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연재]류츠신 SF, 『삼체』 비판적 리뷰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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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동안 감정을 진하게 실어서 사정없이 후드려 팼으니 이번에는 그래도 칭찬과 격려 위주로 마무리를 해 보려 합니다. 하지만 아직 펀치 몇 방은 남아 있습니다. ㅋㅋ
6. 실패한 개연성, 중국적 스케일
전 글들에서 『삼체』의 과학적 오류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 했으니, 이 글에서는 그 밖의 문제점들과 류츠신 글쓰기의 특성상, 어떤 장르가 어울릴지 이야기해 보겠다.
6-1. 인지과학과 진화적 관점의 부재
전통적인 범주의 과학(현대 물리학, 생물학)적 오류 이외의 부분에서 내가 가장 납득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작가가 인간 심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SF분야에서 필수인 인지과학에 대한 이해 부족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작가는 3부에서 4차원 공간 세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작가가 서술한대로 인간이 그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일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의 인지 능력은 인간이 진화해온 환경의 역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상은 주행성으로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던 수상(樹上)유인원에서 유래했다. 때문에 인간의 시각인지는 공통조상을 가진 다른 유인원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면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도록 두 눈의 시야각을 포기한 대신 양안의 거리 차이로 입체시를 가질 수 있도록 진화했으며, 주간에 먹이가 되는 열매를 주위 배경과 쉽게 구분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뭇잎의 파장과 열매의 파장이 쉽게 구분되도록 색채시를 가지게 진화했다. 이런 능력이 필요 없는 다른 포유류들에게는 이런 인지감각이 진화하지 않았다. 개들이나 고양이는 색채를 인간만큼 정교하게 지각할 수 없으며, 야간시에 유리하도록 진화해왔다. 또 넓은 범위의 면적에서 이미 이동한 사냥감의 자취를 쫓기 쉽도록 후각이 극도로 민감하게 진화해 왔다.
인간과 새가 보는 시각의 주관적 경험의 차이. 인간은 3원색을 통해 빛의 파장을 분할, 혼합하여 파악한다. 반면 조류는 기본적으로 4원색을 감지할 수 있는 원추세포 체계를 갖추고 있다. 때문에 인간은 새들이 도대체 어떤 색체감각을 느끼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위의 비교사진의 오른 쪽 새의 시각은 일종의 상상도일 뿐이다.
그런데 4차원 세계에 대한 적응을 할 필요가 없었던 인간이 4차원 세계에 들어가서 혼란 없이 공간의 패턴을 파악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차원의 세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인지체계가 행동이 가능한 만큼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을까?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인간은 당장 불만 꺼져도 개과나 고양이과 만큼 공간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 차원이 더 추가되어서, 위치감각을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통해 직관적으로 그 세계의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에 그런 세계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형식이 인간에겐 없다. (아예 4차원 세계에서 물질적 세계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는 물리학적 예측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상은 대체로 2차원 세계에 사는 존재들의 3차원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더 높은 차원의 경험을 상상하게 만드는 에드윈 애벗의 『플랫랜드』란 소설에서 그 상상력의 대부분을 빚지고 있다. 고차원 경험에 대해 묘사하는 작가들은 설령 애벗과 그의 소설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소설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지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벗의 소설은 일종의 관념소설이지, 상상의 과학적 엄밀성이 문제가 되는 하드SF가 아니다.
애벗이 이러한 상상을 통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가 사는 익숙한 세계 이상의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하드 SF의 목표는 그렇지 않다. 하드SF는 과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엄밀한 현실성을 추구하여, 그 과학적 이론과 지식이 소설의 플롯과 주제에 결정적인 기능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를 통해서 독자들은 과학에 대한 정밀한 이해와 그에서 비롯된 상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심원한 이해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소설 『플랫랜드』와 작가 에드윈 에벗
에벗의 소설, 『플랫랜드』의 영향을 받은 다른 그래픽 노블 작품을 한 번 짚고 넘어가겠다. 닉 수재니스의 작품, 『언플래트닝』은 그 제목에서 느겨지는 것 처럼, 『플랫랜드』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노출한 작품이다. 미국 최초로 만화를 통해 박사학위를 받고 책의 초판도 유명 대학의 출판부를 통해 출간되어서 유독 이런 이력에 약한 한국 독서계에도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애벗이 주장했던 대로, 인간이 인간적 한계에서 벗어나 다른 야생 동물들의 관점을 차용해, 우리를 억압하는 인지적 한계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무 의미 없는 순진한 주장일 뿐이다.
위로부터 작가 닉 수재니스와 그의 작품 『언플레트닝』의 표지와 내용 일부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이런 상황에대해 "우리가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훌륭하게 설명했다. 인간과 박쥐는 감각과 인지의 체계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초음파를 인식하고 그것으로 공간감을 파악한다는 것의 주관적 느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개의 감각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정보를 들여다 본다고 해서 개의 주관적 정신상태를 상상할 수는 없다. 또한 당연히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인간적 한계를 통해서만 객관적 수치들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 데니얼 데닛은 이러한 근본적 한계에 대해, 후설과 메를로 퐁티의 언어를 빌려 "타자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상학적 시야를 통해 인간적 편견이 없는 상태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 후설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말 대로 "새장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인간의 인지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서로 다른 감각- 인지 체계를 가진 존재의 의식의 주관성이 통약 불가능 하다는 것을
멋진 비유를 통해 설명한 분석철학자 토머스 네이글과 그 내용을 설명한 카툰
(대충 번역)
"인간이 박쥐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진짜로 알 수 있을까?"
"전혀. 봐, 박쥐가 된다는 건 아주 이상한 거야. 우리가 하루 종일 뭘 생각하는 줄 알아?
시나 고등수학 같은게 아니라고. 음식, 은신처, 섹스가 전부야"
"우리는 이런 복잡한 뇌를 셀 수 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진화시켜왔어.
문자 그대로 수천억개의 커넥텀을 말이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뼈를 바르거나 간식이 있는 곳을 찾는데 쓰고 있지"
"그게 어떤 걸지 상상도 못하겠구먼."
"우리는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어."
따라서 리얼리티를 신경쓰는 좋은 SF는 단지 물리적 상상력과 이론적 엄밀성 뿐만 아니라, 작중에서 그것의 효과를 경험하는 인간의 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려를 해야 한다. SF의 리얼리티는 그러한 섬세함을 통해서만 확보된다.
구 공산권 출신 작가나 사상가들의 일반적인 특성이기도 한데, 그들은 대체로 인간의 선천적 심리나 인지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사회적 격변에 의해, 번식욕 같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들이 너무 쉽사리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선천적 욕구들이 모두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만큼의 변화는 현대적 관점에서 믿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6-2. 글로벌스텐더드에 한참 못미치는 후진 윤리감각
또 다른 문제는 다른 중국의 대중문화에서 보여지는 특징들과 마찬가지로, 아동에 대한 배려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의 영화나 소설들은 어린아이를 성인과 같이 묘사하거나, 성인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70년대 즈음의 우니나라나 현재 북한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지구를 탈출하는 순간 구조해야할 아이들을 추리기 위해서 일종의 지능검사 퀴즈로 대상자를 선정하는 장면이 나온다.(초딩들을 상대로한 오징어 게임?) 그 상황에서 결정권을 쥔 주인공들 중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아이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해 작가는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듯 하다. 저 시험을 진행하는 어른들은 주인공인 청신의 일행들인데, 이 상황에 대해 인간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작가도 끼어들지 않는다.
아마도 서구나 한국의 작품이었다면 아무리 허구라도 이런 상황이 별 비판적 태도 없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외에도 지나친 능력주의 신봉, 엘리트 출신들의 신념에 대한 긍정적 묘사, 결과를 위해 과정의 정당성이 다소 희생될 수 있다는 관점 등등, 현대 중국의 정치적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또 등장인물의 회상에 등장하는 문화적 창작물들이 거의 20세기 헐리우드 블록 버스터 영화에 편중되어 있는 점, 작가가 영향을 받았을 법한 동구 SF작가들의 아이디어가 그다지 창조적으로 변용되지 않은 채, 작가의 소설에 끼어들어가 있는 점들도 지적해야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그러나 류츠신의 다른 소설들을 보면, 스타니스와프 렘, 트루가츠키형제, 미국 황금시대 SF거장들의 아이디어를 별 각색없이 도용한 흔적이 너무 많이 느껴진다. 소설 『삼체』의 문학적인 측면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 많은 과학적 묘사나 아이디어들이 이전세대 작가들이나 과학잡지들을 통해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고, 그런 아이디어에 대한 서술과 묘사가 부정확하며, 그렇게 등장한 아이디어들의 대다수가 소설의 주요한 플롯과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이 잘못들 중 일부만 피했더라도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박한 평가를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6-3. 류츠신의 가능성
비판은 이쯤하고, 그래도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말해보자. 1권의 삼체세계 온라인게임 시뮬레이션을 묘사한 부분이나, 문화대혁명기간의 중국의 상황에 대한 핍진한 묘사는 좋았다.
사실 기이한 삼체 세계를 인간화한 세계를 보여주는 게임 묘사 부분은 정말로 흥미진진해서 굉장한 몰입감을 가지고 읽어내려갔다. 물론 중간중간 게임에서 벗어난 현실 묘사에서 어이없이 유치한 부분을 노출해서 흥이 조금씩 깨져가긴 했지만 말이다.
또한 예원제가 인류에 대한 깊은 원한과 증오를 가지게 만든 문화대혁명 기간의 중국사회의 분위기 묘사는 이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만약 이 소설이 1부에서 미완으로 끝났다면, 1부에서 노출된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류츠신이 청소년 대상으로 개작한 소설을 한 권 읽었는데, 그 소설이야 말로 류츠신의 장점을 굉장히 잘 살리고, 단점을 가리는 최적의 장르였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대상으로 소설을 개작했기 때문에, 류츠신은 소설에 적용된 과학이론이나 사실에 대한 설명을 극도로 자제했다.
때문에 그 소설에서도 과학적 내용은 사리에 맞지 않았지만, 과감히 그 설명들을 생략함으로써, 이 소설이 비유와 은유에 대한 비중을 높이게 만들었다. 류츠신이 상상한 세계는 스케일이 무척 크다. 『유랑지구』에서는 아예 지구에 엔진을 달아 우주를 떠돌게 만들고, 『우주 탐식자』에서는 말 그대로 지구를 삼키고, 조이면서 약탈하는 고리형 우주선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런 큰 스케일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삼체』 3부의 동화들을 봐도 스토리가 탄탄하고 흡입력이 있다. (물론 동화의 메타포들이 너무 즉물적이고 유치해서 문제이긴 하다. 류츠신이 좋은 동화 작가가 도기 위해서는 신화적 상상력을 더 키우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고, 그것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동화적인 환상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 결론적으로 말해 류츠신은 sf작가로서는 필수적인 실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가 과학적 정합성을 요구하지 않는 환상 소설이나 동화의 세계로 진출한다면, 장점을 살려 작품성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은 다분해 보인다. 이는 절대로 류츠신 본인이나 동화라는 장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동화는 그저 그런 SF보다 훨씬 긴 생명력을 가진다. 생 땍쥐베리의 『어린 왕자』나 오스카 와일드의 『이기적인 거인』이 웰즈의 『타임머신』보다 못한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류츠신이 과학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지금 같은 수준으로 SF를 써내려간다면, 차라리 과감하게 방향전환을 해서 동화작가가 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물론 벌이는 지금보다 훨씬 떨어지겠지만....
드디어 연재가 끝났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무탈하게 끝가지 온 것 같군요.
이미 예전에 작성해둔 메모가 있어서 수월하게 연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을 읽고 그간의 시간낭비에 너무 화가 나서 "기왕 낭비한거 아주 철저하게 비판적인 리뷰라도 남기자"라고 생각하며 써놨던 글들을 이번 기회에 정리할 수 있었네요. 어쩌면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져 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요.ㅎㅎ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번에는 또 다른 기획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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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읽을수록 논문 보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