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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는 맷돌을 돌리는 것 같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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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9-23 03:25:31

최근에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인데요. 이런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등산을 하다보면 내 발끝만 바라보고 뚜벅뚜벅 한참을 걸어가야 할 숲길이 있습니다. 그 밖의 동작과 마음 씀은 숲길을 벗어나는 시간을 늦추기만 할 뿐이고 구경할 것도 없는 좁다랗고 긴 숲길입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그 속에 있고 싶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벗어나기를 위한 동작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곳이죠.

 

시간과 거리에 상관없이 '한참'을 그렇게 매진해야 숲길을 이윽고 벗어납니다. 시야를 가렸던 마지막 나뭇가지를 지나치면 겨우 보이던 하늘 한 조각이 펑! 하고 커지면서 저 멀리 흰 눈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이 먼저 보이고 이 쪽 부터 그 산까지 굽이굽이 산줄기가 오르락내리락 이어진 땅덩어리와 운 좋은 날이면 구름까지 곁들인 공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늘이 넓어지고 시야가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내 몸이 커져서 내 손이 저 산꼭대기 눈을 만질 수 있고 지나가는 흰 구름을 쓰다듬으면서 다음 발걸음은 저 쪽 능선으로 이미 줄달음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쓰고나니 이런 것이 호연지기인가 합니다만, 상이한 느낌의 공간을 이동하는 느낌만을 표현하자면 독서도 이런 경험을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긴 호흡으로 생각을 하며 읽어야 하는 책

Surfaces and Essences: Analogy as the Fuel and Fire of Thinking(호프스태터)

논리철학논고 해제(비트겐슈타인, 조중걸)

 

저자가 안내하는 역사, 지리 , 문화, 예술 관광코스 같은 책

- 유시민과 단둘이 알쓸신잡 찍으며 유럽의 시공간을 다닌다고 생각하시라

Europe: A History(노먼 데이비스)

 

쉽지 않은 책

Deutsche Liebe(독일인의 사랑)

Between the Woods and the Water (유럽도보종단 3부작 중 2권)

 

관두려다 끝까지 읽은 책

Reading Chekhov: A Critical Journey

 

위 3권을 긴 호흡으로 읽으며(반도 못봤어요) 사이사이 아래 3권을 마쳤습니다. 독서라는 행위를 등산에 비유한다면 바위, 풀, 나무, 시냇물, 조각하늘처럼 걸어가며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의 사물들이 된 책들이 하나의 산수화를 구성해 보이는 것처럼 서로의 연관성을 보여주더군요.

 

유럽 중북부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시작한 기행문을 꾸역꾸역 읽으며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했는데 그 순간에 이르는 방법이 반복적인 행위로부터가 아닌 역사, 문화, 지리에 대한 지식이 역사책을 통해서 공급되면서에야 도달했고 그것이 독일인의 사랑과 체호프의 책에서 밤하늘의 별자리 줄 긋듯 이어지면서 내용이 또렸해지고 속도가 붙었습니다. 기행문에 나오는 풍경과 사람과 묘사구들이 그제서야 숲길을 벗어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되었습니다.

 

호프스태터의 책과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맷돌의 윗돌과 아랫돌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호프스태터의 책을 읽으며 문장표현의 방식과 해석에 대한 훈련을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해제를 읽다 보면 우주와 인간, 활자와 언어, 논리의 배경등에 침잠하며 사고 자체를 쉴 수 있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며 제가 확신한 것 하나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관심이 크지 않으면 철학에 대한 지식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다는 제 독서방식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곁다리 지식이야 피해갈 수 없겠지만 비트겐슈타인 책을 벗 삼아 가끔 이야기 나누는 정도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수 많은 철학자들이 각각의 상대적 외국어들인데 독서를 위해서 모든 언어를 배울 필요는 없고 생각하는 방법만 알면 두루 책을 읽으며 사고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펑! 하며 확장하는 하늘 공간에 더 자주 이를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철학하지 않음으로 너만의 철학을 하라는 제 마음 속 소리입니다.

박학다식 무불통지가 목표가 아니니까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원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읽어왔습니다, 안되면 말았고요.(괴델 에셔 바흐 부들부들)

괴델 에셔 바흐 책에 굴복한 것처럼 이런 류를 비롯한 철학 책들은 추상적 단어의 나열이다 보니 아무리 언어적 상상력을 동원해도 철학근육이 없는 바에는 소용이 없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조중걸님의 해제본은 원효대사 해골물을 삼다수로 배달 받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2권 읽을 차례입니다) Rockid님께 꾸벅, 감사드립니다. 

 

맷돌이 비었네요. 읽으면서 책 속에 작가가 숨겨둔 별들을 찾아보고 그 별들을 책과 책 사이로 넓어진 하늘 공간에 줄을 그어 연결할 수 있는 다음 짧은 책들을 또 찾아야 합니다. 윗돌 아랫돌 열심히 돌려가면서요(아랫돌은 고정이네요^^) 여기서 어이는 제 마음입니다. 읽고 계시는 분의 마음 또한 어이입니다. 같이 맷돌을 응?

 

맷돌 가는 장면 보시겠습니다. ㅎㅎ

 

https://youtu.be/ijwWoIivAII 

 

 https://youtu.be/PDHqAofeghQ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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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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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02:52:44

언젠가부터 책은 안읽고 유투브에서만 놀고 있는데, 저도 맷돌을 돌려야겠습니다. ^^

WR
2021-09-23 02:59:29

두 번째 동영상에 보시면 석공이 맷돌을 위한 돌을 구하는 장면이 있어요. 실한 놈으로다 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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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06:21:33

읽어도 알듯말듯 손에 안잡혀 두번 읽었는데도 모호했던 책이 있었는데..
맷돌에 한번 더 갈아봐야겠습니다

피로사회(한병철)

WR
2021-09-23 06:28:18

우물가 물 빠진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야 할 타이밍이 있듯이 더불어 읽고 시너지가 날 책과 함께라면 쉽게 읽힐 수도 있겠죠.^^ 맷돌을 돌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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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07:51:45

 멧돌가는게 힘들어서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걸까요...

아님 노안의 탓일까요... 

WR
2021-09-23 07:56:12

믹서(너튜브)가 있어서 그렇죠. 맷돌 맷돌(속닥속닥)^^

1
2021-09-23 10:40:20

학창시절 헷세의 책들을 읽었는데

아직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그때는 책은 읽으나 내용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지금도 여전히 손이 안가는 책들...

헷세는 지금도 괜히 망설여지게 되네요 ^^

WR
2021-09-23 11:48:44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나서 중딩 때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전혀 다른 느낌이더군요.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 도무지 이해도 못하고 겨우 키스 씬 하나만 나오는 것에 분하기만 했던 철없던 시절, 막연하게 붙잡았던 것은 어떤 한 이성에게 평생을 양보하고 희생하며 그의 자식에게까지 헌신했던 의사양반의 선택이었습니다. 헷세 다시 읽으시면 아마 전혀 다른 느낌 받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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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14:49:49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책들은 번역본이 없는거죠?

Europe: A History가 땡기네요^^

괴델에셔바흐는 한글로 읽다가 도대체가 이해가 안돼서 좀 찾아보니 오역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원서로 샀는데...아직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ㅎㅎ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읽어보려구요. 호프스테더의 Surfaces and Essences도 함 봐야겠네요.

WR
2021-09-23 15:43:52

사고의 본질은 원서가 낫고, 유럽사는 번역판이 광고만 하고 무슨 이유인지 절판됐어요. 원서라 해도 강추합니다.
괴델~은 아직 자신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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