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글] 일본 애니메이션 미디어는 왜 비싼가?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미디어 가격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견해는 블게에서도 이전부터 간간 보아왔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한 번 정리해 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문의 요지는 대개 '길지 않은 시간대의 컨텐츠를 너무 많은 디스크로 쪼개서 발매한다'와 '각각 가격이 높아 총액이 부담된다'입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참고로 일본과 해외는 사정이 조금 다르니 분리해서 적었습니다.)
일본 TVA의 디스크의 일본 발매 가격과 권수는 다음과 같은 바를 감안하여 책정됩니다.
1. 제작위원회는 디스크로 해당 작품의 제작 비용을 뽑아야 함
(* 제작위원회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아니라 해당작에 돈을 낸 스폰들의 집합체, 소위 채권자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빚쟁이들이 으레 그렇듯 '반드시', '빠른 시간 안에' 비용을 뽑을 것을 요구합니다.)
: TVA 제작은 심야건 일요일 아침에 하는 것이건 예술 애니건 상업 애니건 돈이 꽤 많이 드는 작업으로, 일반적인 TVA는 화당 1천만엔에서 최대로는 3~5천만엔(이건 흔치 않은 경우) 정도까지 편차는 있습니다만 약 12주간 방영되는 1쿨 12화 기준으로 대략 1억 엔(= 현 시점 기준 한화 11억 원 가량) 이상의 비용을 소모하게 됩니다.
그게 뭐? 영화에 비하면 싸네? 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표 값 + 2차 매체 비용 + (글로벌 수출 수익) 등을 기대할 수 있는 영화에 비해 일본 TVA는 표 값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고 글로벌 수출 수익도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운(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작비를 뽑을 대상으로는 큰 비중으로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습니다.) 내수용 방송물이므로 단위가 다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방송물의 제작비는 (기업 집단이 지불하는)광고 수입으로 뽑는 것이 소비자에게는 이상적이지만, 일본의 TVA 특히 미디어 가격에 대해 의문이 가장 많이 제기되는 심야 편성 애니메이션은 시청률을 별로 기대하기 어려운 심야 시간대이고 때문에 광고가 별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특히 심야 편성 TVA 수록 미디어는 해당 미디어가 제작비의 대부분을 뽑아내야 하는 의무성 비슷한 것을 가집니다. 달리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일러스트집, 팬시 등등의 부차적인 물건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고 이쪽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야 팔리기 때문에 더더욱 미디어 판매가 중요합니다.
(* 다만 광고가 그럭저럭 들어오는 일요일 아침의 소위 프라임 시간대나 국민 애니쯤 되는 사자에상 같은 작품들은 오히려 후술하는 이유로 책정되는 대개의 애니메이션 미디어물 가격에 슬쩍 편승하여 조금 낮은 수준의 총 컨텐츠 미디어 구매비를 책정해 광고비도 챙기고 미디어 발매 이득도 챙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쪽은 대개 미디어를 조용히, 한 방에 몰아서 발매해서 이런 비난의 시선을 피해가기도 합니다.)
2. 한정된 소비풀
: 일본이 애니메이션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 일본에서도 모든 애니메이션이 일반적으로 즐길 대상으로 생각되지는 않으며(특히 심야 애니는 그쪽에서도 마이너한 장르에 속합니다.), 워낙 홍수처럼 TVA가 쏟아져 나오는 현 시대에는 어떤 한 TVA가 많은 소비자를 모으는 것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워 졌습니다.
일부 성공한 TVA가 조명받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일본 내 TVA 미디어 매체의 판매 단위는 (망하면)100여 장 단위 ~ (흥하면)10만여 장 단위 정도로 형성됩니다. 그럼 평균 5만? 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5천 장 정도가 '(그래도)많이 팔리는' 수준에 불과하고 따라서 제작위원회는 기본적으로 (권당)'2~3천' 정도의 미디어 판매를 예상하고 예산충당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간혹 1만~10만씩 팔리는 것이 있어도 한편으론 많은 돈을 들여도 1천장도 못 팔고 망하는 작품도 있게 마련이니 언제나 리스크를 대비해 장사 계획을 수립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사물의 좋은 면만 보면서 좋게 잡아 5천장을 팔아 10억원을 만들려면 장당 20만 원의 값이 나와야 하는데- 아무리 그 일본이라도 디스크 한 장에 2만 엔을 매겨서 한 번에 사세요 하고 출시하면 소비풀은 더 쪼그라들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예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더 많이 팔아야겠지요.
3. '독점' 컨텐츠를 '한정된 소비자'에게 파는 법
: 거기서 나온 쉬운 방법이 '독점' 컨텐츠를 '쪼개서' 파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모든 컨텐츠는 기본적으로 '독점'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만 만드는 특정한 캐릭터와 이야기니까요. 거기서(혹은 거기 관련된 회사에서) 안 만들면 그 컨텐츠는 없는 겁니다. 그럼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소비자는 그것을 살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소비자에게 10화 정도의 TVA를 디스크 한 장에 넣어 2만 엔을 매겨서 5천장을 파는 것과 그 10화 짜리를 디스크 5장에 2화씩 나눠 넣어 권당 4천 엔을 매겨서 총 2만 5천 장(5천 x 5)을 파는 것 중 어느 쪽이 쉽겠습니까? 요즘은 버블 시대가 아니라서 어지간한 팬이라도 한 번에 한 장에 2만엔 하는 디스크라면 다시 생각하게 되지만, 한 달에 4천 엔씩 다섯 달에 나눠서 지불한다면 뭐... 할부니까... 하고 손이 가기 쉽게 되겠지요. 물론 후속 권으로 갈 수록 판매량이 줄어드는 건 일반적이지만 그런 걸 고려해도 후자가 제작비용 뽑을 계산이 쉽게 서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조삼모사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2만 엔짜리를 한 방에 살 때 소비자가 부담을 줄이는 건 (카드)할부 밖에 없습니다. 카드 할부로 디스크 한 장짜리 사는 게 더 유리하고 만족감이 들지 쪼개져서 나오는 걸 다달이 사서 디스크 한 장씩 대여섯 장을 랙에 꽂는 게 더 유리하고 만족감이 들지는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겠지만 최소한 제작 위원회는 후자를 더 가능성 있게 봅니다.
4. '컨텐츠'를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는 더 쉬운 방법
: 요즘은 일본내 애니메이션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대로 1년 동안 TVA, OVA, 극장판 등등을 합쳐 대략 200여 편의 애니메이션이 나옵니다. 개중에 시리즈물이 아니라 '새로 나온' 'TVA' 작품만 추려도 100여 편은 가뿐히 넘기고. 그게 뭐? 영화보다 적게 나오잖아? 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전술한대로 영화와 TVA는 수익을 얻을 구조가 다르며 '일부러 표 값을 내고 일부러 영화관에 가서 보는' 영화와 '무심히 TV 틀면 나오고 본' TVA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정도도 다릅니다.
어떤 물건이 사람들에게 쉽게 기억에 남으려면? 어떻게든 더 오래 회자되거나 상품판매대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TV 방영 석 달 + 디스크 한 장 내서 한 달 정도 관심을 끄는 것과 디스크를 쪼개서 한 달마다 하나씩 내고 총 여섯 달 동안 완결시켜 3+6=아홉 달 가량을 광고지 한 켠이라도 차지할 수 있는 것(물론 광고비는 나가지만, 팔 물건이 있어야 광고도 되니까) 중 어느 쪽이 사람들의 기억에 더 남을까요? 물론 후자입니다. 그리고 팬시 등 2차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여지도 물론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겠지요.
5. 결론
: 간단히 말해 일본 TVA의 물리 미디어 가격이 높은 건 제작사가 소비자를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감독, 어떤 성우, 어떤 캐릭터를 앞세워도 소비풀은 일정하게 상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일본 TVA의 '결정된 틀'이자 '현실'이므로 거기에 맞춰 제작비 뽑을 계획을 세우려면 '쪼개 팔'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 제작측 입장에서 어떤 한 컨텐츠의 일본내 발매 미디어 수를 줄여서 얻을 수 있는 건 사실상 '없습니다.' 기껏해야 블루레이 디스크 생산 장수가 낮아지니 디스크 생산 및 패키지 생산(과 운반 등등의) 총액은 낮아지겠지만, 그래봐야 전체 컨텐츠의 핸들링 및 오소링 비용은 별다를 것 없으며 결국엔 제작비를 뽑을 전망이 어두워질 뿐입니다. 쪼개 팔면 많이 들어가는 북클릿이니 패키지 인쇄와 매대 전시 등의 비용도 줄잖아? 책자는 생산 비용 대비 만족감을 주기 좋으므로 비용에 대한 소비자 체감을 무마시키기 쉬운 물건이고, 매대 전시 비용은 전술했듯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위해선 불가피합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
때문에 소비자들은 미디어 수가 줄어들면 훨씬 더 싼 값에 어떤 컨텐츠를 소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실제로 미디어 수가 줄면 거기에 책정된 값이(쪼개 판 것을 합친 가격에 버금가게 혹은 더) 오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총액은 별로 달라질 게 없습니다. 그래서 좀 우습지만, 해당 컨텐츠에 물리 매체를 살 정도의 애정이 있는 소비자 입장에선 차라리 쪼개져서 나오는 게 좋은 상황인 것입니다. 쪼개져서 나오면 한 번에 나가는 부담이 줄고, 아무튼 이것저것 동봉품이 더 많이 같이 포함되어 오며, 디스크 용량을 넉넉하게 쓸 수 있으므로 화/음질면에서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장점도 따라오거든요.
6_1. 번외편 : 가격 총액이 낮고 디스크 장수가 적은 북미 혹은 해외 발매시의 사정
: 대표적으로 요새 북미에선 디스크 2~3장에 12화 가량의 일본 TVA를 넣고 60~100 달러 정도의 가격에 발매하는 것이 활발합니다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습니다.
A. 현지 발매사의 판권료
= 이미 일본에서 어느 정도 수익 보전을 한 일본 제작위원회는 (당연하지만)판권료를 제작비 수준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이거야 해외 어느 나라에 팔건 마찬가지. 따라서 발매사 입장에선 소비자 가격에 전가할 부담이 일단 더 낮습니다.
B. 컨텐츠 핸들링 비용
= 이미 일본에서 BD화를 다 해놓은 상태로 소스를 받거나 거기에 약간의 가감을 추가하니 핸들링 비용이 더 크게 들지도 않습니다. BD 2~3장에 12화씩 몰아 넣기 때문에 용량(과 비트레이트) 압축이 더 필요하며 일본보다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건 자막 제작 비용과 (있다면)현지화 더빙 비용 같은 것.
C. 기억에 오래 남길 필요성이 낮다
= 이미 일본에서 완결되어 버린 컨텐츠를, 쪼개서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내며 팔아봐야 성질만 돋구거나 강제로 잊혀질 뿐입니다. 또한 A+B의 이유로도 제작 단가를 조금이라도 더 낮게 보전하는 쪽이 좋으니 장수를 줄이는 것도 이득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화/음질에 대한 상대적 손실이 나와도 총 구매 가격이 낮으니 대개 긍정하게 되기도 하고.
6_2. 번외편2 : 가격 총액이 조금 낮고 디스크 장수가 같은 한국 발매시의 사정
이쪽은 대부분의 일본 TVA 한국 정식 발매판 미디어의 사정. 일본쪽 총액 대비 1/2~1/3 가량이면서 일부 동봉품이나 서플이 빠지지만 본편 퀄리티는 보전하며 디스크 장 수도 같은 케이스가 많은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습니다.
A. 판권료를 뽑아낼 시장 풀
= 말그대로 판매량 차이가 북미 등에 비해 너무 큽니다. 영화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애니메이션으로 한정해도 미국의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의 물리 매체 구매율과 그 저변이 좁다하나 그건 미국 물리 매체 시장 기준이고 한국과 비교하면 자릿수가 하나 두엇 이상 다릅니다. 이런 상태에서 판권료를 북미 대비 1/10, 1/100으로 깎을 수 없다면 한국 발매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일본 제작사와 비슷한 판매법 뿐입니다. 물론 BD 미디어 가격의 암묵적 시장 약속이 장당 2만~3만원 정도(스틸북 등 특화 케이스는 이보다 더 비싼 것도 나오지만)인 한국 시장 현실도 감안해야 하고.
B. 판권사의 입김
= 꼭 TVA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사가 해외 현지 발매사에 쉽게 말해 우리 컨텐츠를 우리가 제작한 품질 그대로, 혹은 장수도 그대로 내시오 하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역수출 방지를 위해서라도 이런 식으로 해두는 경우도 있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이러는 경우도 있고 하여간 다양합니다. 대개 판매 기대값이 더 높아 글로벌 파급력이 더 좋다 생각되는 시장일 수록 이런 제한(= 판권사의 간섭적 요구)이 느슨하며 특히 북미 시장에 판권을 팔면서 이렇게 시시콜콜 따지는 제작사는 요샌 별로 없다시피 한데(예전엔 일본 애니 기준으로 영어 자막이라도 붙박이로 박으시오 정돈 요구했지만), 한국은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는 시장이고 그런 사정상 발매사가 을에 가까우니 저런 요구가 아니라 제작사 입김 자체가 셀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신 A+B의 이유로 아무튼 본편 화/음질은 일본판과 같은 수준으로 보전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며 북미판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일본판보다 더 싸지기 때문에 한국판은 일종의 '절충안' 같은 형태가 됩니다.
- 요약
종종 높은 가격은 악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만, 경제 논리에 선악우열은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유 없는 높은 가격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이유 없이 높은 가격은 그냥 도태를 부를 뿐이므로.)
요약하면 일본 발매 미디어의 책정가에는 다음 비용이 상계됩니다.
- 제품의 제작국이므로 기본적으로 해당 작품 제작 비용에 대한 감안
- BD화, 제품 제작 인력 등 디스크 제작상의 비용
- 인쇄, 박싱, (제작 중의 물류)운송, 판촉 비용
해외에서는 다음 비용이 상계됩니다.
- 판권료
- BD화 소스의 추가 핸들링 비용
- 인쇄, 박싱, (제작 중의 물류)운송, 판촉 비용
한편 일본 애니메이션을 해외에서 정발하는 회사의 입장에선 판권료가 가장 큰 지불 비용이고, 여기에
(상대적으로 용이한)BD화에 따른 (상대적으로 적은)비용 + 자막 등의 번역 비용(이건 일본보다 더 드는 비용) 정도가 추가되는데... 이를 감안하고서 해당 국가 시장 여건까지 생각하여 디스크 발매 장수와 판매가를 책정하는 것뿐입니다.
장사이니 이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걸 얼마나 책정하느냐는 사업 전망에 따른 회사의 판단이고 소비자는 거기에 대해 사냐/ 안 사냐로 판정해줄 따름입니다. 다만 컨텐츠란 것은 그 특성상 '독점'이니 그것이 마음에 들게 유인하여 어느정도 가격을 잊게 만드는 효과는 있으나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수익 추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애니메이션은 생필품 같은 게 아니니 너무 비싸다 싶으면 안 사면 그만이므로) 현재 일본 TVA 미디어물의 가격과 디스크 장수는 대충 이 정도의 경계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총괄적으론 관련 업계가 그냥저냥 먹고 사는 수준의 결과만을 낳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그 비싼 TVA 블루레이를 그것도 악랄하게 쪼개 팔아서, 순전히 '애니메이션'만으로 거부를 쌓은 초대기업이 얼마나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현 시점에서 일본에도, 해외에도 그런 기업은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그게 소비자가 화가 날 정도의 가격대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미디어 시장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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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하고 정확한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