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일상] 그때 그 시절 음악방송 (1)
20여년 전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넌픽션 음악 오디세이를 몇편에 걸쳐 올립니다. 시간을 자주 낼 수 없는 형편이라 자주 올리진 못할 수도 있겠네요.
오늘도 절로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깨는 건 내 의지가 아니니 언제나 수동일 수밖에 없다.
늘 그렇듯 방은 어둡다. 아침 햇살이 잠을 방해할 것 같아 쳐놓은 암막 커텐 덕분이다.
부질 없이 먼저 벽시계부터 본다.
그렇군, 아직은 오전이다. 간신히 오후를 면했다. (이게 뭐라고 이런 것에 다 감동이다!)
어제, 아니지 오늘 새벽 몇시에 잠에 들었더라? 확실히 네시는 넘은 것 같고,.
다섯시는 못된, 대략 네 시 반경으로 추정된다.
담배를 하나 물고 어제 마시다 남은 차가워진 커피를 목구멍에 단숨에 털어 넣는다.
자는 새 부족해진 카페인과 니코틴이 각종 이물질로 가늘어진 혈관을 타고
고속으로 질주하는 게 느껴진다.
아! 이제서야 잠에서 깬 것 같군. 가만있자. 어제는 어떤 소소한 성과들이 있었지?
조각 그림 맞추듯 어제밤부터 오늘 새벽까지의 기억들을 일일이 맞추어 본다.
이런 일과도 소소하지만 제법 재밌다. 요즘 말로는 소확행이랄까?
언젠가부터 수업이 없는 전날은 인터넷 음악방송으로 날밤을 새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개인방송을 한 지 일년 정도 되었는데, 청취자가 많진 않지만 개개의 충성도는
상당히 높다. 게다가 모두 여자들이다. 내 방송은 전문적이고 매니악한 음악만 선곡하는데
다른 방송에선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레어템들이 꽤 있다.
이 곡들 선곡하느라 메타복스에 돈질 좀 한 보람이 나타나는 걸까.
사실 1997년부터 음악감상에 불감증이 생겼다. 왠만한 음악을 들어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시시해졌달까. 그렇게 좋아하던 레드젭이나 도어즈의 음악을 들어도
그저 그랬다. 너무 낯익고, 너무 달콤하고, 너무 멋있고, 그래서 별로였다.
결혼 2년 전부터 음반을 헐값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이젠 집에서 나오고 싶었으니까.
독립할 자금이 필요했다. 우선 한 몸뚱이 누일 방 하나가 절실했다. 판떼기는 워낙 똥값이라서
그냥 놓아두고, 수입 cd를 2000장 정도 팔아서 학교 앞에 월세방을 하나 마련했다.
이후론 음반을 전혀 사질 않았다. 사실 돈 주고 들을만한 음악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다시 음반질에 나선 이유가 있었다.
대략 일년 전 쯤 처음으로 세이클럽에 개인 방송을 시작했는데, 어느날 보자기를 두른 한 인간이
내 방에 청취자로 들어와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음악을 한 시간 듣다가
나가면서 던진 말에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평범하고 뻔한 곡만 선곡하시네요."
"네? 평범요? 그럼 원하는 곡을 한번 신청해보세요. 가진 곡이면 선곡할 수 있으니."
"음.. 그럼 이러 저러한 밴드의 이러 저러한 곡들 있으면 좀 들려줘요."
그가 말한 이러 저러한 밴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밴드들이었다.
"그런 밴드가 있긴 한가요? 처음 들어보는데."
"뭐 예상은 했는데. 역시 그렇네. 그래요. 열심히 방송하세요. 잘 들었어요."
그리고 그는 휘익 나가버렸다. 싸한 기운이 느껴져 온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이런 씨부럴.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보자기 두른 것 부터 짜증인데, 들어와선 뭔 해괴한 밴드들을
찾으면서 내가 선곡한 음악들은 평범하다고? 참나...
뭐야. 대체 이 밴드들은.
그가 던져놓고 간 밴드명을 검색해보니 적은 양의 정보들이 튀어 나오긴 한다.
67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크 밴드로 유일작을 내고 해산.
68년 노르웨이에서 결성된 애시드 록 밴드로 유일작을 내고 해산.
71년 헝가리 출신의 부부 듀오로 ... 대략 이런 식이다.
이런 써글 것이 다 있나. 이런 음악을 대체 어디서 구해서 들어.
그나저나 기분 더럽네. 음악 들은 짬이 얼만데. 내가 이따구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거야?
이후 그가 대화 창에 던져두고 간 밴드들을 구하는 게 무슨 숙제처럼 느껴졌고,
그 음반들 일부를 메타복스에서 구할 수 있었다.
메타복스 사장이란 자는 예전 마이도스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맞나?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알아서 뭐하겠는가?
구해서 직접 들어보니 내 스타일에 맞는 음악도 있긴 했다.
그래도 대체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생소한 밴드기도 했지만 음악 자체가 뭔가 전위적인 느낌도 들었다가, 촌스럽기도 하고
날 것 같은 와일드한 느낌의 곡들도 많았다. 소위 개러지 스타일의 음악들.
여튼 다음에 내 방송에 다시 들어오면 드디어 구했다며 자랑스레 들려줘야겠다.
헌데 한 동안 그 인간은 내 방송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청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보자기를 두른 인간의 존재가 서서히 뇌리에서 지워질 무렵
그 인간이 다시 나타났다. 보자기를 두른 채로. 대화명을 보니까 기억이 되살아났다.
난 짐짓 모른 척 했지만, 전에 그가 던져 놓고 간 곡들을 선곡했다.
전과 같이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감상만 하던 그가 마지막에 방을 나가면서 던진 한마디는
"오. 선곡이 꽤나 발전했군요. 전에 무례하게 굴었던 것은 미안해요. 다음에 혹시 또 들르게 되면
이러 저러한 밴드들의 곡도 선곡해줄 수 있을까요? 기대할게요"
"네? 여봐요. 이게 무슨 숙제 내주는 것도 아니고....이렇게 그냥..."
역시 그는 휘익 방을 나가버렸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인데.
아놔. 어이 없네.
그래도 내 손은 이미 놓아두고 간 밴드들을 노트 한 켠에 옮겨적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가끔 뜬금없이 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감상하고는 숙제처럼 리퀘스트를
남겨놓고 나가곤 했다. 나도 더는 말 없이 그저 받아 적고만 있었다.
점점 리스트가 많아지고 있다는 게 부담이었다.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음반 값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나마 얼마전부터 보자기는 벗어던졌다. 성별은 여성이었다.
물론 믿을순 없었다. 아니 믿지를 않았다. 이런 해괴하고 황당한 류의 음악을 듣는 여자가 있을리가??
사실 보자기의 여성은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레어템을 다수 보유한 내 방송에 충성도 높은 리스너들이 제법 늘었다는 게 더 중요했다.
대화창이나 채팅으로 서로 간을 보고, 이바구를 풀다가 연락처를 따는 게
일종의 전리품 같은 성취감을 주었다.
전화번호를 딴다고 해서 전화를 하거나 만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대개는 그런 만남은 서로 실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그래서 어제는 어떤 새로운 연락처를 알게 되었는가를 확인해보는 게
셔터를 내리고 하루 수입을 정산하는 구멍가게 사장처럼 소소한 재미가 되었다.
음. 이 번호의 친구가 아마 창원 산다고 했지? 이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반응이 좋았던 기억이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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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9 10:04:18
필력이 좋은신거 맞죠? 글이 쏙쏙 읽힙니다. 감사합니다. 1
2024-04-20 11:55:54
역쉬 봉필 전자밴드님의 탁월한 선곡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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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요.
저는 남성입니다.
60년대 노래지만 새로워요.
https://therisingstorm.net/the-pretty-things-the-electric-banana-blows-your-mind/
위 링크 댓글에 있는 노래도 좋네요.
https://youtu.be/6YDNVyjIkP0?si=zbYnrS1Q6ORC3Xnu