 하거든요...

제 경험으로 이런것의 최고점은 집공사 입니다.

또 집과 관련된 대부분...공사, 수리, 중개 등등은 심지어 사기꾼도 넘쳐 납니다.

일부 나쁜놈이라고 하기엔 이바닥 정말 대단 합니다.

쓰다 보니 용산의 그놈도 대단했지요. 워드프로세서를 샀는데 중고를 주고 중고여서 바꿔달라고 해서 바꿔준것도 중고고 이렇게 여러번 바꾼 끝에 좀더 새거 같은 새거를 받은 적있지요.

남대문은 또 어떻구요...

예전에는 오디오 프로젝터 카메라 등등 여기가 않되면 않되는 곳이라서 참 자주 갔었는데 요즘은 가지도 않습니다.

다행히 온라인 몰들이 좋아졌고 또 비싸도 여기에 가느니 차라리 돈 더주고 백화점에서 삽니다.

백화점도 알고 보면 이런 저런 할인이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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