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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을 읽고]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미국사를 통해 바라보는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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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1-24 14:08:20

※ 내용 말고 서평만 볼 분은 마지막 두 문단만 보시면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 출간된 이후,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등 현대 철학자 중 국내에 도서가 빠짐없이 출간된 보기 힘든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죠.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한 번 더 한국에서 작은 돌풍을 일으켰던 그가 올해 초 새로운 서적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를 출간했습니다. 클린턴 시기에 출간한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그 동안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편집해서 새로 냈다는데, 나름 샌델 철학을 파 보기로 하였으니 기왕이면 끝까지 가자는 생각에 이 책도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도서명: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Democracy's discontent)

저자/출판사: 마이클 샌델/와이즈베리

정가: 20,000원

 

 

 

<미국사의 핵심 키워드: 자유>


미국의 정체성을 하나 고르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걸 고를까요? 아마 다들 논란의 여지없이 자유를 꼽으리라 생각합니다. 태생이 영국에서 자유로워진 나라이고, 자유에 대해 보여주는 미국인의 자부심과 행동들이 이를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2003년 프랑스와 잠시 사이가 나빠졌을 때 연방의회 하원 식당에서 감자튀김(french fries)을 자유의 튀김(freedom fries)라고 바꿔 부른 해프닝도 그렇고, 총기사고 논란이 아무리 일어도 총기를 소유할 자유(freedom)를 포기하지 못 하는 것처럼 말이죠. 미국의 원조를 많이 받은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 봐도 미국에서 자유는 절대 떼놓을 수 없는 키워드라 할 것입니다.

 

미국 철학자 샌델은 미국인답게 자유를 중심으로 미국의 정치윤리적 관점 변화를 고찰합니다. '자유'의 뜻이 경제적 변화에 따라 어떤 의미로 이해됐는지 건국기부터 현재(바이든 집권기)까지 시간순으로 살피면서 현대적 자유가 왜 나치 독일의 재림(도널드 트럼프)과 같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시 불러왔나를 살펴봅니다.

 

 

 

<그대의 자유는 어떤 것인가?>

 

위에서 쓴 것처럼 '자유'는 미국의 정체성 그 자체기에 미국에서 자유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를 파악한다는 건 미국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 샌델은 우선 자유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공화주의적 관점과 자유주의적 관점의 두 가지로 나눕니다.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자유는 바람직한 공동선을 따랐을 때 오는 결과로 '자치의 역량'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에 바람직한 공동선을 구성원들에게 함양시켜 시민으로서 자신을 지배하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역량을 갖추게 하는 것이 공화주의적 자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의 애국계몽 운동이나 일제시기의 야학 운동을 떠올리면서 '주권'과 '독립'에 가까운 자유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자유주의적 관점은 공동선 같은 특정한 관점 설정 없이 개인의 권리와 사상적 관용에 근거한 '제한 없는 행동'을 지칭합니다. 칸트가 이론적 기반을 만들어 롤스가 완성한 자유주의적 자유는 공화주의적 자유와 달리 내 안의 도덕 법칙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고, 요즘 자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이 의미로 이해하죠 간섭 없는 자유라는 면에서 '해방'이 이 개념에 가깝다 보시면 됩니다. 본문 중간에 나오는 자발주의적 자유도 불완전하지만 이 의미에 포함된다 보시면 되겠습니다.


샌델은 이러한 두 가지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들고 미국사의 주요 정치적 논쟁으로 뛰어듭니다.

 

 

 

<공화적 전통의 농업국가에서>

 

비록 미국의 주요 키워드로 금권을 꼽긴 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갓 독립한 미국은 농업국가로, 생산과 소유가 일치하고 영국의 압제에서 독립한 사람들에게 자유란 내가 먹고 살만한 것을 스스로 생산할 능력을 보유한 상황에서 강자에 대항해 자신을 지킬 능력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을 위시한 독립의 아버지들에게 자유란 당연히 공화주의적 자유를 의미했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을 자유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농업에 기반한 자유의 개념에 제조업에 추가된 건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한 연방주의자의 주장과 외국산 수입품에 대항하여 스스로 상업과 제조업을 일으키자는 움직임에서 비롯됐습니다. 처음에 독립의 아버지들은 제조업이 사치를 불러일으켜 공화주의 정신을 흔들 것이라 생각하여 상업과 제조업을 적대하고 자유무역을 통해 물품 수요를 충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제조업을 하지 않아도 외국의 제조업 제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결국 공화주의적 자유가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서 결국 미국이라는 신생국가의 자유를 지키려면 제조업과 상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빗대어 봐도 조선 역시 사농공상의 농업중심 체제를 유지하다가 대동법을 통해 교환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상업과 제조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걸 생각하면, 이러한 미국의 흐름 또한 무역을 하는 한 피할 수 없었는 필연적인 결과였을 겁니다.

 

제조업을 받아들인 이후 앤드루 잭슨 시기에 일어난 경제적 상황은 지금과 비슷한 면모가 있지만 이해관계자의 상황은 반대였습니다. 상인, 자본가, 은행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진흥을 주장했고 농민, 노동자, 직공은 정부 개입을 반대했죠. 보통 유리한 쪽이 움직이는 걸 반대한다는 걸 생각하면 여전히 공화주의적 가치관과 경제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노예제와 임금노동>


이러한 공화주의적 자유관이 크게 흔들린 첫 번째 계기는 바로 노예제 논쟁과 남북전쟁으로, 미국이 산업국가로 발전하면서 치른 큰 이 사건은 자유의 가치관 변화에도 상당히 중요한 지분을 차지합니다.


임금을 받고 일하는 북부 노동자가 과연 노예랑 무엇이 다른가는 노예제 논쟁에서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급자족하지 못하여 독립의 기반이 없는 것은 북부 노동자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의식주 및 소유로 인해 일어나는 말썽을 회피하게 해주는 더 교활한 장치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러나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이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사에 반대하는 일을 비자발적으로 하는 사람과 자발적으로 계약하는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겁니다. 가치관 자체가 달랐던 것이죠.

 

노예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통 농업을 하는 농장주로, 공화주의적 자유관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분명 자급자족할 기반이 없다는 면에서 노동자와 노예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을 겁니다. 반면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썼던 자유주의적 관점과 비슷한데 그들에게는 자신의 의사로 행동하는 것이 진정 자유였고, 그런 의미에서 노예와 노동자는 천지차이였던 겁니다. 논쟁 초기에는 이처럼 노예제를 둘러싼 양측의 주장은 전제부터 달랐기 때문에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평행선은 시간이 지나면서 링컨을 포함한 공화당 정치인들이 노동자에 대한 관점에 공화주의적 자유를 혼합하면서 북부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자발적 의사로 계약했을 뿐만 아니라 저축을 통해 향후 자유노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면에서 평생 비자발적으로 일해야 하는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분명 자발적 자유관을 버린 건 아니지만 공화주의적 기치를 근본으로 한다는 면에서 이전보다 더 세련된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기반으로 북부는 남부에 대비하여 이론적 우위를 점하였고 이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 임금노동을 정당화하고 산업 사회로 나아갈 사상적 기반이 되었지만, 순수한 공화주의적 관점의 자유는 이미 한 번 크게 상처입은 뒤였습니다.

 

 


<임금노동은 자유노동인가?>  


자유노동의 가능성을 약속한 북부가 승리했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의 고도화는 노동자들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환경으로 점차 내몰고 있었습니다. 신음하던 노동자들은 저항할 방법을 찾았고, 단합하여 두 번의 큰 흐름을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는 노동기사단으로, 이들은 8시간 노동, 노동자의 시민의식 함양, 생산수단의 공동소유 및 성과에 따른 분배 등을 통해 임금체계를 대체하고 공화주의적 자유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이미 거대해진 트러스트 앞에서는 너무나 미약했던지라 협동조합은 자본부족으로 사라지고 노동기사단 자체도 헤이마켓 사건의 타격으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두 번째 흐름은 헤이마켓 사건 이후 등장한 미국노동총연맹입니다. 이들은 현대 임금체계를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틀 안에서 노동자의 조건 개선을 도모하였습니다. 계약에 의한 자유노동을 인정하고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입각하여 행동할 뿐, 공화적 가치의 회복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담배노동조합장 아돌프 스트래서의 말이 이러한 그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대변합니다.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목표란 것이 없다. 우리는 하루하루 먹고 살 뿐이다. 우리는 단지 눈 앞의 목표들, 몇 년 안에 실현할 목표들만을 바라보며 싸울 뿐이다.(...) 우리는 모두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이렇게 노동운동의 흐름이 자발주의적 자유노동관으로 바뀌면서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버림받은 공화주의적 자유관은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진보주의 개혁운동과 공화주의의 쇠퇴>

 

하지만 공화주의적 전통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금권 정치의 폐해와 거대 트러스트로 인한 사회적 위기에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진보주의 개혁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는 공화적 자유를 복원하려는 움직임 또한 있었습니다. 

 

우드로 윌슨과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으로 대표되는 탈중앙화의 흐름은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자유로의 복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경제 권력을 쪼개고(트러스트 분할 등 반독점 운동) 이를 통해 노동자의 경영 참여(노동조합)가 가능한 상태를 실현함으로써 공화주의적 자유가 가능한 상태로 복원하려 하였습니다.

 

반면, 허버트 크롤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로 대표되는 신국가주의적 흐름은 경제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걸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규모도 커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시민권력을 되찾기 위해 힘을 국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류입니다. 다만 이들 역시 집중되는 국가의 역량만큼 시민적 역량 또한 배양하여 국가 단위로 공화주의적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들은 방법은 달랐을지언정 생산자로서의 시민의 역량을 향상시켜 공화주의적 이상을 실현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하지만 월터 웨일로 대표되는 또다른 흐름, 시민들의 정체성의 공통분모를 소비자에서 찾은 소비자주의 노선의 개혁가들은 생산자와 관련된 기존 공화주의적 미덕은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소비의 측면에서 소비자의 경제적 만족을 폭넓게 달성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는 가운데 진보주의 개혁가들은 거대 자본을 제어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는데, 샌델은 독점금지와 체인점 금지운동을 대표적으로 꼽으며 설명합니다. 독립소매점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체인점 금지운동은 시민의식 복원과 공화적 자유를 위한 마지막 투쟁으로서 결국 소비자 논리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독점금지운동은 시민의식 복원을 기치로 하였을 때는 힘을 못 쓰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기의 반독점국 수장 서먼 아널드가 거대 자본 규제에서 소비자 보호로 방향을 틀면서 성공하여 지금까지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운동의 성패가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명확했습니다. 공화주의적 자유가 설 곳을 점점 잃어간다는 것이었죠.

 

 

 

<대공황과 공화주의적 자유의 몰락>

 

진보주의 운동에서도 공화주의적 자유는 설 곳을 잃어갔지만, 대공황과 뉴딜은 거치면서 공화주의적 자유는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대공황 시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흐름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위의 진보운동처럼 탈중앙화와 신국가주의를 통한 공화적 조치였고, 세 번째는 케인스 이론에 따른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조치였습니다. 좋은 사회의 지향점을 제시한 기존 해결책과 달리 케인스는 특정 가치를 제시하지 않고 현상의 해결에만 집중하였죠.

 

처음에 루스벨트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대공황 해결을 접근하였습니다. 생산량을 조절하고 잉여농산물을 폐기하고 정부보조를 하면서, 산업부흥법을 통해 기업-노동자-정부 사이의 관계 정립을 통해 미국 산업을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대기업이 비협조와 소비자의 불만족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국가부흥청 소멸 후 뉴딜은 분권적 노선에 따라 진행됩니다. 테네시계곡개발청과 같은 자치기능이 있는 기관이 만들어지고 사적 권력의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공공사업지주회사법을 제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이 역시 1937년 생산량 감소와 주식시장 급락과 함께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루스벨트는 1938년부터 정부지출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을 주장한 케인스의 안을 받아들였고, 2차대전의 시작과 함께 천문학적 유효수요와 함께 미국이 불황에서 탈출하면서 최후의 승자는 케인스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건국과 함께 줄곧 미국인의 마음 속에 함께하던 공화주의가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샌델은 이를 두고 케인스혁명이라고 칭할 정도로 의미가 큰 사건이라 평합니다.

 

 

 

<절차적 공화정 속 자유의 빈 틈> 

 

케인스주의의 승리 이후 가치를 적극적으로 판단하는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몰락하고 절차적 공화주의가 대두됩니다. 가치를 설정하고 추구하는 공화정에서 가치 대신 절차가 최종 목표가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이 절차적 공화정은 존 롤스에 의해 확립된 이후 현재까지의 미국의 지배적 가치관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자세한 설명은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3부 해설(1) 참조). 그러면서 자유의 개념도 자유주의적 자유로 정착했죠.

 

미국이 전후부터 베트남전 이전까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 절차적 공화정과 자유주의적 자유는 풍요, 인권 향상 등 다양한 사회발전을 이루고 미국인을 해방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패배하면서 가치의 공백은 그 구멍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가치를 잃어버린 미국인들은 스스로 수습할 역량을 잃은 채 패배감, 상실감과 혼란에 빠져버렸다고 샌델은 지적합니다.

 

가치가 비어버린 혼란에서 신자유주의를 위시한 자본주의 세력은 '세계화', '금융화', '능력주의'의 세 가지 교리를 제시합니다. 공화주의적이지도 않고 소비자 지향적이지도 않은, 월스트리트를 위시한 금융세력이 주도하는 이 특성은 세계화를 통해 어디에서든 돈을 빼기 쉽게 만들고 금융화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능력주의로 자기들의 위상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들의 횡포로 미국의 근간 제조산업은 황폐화되고 서브프라임 위기에서도 아무런 책임없이 살아남았으며 능력이라는 허황된 사다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횡포와 혼란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분노와 증오, 원한으로 이어져 2016년 트럼프 선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가 취한 조치들은 기만의 연속이었죠.

 

 

 

<불변하는 것은 없고, 논의 못 할 것도 없다>

 

샌델이 이제 제시하는 것은 금융세력이 주장하는 세 가지를 타파하고 공공철학을 새로 구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현재의 절차적 공화정은 시장의 왜곡 등 도덕적 문제조차 공적 토론의 영역에서 빼 버리고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 하게 마비시킵니다. 하지만, 케인스혁명으로 인해 기존 공화주의적 자유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워진 것 또한 사실이죠. 그렇다면 절차적 공화정에 공화주의적 자유를 가미하여 적극적으로 가치판단을 하여 바람직한 가치를 찾는 것이 최선의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이 샌델의 의견입니다.

 

과거 세계화에 대한 논쟁이 뜨거울 때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름이 지난 뒤에 과연 가을이 올까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가을은 사실상 멸종하고 기후변화의 영향을 우리는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습니다. 불변의 진리로 보았던 것조차 논의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삶을 지배하는 힘을 불가피한 걸로 보지 않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며 샌델의 책은 끝을 맺습니다.

 


 

<현실과 해결책을 잘 녹였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이 필요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회의적으로 바라봤던 부분은 '미국적 가치가 주제인 책이 과연 우리나라에도 통용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위에서 썼다시피 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자유인데 다른 나라 사정과는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 읽고 난 저의 답은 '일단 yes'입니다. 케인즈까지 다루는 5장까지의 내용은 그냥 미국 정치윤리사의 샌델 해석본으로 생각하면 되고 6~7장의 내용은 월스트리트의 세계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친 내용이기 때문에(특히 능력주의) 적용이 가능하겠다는 생각 들더군요.

 

단적으로 우리나라는 비록 입시를 위한 입시라는 비판은 있어도 학업 수준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편인지라 미국하고 대조해서 보면 됩니다다. 샌델식으로 해석하면 적극적 가치판단을 할 역량이 있는 상태인 사람이 그래도 많은 거죠. 이에 반해 미국은 레이건 때 공교육을 박살낸 이후로 정말 능지처참이 어울리는 수준이 되어 버렸고요. 트럼프 같은 폭력적 극우사상이 미국에서는 주류까지 올라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딱 한 번 수면 위로 오른 뒤로는 사람취급 못 받는 것처럼 미국도 시민역량이 한국 수준으로까지 상승한다면 그런 극우사상이 발호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들고, 그런 면에서 샌델의 처방이 현실에서도 유효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샌델의 해결책 이후가 문제입니다. 시민적 역량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정치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하여 있고, 정치는 극단적 포퓰리즘에 치달으면서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이러한 민의의 왜곡이 샌델이 제시한 보완된 절차적 공화정만으로 해결 가능할까요? 혹여나 해결 가능하더라도 그 수준까지 사람들이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소양을 쌓아야 할까요? 이 부분은 '이 책을 읽은 한국인들'에게 과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샌델을 한 권만으로 이해한다면 가장 좋은 책>

 

개인적으로 샌델의 책은 이번이 다섯 권째인데, 이 책을 줄기로 다른 책들이 뻗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책 내용의 부분부분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면서 한 쪽으로는 반가웠고 한 쪽으로는 이런 책이 이제 출판되었나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나머지 책들은 샌델 사상의 파편을 줍는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샌델 사상의 몸통을 직접 만지는 느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역사적 사실을 주로 열거하다보니 겹쳐서 떠오르는 것도 있는 흥미로운 책이기도 했습니다. 제 경우는 산업혁명으로 생산수단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면서 일어난 가치관의 변화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일부가 떠오르고, 체인점 금지 운동에서 등장했던 판매가격 제한제도는 우리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도서정가제가 생각나고 그렇더군요.

 

다만 와이즈베리가 한역하면서 출판하면 제목에 의역을 많이 하는데, 이번 제목인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는 그리 맘에 들진 않았습니다. 아마 민주주의의 위기 이면에 있는 경제현상과 윤리적 변화가 보통은 인지하기 힘드니까 이런 제목을 지은 것 같은데, 이전의 「공정하다는 착각」과 달리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네요. 그래도 부제에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을 달아둔 거 보면 적절한 제목을 찾기 어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은 듭니다(사실 민주주의의 불편이라고 또 쓰면 옛날 거 재판인 줄 알고 안 사는 사람도 있고, 제목이 재미없으니 안 사는 사람도 있고 그러겠죠).

 

만약 샌델을 단 한 권으로 가장 많이 이해하고 싶다면 전 이 책을 추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전의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아니고 역사적 사실과 인용문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특별히 생경한 용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책 자체가 어렵지 않거든요. 사전지식 없이 샌델을 이해하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미국 정치윤리사에 관심있는 분에게도 흥미로운 서적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긴 감상문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쓴 감상문 가장 오래 걸렸네요.

님의 서명
내가 흔들리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된다.
12
Comments
2023-11-16 18:58:03

미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발달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파블로브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모르겠군요

저는 얼마전 갑자기 삘이 와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을 주문했는데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어요

지도자로서 모범에 가까운 사람중 한명이 아닌가 싶었는데 글래디에이터 ost 듣다 보니 확 삘이 왔습니다

WR
1
2023-11-16 19:04:41

그 얘기가 책에서 빠지진 않습니다. 금권정치로 인한 민의의 왜곡과 오바마가 금융위기의 책임이 있는 금융사에 면죄부를 준 만행까지 다 나와요. 샌델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 못 하는 걸 얘기하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아서스 님 말씀처럼 지금은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부각되어 보이는 게 맞습니다.

2023-11-16 20:12:25

1990년대부터 한국에서 자유 또는 자유주의 논쟁이 있었고 현재도 정권에 따라 자유를 주창하기도 하는데 공화주의적 자유는 그래도 의미가 다가오는데 자유주의적 자유는 뭔가 부자연스럽고 내용없는 용어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라고 번역하니 더욱 이상하고요.
소개해주신대로 미국사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이긴 한데(제가 알고있는 미국사의 반대되는 측면도 있고) 뭔가 걸리네요.(물론 이 글을 써준신 자명종님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성스레 요약해주시고 견해도 덧붙이셔서 잘 읽었습니디)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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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1-17 08:59:58

자유주의적 자유를 영어로 치환하면 Liberty in Liberalism인데 간섭이 없는 해방 정도로 이해하시면 편할 겁니다. 자유경제원이 좋아하는 그 자유가 이 개념에 해당합니다. 말씀도 있고 하니 본문은 고쳐 놓겠습니다.

 

일단 샌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 책이니 그 점은 감안해야 하고, 번역상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철학과 김선욱 교수가 감수한 것이기 때문에 번역상 심하다 싶은 부분은 크게 없었습니다. 사실 민주주의 문구가 많이 나오지도 않아요. 민주주의가 기본인 걸 깔기 때문에 마지막 장 가서야 트럼프와 월가 얘기하면서 좀 언급하기 시작하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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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1-17 03:53:44

최고입니다. 어디가서 센델 신간에 대한 이렇게 정치하고 독자적 비평이 가미된 해설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제 예측이지만 센델의 책에 있을 해설도 이보다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네요. 거기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직업적 스트레스 하에 독해되고 작성된 글이라 더 값지다 생각합니다. (사실 그 때 글을 읽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 글이 한참 미뤄지겠구나 한 것이었는데 기우였네요.ㅎㅎ)

 

사실 저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다른 철학 분과들만큼 크게 흥미를 느끼는 편이 아니라 이런 논의의 맥락을 잘 모르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근현대사적 맥락에서 자유의 개념과 실질적 향유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설명을 들으니 정말 엄청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센델의 이 책은 물론이고, 미국의 대공황기에 대한 책이나 FDR의 전기라도 사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다만 탈중앙화와 신국가주의가 공화주의적 자유의 가치와 비전을 지키기 위한 정치경제적 방향설정이라는 건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들이 연결되는지는 이 글만으로는 알기 힘들었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해설을 해주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철학의 제 분과들 중, 논리학, 인식론-존재론, 형이상학 등에 더 흥미를 느끼는지라 자유에 대해서도 정치적 자유의 개념 보다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에 더 흥미를 느낍니다. 보통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론을 주장하는 측 중에서도, 데닛 같은 학자는 진화를 통한 자유의 확장(이는 전통적 자유를 대체하는 것으로 '의지적 자유freedom'라기 보다 차라리 자유도自由度degrees of freedom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데닛은 이것을 여지Elbow room라 표현했죠. 한편으로는 농담삼아 "I can't believe it's not butter"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공화주의적 자유와 일부 공유하는 개념이 있네요. 사실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진영이나 부정하는진영의 차이는 바로 자유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홉스와 흄에서부터 기원하는 결정론-자유의지 양립론자들은 자유를 '의지적 자유freedom"라고 생각하는 반면 양립불가능론자, 즉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진영은 자유를 그 모든 법칙성과 결정론"~으로 부터의 자유liberty"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구약에 나타난 유태인의 고난 등, 거의 모든 민족신화에서 나타나는 고난과 극복의 서사도 사실 이러한 자유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일테고요.(과거 마르크시즘의 계급서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사실 형이상학적 자유 개념의 여러 분파들이 윤리학이나 정치철학들의 자유의 개념과 1:1대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아 그 난맥을 정리해서 개념의 형성사를 정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한 번 아마추어리즘을 발휘해 해보고 싶은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근대 이전까지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이 범위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사회윤리와 행위의 당위성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정치철학은 윤리학의 하위분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또한현재 와서 윤리학은 여전히 철학의 분과로 남아있는 상황이고 고대의 정치철학의 고유한 분야, 즉 권력, 정체, 국가 등의 작동기전을 다루는 구체적 문제들은 이미 사회과학으로서의 사회학에 넘겨주고, 정치철학은 윤리학의 결론들을 넘겨받아 정치학적 주제를 해석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일종의 메타정치학으로 기능하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철학이 윤리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윤리학자가 아닌 정치철학자가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다시 한 번 잘 읽었습니다. 상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친절하고 깊이있으면서 재미까지 있는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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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1-17 08:45:13

이리 극찬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사실 책에 있는 해제는 제가 예전에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에 쓴 내용하고 비슷했던지라 그래도 내가 샌델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게 맞구나 하며 넘어갔습니다.

 

저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말씀을 보니 지칭하는 자유의 개념이 달라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확 드네요. 전자의 자유라면 자유의지라고 부를 여지가 분명 있다는 생각이 저도 들면서 이런 거 보면 세상 개념들이 다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도 같이 드네요.

 

1.  탈중앙화와 신국가주의가 어떻게 공화주의적 자유를 지키려 했나?

아마 공화주의적 자유의 다른 부분은 다 이해하셨을 거라 생각하고 쓰겠습니다. 공화주의적 자치를 실현하려면 물질이건 지식이건 본인이 소유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근본이었고 그러려면 권력 또한 분산되어 있어야 공화주의적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보셨다시피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시설 같은 경제권력은 독점자본에 집중되게 되었고, 이러한 현실에서 경제역량을 독점자본에서 되찾기 위한 운동이 두 방향으로 일어난 것이죠.

 

탈중앙화의 방향은 보다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자유로의 복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경제 권력을 쪼개고(트러스트 분할 등 반독점 운동) 이를 통해 노동자의 경영 참여(노동조합)가 가능한 상태를 실현함으로써 공화주의적 자유가 가능한 상태로 복원하려 한 운동입니다.

 

신국가주의의 방향은 경제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걸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규모도 커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시민권력을 되찾기 위해 힘을 국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류입니다. 다만 이들 역시 집중되는 국가의 역량만큼 시민적 역량 또한 배양하여 국가 단위로 공화주의적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샌델은 체인점 금지운동과 독점금지 운동은 이 둘을 따로 분류하여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방향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주나 지역단체 차원, 어떤 때는 연방 차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마 구별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문을 보니 그 부분의 설명이 부족해 보이긴 하네요. 이 댓글 후에 추가해 놓겠습니다.

 

 

2.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구분에 대하여

정치철학의 시초라 불리는 마키아벨리는 민중을 위한 윤리라는 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주장한 정치철학을 보면 실현방법들이 단순하게 윤리학의 실천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구석들이 많죠. 일단 시작은 구별되었던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대에서도 구분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rockid님과 생각이 비슷합니다. 철학이 자기가 다루던 것을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다른 학문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마키아벨리가 다루었던 수단적 부분은 정치학으로 넘어가고 지금의 정치철학은 윤리적 문제를 어떻게 실천하느냐를 다루는 메타적 성격을 주로 띠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또 윤리학 없는 정치철학이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예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윤리학이라는 건 사회의 구성을 기본전제로 한다 생각하는데 그 전제를 깨버리고 원자적 개인을 기본으로 상정하고 그 개인의 행동양식에 대해 논한다면 그건 윤리학적 요소가 없는 정치철학이겠죠. 전 그래서 로버트 노직의 초기 자유지상주의는 윤리학이 아닌 정치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이후로 다행히 상위부처에서 기한을 연장한 덕에 징계는 안 가고, 그래도 그 때 무리한 것 때문에 몸이 아파서 병휴가를 잠시 쓰고 있습니다. 그 잠시동안의 여유에 책 읽으면서 써봤네요. 신경써주신 점에 한 번 감사드리고, 그래도 아는 거라고 쓴 글에 이렇게 칭찬해주신 것에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1
2023-11-17 10:53:28

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이해가 잘 가네요. 그러나 제가 미처 명료하게 질문을 가다듬지 못해서 가지고 있었던 의문(케인즈주의는 국가주의와 상관이 없는가?)과 대답을 듣고 새롭게 생긴 의문이 좀 더 있네요. 

 

1.

윌슨의 탈 중앙화와 루즈벨트의 국가주의가 자본의 독과점을 해소하고 공화주의의 복원을 위해 한편에서는 자본권력의 분산을 시도했고 한편에서는 집중괸 자본을 견제하기 위한 국가의 기능을 강조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케인즈의 유효수효 창출을하는 것도 국가의 시장개입을 통한 경제의 통제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국가는 정부지출과 중앙은행의 통화관리를 통해 물가를 조절하는등 시장을 관리하여, 특정자본이 시장을 통제하여 막대한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시장이 실패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정부에 대한 시민의 지배가 확고하다면, 이런 국가의 권한도 넓게 보면 국가주의가 지향하는 시민의 자유증진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째서 센델이 케인즈주의의 승리를 공화주의적 자유의 후퇴로 보는지 여전히 의문입니다. 추측을 해보자면 케인즈 주의의 시장개입이 기존 루즈벨트와 크롤리의 구상보다 현격하게 약화된 국가의 역할이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자세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공화주의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센델은 어떤 국가적 역할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또 어느 정도의 강력한 권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도요. 또 그러한 국가의 권력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센델과 자명종님의 전망도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심정적으로는 경제분야에 있어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실은 너무나 복잡해서 개입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잘못된 개입이 시장을 도리어 혼란으로 끌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국가주의적 비전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러한 개입으로 인한 시장 실패에 대해 어떤 대응책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케인즈주의자들의 정부지출 확대와 통화주의자들의 통화량 관리도 아마도 국가주의적 방법론들보다는 다소 약한 개입일 것 같은데 사실 현재 경제 상황은 그것도 시간이 지날 수록 더 효과가 적어지고 있으니까요. 마치 항생제나 진통제를 쓰는 것처럼 이미 시장이 학습을 한거죠.  

2.

저는 윤리학이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노직의 자유지상주의가 사회와 상관이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자유지상주의도 결국에는 자신과 타인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승인을 목표로 투쟁하고 그래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이란 제한 조건이 붙잖아요. 또한 윤리학은 주로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당위성을 따지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 철저하게 사적인 인간 행위의 당위성도 윤리적 주제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남에게 줄 수 없는 재화를 개인이 사용하지 않고 버리는 일은 정당한가?"같은 질문도 윤리학적 주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죠. 따라서 윤리학을 포함하지 않는 정치철학적 주제가 있다는 주장은 잘 이해도 안가고 동의하기도 어렵습니다. 

 또 마키아벨리 이전의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에서도 정치철학은 언제나 그 대상-권력, 정체, 국가 등등-의 메커니즘의 효율성과 정당성을 다뤘습니다. 이때 그 당위는 언제나 윤리적 판단에 의거했고, 그 윤리적 판단은 형이상학적 근거(예를 들면 이데아, 원자론, 데미우르고스, 부동의 원동자 등등)를 가지고 있었죠. 때문에 현재의 과학이 생물학-화학-물리학 등의 계열을 통해 환원될 수 있는 것처럼, 정치철학도 윤리학과 형이상학 등과 비슷한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고전시대 등 근대 이전의 정치철학이 윤리학의 하위분야가 아니냐고 했던 것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생물학이나 화학은 물론 그 방대한 분야로 인해 고유의 연구분야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기초적인 학문인 화학과 물리학과 완벽하게 부합되어야 하고, 응용학문의 법칙들은 기초학문의 법칙들로 환원되어 수직계열체계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계열에서 툉겨져 나가 더 이상 과학이 아니게 되죠.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의 분야는 현댜과학보다 훨씬 제한된 주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형이상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정체는 어때야 하는지, 어떤 권한과 기능, 구조, 크기를 가져야 하는지 모두 형이상학적 이유를 가져다 댑니다. 물론 그 구체적 실현방안등의 방법론들은 정치철학의 고유영역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윤리학을 벗어난 정치철학은 물리학을 벗어난 화학이나 생물학처럼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시는지 아니면 다른 입장을 가지고 계신지, 그리고 센델이나 롤스, 메켄타이어 같은 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제가 너무 귀찮게 해드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온라인에서 자명종 님말고 이 정도로 자신의 전공이나 관심분야에 대한 의문을 귀찮아하지 않고 토론에 응해주시는 분이 많지 않아 염치불구하고 여쭙니다. 사실 자명종님이 글을 올르시면 글을 읽는 재미도 있지만 의문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토론하는 재미도 놓지기 힘들거든요.  

WR
1
2023-11-17 13:31:40

저같은 경우에는 온라인뿐아니라 오프라인에도 말할 사람이 없어서 창구가 이런 글뿐인지라 에너지는 좀 들어도 이렇게 얘기하는 게 남는 것도 많고 괜찮습니다. 

 

1. 케인스의 유효수요 창출과 신국가주의의 차이점

이 부분은 샌델의 철학을 관통하는 두 개의 단어, 공화주의적 자유와 절차적 공화정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 신국가주의는 공화주의적 덕목을 국가에 대입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국가주의에서 주창한 구호를 보면 8시간 노동/여성참정권 및 여성을 위한 최저임금/상속세/노인·장애인을 위한 별도 사회보험 등 적극적 가치판단이 가미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진보와 보수라는 틀 내에서 설명 가능하며 정치적인 구호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 케인스의 유효수요는 사회에 대한 가치판단이 없었습니다. 단지 불황 타파를 위해 유효수요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국가의 천문학적 지출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지원 대상이 기업이니 국가이니 판단하는 건 집행부의 의지 문제였고, 진보니 보수니 하는 문제는 자유방임주의 철폐에 대한 당시 각 정파의 입장이었을 뿐이었죠. 실제로 1944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토마스 듀이조차 완전고용이 국가정책의 첫 번째 목표라 천명하고 정부지출을 달성 수단으로 꼽았고, 이러면 1920년대부터 보수로 바뀐 미국 공화당이 왜 아이젠하워 시기 현재는 진보적으로 보이는 정책을 꾸렸는지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국가의 역할은 커졌지만 그 사이에서 덕성 함양 등의 공화주의적 역할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샌델은 공화주의적 자유의 패배를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시장 통제가 국가의 개입일지언정 정치적인 메시지는 아니라고 한 것이죠. 그는 경제적 입장에 정치가 가세한 것이지 특정한 경제적 입장이 정치에 묶인다고 보진 않았습니다.

 


2. 보완된 절차적 공화정을 위한 국가의 역할

이에 대해서는 샌델이 여기보다는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에서 많이 할애하였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공동선의 정치'로 얘기하는데, 그 예시로 든 것들은 시민의식 증대를 통한 연대/시장의 도덕적 한계 인식/도덕에 기초한 정치입니다. 예전에 보신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3부 요약 두 번째에도 이런 얘기가 좀 나오죠. 거기서는 존 듀이를 인용하면서 교육을 통한 시민의 가치판단 역량 증가를 그 중에서도 가장 명확하게 주장했고요. 결국은 특정한 구원자가 아닌 시민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게 샌델이 가장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국가의 역할입니다.

 

 

3. 윤리학에 대한 전반적 입장

사실 저도 학부 때 관심있던 건 윤리학이 아니었습니다. 샌델을 통해 윤리학에 발을 디뎠고, 샌델을 보다가 다른 윤리학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다른 윤리학자의 입장을 깊게 알지는 못합니다.

 

로버트 노직에 대하여 제가 비판한 부분은 찰스 테일러의 주장을 일부 인용한 것이었는데, 인용하면서 어투가 조금 강했던 듯합니다. 일단 사회와 상관없다고 읽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정을 좀 해야겠네요. '노직의 말대로 하는 건 반윤리적이기에 덕성을 다루는 윤리학의 범주에 들어가면 안 된다'라고요. 노직은 정의의 원리에 따른 정당한 소유는 침범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정당한 소유에 대해서 얘기한 거 보면 뭔 소린지도 모르게 돌려쓰고 있는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 보니 능력 외의 변수는 고려하지 않은 듯하더군요. 능력대로 소유하고 침범하지 못하면 무능력자는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는데 이거 어디 만 자 거꾸로 돌려쓰는 단체에서 한 얘기같지 않나요? 그래서 이건 윤리학이 아니라고 한 거였습니다.

 

그 외 정치철학이 윤리학의 하위학문이냐, 아니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인간사를 실현하는 데 정치가 필수 수단이다보니 보통은 연결될 수밖에 없기에 노직의 자유지상주의처럼 윤리를 버리지 않는 이상 정치철학은 윤리학 아래에 들어올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대체적으로는 rockid님과 비슷한 견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마키아벨리 이후로 정치철학은 정치학으로 아예 분리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다시 보니 경영철학이라는 희한한 말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만족스러운 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제 의견 적어보았습니다. 예전에 전공공부할 때 머리가 지끈거리는 때가 많았는데 rockid님과 이렇게 주고받을 때면 그 정도는 아니어도 머리 에너지를 엄청 쓰는 느낌이라서 좋습니다.

1
2023-11-17 14:16:40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이제 정확하게 반중심주의, 신국가주의와 공화주의적 자유와의 관계, 그리고 케인즈주의가 어제서 국가주의와 관련이 없는지에 대해서 잘 이해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케인즈주의는 국가행정기능의 강도는 더 세졌을 망정 시민의 주체적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한 방향성과 비전은 부족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공화주의적 자유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이군요. 확실히 설명해주신 신국가주의 정책들을 보면 경제적 평등과 복지에 대한 방향성이 선명하게 보이네요. 

또 어떤 의미에서 노직의 사상이 "윤리학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지도 이해가 갔습니다. 저는 여전히 사전적 의미에서 노직이 정치학자이며 윤리학자이기도 하다고 하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자명종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예를 들어 아주 정치적인 판사나 검사가 이너서클의 이익을 위해 법을 유린한다면 사전적으로는 몰라도 저도 저게 무슨 법관이냐 할 것 같습니다.

 글을 읽고 느낀 의문점들도 명쾌하게 해소할 수 있어서 좋은 대화였습니다. 정말 이렇게 자신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 책임감 있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네요.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WR
1
2023-11-17 15:13:59

저도 항상 제 글에 관심가져주시는 rockid님께 감사드립니다. 궁금하셨던 점이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1
2023-11-18 02:11:20

소중한 본문과 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샌델이 주장하는 방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데 안도감을 느꼇습니다. 

WR
2023-11-18 05:47:53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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