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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오랜 친구 속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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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2-14 12:16:49

 

0. 

며칠 전, 범우사 윤형두 회장의 부고 소식을 듣고 범우사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는 범우사와 함께 인문학 독서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학생 때, 친구의 소개로 읽게 되었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의 이름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소유냐, 삶이냐"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제 독서의 방형에 큰 영향을 끼쳤던 켈빈 홀의 "융 심리학 입문"등 범우사의 책들은 당시 중고교생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초급교양서의 보고였습니다. 나중에 이 빚을 읽지 않고 범우사의 창립 30주년 기념 출판작인 "세계의 문자"를 일부러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1996년에 나오고 저는 21세기 초입에 구매했지만 당시로서도 책값으로는 만만찮은 7만원 짜리 책이었죠. 이외에도 제게 독일 문학의 깊이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해주었던 하인리히 뵐의 작품,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느냐",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등이 특히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1990년대 부터 범우사의 책들은 더 세련된  디자인, 더 좋은 번역, 더 신선한 필자들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부터는 거의 범우사 책을 살 일이 없었습니다. 

 

1.

 범우사의 책을 추억의 책 코너에 소개하기로 하고 어떤 책들을 골라야 하는지잠깐 고민을 했습니다. 영국의 유서 깊은 For Beginers 시리즈를 무단으로 해적 출판한 교양만화 시리즈를 고를까, 아니면 헤르만 헤세를 처음 읽었던 사르비아문고를 고를까, 아니면 앞에 소개한 책들이 포함된 범우신서 시리즈를 고를까. 그러다 뭐니뭐니해도 범우사는 범우문고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해보면 범우사의 다른 책을 사지 않더라도 범우 문고는 좋은 고전들을 아주 값싸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21세기 이후에도 간간히 구하곤 했습니다. 제 첫 범우문고는 중학생 때 구입한 "공산당 선언"이었습니다. 노태우가 집권하고 군사정권의 살기가 한 풀 꺾인 시기이긴 했지만, 공산주의는 당시 중학생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두려운 그 무엇이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이미지는 뭔가 이론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북한"과 빨갱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원흉으로서의 이미지였죠. 그러나 저는 태생이 좀 엇나가는 삐딱이었나봅니다.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에 더 호기심을 가지는 위험한 아이였거나요. 초등학생 때 부터 우연히 삐라를 주으면 신고하는 대신 간직하고 따로 책갈피 속에 모아 두었고, 어학 공부를 하라고 부모님이 사주신 라디오 겸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AM에 북한의 방송 두 개가 잡히는 것을 알아채고 학교가 파해 집에 돌아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방송들을 번갈이 듣기 일쑤였습니다. 아직도 제 보관용 상자 한켠에는 삐라로 날아온 마이크로판형의 김일성 교시집, "시대의 등불"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 것은 만화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저작권 협약 이전에 발행된 책들이 시중에 간간히 남아있을 때였는데, 범우사의 책들도 대부분 저작권 협의가 필요 없는 고전이나 아니면 해적판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영국에는 앞서 말한 For Beginers시리즈라는 유명한 시리즈가 있는데, 나중에는 이두 아이콘 총서나 김영사의 하룻밤의 여행 시리즈로 제대로 번역된 책들입니다. 그 해적판 책들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삶에 대한 책을 범우사에서 출간했던 것입니다. 저는 동네 서점에서 그 책들이 눈에 띄자마자 서둘러 사서 집에 돌아와 읽었습니다. 레닌 소평전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지만, 자본론 해설은 그야말로 눈이 새롭게 떠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고정자본과 가변자본의 합과 자유시장에서의 경쟁으로 노동자의 점진적인 반곤화의 진행을 설명하는 부분은 이전에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그 선명성과 설명력의 궤가 다른 것이었죠.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마음 속으로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친척 중에는 프랑스로 귀화한 숙부와 프랑스인으로 자란 사촌들이 있는데, 그 사촌은 드물게 만날 때마다 아직도 저를 놀립니다. "그래, 너는 아직도 레드인가? 우디 엘런의 영화는 어떻게 생각해?(돈을 갖고 튀어라의 한 장면을 가지고 하는 농담ㅎㅎ)" 나중에는 프랑스인 여자 친구에게도 저를 14세 때부터 공산주의자였던 친구라고 소개하더군요. 따라서 범우사는 당시의 저에게 고루한 고전을 출판하는 회사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창구였습니다.  

 

2. 

 대학에 다니던 시절, 서양학과 친구들과 가끔 어울렸습니다. 제가 속한 영화 동아리에 서양학과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 외에도 서양학과 친구들과 친한 같은과 동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S 누나를 소개받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미인이었습니다. 안면을 트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곤하다, 어느 날 혼자 있는 걸 보고 시간 비면 커피 한 잔 하자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 이후로 가끔 마주치면 누나가 커피를 사주곤 했는데, 시간을 보내며 말이 끊길 때마다 메모지에 간단한 초상화를 그려서 주곤 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활자 중독자였기 때문에, 늘 가벼운 차림새로 걸을 때도 문고판 한 권 정도는 가지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물론 가방 안에는 교제 외에도 항상 다른 읽을 거리를 챙겨가지고 다녔죠. 저는 S가 그려주는 초상화들을 늘 그때그때 읽고 있던 책 속에 끼워 넣고 잊었습니다. 아마 버리거나 판 책들에 끼워져 그대로 잃어버린 것들도 있을 거고, 잘 찾아보면 몇 장은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일부러 찾기에는 볏짚 속에서 바늘 찾기겠죠. 이 스케치도 오늘 소개할 책을 고르다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저 베르코르의 책은 나중에 열린책들 세계문학에서 다시 소개할 때까지 범우사에서 나온 책들이 유일한 번역판본이었습니다. 소설가 신상웅이 번역한 이 책은 2차세계 대전 당시 점령지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고 그리고 있는 단편 선집인데, 표제작이 의미도 의미였지만 정말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3.

21세기가 들어서도 저는 곧잘 범우사 책들을 샀습니다. 쉬면서 뭔가 가벼운 읽을 거리가 필요할 때, 한국 근대 소설이나 수필은 훌륭한 선택지입니다. 이태준의 무서록을 범우사 문고본으로 처음 읽었고(나중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따로 재구매 했습니다.) 거기서 알게 된 김용준의 근원수필도 범우문고로 읽었습니다. 사진의 복덕방은 이태준의 단편소설집으로 역시 즐겁게 읽었을 것이입니다. 비록 내용은 표제작인 '복덕방'과 '가마귀'를 제외하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범우사의 회장이셨던 고 윤형두 님은 출판사를 새워서 금지되었던 불온한 책들을 대중들에게 공급했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사회변혁을 위해 젊은 날을 바친 훌륭한 분입니다. 단 돈 천 원에 문고판 한 권씩을 사모으던 중학생 시절, 그리고 간간히 만나는 오랜 친구가 된 모두의 친구(汎友)를 추억하면서 윤형두 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했습니다. 

 

23
Comments
1
Updated at 2023-12-13 21:49:53

와우! 단숨에 읽었습니다!!
범우와 록키드님의 인연이 깊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
.
.
.
.
.
.
근데 막짤은 누구의 친구도 아닌 듯한데…

WR
2023-12-13 21:51:26

힝...ㅜ.ㅡ

2
2023-12-13 21:52:57

                                독서는 공부가 아니야.
그저 즐기는 것 뿐이야.
책을 읽지 않으면 돼지가 되지만,
책에서 배우려 하면 개가 되어버려.
좋은 책은 오랜 친구와 마찬가지다.
되풀이해서 읽을 때마다
모르고 있던 자신을
눈치채게 되지...        - 20면상의 딸에서 20면상 왈~                       

WR
2023-12-13 21:56:11

담담하게 님께 오랜만에 답글을 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
2023-12-13 22:04:25
범우사의 창업자가 가셨군요...
▶◀
 
90년대까지 읽었던 책들은 뭐랄까...
나중에 머리가 굵어지고나서 돌아보면 얄팍한 속내가 언뜻언뜻 비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덕분에 추억 속에서 멋지게 남아 있었어야 할 그 책들에 가벼운 환멸을 덧칠하고야 말았던 일이 제법 있어요.
 
그런데 범우사의 책들은 제가 90년대의 거의 막바지에나 스무 살이 될 정도로 시대적으로 좀 늦은 탓에 기억 속에서 그리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 얄팍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처럼 90년대 후반부터는 디자인도 장정도 투박하고 번역도 투박해서 낡은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요즘 시대에 전자책으로 나온 범우문고의 일부나 범우사의 책들을 보면 과거의 그 투박한 디자인과 번역은 그대로일지언정 여전히 얄팍함과는 거리가 멀다 느낍니다.
 
전자책으로 가진 범우사 책이 얼마 없으니 오늘은 범우사판 아라비안 나이트라도 뒤적거려 봐야겠습니다.
WR
1
2023-12-13 22:07:19

그렇습니다. 을유문화사, 까치(그러고보니....) 등도 마찬가지죠. 처음에는 외모에 끌리지만 오래 두고보려면 내면이 아름다워야죠. 시간이 지나서 더 좋은 출판사였다고 느낍니다. 

1
Updated at 2023-12-13 22:17:41

80년대 후반?
당시에 범우사 책은 좀 인쇄가 투박해서
다른 문고판을 구입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 고민했던 듯
어렸을 때라... 표지 디자인이 나름 더 낫다고 생각했던
학원사의 오늘의 책을 구입했어요.
범우 문고는 그래도 꾸준히 나와서
최근에도 한권은 구입했습니다. 무진기행(여러 버전으로 모으고 있어요)

WR
2023-12-13 22:34:56

학원사 세계문학을 저도 아직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의 질이 훌륭해서 절판 된 이후 계속 프리미엄이 붙었죠. 무진기행은 저도 여러 판본이 있는데 범우사 문고는 아마 없지 싶습니다.

1
2023-12-13 22:42:53

이글 보고 윤형두 회장 부고 소식을 알았네요.
저야 대학 들어가면서 범우사 책들을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그전까지는 학원사와 더불어 출판 그 자체였습니다. 뒤에 안 것이지만 엄혹한 시대에 금서 가까운 책을 펴내 고초를 겪으셨다는것을 알아냈요(아마 한승헌 변호사와 가까워서 그분의 회고록에 윤회장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있을겁니다)
어쨌든 90년대 들어 출판 흐름을 뒤쫒지 못해 뒤쳐지기 시작했지만 지금 봐도 훌륭한 책들을 많이 펴냈죠. 윤회장이 돌아가심으로 이제 출판 1세대는 거의 사라진것으로 보입니다.

*부고뉴스를 재료삼아 책과 학창시절과 시대를 회고하는 이런 재밌는 이야기를 dp 말고 어디서 볼수 있을까요!!!

WR
1
Updated at 2023-12-13 23:07:56

위에도 썼지만 학원사의 세계문학 쪽은 매니아 층이 있었다죠. 저도 병사 슈베이크와 핀천의 V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시리즈에서 또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출판사를 하시기 전 윤형두 회장의 일생도 정말 사회진보를 위해 바쳐졌더군요. 범우사도 그런 활동의 일환으로 설립했던거구요. 가신 이의 시대를 앞선 모습에 숙연해집니다. 덕분에 저도 세상을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었습니다. 

2
2023-12-13 23:24:04

저도 삐딱한 청춘이었다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rockid님에 비하면 그냥 바른생활 어린이였군요

스케치 속의 멋진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WR
1
2023-12-13 23:41:38

니코데무스님의 소년시절도 궁금하네요. 스케치는 S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겠죠. 사람이 그린 초상화가 재밌는 게 그런 점인 거 같아요. 

1
2023-12-14 01:01:55

책 사러 가서 한참 고민하다 결국 범우사 아닌 삼성당 문고에 손이 가곤 했었습니다

WR
2023-12-14 12:28:52

저는 삼중당이나 서문당 문고는 간간히 봤고 또 구입하기도 했는데 삼성당 문고는 기억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긴 책인지 궁금하네요.

2023-12-15 00:52:03

오래전 일이라,,삼중당이었나 보네요 ^^

1
2023-12-14 09:22:45

같은 시절 고려원의 영웅문에 열광하던 시절이라 좀 부끄럽기도 하군요 ^^;;

WR
2023-12-14 12:30:36

그게 왜 부끄러울 일일까요? 김용 소설의 스토리라인은 고전에 값한다고 봅니다. 저도 중학생시절에 번역된 김용소설을 모두 읽었습니다. 계산해보니 그때 기준으로 50권이 넘더군요. 

1
2023-12-14 09:23:29

오른쪽 책의 디자인은 눈에 익네요.

비록 읽지는 않았지만...

초상화를 보니 상당히 훈남이신 듯하네요. ㅎㅎ

WR
2023-12-14 12:33:38

오른 쪽이 80년대, 가운데가 90년대 왼쪽이 2000년대 이후 디자인입니다. 

초상화가 재미있는 게, 그리는 사람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가 보인다는 거죠. 예전에 권가야 선생님이 제 초상화를 그려주신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무슨 군인처럼 묘사하셨더군요.ㅎㅎ 저를 훈남으로 그려준 S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2023-12-14 12:37:54

권가야씨라면 그 대도오 그리신 분 말씀인가요?

허... 마당발이시군요.  

WR
2023-12-14 12:40:22

마당발 아닙니다. 그냥 우연이었어요.ㅎㅎ

1
2023-12-14 10:49:50

 개인적으로 범우사의 책 디자인이 취향에 맞지 않아서 이거밖에 없다가 아니면 가급적 안사는 편이었습니다.
사도 서점에서 껍데기 싸논 채로 본다던가......

WR
2023-12-14 12:36:32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90년대 갑자기 일취월장했던 국내 책 디자인 시장에서 범우사, 까치 등의 양서를 발간하던 출판사들이 그런 점을 챙기지 못했던 것은 아쉬웠죠. 그때 장석주 시인이 대표로 있던 청하가 책 디자인을 정말 잘 뽑아서 청하 책을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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