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45년 후(스포)
영화를 보면서 이 작품을 본 국내의 노장 남녀 배우들은 이런 연령층을 중심으로 이 같은 이야기를 꾸며 낼 수 있는 영국의 영화 산업이 참 부럽지 않을까, 싶었다. 굉장히 단순한 계기를 가지고 한시간 반 동안 전개되는 뛰어난 심리 드라마이자 가정극이었는데 다루는 소재가 단순하고 텔레비전 단막극 같은 실용적인 구조에 극장용 영화같다는 생각이 안 들 때도 있었지만 잔 멋 부리지 않고 한 호흡으로 끌고 가는 응축력이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해외나 국내나 나이 든 배우가 주역급으로 설 자리가 협소한 상황인건 매한가지지만 상대적으로 국내의 토양이 척박한게 사실이다. 이런 열악한 현실에서 영화 45년 후는 눈물샘이나 자극하려는 뻔한 모녀 신파극이나 흔한 치매 소재, 과시적으로 표현되는 노인들의 연애, 부모, 자식간의 관계망을 통해 감동을 일으키려는 일차원적인 노년 소재물이 아니라는 점이 이채로웠다. 음폭이 적은 진지한 가정극이고 고요한 심리드라마라 얼핏 보면 특출난 지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작품의 남녀 주인공의 심리 노선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간결함으로 포장된 섬세한 여백에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오로지 노년의 남녀가 중심이 되어 그들간에 오가는 심리 묘사에 무게를 기울인 점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국내에서 이 작품이 리메이크 된다면 무보수로라도 배역을 맡고 싶다고 서로 나설 60대 이상의 남녀 배우가 차고 넘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노년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펼쳐지는 심리 묘사가 훌륭한 작품이다. 영화 45년 후가 시간이 흘러서도 오래 기억되는 작품으로 정착된다면 그 나잇대 배우들과 그 나잇대까지도 연기를 하고 싶은 배우들에게 또 다른 식의 황금연못 같은 마스터피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것이다.
상업성은 떨어지겠지만 저예산으로 절충을 하고 보기 삼아 모험심을 발휘하여 국내에서 리메이크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규모가 5억 미만으로도 제작할 수 있을것같다. 출연진도 적고 배경도 간편하다. 특히 두각을 나타낸 샬롯 램플링이 맡은 여주인공 역은 샬롯 램플링 만큼이나 잘 소화할 수 있는 국내 여배우들이 많을것이다. 영국 영화로 한번 끝내기엔 소재를 펼쳐나가는 추진력이 아까운 작품이다.
이야기는 굉장히 단순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45년이나 같이 살며 백년해로를 지키고 있는 60대 후반 혹은 70대 초의 중산층 노년 부부가 있다. 부부는 일주일 뒤에 있을 결혼 45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있다. 결혼 45주년 축하연에 무덤덤한 남편과 달리 아내는 결혼 45주년 기념회 준비에 다소 들떠 있는 상태다. 겉으론 리마인드 웨딩도 아니니 조용하고 간단하게 하자는 식이지만 결혼 45주년 기념은 아내에게 의미가 크다. 원래는 40주년을 기념하려고 했지만 40주년 때는 남편이 아파서 넘어갔고 그래서 10년 주기가 아닌 5년 주기로 끊어서 45주년을 기념하게 된것이다.
어느 날 남편에게 결혼 전 애인이었던 여자의 시신이 알프스산 고지대에서 얼어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 충격에 남편의 심리가 흔들린다. 문제는 남편이 5년 전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판단력이 조금 흐려졌다는것이다. 그래서 속에 있는 말을 아내에게 다 끄집어 낸다. 눈치 없게도 45년 전의 애인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수시로 피력한다. 마음이 상한 아내는 만약에 45년 전 연애 상대가 살아 있었다면 현재 자신과 결혼했겠느냐는 유도 질문를 던지는데 아무렇지 않게 아니라고 말해서 아내를 당황하게 한다.
산이 험난해서 아직 얼어 죽어 있는 상태로 옛 애인의 시신이 방치돼 있다는 사실에 남편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여행사를 통해 알프스 항공권을 알아보기에 이른다. 결국 아내는 폭발하고 서운한 마음을 피력한다. 그제서야 눈치없이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토로했던 남편은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45주년 축하연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내는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해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남편의 상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서글퍼진다.
부부에게 균열이 일어난 원인은 남편이 노환으로 판단력이 흐려졌고 상황 파악을 못 한 이유가 크지만 그보단 오랜 결혼 생활에 갖는 의미가 달랐던게 문제였다. 남편은 45년이나 같이 산 아내를 인생의 동반자, 모든 것을 부담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게 솔직했던것인데 아내는 45년이 됐건 50년이 됐건 배우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싶었던것이다.
후반까지 오랜 결혼 생활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차 때문에 엇박자를 내다가 뒤늦게 남편이 아내가 느끼는 비참한 감정을 이해했을 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남편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45주년 축하연에서 반성의 눈물을 더하여 아내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지만 평화롭게 잘 유지된 결혼 생활의 후반기가 쇼윈도 부부처럼 마무리가 될것같다는 서글픔에 아내는 허망하고 초라한 기분이 드는것이다.
영화는 부부의 관계에서 자식이나 친척들을 개입시키지 않고 부부의 대화와 그들이 느끼는 심리에 집중하며 서서히 붕괴되는 노년의 부부관계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호흡은 느리고 전개도 더뎌서 다소 지루하긴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잘 따라가다 보면 목가적인 분위기의 교외 지역을 배경으로 서서히 건조해져가는 노년 부부의 민감한 관계를 냉랭하게 팽창시키는 힘에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
날카롭게 빚어진 극의 예민한 기운을 미세한 표정과 작은 몸짓만으로도 극본 이상의 드라마로 살려낸 샬롯 램플링의 호연이 인상적이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남녀 주연상을 탄 작품인데 솔직히 톰 커트니도 잘 하긴 했지만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피아니스트의 브누와 마지멜의 경우처럼 동반 출연한 여배우의 호연에 얹어간 느낌이다. 국제 영화제에서의 연기상들이 그런 경우가 많아서 운이 좋았다고 여겼는데 영화 보고 나서 배우들 수상이나 후보 이력을 찾아 보니 톰 커트니의 연기도 남우주연상 후보로 다수 시상식에서 올라 있어서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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