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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Liquid Modernity / The Colonization of the Lifeworld / Cultural ca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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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4-01-30 06:42:51

세포 수준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유동성, 와중에 계급은 상속되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결혼이 꼭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 경향입니다. 마치 오디오 취미가 실용주의와 음질주의로 나뉘는 것처럼^^ 결혼과 출산을 사랑과 행복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으로 보는 사람들과 사랑의 증명과 최소한의 행복을 보장할 재화의 보유여부가 잣대가 되는 사람들로 나뉘기 때문에 지레 단념하는 층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내 사랑을 내 삶 속에 구현하는데 요구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높습니다. 

 

그런 단념 또는 박탈감을 전제로 페미니즘과 여혐이 대립하고 맞불로 남혐도 출현하면서 겉으로는 복잡한 듯 보입니다. 출산율 저하는 지배자의 관점으로 보는 통계결과일 뿐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개인의 행복이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역사의 발전이 어떻게 됐든 현재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어떻든 지금을 살고있고 앞으로 살아갈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은 이전과 다릅니다. 행복할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이런 유체이탈언어를 구사해서라도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들에 비해 낡은 법이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젊은 의식의 변화를 통념이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이전에는 당연시 됐던 것들이 지금 또는 근미래에는 그렇지 않음을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성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989년에 해외여행자유화가 됐던 것이나 요즘의 비트코인, 인공지능과 퀀텀컴퓨터 등은 좋은 예시이자 기존의 틀은 깨는 '어제는 없던 것들'이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서 예시들에 대한 개별적인 다툼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원하지도 않음을 미리 밝힙니다.

 

검색해서 나온 어떤 글에 유동성 근대/현대에 대한 번역논란이 있던데 그냥 Modernity로 이해하면 논란은 끝 아닌가 합니다. 모더니티 안에 고착된 어떤 것이 있고 여전히 그렇게 보이는 것과 흐물거리거나 부숴지고 있는 것이 공존하고 있는 게 지금입니다. 출산율, 결혼, 성 정체성 등이 그런 것이 현재진행형인 것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줍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때 쩡 쩡 울리다가 부숴지고 녹는 호수의 빙판이 생각납니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공론장 또는 사적 공간의 내적 식민지화를 이야기 한 것도 사실 같은 것을 약간 다른 시점으로 본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전통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꿋꿋하게 구현하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반면 기존 사회 시스템 속 계급이라는 것이 엄연히 있고 사용자가 경제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잉여를 수확하려는 구조 속에서, 그 고착을 벗어나려는 젊은 세대들이 유동성을 일으켜 고착화된 기득권을 이용해서 사회시스템의 합법적 식민지화를 항구화하는 흐름에 저항하는 모습이 바우만과 하버마스가 사실은 같은 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예를 든 것은 예시의 하나일 뿐이지 광범위한 철학적, 사회학적 개념과 등식으로 성립하지 않는 것 정도는 이해해주실 거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소비에트의 붕괴로 이념 자체가 식민지화 됐음을 이제 느낍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졌다고 개인들의 행복이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사용자들의 걱정이 사라진 것이죠. 골치거리인 반대의견 하나가 없어진 자본주의의 제어장치가, 고삐가 풀린 격이죠. 어떤 체제든 개인의 행복에 대한 여지를 조금만 터준다면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왔습니다. 곁길로 빠지지 않고 원래 이야기로 되돌아가야겠네요.

 

세상은 더 복잡하고 바쁘며 즐길거리가 초단위로 새로 나옵니다. 모두가 다른 의견인 게 당연하고 각 자의 행복은 모두 종류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의 소멸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고도화되어 인터넷 발달과 더불어 세계가 1일 생활권으로 바뀐 현재는 대항해시대에 식민지확장경쟁에 나섰던 제국주의가 이제 Cell 단위로 보편화되어 침투했음을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생활합니다. 자유롭지만 수사적 표현으로 '2% 노예'임을 인정하지 않아도 구조 속에서 노예화 됐습니다. 그게 위버마스가 말한 것과 동일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현상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적 자산 같은 것은 사실 체계화된 설명 이전에 이미 우리들이 알고 느끼고 보는 것들입니다. 대가집 종손, 몇 백년을 물려받는 고추장, 식초, 명가의 예절 등 '남다름'과 '고상한 것'들이 전통이란 이름으로 세습되는 것을 흔히 보잖아요, 지금은 상품화로 전환됐고 '돈'을 벌어들입니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경향 같은 문제들이 현상이 아니고 결과이며 자본주의 속성에 말미암은 필연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논란과 다툼들이 사실은 한 가지 전제와 방향이 없이 의견이 모아지지 않는 곤란한 상태에서 발생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 더한 위기나 극한 대립의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럴 것이라는 것, 유동성이라는 완곡한 표현이 사실은 ㅠ가 뒤집혀 '요동'하는 현대라는 것이고 우리가 자전하는 지구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요동의 여파가, 보일러가 실내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 방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저에게처럼,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처럼 느껴질 리가 없겠습니다. 

 

혁명은 전설 속에나 회자되고 코로나가 길들여져 감기 정도로 지나가듯이 노예라는 바이러스는 이제 백혈구와 장기나 바둑을 두고 있겠죠. 우리 핏줄 속에서요, 핏줄의 전승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강물에서 점차 실개천화되고 있고요.

 

일요일 아침 진한 커피향이 아직 입에서 가시지 않은 짧은 시간,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저에겐 얼마만큼의 세습 또는 획득한 문화자산이 있으며 몇 프로의 노예화율이 진행됐을까요. 계량화되지 않는 것임에도 말로는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요. 명상을 통해 없앨 원초적인 두려움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해도 구조 속에서 진행된 이 질긴 틀은 인지의 대상이면서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고 자유를 억누르기도 하면서 자유를 보장하기도 합니다. 삶 속에서 모르는 것보다는 좀 낫겠죠.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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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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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2-11 04:04:22

사랑과 결혼과 행복에 대한 최고의 묘사가 하나 떠오릅니다.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태인 주인공의 첫째 딸이 돈 많은 푸주간 늙은이의 청혼을 물리치고 소꼽친구이자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양복장이 남자와 결혼해서 결국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 아버지는 자기 딸과 사위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자신의 신에게 이렇게 독백하지요.

 

"겨울철의 다람쥐처럼 (찢어지게) 가난한데도 그 아이들은 (함께 같이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몰라요." - (...) 부분은 영화의 대사에는 없지만 제가 멋대로 추가한 것입니다...ㅎㅎ

 

역시 소설이나 영화 같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겠죠?

아님 물질에 대한 기대와 욕망이 지금과는 좀 달랐을 과거에는 이런 낭만도 충분히 가능했을지 모르겠습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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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2-11 07:28:32

정신승리가 조롱의 도구로 쓰이기 시작한 것 자체가 삼가했던 과거와 다른 것이죠, 소확행이라는 것이 미래가 없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하나의 숨쉴 틈이 될 수 있던 것도 이젠 플렉스와 스웩 너머로 퇴색해버렸죠.

찢어지게 가난해도 사랑의 도피처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게 과거 평균이라면 지금은 혼밥혼술과 LGBTQ로 흩어졌고,

비혼주의와 무자식상팔자로 퇴각한 사랑과 번식의 현실이 결국 고도화한 자본주의의 자충수로 기인했다고 보면,

막을 수 없는 어떤 임계점까지의 악화는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납니다. 그게 역사적인 용어 하나로 어느 순간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성에 의지해 생각하게 됩니다.

1
2023-12-11 10:43:32

 

이 글을 보고 있으니 문득 다음 대사가 생각나는군요. 

That you are a slave, Neo. Like everyone else you were born into bondage. Into a prison that you cannot taste or see or touch. A prison for your mind.

 원 기획 의도를 가장 충실히 반영한 1편의, 가장 중심이 되는 배경 설정의 핵심 설명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부분입니다. 

믿어왔던 가치들이 언젠가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로 대체되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인간이란 것은 또 다시 무언가의 가치에 종속되는 길을 맹목적으로 달리곤 하지요. 

누구보다도 자유롭다고 스스로 믿지만, 어떤 가치에 속박되어 행동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결국 자유롭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평생을 '마음의 감옥'안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은, 넓게는 여러 사회 현상에서도, 좁게는 이곳 게시판에서도 쉽게 목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에 얽매이는 것도, 그런 자박의 일종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보곤 하네요. 물론 이건 본문 말미의 커피 이야기에 편승한 조금 짖궂은 농담입니다.)

WR
Updated at 2023-12-11 10:48:56

전두광의 본능에 충실한 대사가 있었죠.

안간은 말이야 누군가 강력하게 리드해주길 바라잖아.(기억소실로 대충 작문)

새끼 캥거루가 주머니로 들어가듯 중요선택권을 쉽게 위임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죠. 자질구레한 불평은 위임자의 실권없는 특권이고요.

Updated at 2023-12-11 10:56:56

네. 그러고선 스스로를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지혜로운 자'로 평가하고, 선택권을 위임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경멸하지요. 마치 사이퍼처럼 말이에요. (얼마전 여기서도 그런 광경을 목도하기도 했었네요)

그런 위임자들이 매트릭스를 보고, 사이퍼의 행동을 봤을때 어떤 평가를 했었을지 문득 궁금해지곤 합니다.

 

서울의 봄은 아직 보질 못했는데, 일본에서도 빨리 개봉했음 좋겠네요.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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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12-11 11:06:53

갖은 군상의 연구자료로도 정말 훌륭한 영화입니다. 좋은 시절이라면 괜찮은 블랙코미디로 평가되겠지만 다큐요, 신파요, 판타지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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