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빛 바랜 핑크빛 약속-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의 번역본이 발간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원래 영유아의 언어발달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인간 언어산출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작업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스티븐 핑커는 그의 첫번째 대중교양서인 "언어본능"을 통해, 인간에게 생득적 언어획득기제가 있다는 촘스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보강하고, 거기에 덧붙여 그러한 기제들이 진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얻어질 수 없다는, 촘스키가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주장을 대중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빼어난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이후 핑커는 언어심리학에서 얻은 교훈을 발판으로 인간의 마음 자체가 모두 그러한 진화적 적응과정에 의해 획득되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진화심리학적 주장들을 수용하여, 그간 인지심리학의 난제들이었던 시각, 감정, 예술 등등의 기원에 대한 독창적인 추론을 담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출간했고, 그런 사유들을 더욱 발달시켜 언어의 규칙성과 변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이 사고하고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에 대한 거시적 이론을 담은 "단어와 규칙"을 내놓기에 이릅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부터 명확하게 정리된 범주, 유형론의 생물학적 기원을 탐색하고, 그에 맞선 유명론자들과 다윈주의자들, 비트겐슈타인 등의 경험론자들의 대립을 설명한 엄청난 저작이었습니다. 저는 이 때가 과학자이자 인문사상가로서의 핑커가 가장 빛나던 시절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제의 저작 "빈 서판"이 나왔죠. 빈 서판은 이렇게 핑커가 파악한 인간의 사유형식들의 충돌로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경향성과 특징, 그리고 그들의 대립을 설명했습니다. 핑커가 이 책을 내던 당시 유럽과 미국의 인문학 강단은 신좌파의 지배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고(현재는 어느 정도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들의 시각이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시각에 의해 지배되던 인류학, 민속학, 사회학 등의 각 분야에서 도그마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실제 증거들이 터져나와, 일부 뜻있는 학구파 학자들의 반란이 예고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절에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반인종주의적 시각을 가진 과학자들조차도 그들의 연구가 신좌파의 도그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문적 탄압을 받던 시기였습니다.(가장 유명한 예로 곤충학자 최재천 교수의 지도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이 강연 도중에 좌파 학생들에게 물벼락을 맞은 사건이죠.) 핑커의 이 책은 발간 즉시 큰 반향을 불러왔지만 의외로 책의 내용 전반에 대한 비판은 적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사상-인간은 유전적 영향을 막대하게 받으며, 따라서 저마다 타고난 특성과 우열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더이상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증거를 획득해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핑커가 논쟁이 집중되는 지점을 예술과 육아법에 대한, 다소 덜 첨예한 분야로 유도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핑커는 이 책을 통해, "단어와 규칙"에서부터 비롯된 인간의 지성사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를 확고히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차곡차곡 과학적인 방법으로 외연을 확장한 핑커가 인류사 전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사실 본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빈 서판"에서 다뤘던 주제 하나가 확장되어 나온 것입니다. "빈 서판"에서 핑커는 루소와 홉스가 현대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기원이었음을 밝히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홉스(우파)의 견해가 더 사실에 부합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고, 홉스의 이론이 현대 정치사상의 확립과 현실에 대한 대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지속적으로 인간이 가진 직관적 한계들을 교정해 나가며 우리의 지식으로 그것들을 더 나은 방식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구상을 설파했죠. 핑커는 그러한 진보의 조건으로 생각과 상품이 자유롭게 교환되고, 그러한 교환들이 인간의 삶을 크게 개선시킴으로써, 윈-윈 게임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크게 의지하고 기여하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구상은 생명이 RNA분자에서 DNA, 단세포, 다세포 생물을 거쳐 인간사회를 이루는 동안 꾸준히 분,협업을 발전시켜온 과정과 다르지 않죠. 바로 이 챕터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은 결과물이 바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이 책과 비슷한 주장을 하거나 영향을 끼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핑커와 거의 같은 나이에 좀 더 진화-생물학적 학문적 배경으로, 역시 인간 사회에 대한 여러 통찰을 제공한 책을 썼던 매트 리들리의 여러 책들이 그렇고, 인류사에서 서구가 지배적 위치를 가지게 된 이유를 추적한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 세포에서 문명까지의 협업의 발전사를 다룬 유전학자 엔리코 코엔의 책도 그랬습니다.
이 책은 사실 제가 유일하게 핑커의 저작 중 두 번 읽고 멈춘 책입니다.(다른 책들은 대체로 최소 4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만큼 쉽고 평이하게 쓰여졌고 번역가 김명남이 신뢰할만한 꼼곰한 번역을 제공한 탓도 있었겠지만, 이미 전작들에서 이에 관해 핵심적인 내용을 충분히 말해왔고,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익숙한 내용들이라 구태여 곱씹을 만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경쟁과 협력을 위해 때로는 기만을 행하고 잔인하기도 하는 등, 시점에 따라서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기구의 발명을 통해서 계속해서 협력과 번영울 이룩해나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제가 이전에 썼던 핑커의 글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누군가 스티븐 핑커가 "인간은 본디 선하다는 성선설과 인간 내면의 선함을 부르짖"었다고 쓴 글을 봤는데 어이 없는 오독입니다. 아마 오독이라기 보다는 책을 읽지도 않고 지레짐작하고 쓴 글이겠지만... 제발 누가 유명하다는 이유로 알지도 못하면서 잘못 인용하는 허영은 안봤으면 좋겠습니다. 핑커를 단 한자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 회원분은 원래 늘 그러셨던 분이라 놀라울 것도 없지만요)
저는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너무나 많은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낙관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이야 진부해졌지만 당시에는 레이 커즈와일 류의 특이점 신화도 근거가 희박한 낙관론-거의 신앙에 가까운-을 펼치고 있었죠. 고백하자면 저도 열렬한 특이점 신봉자였습니다.ㅎㅎ 나중에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어느 순간 부터인가 커즈와일의 예측이 조금씩 시간이 밀리기 시작했는데, 수학적으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한번 논의해볼 만한 주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초 우려했던 FTA가 생각보다 우리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고, 이전에는 선진국만 이익을 보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했던 자유무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요. 인터넷의 발달, 정보의 가격이 싸지면서 비약적으로 증가한 접근성과 소비 추이도 이런 낙관론을 부추키기 충분했습니다. 아마 디피에서도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분들의 단평으로 미루어보아, 저와 비슷한 감흥을 느끼셨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시진핑 체제 이후의 중국의 맹동과, 미국의 반동적 정치행태,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맞이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런 추이는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대다수가 예측하지 못한 격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내노라 하는 중국 학자들도 중국이 "화평굴기" 케치프레이즈에서 후퇴하여 "화평발전"으로 자세를 낮추는 등의 제스처를 보고 당분간 중국은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하고 패권경쟁은 먼 훗날의 과제로 미뤄둘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습니다. 푸틴이야 언제나 위험한 인물이었지만 이 정도로 날 뛸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겠죠.
미국 내부의 변화에 대해서는 핑커도 비판을 피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먼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말하자면, 핑커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핑커가 어렸을 때는 많은 캐나다인들이 그런 것 처럼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였고, 철이 들고부터도 계몽적 자유주의보다 더 오른 쪽으로 나간 적은 없습니다. 그의 저서에서는 사상과 생활의 자유, 그리고 더 나은 지식을 통해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핑커의 그러한 면모를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핑커의 자유시장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으로 소유권과 교역의 무제한적 자유를 인간의 삶을 개선할 기본적 권리라고 보는 신자유주의적 태도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디피에 올린 "빈서판"서평과 정리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핑커의 정치, 경제적 시야는 미국에 갇혀있습니다. 만약 핑커가 북유럽 사민주의를 조금 더 심도 있게 공부했더라면, 미래의 비전이 다소 다르지 않았을까, 또 그 결과로 현재 미국에 대한 전망도 지나친 낙관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은 핑커의 전망이 완전히 빛을 바랬다고 생각하는 것도 섣부른 전망일 수 있습니다. 핑커가 세계 1,2차 대전을 예시로 들었듯이 의외의 파격적 변수들은 늘 있기 마련이죠. 그러나 지금의 국제적 상황을 보면 핑커가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았던 국제적 협력도, 언제든지 다시 철회되고 세계는 블록화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를 보면 그것이 경제적인 결핍이 아니라 엄청난 풍요에 의해서도 그렇다는 것도요. 해서 저는 더이상 핑커가 말했던 핑크빛 전망에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물론 핑커의 전망은 칸트의 정치적 기획처럼 인류애가 가득한 숭고한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생각을 앞섭니다. 핑커의 기존 역사를 근거로 한 외삽은 아마도 몽상으로 끝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핑커는 "나는 기존의 역사를 분석했을 뿐 미래에 대한 외삽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핑커의 책을 읽은 대다수의 독자들은 아마도 핑커의 책에서 그러한 전망의 함의를 읽고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이 책이 발간되고 마이클 센델은 핑커의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기획된 양자토론에서, 핑커가 말한 몇몇 지표가 과연 진보의 진정한 지표가 될 수 있냐는, 철학적 질문으로 정교한 개념적 조작에 능한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핑커 같은 대단한 과학자도 일급 철학자들의 유연하고 날카로운 질문의 채찍에는 별 수 없더군요. 학문적 협력자이자 은근한 경쟁자인 철학자 대니얼 대닛하고의 논쟁에서도 밀리는 모양새고요. 고인물 던전에 들어온 신출내기 인문학자 핑커의 데뷔를 환영합니다.ㅎㅎ) 그러나 그런 철학적 질문들은 제처두고라도, 역사학자들의 진보에 대한 질적 정의에 대한 반론도 제처두고라도, 핑커가 인류가 늘 발전시켜왔다고 주장한 진보가 미래에도 여전히 그러리라는, 핑커의 그 책을 읽었던 독자들의 전망은 산산조각나기 일보직전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은 현재 다소 빛이 바랬습니다.
이런 이유로, 원래 "추억의 책들" 시리즈에서는 대부분 절판되거나 읽은지 적어도 십 수년은 된 책들을 소개해왔지만, 오늘 한 회원님이 이 책을 언급한 글을 보고, 요 몇 년 동안 늘 생각해오던 이 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 카테고리에 넣기로 했습니다. 핑커의 후속작인 "지금 다시 계몽"은 사놓기만 하고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네요. 조만간 다시 낙관론을 회복하고 핑커의 책들을 손에 잡을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이 책의 빛바랜 전망이 다시 희망에 이끌려 떠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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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낡아 추억의 책이 되었다는, 굉장히 철학적인 선정이네요. 샌델이 핑커를 탈탈 털었다는 건 몰랐는데, 핑커가 정의(definition)를 건드는 학문과 대등하게 토론하기는 어려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보통 대표적인 철학자가 레일에 깐 정의(롤스의 정의론이라던가)는 사회의 기본 전제인데, 전제를 뒤흔드는 걸 어떻게 극복하겠어요...
책 자체는 뭇사람들이 지식이 있으면 주장할 법한 내용일 것 같긴 한데, 책을 안 봤으니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될 듯하네요. 그래도 요약해주신 내용을 보면서 조금 짚어보면... 의미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본성이 이리저리 갈가리 찢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모순되어 보이는 행동도 일관된 명제로 설명할 수 있어야 '원리'의 칭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저의 얄팍한 생각에서 말이죠.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하나의 행동이나 주의가 가진 함의를 한 쪽만 강조하는 건 굉장히 흔한 일인지라 그냥 그런가 하는 생각 정도로 끝나는 느낌입니다.
여하간 책의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