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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987 모두가 영웅이던 역사 (내용누설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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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2-20 17:39:17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영화에서 박종철 열사 아버지가 아들 유해를 임진강에 떠나보낼 때 하는 대사이고 실제로 친부이신 박정기 님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하죠.

 예전부터 박종철 열사에 관한 당시 기록이나 사건을 대할 때마다 항상 보면서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사무치는 아비의 절통한 감정이 전해져 가슴 아프게 하던 문구였는데요,

 그러면서 아버님께서는 과연 어떤 심정으로 하신 말씀이었을까라는 다소 무례하지만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할 말이 없다...'

 가혹한 군사정권으로부터 생때같이 귀한 자식을 억울하게 잃으셔야했던 아버지의 남 모를 슬픔을 감히 내 얕은 심정으로 가늠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짓이지만...

 

 보통은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속으로 삭이는 경상도 아버지 특유의 무뚝뚝함이라고도 하고,

혹은 청천벽력같은 자식의 죽음 앞에 남겨진 아버지로서 아무 심중도 가누질 못해하시는 비통함인가도 했습니다.

 그러나 할 말이 없다는 건 단지 심사가 괴로워 못 가눈다거나 슬픔을 삭여서 그렇다기 보다,

순전히 보통의 '아버지와 아들'로서 피붙이로서 자식이 그 참상을 겪을 때도 아무런 보호조차 해주지 못한 아비로서의 자책감과, 죽음으로 치른 아들의 처참한 고통을 주검이 되어 나와서도 아버지인 자신은 알지 못하고 그저 한 줌 식은 재로 밖엔 쥘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이미 떠난 아들에게 애비는 아무 면목도 할 말도 없다라는 피맺힌 통한과 고해로 심정을 나타내신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통상 시대극이나 역사물이 몰입도 높은 극적 전개를 위해 걸출한 소시민이나 비장한 능력자를 내세워 감상적인 영웅극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하지만 '1987'은 그런 면에서 영웅 없는 역사를 그리며 그 시대 자체를 영웅으로 빚어낸 흔치않은 네러티브의 역사물이었어요.

 

 시대를 장악한 거대한 불의를 꼭짓점 삼아 당대 다양한 군상들의 정의로운 저항들을 아래에서부터 각각 따라가면서 박종철 열사 죽음의 진상과 독재정권 심판이란 꼭지점을 향해 각기 동선을 앞뒤 재는 거 없이 직선으로 잇다, 마지막 이한열 열사의 장렬한 죽음이란 한 점으로 모여 피라미드 같던 불의의 시대를 뒤집어 아래에서 위로 날아가게 펼친 부채처럼 시대를 펼쳐내 민중의 바람을 역사로 불어넣었습니다.

 

 아무 정의도 저항도 전혀 없었으나 서사의 가장 중심축이 되는 이 역순환 구조를 연희가 대변해주고,

반대로 아무 양심도 의문도 전혀 없이 오로지 권력의 꼭짓점만을 신봉하며 아래로부터 사방에서 기어오르는 민중의 정의와 저항들을 훑어내 압살시키는 시대의 순환 구조를 박처장이 대변합니다.

 서사의 양축인 박처장과 연희는 극중에서 서로 만나지도 대립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박처장은 사태가 절정에 이르자 공산당에게 무참히 죽어간 자기 가족과 여동생을 항명하는 직속 수하를 제압할 때 그랬듯이 끈질기게 버티던 교도관의 조카 연희에게도 투영시키며 비열한 목적을 달성해냅니다.

 

 그렇게 분단의 아픔을 의도 아래 이용하는 자와 여전히 의도에 휘둘려 아파해야 하는 자로 나뉘어 또 다시 분단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고통은 신체에 가하는 고문과 폭력이 아니라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무력히 잃게 해 사람으로서의 공존을 무너뜨리는 체제 자체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초반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임진강에서 아들의 유해를 떠안고 보내며 처참히 울부짖는 모습과, 영화 종반 박처장이 고문실에서 교도관이 딸처럼 아끼던 조카 연희의 사진을 들이밀어 협박하자 모진 고문도 꿋꿋이 버티던 교도관이 끝내 오열을 토하며 실토하는 모습은 그들이 단지 마음이 비참하고 몸이 아파 울고 굴복한 것이 아닌 시대의 체제에 고통 받는 당시 사회의 무너진 인간성을 처절히 드러낸 울음일 겁니다.

 

 둘 다 아버지이고 아비 같은 삼촌이란 사실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며 당시 분단 못잖게 참혹했던 체제의 사회(부성)에 무력한 민중의 안타까운 현실을 둘은 핏물 같이 흘리는 눈물로 서사의 수미상관을 이루지요.

 한 눈물은 모든 사건의 열쇠로 서막을 열어젖히고, 한 눈물은 모든 사건의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토대를 이루면서 말이죠.

 

 마지막 연희를 단순한 서사적 장치나 그저 시대의 유약한 방관자로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닌 각각의 저항과 정의의 부채꼴 동선들이 독재타도라는 한 점으로 모여 뒤집어 펼쳐지게 하는 메세지의 손잡이로써 연희와 이한열 열사와의 에피소드는 그래서 너무나 필연적이었다고 봅니다.

 연모하던 선배의 죽음 뒤 시위대 연단 위로 올라서는 연희의 동선을 따라 마지막 장대한 시위 장면이 펼쳐지며 태산 같이 짓누르던 체제를 뒤집어 사람을 지켜내고 공존을 이뤄낼 그 날의 중심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감독의 의도가 서서히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연희를 따라 숨으면서 장엄히 떠오르는 1987년 숫자와 함께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영화가 끝난 뒤 으레 일어나 가기 바쁘던 관객들이 하나같이 돌처럼 앉아 시커먼 크레딧 화면과 실제 기록 영상들을 묵묵히 끝까지 응시하였던 보기 드문 작품이었어요.

 그 벅찬 침묵의 소리가 여전히 가슴에 울려퍼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 비석처럼 박혀 현재와 동 떨어져 있던 과거 이 땅 사람들의 피맺힌 역사와 그 치열한 시대정신이 그저 역사 속 무덤 속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시대에도 함께 생동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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