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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일반]  SF와 사내정치물로서의 "대장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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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17 13:17:42

오래 전 드라마이고 본방사수에 DVD까지 구입해서 한 차례 더 정주행한 드라마이지만 어떻게 다시 보게 되었는데, 명불허전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세월의 흐름도 느껴집니다. 계속 장금에게 미션이 주어지고 미션 클리어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드라마는 보고 있으면 좀 질리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드라마는 여전히 좋습니다. 

 

1) 배우들의 연기력: 여운계...이 드라마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십니다. 정상궁 그 자체이셨죠. 여운계님이 이미 작고하셔서 그런지 정상궁이 죽을 때 저도 약간 눈물이 나더군요. 견미리의 악역 연기는 당시엔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보니 연기 패턴이 약간 반복되고 정형화된 느낌이더군요. 한상궁의 양미경은 잘 하셨지만 뭔가 2% 부족합니다. 아마 배우의 연기력 보다는 캐릭터가 조금 평면적인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는 느낌이 듭니다. 장금, 금영, 연생을 연기한 이영애, 홍리나, 박은혜 등은 그냥 그래요. 이영애는 제가 보기에 연기를 잘 못했는데, 그 잘 못한 것이 그냥 장금의 캐릭터로 굳어져서 나중엔 익숙해집니다. 그런데 중종역의 임호가 나중에 인터넷에서 코믹한 밈이 되어서 그렇지 의외로 연기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로 인해 왠지 조선 중종이라는 왕이 실제로도 자애로운 왕이었을 것이라는 인상이 남게 되거든요. 민정호를 연기한 지진희는 당시에는 연기력도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캐릭터 자체가 잉여입니다. 여자들 드라마에 갑자기 끼에든 사내가 어색하기만 합니다.

 

2) 이병훈 PD전성기의 작품답게 여러 장르가 섞여 있고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요리드라마+의학드라마+사극인데, 여기에 학원물, 추리물, 복수드라마,  그리고 어떤 면에선 (넓은 의미의) science fiction이 섞여 있습니다. 장금이 여학생 기숙 학교같은 곳에서 자라나고, 일종의 셜록 홈즈같은 탐정 역할을 한다는 것, 그리고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같은 복수의 화신이 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는데, 저는 이 드라마에서 "과학"의 역할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3) 기본적으로 장금은 늘 실험과학자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동물실험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몸에도 실험을 하죠. 기본적으로 과학자 중에서도 화학자와 생물학자의 작업과 비슷합니다. 음식과 약제에 들어간 재료를 분석하고 각 재료의 효능을 문헌과 실험과 필드 리서치를 통해 확인합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 심지어 중전마마(문정왕후)도 과학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수라간 최고 상궁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자 중전이 제시한 해결책은 기가막힙니다. Double-blind testing이라니!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궁들이 모여서 누가 지은 밥인지 모르게 하고 맛을 본 후 선호하는 밥을 써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수결로 결정한 후 결과를 발표해서 한상궁이 논란 없이 최고 상궁에 오릅니다. 왕이나 중전, 대비가 맛을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논란의 핵심인 상궁들이 결정하고 그것도 어떤 것이 누가 지은 밥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방법이 있었을리는 없지만 이런 걸 사극 시나리오에 녹여낸 이병훈 PD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Double-blind testing이 나오는 사극이라니요!

 

**관점에 따라서는 single-blind testing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상궁들이 심사한다는 것을 한상궁과 최상궁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자신이 지은 밥의 각 그릇이 어떤 입맛을 지닌 누구에게 갈지는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double-blind라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상궁은 이때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최대 다수의 상궁들의 입맛에 최대한 맞는 밥을 지어냅니다. 최상궁은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을) 압력밥솥의 원리를 이용해 그냥 일반적으로 "맛잇는 밥"을 지었지만 패배하고 말죠.)

 

4) 대부분의 상궁들은 최상궁과 금전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한상궁이 천한 출신이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자신의 이권을 따라 최상궁의 편에 붙는데, 이에 따라 한상궁을 최고상궁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든 업무를 보이콧합니다. 이 부분이 대장금에서 가장 열받는 부분이고 이병훈 PD의 다른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더 진득한 사회 드라마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고 있으면 정말 열불이 터집니다. 저는 비슷한 사내정치의 기억이 갑자기 10년만에 돌아와서 PTSD가 오더군요. 결국 위에 말한 double-blind testing으로 위기를 돌파하고 최고상궁에 오르는데 결국은 처음에 문제가 되었던 사내 정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민상궁처럼 사내정치에 대해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상궁의 죽음으로 장금이 결국 어의가 되고 늘 꿈꾸던 최고상궁도 잠시나마 하는 길로 가게 되었지만 한상궁 본인이 죽었는데 그게 다 뭐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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