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자동
ID/PW 찾기 회원가입

[책]  [책을 읽고]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 유용하지만 반증 불가능한 과학 성경

 
13
  1256
Updated at 2023-08-07 21:28:49

정기적으로 하는 책 모임에 오랜만에 참여하였는데 책을 투표로 고르면서 제목이 맘에 쏙 드는 건 없더군요. 그래도 나름 관심사 쪽이겠다 하고 고른 책이 선정되었고 그래서 다 읽은 후의 느낌을 써 봅니다.

 



 

도서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주제: 과학

저자: 칼 세이건/1995년 초판 발간

 

 

 

< All about science >

 

저자인 칼 세이건은 천문학자이자 명저 <코스모스>로 알려진 작가이고, 동시에 사회운동가로서도 핵무기 감축 운동 등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많은 활동을 했지만 그의 모든 활동은 과학이 중심에 있었죠. 이 책 역시 그러한 활동의 연장선으로,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설명하면서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간세상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가 과학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보면, 과학자로서 그가 지닌 프라이드를 잘 엿볼 수 있죠.

과학에서는 해서는 안 될 질문이 없다. 너무 민감하거나 미묘해서 증명하기가 어려운 문제라도 상관없다. 과학에는 신성 불가침의 진리 따위는 없다.

- 본문 62페이지

거침없이 질문하고 회의하고 성찰하며 오로지 사실을 향한다는, 그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과학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과학보다 더 좋은 수단이 있으면 그것을 지지하겠다는 저자의 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오류를 찾아 도전하는 과학자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과학적 태도 등 그가 언급한 과학자의 행동과 자세는 과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범으로 비추어지고 있죠.

 

세이건은 과학의 대중화를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였습니다. 비과학적인 사고로 인해 사람들이 피해입고 죽어나가는 것을 극히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현실은 과학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유사과학과 사이비, 상업적 유혹과 미신들이 책의 제목마냥 악령처럼 사방팔방에서 출몰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는 그러한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묵사발로 만들어 줍니다.

 

 

 

< 너의 용은 차고 안에 있느냐? > 

 

 

그는 유사과학과 사기 등을 비판하기 위한 예로 '차고 안의' 용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누군가가 불을 뿜는 용이 차고 안에 산다고 주장한다.

보여달라고 하니 '어이쿠 얘 투명해서 안 보여요'라고 한다.

불의 열이라도 재보자고 하니 '얘는 투명해서 열도 안 나요' 라고 한다.

차고 안의 용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제시하지만 이리저리 말만 빙빙 돌리고 아무런 결론이 안 나온다. 당연히 확인할 방법 따위도 없다.

 

주장하는 사람에게 이미 '차고 안의 용이 있다.'는 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요. 반증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저 주장이 되는 말만 맴돌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것이 되어 버리고, 이는 분명 과학적 사고와는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 차고 안의 용 중에서 세이건이 가장 비중을 할애하는 것이 UFO 체험기입니다. 체험한 사람들이 얘기하는 외계인의 말과 행동이 지극히 지구인의 중심적임을 지적하고 있죠. 외계인들이 지구의 운명과 도덕에는 굉장히 관심이 많지만 지구의 기술과 자신들의 문명을 얘기하는 데 인색한 부분은 기초적이고 흔한 사례입다. 그것도 그렇지만 외계인을 접했다는 사람들이 화성이나 금성 탐사 전에는 외계인이 금성인이나 화성인이었는데 둘이 불모지인 게 알려진 후로는 은하 밖으로 거주지가 바뀌는 것도 세이건이 하는 비판의 주요 포인트가 되고요.

 

외계인 외에도 마녀 사냥 역시 그가 많은 지분을 할애하며 비판합니다. 마녀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마녀를 만들면서 엄밀히 고찰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마녀로 정해놓고 모든 것을 시작했죠. 고문하여 자백하면 마녀임을 인정한 것이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마녀이니 인정할 리가 없다는 논리로 말이죠.

 

차라리 크아아앙 울부짖으면서 다 뚜까패는 투명드래곤이 실체가 있겠다고 느껴지는 이 개념을 통해 칼 세이건은 이미 정해진 결론에 끼워맞추는 억지 퍼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강조합니다.


투명드래곤은 적어도 줘패니까 있다는 티는 나겠다

 

 

 

< 모두에게 있는, 모두를 위한 과학 >



책의 후반부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그는 과학적 성향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있으며, 따라서 발현하기만 하면 모두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차고 안의 용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칼라하라 사막의 쿵 산 족은 사냥감의 흔적과 변수를 철저히 분석하여 사냥꾼들의 의견을 모으고 합의하여 사냥합니다. 지극히 과학적으로 보이는 생각이나, 그들이 어디서 과학을 배웠을 리는 만무하기에 칼 세이건은 인간이 과학적 성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증거로 이 부족을 제시하지요.

 

그렇게 다들 과학적 성향을 담고 있으니, 그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사고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과학 얘기를 TV에서 더 틀어준다던가, 과학 행사를 한다던가, 체험관을 더 만든다던가... 순수하면서도 나름 깊은 칼 세이건의 고민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이 단락은 조선시대 유교정치의 본질이었던, 백성을 교화하여 선한 본성(잠재력)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얘기가 문득 떠오르는 부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론에 가장 충실했던 게 조선 최고의 과학군주 세종이었으니 어떤 의미로 통하는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종이 정창손을 파직한 이유가 바로 백성의 선한 잠재력을 부정해서였다.


 

 

< 책임있는 과학을 향하여 >

 

칼 세이건은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을 강하게 강조하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25장의 제목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25장 제목-

 



그는 과학적 사고를 통해 비과학적인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드워드 텔러라는 물리학자가 책임의식 없이 수소폭탄 같은 대량학살무기를 적극적으로 만들려고 한 것을 비판한 것이야 과학 분야이니 당연히 자기 분야겠지만, 자민족 중심주의, 제노포비아, 국수주의가 발호하는 세상도 같이 비판하며 과학의 방법으로 사회, 경제, 정치체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죠.

 

미국 제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그의 그런 생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로, 과학을 애호하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정치가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주의를 정착시킨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인구가 100배 늘었는데 제퍼슨 같은 사람이 100명은 있어야 할 텐데 도무지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제퍼슨이 과학적 기치 아래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권리 장전,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통로가 되어 주는 표현의 자유 등 과학적 사고를 이어가야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 좋은 건 다 과학이냐 >



이제 세이건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제가 왜 제목을 저리 적었나를 한 번 써 보고자 합니다. 재미는 있었지만 동시에 꽤나 참아가며 읽었고, 유익하면서도 할 말이 많은 이 희한한 책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은 '위화감'이었습니다. 특히나 이 책 자체가 과학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전파하려는 것이다 보니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로서는 '전도당하는' 느낌을 너무 강하게 받았습니다. 교양 수준으로나마 과학을 접했고 관심도 많기에 공감이 많이 갔음에도 그런 감정이 든 것이죠.

 

위화감의 가장 큰 원인은 '과학'의 범위가 이리저리 넘실대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에서 온갖 좋은 것들을 설명할 때 과학이 꼭 들어갑니다. 쿵 산 족의 사냥법, 노예제 논쟁, 위에서 언급한 권리 장전, 표현의 자유 등 인류를 발전시킨 개념에는 일단 과학을 넣고 보았고, 철학으로 일평생 살아온 데카르트는 물리적 업적이 있다는 이유로 이 책에서 졸지에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은 이유는 ‘과학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초능력 사냥꾼 제임스 랜디가 초능력의 허구를 밝혀낸 것도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반증 가능성'을 통해 미신을 타파하고 인류를 발전시켰다고 하면서 말이죠.

 

사실 책에서 쓰는 과학의 정의가 모호한 건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언어가 아닌 물질을 보는 사람이니 굳이 언어를 정확하게 쓰려 신경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을 정확히 쓰지 않으면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책의 논리를 따라가면 괴력난신(기이한 이야기나 설화, 미신 등)을 철저히 배격하는 유교적 사고방식도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두는 불교 역시 과학과 연결될 겁니다. 하지만 보통 이들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그저 합리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인정될 뿐입니다.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봐도 예시는 많습니다. 그가 유사과학과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활동했던 CSICOP에서도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제법 있었죠. 유명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도 있지만, 언어철학의 대가 놈 촘스키, 마술사이자 초능력 사냥꾼이었던 제임스 랜디도 그 단체 관련자긴 해도 칼 세이건은 이들의 모든 비판적 행위를 과학으로 묶어버립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저 회의적으로 접근한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CSICOP와 관련된 유명인들: (좌)철학자 촘스키 (중)마술사 랜디 (우)과학자 도킨스

 

 

위에서 썼듯이 과학자는 언어학자도, 철학자도 아니니 정확하게 말을 쓰는 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건 다 과학으로 넣고 나쁜 건 다 과학 밖으로 몰아내는 건 의도도 의도지만 세상의 다양성을 너무 얕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들더군요. 

 

 

 

< 그의 용도 차고 안에 있었다 >



하지만 단순히 말을 혼란스럽게 쓰는 정도가 가장 큰 문제였다면 아마 이 서평은 단순한 아전인수에 대한 불만제기 정도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중요한 명제가 '차고 안의 용'과 다를 바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인간 본성에 대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누구나 과학적 성향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일 텐데 정작 이 주장은 과학적 사고의 예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칼 세이건이 지칭하는 ‘과학적 성향’에 대한 증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그는 쿵 산 족의 사냥 방식이 이를 증명한다 했지만, 이 주장은 언어적 장치와 물질의 증명 방식이 교묘하게 뒤섞여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연구 방식은 같은 성질의 표본을 규명하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표본 하나로 일반화를 해도 논리적 오류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정말로 같다면). 그는 쿵 산 족이 어디서 과학을 배운 것이 아님에도 과학적 성향을 '발현'하였으니 모든 인간이 이를 타고났을 것이라 과학적 방식으로 일반화하였죠. 얼핏 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이 증명의 함정은 '성향'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성향은 보통 발현되지 않은 성질을 지칭하므로 물질적이건 정신적이건 사람이 인지할 수 없거든요. 따라서 이 성향이 있음을 인지할 수 있어야 증명이 완성될 것이고, 방법은 아래 세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1. 모든 인간이 과학적 성향을 발현한 사례를 보이거나(연역적 증명)

2. 인간 본성의 보편성을 담아 짜임새 있게 설명하거나(정신에 대한 논리적 증명)

3. 과학적 성향이 담긴 유전인자가 인간 공통으로 있음을 보여야 한다(물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

 

그러나 1은 인구수는 둘째치고 사람이 계속 새로 태어나고 바뀌는 이상 증명할 수 없는 방식임이 명백하고 2는 인간 본성도 제대로 규정 못 하는 마당에 표본 하나로 증명이 어려운 게 매한가지며 3 역시 드러난 바가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그게 없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있다는 증거 역시 될 수 없겠죠. 어떤 식으로 봐도 '누구나 과학적 성향이 깊게 자리고 있다'는 명제 자체가 증명 불가능한 차고 안의 용인 겁니다.

딴 건 다 물질주의로 보면서 왜 과학적 성향만 마음속에 둘까?

 

 

 

 

< 땅을 디디는 한 있어야 하는 그것은 과학 >

 

비록 책 자체는 '과학적이지' 못하나, 과학의 중요성을 열변하고 미신을 비판하는 그의 자세가 마냥 잘못되었다고 비난만 받을 감인가 생각해 보면 그건 애매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가치관 또한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중에 그가 중심으로 두는 개방성과 비판을 열어두는 모습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미신을 이용한 악의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지침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식에서 윤리나 법처럼 과학이 들어가지 못 하는 영역이 있음에도, 이 책은 오로지 과학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비논리적인 방식으로요. 제가 서평 제목을 '유용한 과학 성경'이라고 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어차피 사람들이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살기에 인간의 지식체계는 너무 방대해졌다고는 생각합니다. 얻을 수 있는 지식에 한계가 있다면 도덕 다음으로 얻을 가치가 큰 지식 중 하나가 바로 과학이기에 이 책은 발간된 지 20년이 되었음에도 과학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책으로서 그 가치를 발휘하지 않을까 싶군요.

 

 

 

 

사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때에 비하면 사람들의 생각이 훨씬 많이 발전하였고 초전도체, 기후변화 등 과학적 관심도 대단히 증가했습니다. 그 동안 과학도 많은 발전을 거듭했을 것이기에 이 책을 두고 뒤늦은 비판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당연한 생각을 반복해서 적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 적고 마음 속에만 두기에는 너무 답답하여 한 글자 적어내려가 보았네요.

 

 읽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책을 참고하는 데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님의 서명
내가 흔들리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된다.
16
Comments
2023-08-07 21:21:03

 자세한 소개 감사합니다. 소개하신 글 후반부를 읽어보니 어쩌면 이 책이 진짜 의미하는건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 보다 맹신의 위험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WR
2023-08-07 21:22:35

사실 칼 세이건은 말씀대로 맹신의 위험성을 강조한 게 맞습니다. 그걸 과학으로 다 퉁쳐서 그렇지...

2023-08-07 21:23:26

추천 감사드립니다^^. 

요즘은 과학적 사고를 맹신하는 것이 위험한지를 말하는 콘텐츠가 많네요^^.  

WR
2023-08-07 21:26:55
전 물질의 범위 내에서는 과학이 맞다 생각하지만... 물질의 범위가 아닌 것도 인간 세상을 아직 지배하고 있죠. 그것도 있고, 학문의 월권(예 - 경제학이 윤리를 대체하려는 시도)을 경계하는 차원이기도 합니다.
2
Updated at 2023-08-07 23:31:59

정성스러운 서평 잘 읽었습니다. 남에게 자신이 새롭게 접한 내용을 전달하려면 이 정도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어야죠. 속 빈 강정같은 인상주의적 감상 말고 이런 글들이 프차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해서 저도 이런 좋은 글에 보답하고자 꼼꼼하게 이 글이 제기하는 의문에 대해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하고 이 글에서 보이는 오류에 대해서도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좋은 것은 다 과학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발달 인지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과학은 좋은 사고 방식을 세련되게 양식화해서 가다듬은 최선의 사고방식이다"라는 주장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좋은' 벙법론은 모두 과학적 방법론과 원칙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와 인지의 발달에 대해 연구하는 하버드의 심리학자 폴 블룸은 광범위한 양적, 지역적 조사를 통해서 아동들에게서 전통사회의 민속적 믿음 체계가 이미 학습으로 습득하기 전 부터 내장된 생득적 기제라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들을 내놓았습니다. 이를테면 문화권에 상관 없어 전 세계의 모든 아이들은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마음-몸, 선-악의 이분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논리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동일율, 배중율, 모순율, 인과율등의 기본적 논리 규칙과 수 보존, 마음이론 등의 살아가면서 부닥칠 상왕에 대한 판단 기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과학적  사고'의 맹아 뿐 아니라 '미신적 사고'의 맹아 또한 이미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장되어있다고 가정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폴 블룸과 연구 주제를 일부 공유하는 아동발달 연구자인 앨리슨 고프닉과  앤드류 멜초프 등(이들은 서로 연구를 인용하고 우호적으로 보강합니다.)은 인간 아기들이 새상을 경험하고 학습하면서 경험에서 추출할 수 있는 공통의 패턴들을 파악해서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을 바탕으로 잠정적 이론을 세운 다음, 그것을 다른 경험에 적용하여 일반화시키고, 그 가정에 반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이론을 수정하는 활동을 자연스럽게 해나간다는 것을 역시 방대한 양적 연구를 통해서 입증했습니다. 이런 연구들은 현재에도 특별한 반론 없이 게속 재현되고 있으니 인간에게 이렇게 경험을 일반화하는 귀납과 이론을 적용하여 사실을 예측하는 연역적 사고가 생득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객관성을 담보한 주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론 이외의 다른 적절한 벙법론이 없으며 이러한 방법론이 과학적 방법론과 구체적 행위양식을 상당한정도로 공유함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히 좋은 방법론은 모두 과학이다 라는 말도 성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의 훈련된 과학자들이나 과학에 익숙한 철학자들은 이 정도의 입증이 설득력을 가진 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나 파블로프의 자명종님이 제시한 '증명'의 조건을 제시하신 것으로 봐서 과학의 설득력에 대한 과학철학적 지식을 특별히 쌓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최대한 쉽게 설명드려보겠습니다.

 파블로프의 자명종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득적 과학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1. 모든 인간이 과학적 성향을 발현한 사례를 보이거나(연역적 증명)

2. 인간 본성의 보편성을 담아 짜임새 있게 설명하거나(정신에 대한 논리적 증명)

3. 과학적 성향이 담긴 유전인자가 인간 공통으로 있음을 보여야 한다(물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

 

 먼저 1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인간이 과학적 성향을 발현한 사례를 보이거나(연역적 증명)"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이런 실수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연역적 증명이 아닙니다. 연역적 증명은 아시겠지만 보편적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합당한 방법을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입니다. 모든 인간이 과학적 성향을 발현한 사례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어떤 정의를 참이라고 가정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사실들을 조사하여 검증이나 입증을 통해 일정한 정도의 설득력을 확보하는 귀납적 종합입니다. 여기서 검증은 먼저 충분하지만 '유한'한 사례를 조사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일반적인 과학적 실험이나 조사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입니다. 유한한 사례들에 대해서만 검증하기에 엄격한 한계 내에서 그러한 조사를 통해 주장이나 결론을 '검증' 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한한 표본에 대한 조사가 귀납적 일반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원칙적으로 부족하므로 우리는 세상의 일반적인 경우에 통용되는 귀납적 주장을 결코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한한 검증을 통과한 과학적 귀납이 약속된 기준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집적 되었을 때 우리는 그러한 방대한 조사들이 귀납적 일반화 주장을 충분히 '입증'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배우셨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이야기하자면 이것이 바로 과학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검증주의와 입증주의의 정의입니다. 당연히 인간이 가진 방법론의 한계 내에서는 이것이 최선입니다. 과학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경험적 귀납명제를 발견하는 것을 추구하며, 증명은 이미 참으로 가정되는 명제에서 오직 논리를 통해서만 연역할 수 있기에 귀학적 명제를 발견하고 설득하는데 쓸 수있는 방법론이 아닙니다. 때문에 자명종님의 주장을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고친다면 '인간의 과학적 성향에 대한 증명' 이 아니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수정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를 진행할 수 없고, 아마 이정도 설명이면 충분히 납득이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블룸과 고프닉 등의 일련의 연구들은 이러한 입증을 설득력 있게 해왔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2번과 3번의 조건은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요구입니다. 2번의 경우 논리적으로 인간의 과학적 성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논리학이나 철학의 영역이지 위에서 말씀드린 과학적 방법론에 비추어봤을 때 과학적 범주의 연구가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어떤 성향을 '발견' 하는 일이나 '입증'하는 일은 그 지식의 종합명제적 특징에서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범주의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3번은 그러한 성향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밝혀져야 증명(사실은 입증)된 다고 말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까지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지만 그보다 간접적인 방법, 즉 충분한 비율이나 수의 입증사례를 행동 관찰을 통해 발견해서 입증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주장의 입증이 가능합니다. 이는 마치 실용 열역학 이론을 발견하기 위해서, 입자 하나하나의 거동을 모두 살펴볼 필요 없이 통계적 방법론만으로도 실용적인 주장이나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때문에 안타깝지만 파블로프의 자명종님께서 세이건의 주장에 설득되기 위해 제시한 조건들믄 모두 적잘한 방법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논의했다고 생각합니다. 고프닉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인간 영유아가 인간이 수립한 과학적 방법론과 동일한 행동양식이 인간의 본성에 내장된 행동기전이라는 것을 입증했으며, 세이건이 인간에게 과학적 성향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그렇게 무리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사실을 충분히 임증된 설득력있는 주장)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촘스키나 랜디가 과학자가 아니라는 것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애초에 과학은 합리적인 인간의 지적활동을 가장 고도로 세련화한 양식이고 촘스키나 랜디가 자연과학자는 아닐지언정 여전히 과학적인 방법론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던 객관성을 확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과학을 제외한 다른 학술적 활동에 대해서도 현대에는 모조리 인문과학이나 사화과학 등의 라벨을 붙이는 것이고요. 

다만 세이건은 모두가 알듯이 계몽적 과학 전도사를 자처하고 활동했습니다. 인간에게 과학적 본성 뿐 아니라 미신적이거나 맹목적 본성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과학적 본성을 더 두드러지게 역설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는 입장이겠죠. 제가 보기에 자명종님께서 책의 비판을 위해 충분히 내용을 설명하셨다면 그 내용에서 이 책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들을만한 어떤 근거도 없어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글의 장성과 내용에 대한 좋은 소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비판에 치중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파블로프의 자명종 님이 어떤 글을 쓰시는 분인지 잘 알고 자명종님 또 한 저의 선의를 충분히 이해하시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쓸데없는 걱정 하지 않고 반론 기대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붙임: 또한 안타깝게도 이 글의 제목인 "반증불가능"성의 혐의도 저는 소개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조사를 통해서건 유의미한 숫자의 정상 인간 아기(굳이 정상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발달상의 결함이 있는 경우 위에서 언급한 생득적 기제들이 제대로 기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들에게서 블룸과 고프닉이 발견한 생득적 특질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 충분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기만 하면 됩니다. 어째서 "반증불가능"이라는 엄격하게 정의된 용어를 근거 없이 사용하셨는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WR
Updated at 2023-08-08 00:05:00
보잘것 없는 서평이었는데 우선 대단히 정성스레 답을 남겨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쳐줘도 공부 열심히 한 학사 수준밖에 안 된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수준높은 의견을 주셔서 기쁘면서도 당황했습니다.

일단 지적하신 부분 중 명백한 곳부터 써 봅니다.

1. 모든 개체를 증명하는 건 귀납쪽인데, 연역으로 쓰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철학공부를 하지 않는 환경이라서 까먹었다는 핑계가 있긴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놓쳤네요. 이건 명백한 제 실수입니다.
2. 과학철학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기에 적용하는 부분에서 학문적 지식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부분은 제가 분명하게 맞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이 글이 의식의 흐름대로 쓴 건 아닙니다. 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데 나흘 정도 걸렸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적을까 말까 하다가 지운 내용도 상당히 많았고, 서평의 목표가 보통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읽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생각한 부분도 뭉텅이로 날려버렸습니다.

하여 정성스레 써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바로 답변을 드리지는 못 할 듯합니다. 지웠던 글들과 논리구조, 세웠던 전제조건들을 다시 정리하고 말씀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시간을 조금 쓰고 답을 달겠습니다.

정성스러운 덧,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1
2023-08-08 00:10:44

넵 넨 상에서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파블로프의 자명종님(앞으로는 그냥 자명종님이라고 부를게요.^^)의 서평 쓰는 솜씨와 정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저 반론이 제가 모두 맞다고 확신하고 드린 것이 아니고 설명과 반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작성해주세요. 감사합니다. 

WR
1
Updated at 2023-08-09 03:29:10

개인적으로 인문학적 지식은 혼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잘 쌓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성스레 달아주신 덧글을 본 뒤,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책을 다시 들여다보고 머릿속을 한 번 더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에 근거가 하나 더 달리게 되었네요. 우선 그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 이해한 책 내용의 핵심

 

서평을 쓸 때 근거가 된 것은 순수히 책의 내용만이었습니다. 칼 세이건이 이 책에서 과학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는 부분은 1장 말미와 2장(과학과 희망)으로, 1장에서는 과학과 유사과학의 결정적 차이인 '반증 가능성'을 언급하고, 2장에서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특징으로 다음을 제시합니다. 

 

1. 새로운 생각에 개방적임

2. 오류 수정장치가 내장되어 있음

3.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을 인정하지 않음

4.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책에 의하면 유사과학과 과학의 차이가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에 따른 결과로, 그렇기에 반증 가능성은 이 네 가지를 내포하고 있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머지는 이를 '기준'으로 과학/사회/역사를 오가며 하는 그의 주관 이야기입니다.

 

 

- '좋은 건 다 과학이냐' 단락에 대하여

 

이 부분은 제가 쓸 당시 머릿속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분야의 사고방식까지 마음대로 가져다 쓴다는 취지로 쓰여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rockid님께서 댓글과 같이 과학적 사고방식의 포괄 가능성에 대해 논하시는 반론이 달리게 했네요.

 

사실 비판하고자 한 부분은 칼 세이건이 과학이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것에 취해서 사회/역사와 같은 다른 부분을 과학적 사고라는 잣대만 가지고 함부로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오만의 가장 좋은 예시를 책을 다시 살펴보니 민주주의가 있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가 과학적 사고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여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치체제로 치는데, 실상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가 이상으로 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미국식 자유고, 그래서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그가 언급하는 부분을 보면 무지가 넘쳐 흐릅니다.

 

592쪽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과학과 민주주의 모두 실험을 통한 판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어떤 것이 실험에 해당하는지부터가 의문이고, 설사 번역의 오류 가능성을 생각해서 최대한 넓게 생각해서 선거를 실험으로 비유했다고 쳐도 의지의 총체에 대한 책임과 물질 탐구의 결과물은 제가 보기엔 절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습니다. 

 

미국 권리 장전에 대한 그의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권리 장전이 과학적 사고처럼 사회에 거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미국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 역시 과학에 매몰돼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못한 발언일 뿐입니다. 똑같이 민주주의가 잘 정착한 나라라도 각 국가마다 용인하는 자유의 범위가 다르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미국식 자유와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가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는데, 왜 가장 폭압적인 제3제국으로 바뀌었는가에 대한 성찰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더군요.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모르는 것에 대해 확언하는 것부터 접근해서 비판하는 게 더 적절했을 텐데,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서 그랬는지 정리하는 방향이 잘못되었고 두 비판 단락이 연속하여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했네요.

 

 

다만 말씀하신 과학적 성향의 생득 문제는 아래 반증가능성과 연결되는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니 먼저 생각해보려 합니다.

 

 

- 과학적 성향의 생득적 기제 가능성에 대하여


일단 블룸의 생득적 요소가 있다는 연구결과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게 생득적 요소에 기존 관념을 끼워맞춘 것이던, 실제로 해당 관념이 유전에 각인되어 있던 생득적 요소 자체가 있음은 여러 유전 형질이나 유전병, 일란성 쌍둥이의 성격일치 등 다방면으로 확인되기 때문이죠(다만 저는 끼워맞추었다 생각하기 때문에 선험에 대한 근거로 지지하는 건 경계합니다. 이 부분은 개인 생각 정도로 넘어가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고프닉과 멜초프의 건에서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제부터 잘못된 연구를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블룸의 연구도 그렇지만 후천적 요소의 영향이 가장 적다고 추정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건 아마 생득적 기제가 바로 발현된다는 전제를 깔아두고 있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생득적 기제는 시간이 지나거나 나이가 들어서야 발현할 수도 있고, 이는 어렸을 때 발견된 성향이 생득적 기제가 발현되지 않은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내포합니다.


생물이 유전자 지도에 의해 구성됨이 밝혀진 만큼 인간의 생득적 요소는 정신이나 육체 중 어느 쪽으로 발현되어도 유전적 요소와 관련이 있음이 명백하고, 연구도 이를 증명합니다. 이를테면 근심이 많은 성격은 17번 염색체의 세로토닌 운반체(5-HTT) 유전자를 억제하는 DNA의 길이가 짧은 것이 원인이 됩니다(1996년 독일 뷔르부르크 레슈 교수팀 연구). 따라서 고프닉과 멜초프의 연구를 부정하는 데는 (육체와 정신 상관없이) 연구 대상기간을 지나 발현되는 생득적 요소를 보임으로써 충분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생각보다 흔합니다.


탈모는 빠르면 10대, 늦으면 30대에 오는 등 사람에 따라 시기가 천차만별이지만 유전적 탈모는 선천적 형질이며 생득적임에도 유년기에는 신체적 현상을 통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헌팅턴 무도병도 30~40세 사이에 발현하는 유전병으로, 역시 생득적임에도 유년기에 행동이나 성향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득적 형질의 유무를 확인하는 방법은 유전자를 직접 보거나 조상을 추측해서 형질을 추론하는 것 뿐인데, 결국 둘 다 유전 형질의 유무를 직접 확인한다는 점에서 같다 봐야 할 겁니다.

 

과학적 성향에 대한 연구결과를 위의 반례에 대입하면 고프닉과 멜초프가 아무리 과학적 성향이 유년기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연구 결과를 보인다 해도 유년기의 행동이 무조건 생득적인 게 아닌 이상 그 연구에 대한 진실은 유전 형질을 직접 확인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게 됩니다.

 

다만 제가 이 연구에 대한 통제변인, 실험방법 등 자세한 사항을 모르기 때문에 이 연구를 자세하게 알게 된다면 이 의견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봐야 할 듯합니다.

 

 

- 과학적 성향의 반증 불가능성에 대하여

 

첫 번째는 귀납추론의 성격상 무리한 명제임을 rockid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여 더 논의할 문제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정의를 내려 명제화해야 반증 가능성이 생기고, 만약 설득력 있는 명제를 구성했는데 옳다고 판단되면 참으로 보아야 하는 형식논리를 빌렸는데 말씀을 보니 과학을 철학으로 강제로 끌어당기는 것이니 적절한 태도가 아니라고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명제는 위에서 썼듯이 절대 과한 요구가 아닙니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정신과 직접 연결됨이 명확히 증명된 유전 형질 수준의 엄밀성이 아니면 입증이 불가능하다 보았기에 제 판단에서는 최소한의 증명수단을 요구한 것 뿐입니다. 아직은 과학의 범위가 덜 미쳐서 반증가능성에 위배되나, 언젠가는 반드시 이 방식으로 그의 주장의 참거짓 여부가 확인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칼 세이건이 과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쓴 것에 대하여

 

다만 1995년 당시에 칼 세이건이 이런 생각을 가정하면서 이 책을 썼을 리 만무합니다. 폴 블룸, 고프닉과 멜초프 모두 세이건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블룸은 90년대부터, 고프닉과 멜초프의 관련 이론은 2006년에 발표한 걸로 보이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과학자이긴 했어도 천문학자였습니다. 과학적 사고에 대해서야 누구보다 익숙하고 정확했겠지만 생물학이나 심리학 자체에 그 정도의 생각을 칼 세이건이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그의 주장이 어떤 지식을 기반으로 썼느냐를 추론했을 때 제게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민주주의에 대해 쓰는 것처럼 과학이 이룬 업적을 빌려 모든 것을 과학 중심적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과학이 이렇게 강하게 자리잡고 있으니 당연히 과학적 성향도 있을 것이라는 방식으로 나이브하게 생각했겠죠. 그렇게 사고했다면 당연하다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결국 반증가능성을 피해가니 이중잣대가 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서평 말미에 20년이 다 돼가는 책에 이렇게 까는 게 맞나에 대해 적은 이유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지식수준이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 지식인을 이렇게 강하게 비판하는 게 사실 공평함에는 많이 벗어날 테니까요.

 

 

 

아무 생각없이 쓴 서평이었는데, 주신 덧글 덕에 생각을 정리하고 머릿속을 체계화할 수 있었습니다. 귀한 댓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1
Updated at 2023-08-09 17:03:25

잘 읽었습니다. 아직도 의견의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명종님의 훌륭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의 재반론은 집에 가는대로 다시 한 번 자명종님의 반론을 살핀 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빠르면 오늘 밤 자정 이전,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한 재반론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23-08-09 23:43:23

 

 말씀드린대로 자명종님의 반론에 대해 여전히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남아 있어 다시 재반론하겠습니다가능하다면 이런 반박과 재반박이 서로 아무런 의문이 남지 않게 되기 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전문 포럼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 이런 논쟁이 만족스럽게 마무리되는 것이 가능할지 가능하면 끝까지 실험해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1.
먼저 정리해주신 세이건의 과학에 대한 내용은 포퍼 이후 과학자들이 조금식 발전시켜온광범위하게 합의된 과학에 대한 정의입니다다만 아시겠지만 이후 쿤의 패러다임 교체 이론이 입증한 과학의 모습과 차이가 있죠그러나 포퍼의 규정은 아직도 과학자 사회에서는 중요한 윤리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이런 점에 대해서 그들은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따라서 쿤이 말한 것이 과학의 실상을 이야기한 과학사회학적 관찰이라고 한다면포퍼의 이론은 지켜야할 규범에 주목한 이론적 당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개인적으로는 인간사회에서 당위와 현실이 여러 이유로 충돌하지만 결국 현실이 당위를 이기기도때때로 당위가 현실을 극복하기도 하는 것처럼 과학도 그러한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이는 패러다임 교체의 단초가 결국 패러다임의 이론과 실제 관측의 차이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권위에 저항한 과학자들의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포퍼가 확립하고 세이건이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준 저 과학의 이미지의 정당성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

인용하신 과학과 민주주의 모두 실험을 통한 판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라는 세이건의 주장은 위에서 정리하신 세이건의 항목 중, 1. 2, 합리적 규칙을 준수하는 토론을 통한 이론에 대한 개방성, 3, 권위주의에 대한 부정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다만 과학적 실상이 그렇듯이민주주의의 실상도 이상이나 당위와 무척 다른 모습이죠그러나 이 역시 당위와 규범이 민주주의라는 이상이라는 목표에 필수적 지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민주주의 제도에 의해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정책을 각각 예측하여 토론하고 합의하고 실험합니다이후 평가하고 수정하면서 위의 사이클을 반복하죠물론 실제 민주주의가 이런 식으로 무리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아닙니다발전 정도에 따라 여전히 실상은 귄위주의적이기도 하고좀더 나은 경우에도 이상적인 결론의 도출이 아니라 협상에 의한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민주주의가 신비적인 기원을 가지는 기존의 정치적 귄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사실입니다이런 당위가 현실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해도 애초에 의문을 공표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권위주의 제정일치나 절대왕정에 비해 어떤 가능성이 열리고 그 가능성이 점차로 확대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사적 사실입니다물론 그 경향이 꾸준하지도 때로는 후퇴하기도 했다고 해도 말이죠미국의 권리 장전 뿐 아니라영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합의 선언들프랑스의 인권선언공산주의의 끔직한 실험까지새로운 가설을 새우고 그 가설에 합당한 정치체제를 실험해왔다는 점에서 과학이 말하는 포퍼식 과학의 정의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그리고 성공한 것들은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고실패한 것들은 점진적으로 패기하게 된 것도요물론 이런 역사적 발전을 진짜 그렇게 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합니다 이러한 당위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훨씬 복잡하고선형적으로 진행되지도 않습니다그러나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상적 민주주의가 내장해야할 당위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정치적 이상은 당시에도 지금도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에게 독일의 정치사상, 근대적 개인의 귄리를 가장 잘 구현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문제는 그것이 현실에서 잘 기능하지 못했던 것이죠그런 이상을 구현하기에는 당시의 국내의 정치상황도 외교적 상황도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경제적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독일 국민들에게는 현실을 비관하는 냉소주의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맹동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습니다.(후자의 경우는 태평양전쟁 직전제국주의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이런 상황에서 바이바르 공화국이 체현한 근대적 개인개념에 기초한 정치적 이상이 의욕적으로 추구되기도현상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죠그래서 제3공화국이라는 반동이자 시대의 요구가 추동된 것입니다이는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어떤 가설이 수립되고 가설을 이론으로 정립하기 위한 실험의 실행은 이런 저런 이유로 방해받고 실패하기 쉽습니다아직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밀도가 확보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예산이 부족할 수도 있죠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애초에 생각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았던 자유가 일부나마 주어진 것입니다이전에는 그 누구도 신이나 황제가 말한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하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비록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야겠지만 꼭 모두 그런 것만도 아니었습니다우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독일의 과학문화예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괴팅겐과 베를린은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함께 양자역학이라는기존 뉴턴 역학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는 가장 도전적이고 복잡하며 섬세한 과학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3제국의 비과학적 권위주의가 태동하기 시작된 이후부터는 과학보다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중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양자역학핵물리학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유태인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이 추방되거나 권리를 읽었습니다이것을 보면 바이마르 공화국은 과학과 비슷한 민주주의 체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과학과 달리 실패하지 않았느냐?“라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합니다자명종님이 세이건의 과학과 민주주의의 유사성에 대한 주장에 반론을 펴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를 예로 드신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죠그러나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것처럼과학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많이 실패합니다그 예로 갈릴레이 시절부터 수 없이 시도되었던 빛의 속도 측정 실험이 있습니다이것은 훗날 뢰머의 목성 위성의 공전을 이용한 실험계획이 잡히기 전까지대략적인 속도를 측정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이전의 순진한 실험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그러나 결국 측정에 성공했고 과학은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실험주체와 환경적 한계 속에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성꽁하는 것입니다따라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를 근거로 세이건이 주장한 과학과 민주주의(자명종님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식 자유주의)의 유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과학과 민주주의의 이상과 당위그리고 현실적 제약조건을 구별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우기, 소개해주신 세이건의 주장은 무척 제한적입니다. 이상적 과학과 민주주의 작동에는 서로 비슷한 구석이 있다."정도가 세이건이 주장하려는 바고, 아마도 이러한 것을 근거로 "과학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정도의 함의를 가질 것입니다. 제가 셍각하기에는 민주주의가 전적으로 과학의 원리를 따른다든가, 현실적 민주주의가 이상적 과학처럼 무결하게 돌아간다든가 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명종님의 반론은 세이건이 마치 이런 주장을 했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또 “ 의지의 총체에 대한 책임과 물질 탐구의 결과물은 제가 보기엔 절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고 하셨지만 세이건 역시 같다고 주장한 것이 아닐 겁니다그 두 과정 사이의 핵심적 유사성을 지적한 것일 뿐이죠세이건의 이러한 전략은 일종의 유비추론입니다유비추론은 아시다시피 대상간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을 구성하는 구조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방식입니다그러나 이런 이유로 유비추론은 논리학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추론방식 중 하나죠누구나 그 유사성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그래서 자명종님의 주장이 일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단 그 주장이 객관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단순히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는 것 외에 세이건의 유비추론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입증해야 합니다자명종님의 주장에는 아직 이러한 입증이 없습니다그리고 세이건의 유비추론에 근거한 주장에 자명종님의 마음에 들건 말건일단 구체적인 추론 근거(작동방식의 구체적 유사성)를 제시했으므로 이제 그 주장에 대한 반론을 입증하기 위한 책임은 자명종님께 있다는 것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따라서 자명종님의 민주주의와 과학의 공통점혹은 유사성에 대한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아직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 토론에서의 주장은 실패했습니다그러나 여전히 자명종님이 이 주정에 대한 구체적 입증 근거를 마련하고 다시 반론의 구조를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여전히 열린 마음으로 기대하겠습니다.

3.
자명종님은 다음으로 고프닉과 멜초프의 실험이생득적 기제가 다른 후천적 요소의 영향 없이 발현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디자인한 실험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실험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셨습니다저는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말씀하신 바와 같이 인간의 생득적 기제는 나이가 들어서 발현되는 경우도 많습니다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죠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되는 경우가 있겠죠이 경우이 사람이 모험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아니면 정말로 어떤 유전적 소인의 영향 없이 사고를 당해서 그런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이런 경우 우리는 일군의 표본에 모험적 경향이라는 생득적 기제가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이러한 불구라는 특징을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고프닉 등의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고프닉이 인간의 과학적 사고 경향의 생득적 기제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가 생득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는 생애사 후기의 특징을 입증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우리는 그러한 위험성을 제거하고 확실한 근거를 수립하기 위해 확실한 것만을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고프닉이 과학의 특징에서 보이는 인간의 귀납과 연역적 판단과 행동 경향은 생득적이다혹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과학자나정치적 권위주의자혹은 종교인의 행동을 대상으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이들의 행동은 수많은 경험을 거쳐 원래 가지고 있던 생득적 경향들이 서로 다른 강도와 빈도를 가진 경험의 영향으로 강화되거나 약화되거나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변인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그러니 처음부터 근거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지극히 온당하고 합리적인 선택입니다고프닉 등은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과학적 사고의 경향을 생득적으로 지니고 태어난다라는 주장을 확립하고 싶었던 것이지, ”인간에게는 후천적으로 발현되는 과학적/비과학적 생득적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주장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물론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고나중에 잘 고안된 실험이나 조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도 있겠죠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프닉의 주장이 반박되는 것은 아닙니다고프닉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전에 적었다시피 정상적인 인간 영유아에게 귀납추론 행동 패턴이 전혀 발견디지 않는 충분한 수의 양적 사례를 발견하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저는 자명종님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고프닉의 주장에 대한 부당한 연역추론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좀 더 비판하자면자명종님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신 근심 많은 성격애 대한 레슈의 연구는 시간이 지나 발현되는 생득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지 조기 발현되는 생득적 요소만으로 인간에게 어떤 성향이 있다는 주장에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또 고프닉의 주장의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하지도 못합니다도대체 어떻게 생애사 후반에 발현되는 생득적 요소가 있다는 주장이 태어나면서 발현되는 생득적 기제가 있다는 것을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또 고프닉의 실험은 대체로 유년기가 아닌 생후 단 며칠에서 몇 개월 사이의 영유아기를 대상으로 합니다때문에 그 실험들이 긴 유아기를 통해 획득한 경험에 의한 오염을 차단합니다다시 말하지만 고프닉은 긴 생애사 전반에 나타나는 생득기제에 대한 어떤 부정적 주장도 한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제시하신 사례를 근거로 고프닉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4.

자명종님은 이렇게 위에서 부당하게 연역된 고프닉에 대한 오해와 과학에 대한 부정확한(이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미지를 토대로 과학적 경향에 대한 생득적 기제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DNA상의 변이의 좌위 확인등의 구체적 유전학적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셨지만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저는 아마도 자명종님이 과학에서 입증의 확실성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반례를 들겠습니다하나는 바로 그 유전학의 발전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인간이 DNA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의 일이며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발견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이후 분자유전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우리는 어떤 일부 유전형질에 대한 유전자의 DNA좌위에 대한 지식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러나 그런 더욱 확실한 입증 근거들을 갖추기 이전에도 우리는 멘델의 유전학에 근거한 수많은 추론들을 양적으로 충분한 실험과 조사를 통해 이론으로 확립해 나갔고유전자 검사 시대 이전에도 이러한 주장들을 충분한 과학적 사실들로 인정해오고 있습니다가장 간단하게 1980년대 발행되었던 생물 국정교과서에서도 유전질환의 생득적 성질이 기술되어있었습니다. 다만 모건 등의 연구들을 통한 염색체상의 생득적 유전형질의 상대적 거리 등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당연히 색맹다운 증후군 등의 유전질환에 대한 분자유전학적 지식이 없었습니다그러나 그 어떤 과학자도 그때가지 풍부하게 학립된 이 유전병들의 생득적 성질에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습니다물론 우리는 DNA상에서 그런 유전병들의 좌위를 확인하고 반복되는 현상의 출현을 관찰하는 것으로서 훨씬 더 강력한 확실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정도가지 가지 못한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과학자 사회에서 그러한 주장들이 지지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고프닉 등의 연구는 아직도 진행되는 연구로서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유전병 수준의 생득적 성질의 확실성이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아주 확실한 생득적 기제로 인정되는 현상들도 분자유전학 적 증거 없이도 굉장히 높은 신뢰성을 담보하기도 하며분자유전학적으로 유전자의 DNA좌위를 확인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침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유전자는 다면발현과 복합유전유전자 거리에 의한 상관성의 점증이라는변인을 통제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방법을 통해서 형질의 발현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때문에 어떤 유전좌위가 어떤 형질발현과 연관되어있다는 상당히 확실한 상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나중에 뒤집힐 가능성이 논리적으로는 존재합니다.(물론 과학자 사회에서 인정될만한 기준을 통과한 연구들에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반례는 진화론(다윈의 자연선택론)의 연구에 관한 것입니다진화론이아말로 모든 생명의 생득적 형질의 차등적 보존이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주장으로 다윈 시절부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현재까지 꾸준한 발전을 거쳐서 현재거의 진리에 준하는’(생물학 박사 지인의 표현입니다.) 지위를 획득한 이론입니다다윈의 자연선택설이 등장했던 시기만 해도 현대 핵물리학은 전혀 발전하지 못했던 시기임으로 태양의 내구연한에 대한 문제제기로 인해 자연선택설의 과학적 지위는 불안정한 측면이 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수많은 지질학적 증거생물상의 변이에 대한 증거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질학과 생물학에 조예가 있는 과학자들로서는 자연선택설을 부정하기는 힘들었습니다물론 중간에 수많은 억측과 오해가 있었지만 자연선택설은 가장 그 세가 미약했던 19세기말~20세기 초에도 무시하지 못할 이론이라는 것이 생물학계의 중론이었습니다이후 핵물리학의 발전멘델 유전학의 재발견등을 통해 물리적 한계가 해결되고 유전학과의 통합을 통해 신종합설이 탄생함으로서 다윈주의는 20시기 초중엽부터는 거의 반박불가능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그러나 아직 DNA의 발견과 그로부터 파생된 분자유전학적 분석의 발전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습니다그리고 분자유전학적 증거들이 넘쳐나자 자연선택론은 더욱 확실한 과학적 사실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에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근거한 과학적 주장들이 설득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셀 수 없이 많은 다윈이론에 기댄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적 추정들은 방법이 불확실한대로 과학적 주장의 지위를 획득했고그 가설이나 이론들은 다른 근거들을 통해서 더 보강되거나 폐기되기도 했습니다그리고 현재 분자유전학의 발전은 세밀한 부분에서 계통수를 조정하는 등의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예를 들어 현생 동아시아인의 원류를 기존에는 표현형질 특징에 대한 추론과 분석을 통해 아시아 북부 빙하기후에 적응한 고인류라고 생각했지만 현재 분자유전학적 증거들을 토대로동남아시아에서 북상했다가 중국내륙에서 정착한 후 다시 주로 동북방향으로 북상했다가 각지로 퍼졌다고 추정합니다그러나 그런 세밀한 교정이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 다른 수많은 고인류가 있었다는 커다란 담론을 뒤집지는 못합니다이렇게 과학적 주장들은 그 스케일과 세밀함 측면에서 방법론의 발달에 영향을 받지만그렇다고 해서 그 방법론적 발달이 비교적 열악했던 시기의 이론들도 그 주장들이 입증근거에 합당할 정도로 제한적이고 조심스러울 경우이후의 방법론의 발전과 상관없이 여전히 지위를 유지합니다.

 

 

자 이제 고프닉의 주장이 어느 정도의 세밀한 주장을 하고어느 정도의 과학적 합리성을 담보한 주장인지 살펴봐야겠죠고프닉의 주장은 영유아들의 행동 패턴에 대한 실험과 관찰 결과인간에게 과학적 탐구양식과 유사한, 행동의 경향이 있다는 것이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프닉의 주장에서 "인간에게 어렸을 때부터 확인되는 생득적 과학적 탐구경향이 있다"라는 명제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추론언 엄격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과학적 행동경향이 영유아기에만 나타나고 발달하면서 마치 곤충의 변태처럼, 완전히 소멸했다가 학습을 통해 재획득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이고 가설을 위한 가정이 더 많이 필요한 가설은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배제해도 무리가 없고, 위에서의 추론은 상당히 정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프닉은 이 주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주장을 강화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해도 오염가능성이 있는비교적 생애주기 후반의 행동패턴에 대한 분석을 제거했습니다어떤 과학적 주장에 대한 입증은 이론 확립의 충분 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을 확립하고 보강하는 것으로 충분하므로 굳이 확실하지 않지만 가능한 근거들을 억지로 끼워 넣어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고프닉은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언어획득 이전에 나타나는 영유아기의 특질들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분자유전학적 증거보다 상대적으로 덜 강력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입증의 요건은 충족되는 것입니다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바로 입증의 충분조건입니다입증은 주장에 합치하는 증거들이 하나 이상 발견되고 반례가 발견되지 않으면 조건을 충족합니다고프닉은 비록 인간의 모든 과학적 행동경향이 생득적이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지만(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인간에서 최소한 생득적인 과학적 행동패턴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그리고 인지과학 교과서에서 발달 분야를 다루는 쳅터에 수록될 정도의 과학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습니다자명종님이 이정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개인의 주관에 의한 자유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런 입장이 과학이라는 분야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태도는 아닙니다.  여기서 기대되는 과학적 태도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여러 사실들을 양과 질에서 확률적으로 판단하고 딱 그 정도의 신뢰성을 주는 것입니다. 과학에서 어던 이론을 바라보는 방식은 all or nothing이 아닙니다. 이는 만약 고프닉의 이론이 일부 수정되는 일이 생긴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충분한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주장이라면 우리는 다른 반레례가 없는 한 정도껏 인정해야 하고 보강거나 반증례가 재시될때마다 신뢰의 확률을 재조정 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장점과 한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그것이 분자유전학이 없는 시절에도 우리가 생명과학이나 인지과학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런 일은 여전히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인지과학자들은 분자유전학적 근거나 심지어 신경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함에도 여전히 가설을 제시하고 입증할만한 행동분석을 위한 실험디자인과 통계적 확실성만으로 인지과학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물론 이런 경향에 대해 신경과학계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이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입니다. 최소한 과학적 정당성은 담보됩니다. 유명한 대중과학 저술가이기도 한 스티븐 핑커도 신경과학이나 분자유전학을 잘 알지만자신의 연구방법론에서는 이것을 배제합니다이것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사려 깊게 제시된 제한적인 주장들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도킨스는 진화론 연구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물론 DNA증거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화석학적 증거만으로 진화론을 입증하기는 충분하다그러나 우리는 이제 더욱 확실한 다른 방법론을 획득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서 자명종님께서 말씀하신 과학적 성향이 담긴 유전인자가 인간 공통으로 있음을 보여야 한다라는 명제의 옹호에 대한 사례적논리적 반박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5.

 

 

물론 칼 세이건이 블룸과 고프닉의 주장을 알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닙니다이것은 확실합니다저는 앞에서 말했듯이 블룸 등의 주장이 세이건의 주장을 보강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이 글을 쓴 것이지세이건의 주장이 그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세이건의 성향에 대해서 말하자면자명종님의 주장이 일리가 있습니다이 책을 제외하고 세이건의 다른 책들을 보면세이건이 자신의 주전공인 천문학 분야에서 얼마나 엄밀한 연구를 했는가와 상관 없이대중서적을 집필할 때는 상당히 무리한 주장을 많이 하고 논리적으로도 엄밀하지 않습니다그는 별 설득력 있는 근거 없이 진화론에서 집단선택론을 옹호하기도 하기도 하고인간의 지능발달에 대한 무리한 주장을 펴기도 하는 등전반적으로 자명종님이 이 책을 읽고 세이건에 대해서 받은 인상을 더 확고하게 할만한 모습을 여러 번 보였습니다때문에 자명종님이 세이건의 다른 책들도 읽고 더 설득력있는 입증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세이건의 문제를 지적했다면 저는 두말 않고 동의하고 지지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에 대한 비판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세이건은 블룸이나 고프닉처럼 세밀한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나름대로 전통사회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이런 주장의 근거를 세웠습니다저라면 (이 경향성에 대한 세이건의 주장에 한해서) 세이건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세이건이 제시한 입증 근거는 합리적이지 않았으므로(과학을 접하지 못한 쿵산족의 자연발생적 일련의 행위체계가 과학의 체계과 비슷한 점은 반대사례를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으므로세이건의 주장에 입증근거의 허약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다른 근거들로 세이건의 의견에 동조했을 것이고 제가 자명종님의 서평을 접하고 한 행동이 정확이 이러한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자명종님이 그 반벅 근거로 제시한 3가지의 요건은 제가 두 번에 걸쳐 논박한 바와 같이 모두 합리적이지 않고 과학계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세이건이 이러한 에세이에서 주장한 것이 어느 정도의 강도였는지도 문제가 됩니다만약 세이건이 인간의 생득적 행동성향을 논하는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처절하게 반박되고 무시되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에세이에서 이러한 성향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역사적으로도 인류학적으로도 이러한 성향들이 발견되니 한번 진지하게 다뤄볼 가치가 있지 않느냐는 뉘앙스였다면 거기에 비판의 여지가 충분할지언정 할 법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거기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정당합니다다만자명종님이 하셨던 바와 같이 과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자의적 기준이 아니라입증의 확실성에 대해 널리 인정되는 기준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세이건은 블룸과 고프닉이 한 것처럼오염가능성이 있는 근거를 배제하고 책임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가진 제한적 주장을 했어야 합니다그러나 세이건의 과정이 틀렸다고 해서 그 주장 전체가 틀린 것은 아니므로 새로운 근거를 보강하면 세이건의 인간의 생득적 과학성향은 합리적으로 주장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바로 이것이 블룸과 고프닉이 한 것이고 제가 이것을 자명종님께 소개한 이유입니다.

 

 


또한 세이건은 반증가능성을 피한 주장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세이건은 불충분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증불가능한 주장이 아니라 불충분한 주장으로 위에서 제가 제시한 것처럼 적절한 반례로 충분히 반박이 됩니다반증불가능한 주장이란, 지옥은 뜨겁다라처럼 어떤 식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한 불건전한 주장이거나 인간의 모든 심리와 행동은 성적인 함의가 있다라는 정신분석학적 주장처럼 명학하게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모호한 태도로 반박에 대해 임기응변식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세이건의 주장은 불충분하고 가정에 결함이 있었을지언정 이러한 규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때문에 세이건의 주장이 과학적 엄밀함을 갖추지 못한 주장이라는 것은 진정되지만 반증불가능하다거나결과적으로 틀렸다는 것은 틀린 주장입니다바로 이것이 제가 자명종님의 글에 의문을 제기한 이유였습니다이에 대한 답변을 또 즐겁게 기대하겠습니다

 


WR
1
Updated at 2023-08-10 23:33:50

정성스러운 덧 감사드립니다. 고프닉의 실험은 국내 자료를 찾을 수 없었던지라 해 주신 덧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학부생 수준이 그렇겠지만, 제 과학지식은 교양 정도고, 잘 해봐야 고등학교 수준에 머무릅니다(고등학교는 이과를 했습니다). 때문에 전문적이지 못한 답이 될 것들이 많았고, 과학적 증명에 대해서도 엄밀성의 기준이 다르니 다른 쪽으로 기준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아래로 제가 다는 답은 철학은 학부생/과학은 낮은 수준임을 감안하고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 민주주의와 과학의 연결에 대하여

 

민주주의는 분명 과학과 비슷한 모습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책의 내용에 공감 자체는 많이 한다고 했고, rockid님의 말씀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제가 부정하는 건 그런 닮음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보고 있는 세이건의 얘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의지의 총체에 대한 책임을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과학적인 모습은 민주주의를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닮음이지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니니까요. 민주주의와 과학은 발달하다보니 닮게 되었을 뿐, 절차가 본질인 과학과 절차의 결과가 본질인 민주주의를 동치시키면 안 됩니다.

 

 

약간 사족을 넣어서 '의지의 총체에 대한 책임'을 조금 더 자세히 써보겠습니다.

 

사회제도의 발전 방향은 군주제가 등장한 이래 서서히 권리와 책임을 일치시키는 쪽으로 전개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정착된 전제군주제에서 권리와 책임은 보통 따로 놀았습니다. 전쟁의 패배처럼 왕이 국가적 실패를 해도 목숨과 피해는 인민에게 돌려진 것처럼 왕은 모든 권리를 누렸지만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모두 국가의 구성원들이 받았습니다. 책임을 지는 형태도 아랫사람이 체계를 벗어난 행위(반란 등)를 했을 때나 받는 등 체계적인 모습이 아니었죠. 가끔 권리와 책임을 일치시키는 군주도 있었지만, 그건 군주의 인성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지금도 많이 의존이야 하지만, 예전과 달리 필터링이라도 할 수는 있죠).

 

그런 지배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프랑스 혁명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이 되고 나서야(부정적으로는 안 봅니다. 역사의 필연이고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의무교육,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적게나마 (필요에 의한 경우도 있었지만)권리를 주기 시작했고, 위에 의한 실패가 반복되면서 궁극적으로 최종적인 권리인 보통선거를 쟁취하면서 어느 정도 제도적 기반이 만들어지는 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리와 책임의 일치'입니다. 인민의 선거권 행사는 의지의 총체로서 체제를 지배하는 자의 권리를 형성하고, 이에 대한 결과는 '책임'으로서 인민에게 돌아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의지의 총체에 대한 책임'입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의 본질은 의지의 총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절차)'에 빗댈 수 있고, 민주주의의 본질은 그로 인한 '결과(책임)'이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약 제가 세이건의 입장을 곡해해서 부정한 거라면, 그가 민주주의와 과학의 닮음을 민주주의의 본질로서까지 주장한 게 아니라면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책에서 칼 세이건은 주장을 매우 강하게 하였고 자유와 과학지상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것을 얘기하였기 때문에, 본질로서 민주주의와의 닮음을 얘기했다고 생각할 혐의점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 바이마르의 예시에 대하여

 

사실 이건 넣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넣었습니다. 바이마르의 실패를 과정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그리 생각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넣은 이유를 미국식 자유에 대해 만능주의 수준으로 예찬하고 있어서 경계한다는 취지로 넣었다고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 범위에 대하여

 

많은 말씀이 있었지만 결국 중요한 부분은 과학적 엄밀성이 철학적 엄밀성과 다르다는 부분이 취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신뢰성은 물질과학에 대해서는 납득하며 동의하는 바입니다. 물질계는 사실 철학적 엄밀성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탐구하는 물질계는 공통 속성인 물질의 표본적으로 충분한 수거나 이론적으로 여지가 없고 교차검증만 되면 사실을 입증하는 데 무리가 없겠죠. 여기에 철학적 엄밀성까지 더 하라는 건 사족일 겁니다. 

 

다만 단 하나, 과연 물질과학적 엄밀성을 정신(심리)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전 이 부분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심리철학자 김재권의 지적을 인용하면 아직 물질적(신경생리적 설명이라고 김재권은 얘기합니다)으로 심리의 주체인 '의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 하기에 정신 현상을 물리적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제가 가장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 이겁니다. 물론 데이비드 차머스처럼 의식의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로 나누어서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rockid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생득적 부분을 다루는 의식의 쉬운 문제에 해당하고 그렇기에 이 주장에 동의하면 과학적 엄밀성을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주관적인 감정의 발생에 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김재권의 말마따나 정신현상은 아직 물질현상을 연구하는 엄밀성의 적용 대상이 아닌 것으로 봅니다.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이 아직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규명할 수 있다면 규명되는 방식이 꼭 유전생물학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경학적으로 규명되어도 충분하고, 굳이 생물학이 아니라 어떤 과학 분야라도 정신을 물질로 직접 환원할 수만 있다면 충분할 겁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정신과 물질에 대해 그나마 객관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건 제 지식 상으론 유전생물학적인 부분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번의 답은 최소한의 해답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심리의 영역은 과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철학적 엄밀성이 아직도 유효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제가 '모든' 사회과학을 개인적으로 부정하는 이유입니다. 사회과학의 상당수 이론은 제 관점에 과학적 기반에 의해 완성되지 않은, 현실의 피드백에 의한 지식의 경험적 축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리와 연관된 것은 과학의 방식으로 연구하면 연구자의 심리에 맞는 결과가 나올 뿐입니다.). 그렇다면 고프닉의 정신에 대한 연구 또한 철학적 엄밀성을 요구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고프닉의 연구는 심리에 대한 것이고, 정당화를 위해 제시하신 건 물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방법론 자체가 달라야 한다 생각하는 저에게는 반론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 합니다. 이런 방법론적 부분은 환원의 근거가 없으면 연결하면 안 된다는 제 입장 때문에 이것만큼은 아마 합의점에 이르지 못 할 듯합니다.

 

 

 

 - 반증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

 

당시 상황을 쓴 이유와 그의 어조가 제가 반증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쓴 핵심입니다. 1995년에는 본인의 말을 증명할 수단도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상태에서 아주 강하게 '인간은 모두 과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하였습니다. 해당 내용은 사이언스북스 판본 468페이지에 나옵니다. 책의 번역 내용에 볼드체까지 정확히 옮기겠습니다.

 

'...과학적 성향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문화에서든 늘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의 수단이다. 그것은 우리의 천부적 소질이다. 무관심, 부주의, 무능력, 그리고 회의주의에 대한 불안 따위 때문에 우리가 어린이들을 과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그들로부터 인간으로서의 특권과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를 빼앗는 것이 되리라.'

칼 세이건은 아주 강력하게 진리값 수준으로 이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볼드체는 10번을 보기 힘든데 그 중 하나가 여기에 쓰입니다. 에세이에서 적당히 제시한 거면 저도 검증 가치가 있겠지 하고 넘어갔겠죠. 그게 아니니 저도 진리값의 자격에 걸맞게 긁어 본 겁니다. rockid님 말씀이 일리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전제가 맞다면 반론할 게 없는 명확한 얘기들인데 단지 칼 세이건이 전제를 초월할 만큼 과격하게 주장한 게 문제였을 뿐이죠.

 

 

- 주장의 강도에 대해서

 

사실 민주주의 얘기건 과학적 성향 얘기건 칼 세이건이 진리값 수준으로 세게 썼다고 굳이 똑같이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rockid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적당히 파악하고 넘어가는 정도로 충분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성격이 똑같이 돌려주자는 주의다 보니 감정적으로 강하게 쓴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분명하게 인정하는 바입니다.


 

 

과거에 철학과 학부에서 토론할 때는 토론 속에서 인신공격 콤보가 같이 날아오는 경우가 하도 많아서 질렸고, 정치나 종교 얘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자니 지겹고 해서 요새는 이렇게 진지하게 쓸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rockid님의 수준에도 안 맞을텐데(비꼬는 표현 아닙니다) 저와 어울려주신 덕에 오랜만에 정말 힘을 다해서 글을 쓰네요.

 

 

부족한 점에 대해서 또 써주신다면, 겸허히 더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Updated at 2023-08-11 11:22:00

  제가 만약 그렇게 교만하게(수준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면(역시 자명종님이 저를 넘겨짚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길고 진지한 토론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전에 센델에 대해 정말로 좋은 글을 써주셨고 그 때 철학을 전공하셨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저도 조금 아는 관심분야에 대해서 다루시면 언제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온라인 상에서 첫 인상만 그럴 듯하고 시간이 갈수록 실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명종 님의 센델 책에 대한 소개글은 정말 좋았거든요. 최대한 겸손을 배제하고 이야기하자면 아마 제가 나이가 더 많을 것이고 주력 관심분야가 다를테니 제가 더 아는 분야도 있겠다 싶은 정도로 생각합니다. 전공자이시니 아마 주전공 분야에 대해서는 당연히 자명종님이 저보다 훨씬 많이 아실 테고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1. 

  세이건이 민주주의의 핵심을 그렇게 말했군요.(사실 저도 그 책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이지만 그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짐작하고 있었고 많은 과학계몽주의자들이 그렇듯이 세이건의 그 책도 포퍼의 영향을 받아 대중적으로 포퍼의 사상을 풀어쓴 것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과학의 공통점에 대한 내용도 아마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겠죠. 그래서 민주주의를 예시로 다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절차와 결과의 강조점에 따른 과학과 민주주의의 구분은 충분히 합리적인 구분이고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보면,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야기 했듯이, 민주주의와 과학은 열린 체계로서 환경과 주체의 변화에 따른 유연한 적응과 발전을 이룬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린 체계라는 프레임으로 민주주의와 과학이라는 두 제도를 해석한다면 그 둘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두 체계의 본질로 파악하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이상론의 영역에서는요. 제 의견으로는 자명종님의 차이점에 대한 지적은 세이건과 포퍼의 두 제도의 동일성에 대한 생각과 특별히 상충하는 부분이 없어 보입니다. 포퍼도 과학과 민주주의가 작동기전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 두 체계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만약 세이건이 두 체계가 차이를 찾아볼 수 없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고 말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공통점을 강조했다거나 심지어 핵심이라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한 쪽이 틀렸다기 보다는 관점의 차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만약 포퍼가 제시한 과학의 이미지와 현실 민주주의의 실제적 작동을 비교하는 자리라면 당연히 자명종님의 시각이 더 적절한 해석틀이라 생각합니다.[그러나 실제의 과학(쿤의 관점)과 현실의 민주주의를 비교한다면 아마 공통점이 더 많을 수도 있겠습니다.ㅎㅎ] 해서, 세이건의 관점과 자명종님의 반론이 세이건이 택한 관점에서도 서로 모순되고 또 세이건이 틀렸다고 하신다면 거기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ex: 열린 체계라는 관점에서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두 제도의 이상이 왜 서로 다른가? 만약 과정과 결과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두 제도가 열린 체계라는 점에 그 강조점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어떤 차이를 낳게 되는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두 제도의 이상론적 관점에서도 그런가?)

 

과학자 사회에서도 책임의 영역은 중요합니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제시하과 실험을 통해 확인하면서 민주적인 절차에서 여러 경쟁자와 마찬가지로 연구과정에 있어 효율적인 전략을 짜야하고 규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이론의 입증에 실패하거나 연구를 조작한 것이 들통난  과학자들의 말로는 거의 처참하다고 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상온초전도체 이슈가 불거졌을 때, 옹호파와 반대파로 갈렸다가 어느정도 결론이 나게되면 틀린 쪽의 학자들은 학술적 권위를 잃고 이후 논문의 피인용지수 하락 같은 책임을 져야 하고, 줄을 잘못 선 소장학자들의 직업이나 학자로서의 전망은 급격하게 어두워집니다. 물론 이상적인 과학자라면 이것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죠. 하지만 과학에도 그러한 문제는 있고 어떤 제왕적 과학자라고 할지라도 틀린 결론을 옹호해한다면 금방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고 아무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에 반대한 아인슈타인이 만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보낸 날들이 그랬습니다. 프린스톤의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을 구시대적 인물로 취급했죠 그의 몇 가지 연속적인 실수들 때문에요. 이러한 것이 이상적인 민주주의라는 제도에서 잘못된 결정을 했던 인물들이 고스란히 그 책임을 떠 않아야 하는 것에 비교하면, 과학은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 결과적 책임을 지는 것이 현실 정치만큼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써주신 글에서는 세이건이 두 체계의 작동기전의 개념적 동일성에 천착했지 그 이상의 것을 말했다는 근거가 여진히 없어보입니다 아무리 그가 그답게 감성적 문장으로 호소를 했다고 해도 말이죠.(만약 그러한 정황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리하자면 두 제도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핵심이나 본질에 대해서도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이건은 당연히 포퍼의 관점을 채택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실수가 있었다면 다시 세이건 본인의 문장을 통해 근거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2.

제가 말씀드린 것이 과학적 엄밀성과 철학적 엄밀성이 다르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발전 과정을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적이 없으시다면 그렇게 오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과학은 과학 자체의 방법론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 데이터지,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과학이라는 학문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철학의 영역이고, 과학철학이 바로 그러한 문제를 다룹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이란 어떤 당위적 규범들이 있는가”, “ 과학적 확실성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는가과학철학은 당연히 과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가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분석철학 연구분야에 속하고, 현대 과학철학은 모든 귀납적, 경험적, 종합적 성격을 가진 탐구대상을 과학의 영역으로 인정합니다. 따라서 과학적 탐구 대상인 인간의 생득적 본성 유무를 판단하는데 있어, 과학적 엄밀성과 철학적 엄밀성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유전학적 연구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철학적 엄밀성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은 과학철학의 기본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것은 과학의 영역철학의 영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로 사용한데서 온 오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김재권이나 차머스를 인용하시는 것을 보니 아주 잘은 모르신다고 해도 심리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으신 것으로 간주하고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우선 말씀하신 것 중 오류를 수정하자면 차머스의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감각질과 그에 관한 주관적 경험에 대한 것입니다. 고프닉 등의 연구는 그러한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차머스의 쉬운, 어려운 문제 주장을 참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고프닉의 연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주관적 경험이나 감각질에 대해서 고프닉은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고프닉이 연구한 주제는 철저하게 객관적 지식의 대상일 뿐입니다.) ,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고프닉의 이론의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더더욱 신경과학이나 분자유전학적 확실성을 담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증거들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분야(의식과학)에 뛰어든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명은 바로 DNA 구조를 규명한 프렌시스 크릭입니다. 그러나 크릭은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신경과학자들과 공동연구를 했을지언정 자신의 전문분야인 분자유전학을 끌어들일 착상은 가능성조차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크릭은 현명하게도 물리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의식의 신경학적 상관물(NCC)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그것이 크릭의 책 놀라운 가설의 내용입니다. 김재권이나 크릭이나 전부 물리주의자들로서 크릭은 그것으로 의식은 충분히 설명되고 김재권은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물론 김재권은 감각질을 옹호합니다. 저는 김재권의 책을 읽었는데 데닛의 시각으로 충분히 반박하고 교정할 수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 현재 의식이론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어려운 문제/쉬운 문제의 구별은 감각질이라는 혼란스러운 개념에서 비롯된 잘못된 문제제기이며, 의식의 주관적 경험 문제는 타자현상학적 방법론(나중에 심리철학에 대해 논의할 일이 있으면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인터넷만 쳐도 대략적설명은 나올겁니다.)으로 충분히 연구될 수 있다는 주장들이 그 반대쪽 주장들과 우세를 점하며 맞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벌써 30년동안 데닛은 감각질이라는 개념이 주관적 경험의 발생에서 대상을 중복시키는 가짜 개념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논증해오고 있습니다.(최근 신경과학자 아닐 세스의 책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차머스가 제기한 어려운 문제는 개념적 환영이라는 데닛의 입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제가 가장 관심있는 철학적 주제라서요.) 아무튼 어려운 문제가 정당하건 말건, 이 문제(고프닉의 연구)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 개념이 끼어들 가능성은 어려운 문제의 개념상,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심리철학과 의식과학문제로 잠간 더 세자면,  감각질과 어려운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펜로즈 등 일부 이론물리학자들과 거기에 호응하는 일부 심리철학 연구자들, 그리고 신경과학자들이 있는데, 그 중 누구도 구체적 로드맵은 고사하고 개념적이거나 논리적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펜로즈의 연구는 대다수의 전문연구자들에게 학문적 가치가 없다고 비판받았으며, 거기에 호응했던 일부 신경과학자들 속내는 자신들의 연구가 인지과학자들에 의해 뒤처지는 것에 대해 반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거의 헛짓거리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이고 더 이상 이런 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연구자도 거의 없습니다. 원래 적었던 수가 더 적어지고요. 조금 쓴 소리를 하자면, 전 글에서 인간의 생득적 정신기제를 발견하기 위해 제시한 조건도 그렇지만, 이번에 여기에 심리철학적 논점들을 끼워 넣은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시도였습니다. 아마도 해당분야 상황을 전혀 모르시지 않나...생각합니다. 만약 아직도 연락하시는 심리철학 전공자가 있으시다면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감각질 옹호자든 아니든 간에 이 문제와 차머스의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철학이 심리학이나 심리철학(심리학과 심리철학이 전혀 다른 분야라는 것은 아시겠지만 굳이 확인차원에서 다시 써봅니다.), 의식과학에서 철학의 역할은 해석적 역할이고, 과학이 그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다고 해서 철학적 연구가 과학을 배재하고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과학의 엄밀성의 한계를 철학연구의 엄밀성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정신현상의 문제는 경험 영역의 문제니까요. 정신과 물질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문제는 현재 위에서 말한 정신기제의 신경학적 상관물을 발견하고 그것이 유전에 의해서 어떻게 발현되고 환경과의 협응을 거쳐 발견하는지를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려운 문제는 해결할 수도 없고 어려운 문제 자체가 개념적 오류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정신적 기제를 발견하는 문제는 꼭 그런 생물학적 기초연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PCMAC은 서로 다른 기계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은 그러한 구체적 물리구조를 전혀 모르고도 코드와 컴퓨터의 실행을 기초로 그 프로그램의 알고리즘 구조나 기능 같은 중요한 특징들을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심지어 기계어를 다룰줄 모르는 초급 프로그래머라고 해도 프로그램을 이해하고 주요 특징을 알아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컴퓨터 설계공학자들처럼 그러한 것들을 안다면 이해의 깊이를 더욱 높일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어떤 프로그램의 기능이 임베딩 되어있는지 아니면 학습형인지 '엄밀하게' 알아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득적 기제를 알아내기 위해 유전학적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프로그램의 기능과 특징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기계적 구조와 설계사양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거기에 심리철학적 관점이나 방법론이 끼어들 틈은 전혀 없고요. 따라서 어려운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혹은 과학적 엄밀성이 철학적 엄밀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분자유전학 정도의 엄밀한 확실성을 보증해야만 생득기제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인지발달 심리학자들의 연구가 충분한 엄밀성을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은 철학계에서나 과학계에서나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입니다. 이것도 좀 심한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자명종님의 주장은 충분히 고찰해보지 않은 개인적 직관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과학적 주장의 엄밀성을 판별하는데 어떻게 철학이 독자적인 엄밀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지, 분자유전학이 이 주제의 전문분야인 인지심리학 연구에 비해, 분자유전학적 상관물을 발견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철학적 엄밀성을 더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인지, 과연 나는 해당 분야에 대한 엄밀성의 척도를 과학적이든 철학적이든 남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한 번 설명연습을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이것은 진지한 충고입니다. 저런 주장들이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진짜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참신한 생각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럴 확률은 매우 낮고 오히려 진정한 이득은 그러한 설명을 시도하면서 구체적 자료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급한 주장을 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지요. 저는 그래서 이번에 새로운 논변('어려운 문제')을 준비함에 있어 조금 더 자료를 조사해보셨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듭니다.]

4.

 

반증가능성 용어의 사용문제는 세이건이 얼마나 강하게 주장했는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반증가능성은 제가이미 정의를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증에 필요한 구체적 대상을 제공하느냐?" 그리고 "그 주장이 검증조건을 설정할 수 있도록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용하신 세이건의 글은 말씀대로 매우 강력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조사 불가능성이나 모호함이 있나요? 세이건이 제시한 분야는 모든 인간사회의 시대와 장소를 망라합니다. 거기서 단 한군데라도 세이건이 과학적 특징으로 제시한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밝히거나, 아니면 세이건이 제시한 성향이나 특징이 과학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히면 됩니다. 반증가능성은 주장의 강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장을 검증할 수 있는 조사대상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주장이 얼마나 명확하거나 모호한지에만 상관이 있습니다. 세이건이 제시한 과학적 성향의 특징은 아마도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을 다시 현실에 적용하여 일치/불일치 여부를 확인하고 다시 가설을 수정하는 구체적 행위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전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 이러한 성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 블룸과 고프닉 등의 연구였습니다. 따라서 세이건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불확실한 모험적 주장이었으나 해볼 법한 모험이었고, 반증불가능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자명종님은 세이건의 주장이 근거가 허약한 주장이라고 논평할 수 있을지언정 반증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논평할 수는 없습니다. 세이건의 주장은 너무나 쉽게 반증가능합니다. 진화론의 반증가능성에 대해서 공룡 뼈 지층 아래 놓여진 인간 뼈라고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어느 문화권에서건 영유아기에 고프닉 등이 발견한 생득적 기제를 발견하지 못하면 됩니다. 그 전까지는 인간에게 생득적 과학 탐구성향이 내제되어 있다는 것이 충분한 권위를 가진 과학적 사실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요.(사실 위에서 반복해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구분 자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가 속한 영역은 철학이 스스로 자원해서 과학의 영역임을 밝힌 영역입니다.)

 

또 새로운 논의를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제 글에서도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의심될만한 문장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주세요. 전혀 의도는 아니겠지만 저도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라 얼마든지 그런 가시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에 그런 것을 교정하는 것이 저로서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WR
1
Updated at 2023-08-13 01:10:27

빠르게 댓 달아주셔서 감사했는데 이것저것 다른 일 때문에 댓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직전 댓글은 쓰고 나서 되짚어 보면 꽤나 많이 잘못 쓴 글이었습니다. 사회과학을 통짜로 부정한 것도 그렇고,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써야 하는 단어에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 사회과학의 전면 부정에 대하여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저 역시 의식의 쉬운 문제만큼은 심리학을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고 신뢰도도 높은 편입니다. 따라서 전부라는 말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정정합니다.

다만 다른 사회과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매우 부정적입니다. 나중에 각 잡고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입장은 바뀌지 않을 것 같네요. 

 

물론 일반적으로 제도권 학문들은 기본적으로 존중되어야 하기에 제 생각들은 그냥 개인적 망상 정도로 머무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그것이 제도권에서 인정받는 건 다른 얘기기도 하고, 혼자서 생각한 지식 수준은 보통 지식의 집합체보다 결과가 좋지 않죠.

 

- 철학적 엄밀성: 여기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철학적으로 논의를 하기로 했으면 단어도 철학적 엄밀성에 따라가야 했겠죠. 진리값과 반증가능성이 여기에 해당되겠죠. 사회생활 한다고 정당화될 만한 건 아니겠고요. 그래도 이해해 주셨다면 그걸로 다행일 따름입니다.

 

 

이제 말씀주신 부분에 대해 다시 써 봅니다.

 

- 민주주의의 본질

이 부분은 사실 세이건의 얘기를 깊게 파서도 안 되지만 깊게 보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모든 개념에서 그렇지만 세이건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섞어서 얘기한 탓에 일일이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책 군데군데를 보면 본인이 민주주의의 장점이라 주장한 부분도 세밀히 보면 자유의 장점인 곳도 있고 그럽니다. 위에서 썼던 칼 세이건이 얘기한 민주주의의 장점은 자유지상주의의 장점일 뿐입니다. 개인의 의견을 막지 않고 자유를 보장한다는 건 민주주의가 아닌 아닌 미국식 자유주의의 차원일 뿐이니까요. 

 

과학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제한을 두면 안 됩니다. 이는 미국의 자유지상주의적 민주주의와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같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자유와 민주주의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섞어 쓴 칼 세이건의 입장에서는 그냥 동치시키고 본질까지 같게 봐도 되었겠죠.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충분히 짐작됩니다. 하지만 같은 민주주의라도 작동 방식이 다른 데는 많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보장하지 않는 자유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죠. 독일은 나치와 관련되면 폭압에 가까운 수준으로 해체시키고, 프랑스 역시 앵똘레랑스라는 말로 관용을 두지 말아야 하는(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부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로 인정받는 나라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책임을 받게 되는 자가 선거라는 권리를 가지는 것뿐입니다. 본질에 가까운 건 좀 더 확실하게 공통된 부분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학은 주장하는 자가 책임을 남에게 짬처리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 있기에 자연히 책임은 주장자 본인에게 돌아가고, 책임 문제가 알아서 해결됩니다. 책임이 중요한 건 맞지만 알아서 해결될 수 있기에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책임보다는 훨씬 집중해야 할 본질이 됩니다. 하지만 위에서 썼듯 정치 영역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기 매우 쉽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알아도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또한 권리를 쥐어 줄 후보에 따라 올바름 자체를 고를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포함한 정치의 핵심은 다다르기 힘든 올바름보다는 당장의 책임에 쏠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와 과학에 닮은 점이 있다는 주장은 관대하게 봐서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지만, 세이건이 그런 과학적 원리를 민주주의에 빗대면서 마치 본질인 양 호도하는 건 용납하면 안 되는 겁니다. 

 

다행히 책이 있으시다니 칼 세이건이 민주주의와 과학에 대해 혼동한 부분을 효율적으로 알고 싶으시다면 마지막 두 장, 24장과 25장의 내용을 읽으시길 권합니다. 알아서 찾으라는 게으름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맥락(context)에 의해 제가 판단한 부분도 있는지라 부분발췌만으로는 도저히 원하는 의도대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 엄밀성의 구분: 이 부분은 제가 과학철학에 대해 알지 못하니 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다만 과학의 방법론과 철학의 방법론은 다르다고 생각하였고 그런 취지에서 적었다는 점만 밝힙니다.


- 김재권과 차머스를 인용한 이유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물질과 신경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복합적 행동들을 물리적으로 환원할 방법이 아직 없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싶었고 그 와중에 의식의 쉬운 부분, 어려운 부분으로 물질과 정신의 연결관계를 서술한 것으로 보여서 차머스의 개념을 차용한 거였습니다. 사실 감각질이라는 표현 자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살펴보니 그게 핵심이었다니 잘못 인용한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학문을 하지 않는 사람의 엄밀하지 않는 단어선정으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네요.

 

 

- 과학적 증명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물질적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의견이 같으며 부정 역시 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프닉의 건에 대해서는 제 의견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반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정리된 부분도 있고 하니 적어 봅니다.

 

제시하신 고프닉의 연구결과, '인간은 누구나 과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에 대하여 정리된 제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1. '좋은 건 다 과학이냐?': 결국 처음 문구로 돌아오는군요. 인간이 아니라도 동물이라면 생존을 위해 당연히 주변 변수를 분석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그건 과학적 사고 이전에 근본적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생득적으로 가진 분석과 취합, 일반화와 수정 능력이 과학에 있다는 이유로 과학이라는 용어로 치환된 것에 제 위화감의 근원이 있습니다. 그런 능력은 분명 누구에게나 있지만 과학적이지 않은 사고도 분석, 취합, 일반화와 수정을 거칩니다.

 

한 때 나돌았던 모 정치인의 금괴 200톤 음모론을 예시로 들겠습니다(정치소재를 쓰는 건 송구하게 생각합니다만 지식이 그나마 있는 분야로 설명해야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듯했습니다). 분명 인지능력이 올바르게 되었고 분석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얘기였던 게, 금괴 200톤이면 루머가 유포된 당시에 금 보유'국가' 순위로 21위가 될 정도의 엄청난 양이었고, IMF사태 때의 금모으기 운동 때 온 집안 다 긁어모은 금 무게가 227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음모론은 대부분 허무맹랑한 걸로 간주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비과학적으로 간주되는 사고조차 제 의견으론 분석과 취합, 일반화에 심지어 수정(!)의 과정을 모두 거쳤습니다. 그걸 아래에 적어보겠습니다(이것도 철학적 엄밀성이 요구된다면 이 부분은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사례라면 끝도 없이 들 수 있겠지만요).

 

 

분석과 일반화, 그에 따른 가정

 - 보통 거물 정치인들은 뒷배가 있다. 그러니 그 정치인이 뒷배가 없었다면 이렇게 정치 전면에 나왔을 리가 없다.

 

일반적 사례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근거 탐색

 - 부산 문현동에 있던 일본군 해군 어뢰공장에 일제가 숨긴 금괴 1,000톤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 그 정치인은 부산에서 직업활동을 했다.

 

개별 사례의 일반화할 수 있는 분석 완료

 - 그 정치인은 정치활동하기 위한 뒷배를 부산에서 모았다

 - 뒷배를 모으는 과정에서 문현동 금괴 1,000톤과 자기앞수표로 된 20조원의 비자금을 확보했다.

 

수정(위의 건 단순 분석일 수 있지만, 이건 처음과 나중의 주장의 차이를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됩니다...)

 - (일본에 있는 금괴 다 합쳐도 760톤 가량인데) 1000톤은 너무 터무니없다. 보니 200톤이 적당하겠다.

 - 추적이 쉬운 자기앞수표를 가지고 비자금으로 쓰는 건 말이 안 되니 빼야겠다.

 

최종 결과물: 그 정치인은 금괴 200톤을 은닉하고 있다!

 

참 뭐같긴 하지만, 분명 이 루머의 형성 과정은 말씀해주신 멜초프의 인지과정에 따라 설명이 가능하고 다른 건 몰라도 실제로 수정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과학적인 사고라고 봐야 할까요? 당연히 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전제가 잘못 된 분석일 뿐이죠. 멜초프의 연구결과는 잘 봐도 (일단)인간의 기본적 분석 성향을 입증한 것 뿐이고, 과학적 성향을 증명한 게 아닌 겁니다.

 

동물의 분석 과정과 인간의 사고 성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생각한 바가 많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기도 하고 누가 인정할 것도 아니니 여기에 쓸 건 아닐 듯합니다.


 

2. 정말 과학이라고 하려면 범위를 좀 더 좁혀야 하지 않을까?: 제가 위에서부터 수도없이 반박받고 부정당하면서도 합의점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극단적인 얘기를 하면서 굽히지 않은 이유입니다. 1과 같이 느꼈기에(생각이라고는 절대 못 하겠습니다. 직관적으로는 이렇게 느꼈을지라도 언어화되어 정리한 건 분명 이 댓글이 처음이니까요.) 멜초프의 주장은 과학적 사고와 관련된 주장이 아니라고 한 거고, 정말 과학과 연결하려면 다른 과학과 연결되는 증거가 필요하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방법론은 위에서 써 주신 정도면 충분하니 반복해서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말이 바뀌는 듯한,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제 글에서 받으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식을 받아 배우는 과정에서 사고를 고쳐 나가는 거라 너그러이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Updated at 2023-08-13 01:11:12


  자명종님이 게을러서 인용해주지 않은 것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게으름을 말하자면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읽지 않고 의문점을 질문한 저의 게으름을 탓해야겠죠. 다만 시간이 지난 후에 더 정밀한 토론을 이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글을 쓰신지 얼마 되지 않고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택하느라 부득이하게 제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문을 드렸다는 것을 너그럽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민주주의의 본질

어쨌든 더욱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뉘앙스를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양 체계 간의 공통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것인데, 세이건은 마치 과학적 태도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가치인 것처럼 말했다정도로 자명종님의 주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읽어봐야 거기에 대해 더 합당한 판단을 내리고 또 논의를 계속해나갈 수 있겠으니 잠정적으로 결론은 보류하고 언젠가 시간이 걸려도 꼭 내용을 읽어보고 다시 논의를 부탁드려보겠다는 약속으로 대신합니다. , 세이건의 스타일로 볼 때, 세이건이 대중적으로 포퍼의 사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장했거나 엄밀하지 못하거나, 경계를 날카롭게 구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말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저는 이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마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내용을 풀어쓴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공통점에 착안한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사실 포퍼가 만년(90년대)에 쓴 에세이들을 보면 미국식 자유주의에 대해 엄청난 호의를 가지고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저는 포퍼의 과학의 당위에 대한 설명에는 동의하나 포퍼의 정치적 입장까지 마냥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러한 괴리의 문제에서 자명종님과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합니다.


- 고프닉의 주장에 관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이제 서로의 의견에 대해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일치될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금괴 200예를 통해서 의견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과학 뿐만 아니라, 미신, 억측, 음모론 등도 모두 과학이 그러는 것처럼, 반복된 상황에 대한 패턴 분석, 그것을 통한 가설 제시(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여기에는 이미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가정이 존재하고 그것을 경험을 통해 수정한다고 봐야겠죠. 더 학술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생득적으로 관찰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한 이론적재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더 많은 경험을 통한 가설 수정 등의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과 과학과의 결정적 차이는, 과학이 그런 자연스러운 행동들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신은 대부분 성급환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으로 충분한 샘플이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론을 내고, 일단 그런 미신적 이론을 세운 다음 그 이후 관찰에서 그 미신적 이론을 고집스럽게 활용하며 가설을 수정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진화심리학적 실험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인간의 논리적 특성들은 실용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편향적 오류에 매우 취약합니다. 예를 들어 전건 긍정의 오류나 후건 부정의 오류 같은 것이 그 예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귀납을 통해 가설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가설을 통해서 연역적으로 사건을 예측하며, 또 더 많은 귀납을 통해서 가설을 수정하는 행동을 태어나서 미처 언어를 습득하거나 교육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해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고프닉이 발견한 것이고, 그것이 과학의 맹아’(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맹아!)라고 하는 것이죠. 고프닉이 진화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진화심리학적으로 그런 행동들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태어나면서 모두 알 수는 없는 앞으로 닥칠 경험에 대해, 반쯤 갖춰진 본능으로서의 생득적 기제와 경험을 통한 자료의 확보들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유기체의 가장 발달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다양한 한계와 경험, 사려깊음의 부족으로 그러한 특징들을 조합하여 가장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돼지 꿈을 꾸면 재수가 좋고, 어떤 정치인은 금괴 227톤을 은닉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겁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러한 성향들을 온전하게 발달시킬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타고난 본성을 100%발휘하여 과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고프닉이 대중서적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마 세이건도 마찬가지일테고요. 조금 더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인간은 과학적이 될 본성 뿐 아니라, 미신적이고 맹목적이 될 본성도 타고 납니다. 인간은 권력관계와 위신에 민감한 동물이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을 위신과 결부시키며, 타인과의 의사소통에서 얻은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는 문제에 매우 취약한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마녀사냥이나 인종차별, 종교전쟁을 발생시키는 인간의 생득적특질들이죠. 고프닉과 세이건이 이러한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부정했다면 그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궤변을 만들어내야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세이건이나 고프닉 모두, “과학은 인간의 본성이고 미신이나 맹목은 부정적 경험이 원인이다라는 성선설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에게는 과학과 같은 좋은 특질을 발전시킬 수 있는 특질을 생득적으로 내장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잘 발달시킨다면, 우리는 과학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 가진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몇 가지 생득적 특질들을 가장 이상적으로 발달시킨 결과가, 그리고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이 바로 과학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만능이라거나 한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그러나 과학자들로서,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범박하게나마 아는 교양인으로서, 그들은 과학이 얼마나 기적같은 것인지 경탄하는 것에, 우리에게 그것을 발전시킬 능력이 생득적으로 갖춰져있다는 것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방점을 찍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로서 1번의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이 되었기를 희망하지만 미심적은 부분이 남으신다면 더 논의를 이끌어나가 봐도 좋습니다.

2번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과학은 다른 방법론들에 비해 신뢰성이 매우 높을 뿐,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은 아니라는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좋은 요리사든 나쁜 요리사든 같은 재료와 레시피를 가지고 결과물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요리사의 숙련됨과 능력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이죠. 그리고 만약 뛰어난 요리사가 다른 요리사들의 노하우를 취합해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랐다면 효과는 더욱 강력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과학이 다른 미신과 음모론, 전통과 다른 점입니다. "따라서 좋은 것이 모두 과학은 아니겠지만, 압도적 대부분은 과학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때로는 미신이나 전통, 음모론 등 과학과 일부 사고기제를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비율로 섞고 일부는 누락하고 쓸데 없는 것을 덧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효과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소 뒷발에 쥐잡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죠.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당히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하지 않고 잠정적인 결론들이 틀리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과학은 실증이라는 증거 외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인간이 가진 적응의 생득기제를 통해 인간이 고안해낸 모든 제도 중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이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얻는 일들을 해냅니다. 그리고 아무리 개인적인 기준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제도로서의 과학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결론을 냈다면 그것은 과학적 결론입니다. 자명종님이 말씀하셨다시피 과학은 과정자체가 중요하죠. 결과의 정말도와 상관 없이 그것이 과학적 과정을 충족시켜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성기고 정밀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리고 받아들이는 과학자들의 수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과학적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론을 믿고 안믿고, 수용하고 수용하지 않고는 과학자 개인의 주관성에 달린 일이죠. 아무리 과학적 규범을 따른 결과라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과학적으로 연구된 결과일 뿐 신뢰성을 확신할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결론의 확실성은 이분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뢰도에 차이가 있는 일련의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며, 그 신뢰도가 수치적으로 제시될 뿐 어떤 수치를 기준으로 삼을지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그것이 사회적으로 실행될 때는 합의에 따르게 되죠(백신 논란을 생각해보시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명종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을 제가 좀 더 정확하게 풀어보자면,  "고프닉의 결론을 아직 신뢰할 수 없다"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고프닉의 결론이 과학적이다/ 과학적이 아니다가 아니라요. 물론 과학의 영역에서 이런 경우 가장 정정당당한 태도는 바로 반론을 제시할 수 있는 실증연구를 내놓거나 메타데이터 해석으로 반증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주장을 잠정적으로 수용하고요. 그러나 과학의 현실이 이상과 다른 것처럼 많은 과학자들이 그저 부정적으로 코멘트만 하고 알력싸움을 하기 일수이긴 합니다. ㅎㅎ  제 결론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고프닉의 연구는 과학적 규범을 잘 지킨 연구고 (그 신뢰성은 위키 고프닉 항목에서 고프닉이 얼마나 많은 피인용과 권위있는 학술지에 실렸는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과학적 신뢰성을 상당히 담보한 연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시된 코로나 백신의 위험성이 얼마나 낮은 확률이든간에 주관적으로 느끼는 위험은 다를 수 있듯이, 아무리 과학적인 연구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신뢰도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믿을 수 앖는것도 이해합니다. 다만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할 때, 과학적이지 않아서, 혹은 과학적으로는  엄밀성이 널리 인정될지 모르지만 철학적으로는 부적합해서 문제가 된다고 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명종님이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의 실험결과로는 내 주관적 신뢰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정도가 최선입니다. 그리고 좀 건방진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명종님이 이런 연구에 대해서 더 알게되면 알게될 수록, 예를 들어 언어, 각종 행동등의 생득기제 연구에 대해서 알면 알게 될 수록, 최소한 그들의 주장을 납득하고 훨씬 긍정적으로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실 것이라는 것이라 예상합니다.  

 

제가 읽은 바로는 고프닉의 주장도 이와 다르지 않고, 아마 세이건도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미신과 음모론과 다른 것은 압도적인 신뢰성에 있을 뿐 서로 같은 기제를 공유한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고프닉의 주장이 과학적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자명종님의 토론 태도에 대해서 정말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 분야에 대해서는 좀 더 일반적인 지식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더 말이 많고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은 모양세가 되었지만요. 그러나 혹시 예전의 대화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자명종님께서 데카르트나 니체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요즘에 니체에 대해서 부쩍 더 자세하게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의 흥미를 강하게 끄는 것 중 하나는 독일 사상사에서 보이는 개인의 정신적 성장에 대한 관심입니다. 괴테에서 니체를 거쳐 융, , 헤세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게서까지 발견되는 그 내면의 성장에 대한 관심의 깊이가 독일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 음악에서도 그러한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언젠가 니체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아는 것은 아는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담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제 생각에, 세이건에 대한 논의는 의견이 많이 좁혀졌고 대충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 같긴 하지만, 아마도 아직 남은 부분들이 있을 듯도 합니다.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이 주제도, 또 다른 주제도 의견을 교환하면서 이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중간에 내용을 추가하느라 글을 수정했습니다. 2번 묹제에 대한 답 후반부를 다시 한 번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WR
1
Updated at 2023-08-13 16:00:38

저도 이제 마무리를 지어도 되겠네요. 민주주의 쪽은 제 의도를 정확히 읽으셨기에 더 쓰지 않아도 되고, 과학 쪽도 짧게 제 의견을 쓰는 정도면 충분해 보입니다.

 

말씀하신 과학적 맹아(잠재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본 기제를 넘어 이제 그 사람이 어떤 기질이나 판단성향을 최종적으로 가질 지는 이제 자라나는 환경과 유전인자에 달렸다고 봐야 한다면 고프닉의 연구 결과는 과학적 잠재력을 충분히 암시한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제 의견으로는 그건 모든 것의 잠재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을 합니다(아마 rockid님의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언어적 표현이 다를 뿐이죠.).

 

저는 원리에 대한 환원주의(?)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다양한 세상의 원리들이 마지막에는 큰 원리 몇 가지로 묶일 거라 생각하죠. 그래서 문과 졸업임에도 물리학이나 초끈 이론같은 것에 관심이 매우 많고, 정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라 사람 행동에 대한 여러 심리적 설명 위에 인간 행동의 기본 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말씀하신 고프닉의 연구 결과는 기본 원리까지인지는 몰라도 행위 일반에 대한 상위 원칙은 충분히 될 수 있다 보기에 저는 상위 개념(좀 더 많은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설명)으로 환원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었고 때문에 과학에 한정하여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직감'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에 말씀을 거친 지금 정리된 걸 말씀드리면, 고프닉의 결론을 아직 불신한다기보다는 행동의 기본 원리는 다방면에 적용되며 이를 올바르게 극대화했을 때 과학이 있다 정도로 생각을 하려 합니다. 이게 제 최종적인 의견입니다.

 

 

말씀을 나누는 동안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었고, 조금 의가 상한(?) 때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거의 나눌 수 없는 대화였기에 매우 유익했습니다. 더욱이 이렇게 대화하면서 제 생각이 다듬어지는 모습을 보고 역시 혼자 꿍해있기보다는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게 됐네요.

 

제가 니체와 데카르트는 책을 조금 읽긴 해서 설명할 수 있겠다고는 했지만 오랫동안 책을 손에서 놓은지라 아마 나중에 대화를 나눈다면 책을 준비하고 얘기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대화하게 되면 지금처럼 최선을 다 해서 찾아보고 말씀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들 매우 감사했습니다. 합의점을 찾고 마무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1
Updated at 2023-08-13 17:04:38

저도 감사했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말한 부분이 꽤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정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고자 하시는 모습에 상당히 감명 받았습니다. 특히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면서 전에 있었던 오류가 왜 생겼는지까지 꼼꼼하게 적어주시는 모습은 저도 정말 배울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오답노트를 적듯 리뷰하시는 모습을 보니 취미든 업이든 공부하시는데 발전이 상당히 빠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종적인 결론들은 저도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제가 처음에 자명종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가장 큰 이유는 용어의 오용 문제였습니다. 만약 자명종님이 지금 제시하신 입장을 정확한 용어로 문제제기를 하셨다면 저도 동의했을 겁니다. 고프닉이나 세이건은 모두 과학자들이기도 하고 (과학자들은 대충 맞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철학적 정밀함이 떨어지는 경우가 못지않게 많습니다.) 그들의 책들 자체가 과학적 계몽을 위해 대중적으로 쓰여저 정밀하게 표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명종님의 철학적인 문제제기(과학으로 발전될 수 있는 요소들을 과학 자체라고 주장하는 혐의가 있다)는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환원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과학적 환원주의'를 강하게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명종님 처럼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패턴)이 몇가지로 정해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인지적 본능 때문이고, 그것이 본능인 이유는 그러한 방법이 진화를 통해서 적응에 유리한 것으로 판명이 나 잘 다듬어져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어떻게 진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롭게도 물리학에서도 철학적 전통을 이어 이런 입장들이 대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양자중력 이론의 쌍두마차인 카를로 로벨리와 리 스몰린의 대립이 이와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몰린은 실재론자라고 불리는 입장을 지지하는데, 자연이 우리와 무관하게 실재하며 우리는 그 원리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진영에는 아인슈타인, 스티븐 킹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탐구하는 세계가 관찰자인 우리와 독립적으로 살제하는 어떤작동원리나 패턴이 있으며 우리는 관찰과 수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결국 규명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반실재론자, 혹은 실증주의자 그룹이 있습니다. 이 진영에는 에른스트 마흐를 거쳐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을 포함하는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그룹이 있죠. 이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정된 경험을 통해 파악한 데이터와 그것을 패턴화한 이론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전부를 우리는 알 수 없고,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진짜 어떤 법칙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변덕스러운 세계의 변화의 일부분만 보고 규칙으로 정할 뿐 세계의 실체를 알 수 없다고 하는, 흄과 칸트를 거쳐 영미철학에서 꽃피운 분석철학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자명종님이 어떤 엄밀함이나 확실성을 왜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지 조금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 실재론은 신념이지 실증된 것은 아니라 생각하기에 그런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저로서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이나 호킹의 실패(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이나 빅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호킹이 블랙홀 정보이론에서 오류를 저지른 것)도 그들이 자신에게 갖춰진 관찰이나 판단 능력이 진화론적으로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얻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못했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미시적으로 들어가보면 우주는 인간이 진리를 판별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원리로 생각하는 동일율조차 담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일율은 그것에서 논리학의 모든 법칙이 도출되는 가장 중요한 생득적 판단원칙이죠. 심지어 김상봉을 비롯한 많은 서구철학 비평가들이 서구의 사상은 동일률을 기초로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고요.) 우리는 단지 어떤 상향이 우리의 적응과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본능으로 가지게 되었지, 그것이 진리를 판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갖춰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진화론적 사고입니다. 그리고 진화론이나 실증주의 경험주의는 모두 반플라톤 주의에서 비롯되지요. 저는 이런 사상들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고 설득된 입장이라 실재론의 입장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아마 계속해서 논의를 진행하게 된다면 이 점에서 흥미로운 토론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끈 이론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도 바로 끈 이론이 인간의 미학적 요구를 충족시킬 뿐,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끈이론의 기본 요소는 실증될 수도 없고, 현재 알려진 입자들의 실재 물리량 수치와 동떨어진 예측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파인만 등 비판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끈이론은 이론이 아니라 직관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진화론이나 철학사에서의 논쟁 등을 근거로 실재론에 대해 강하게 불신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토론이나 의견교환은 입장이 명확하게 갈릴 때 더 풍요로운 결과들을 가져다 주죠.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